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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君亭記

수로보니게 여인 2009. 10. 27. 18:27

 此君亭記


                                                尹淳


                                                


  富貴者自富貴而欲富貴者未必富貴

부귀한 사람은 절로 부귀를 누리지만, 부귀하고자 하는 사람이 반드시 부귀해지는 것은 아니다.


閒者自閒而欲閒者未必閒이라

한가한 사람은 절로 한가함을 누리지만, 한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반드시 한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是知富貴與閒皆自然而得이니而不可以力求而計取也

이로써 부귀함과 한가함은 모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지 힘써 구하거나 계획을 세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余偏介하여 不喜稠擾

내 성품이 평소 편벽되고 고집스러우며,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운 데는 좋아하지 않는다.


  甞欲掩門塊蟄하여收養心神顧未易得其便하고 而意未甞不如此矣

일찍이 문을 닫고 꼼짝 않고 있으면서 심신을 수양하려 하였지만 그럴 기회를 쉽게 얻지 못하였다. 그래도 뜻은 이와 같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近者過洛이라가寄寓於翠軒公娣兄李公明弼僑舍

    근래 서울을 들르는 길에 동서인 취헌공(翠軒公) 이명필(李明弼)의 셋집에 기숙하게 되었다.


 傍有庭戶數地하여多種松與竹하고百卉周匝하니翳然有濠濮間想1)이라

 집 곁의 뜰에 땅이 조금 있어 소나무와 대나무를 수북하게 심어놓고 온갖 꽃들로 둘러놓았으니, 그윽하여 호복(濠濮)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1)


  中置一草亭하니亦瀟灑孤絶하여闉市囂氛之所及也

  그 가운데 초가로 된 정자를 하나 두었는데 이 또한 깔끔하고 한적하였다. 도성 안 시장바닥의 시끄러운 분위기와는 아주 달랐다.


  一日翠軒公早出門하여無過叩者하니余乃掃亭除하고移圖書

하루는 취헌공이 이른 시간에 문을 나선 후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이에 나는 정자와 뜰을 소제하고 책을 옮겨놓았다


  或杖而逍遙焉하고或座而沉默焉하며或開卷而究道理하고或點筆而濡繭素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기도 하고, 자리에 앉아서 묵상하기도 하였으며, 어쩌다 책을 펼쳐 도리를 연구하기도 하고, 붓을 들어 비단에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吟嘯隨意하고坐卧適節하니l與造物者하니而不覺日之夕也

  시를 읊조리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하되 앉고 눕는 것은 예법에 어긋남이 없게 하였다. 정신이 조물주와 더불어 노닐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余乃欣欣然如有得하여而輒語於心호대

이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얻은 듯한 느낌이 들어 문득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 此l 所謂浮生一日之閒歟向之計其將偶成於今日이라而其所謂掩門收神l止如是而已歟

“ 이것이 이른바 허망한 인생에 하루의 한가함이라 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계획했던 일을 오늘에야 우연히 이루게 되었구나. 문을 닫아걸고 정신을 수양한다는 것이 그저 이와 같을 뿐이구나. ”


  旣已又爲之歎호대

이윽고 다시 이렇게 탄식하였다.


  “ 斯亭也卽桃溪沈公齊賢之所刱置也

  이 정자는 곧 도계(桃溪) 심제현(沈齊賢) 공이 창건한 것이다.  


沈公乃一世之淸士治此亭塢하고養此花竹者葢欲爲安居靜散之計

심공은 곧 한 시대의 청빈한 선비였다. 이 정자와 화단을 꾸미고 이러한 꽃과 대나무를 기른 것은 아마도 편안히 거처하면서 조용하게 살 계획이었으리라.


  猶且不免爲吏役之所驅制簪綬之所絆縲하여轉漕於江漢二歲

그런데도 공무에 휘둘리고 벼슬에 얽매이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서, 2년 동안이나 강물을 따라 조운의 일을 맡아야 했다.


  未暖斯亭之席而今又爲宰於湖之南하여棄花竹亭塢於千里之外하고而屬之於翠軒公이라

그리고 돌아와 이 정자의 돗자리가 덥혀지기도 전에 이제 다시 호남의 부사가 되어 꽃과 대나무가 있는 정자와 화단을 천리 바깥에 버려둔 채 취헌공에게 맡기게 되었다.


  翠軒公又小暇하여未甞安此坐盡一日飽其幽獨之趣

  취헌공 또한 한가한 겨를이 없어 이곳에 편히 앉아 하루라도 그 호젓한 멋을 실컷 누려본 적이 없다.


  而使我翠軒之宿客盤礴偃蹇於此하고而斯亭之風色景趣하여盡爲吾之所籠絡無餘이라

결국 취헌공에게 하루 묵어가는 나그네인 내가 이곳에서 다리를 뻗고 편안하게 쉬면서, 이 정자의 모든 풍경과 경치를 내가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이게 되었다.


  然則作斯亭者雖沈公이나而實居之者我也借此亭者雖翠軒公이나而能樂之者亦我也

그러니 이 정자를 지은 사람은 비록 심공이지만 실제로 거주한 사람은 나이다. 이 정자를 빌린 사람은 비록 취헌공이지만 능히 즐긴 이는 또한 나이다.


  噫彼二公欲閒之心非後於我而今日之閒獨不能無讓於我러라

 아, 저 두 공이 한가하려는 마음이 나보다 뒤지지 않았겠지만, 오늘날의 한가함은 유독 나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我之欲閒이나而未得者亦有年이라

내가 한가하고자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또한 여러 해 되었다.


而幸今日之偶然得閒하니而亦非所以計取力求也

 다행이 오늘날 우연히 한가함을 얻었는데 이 또한 계획에 따라 얻고 힘을 써서 구한 것이 아니다.


  其所謂自然而得閒하고而欲閒者未必閒者果不誣이라

  이른바 한가함은 저절로 얻는 것이지 한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반드시 한가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 말이 과연 헛되지 않다 하겠다.


  嗚呼世之捐金錢營亭墅大是有力者事

 아, 세상에서 금덩이와 돈꿰미를 내어서 정자와 별장을 경영하는 것은 대개 능력이 있는 자들이 하는 일이다.


而其所以營之者亦有沈公之意

그렇게 정자와 별장을 경영하고자 한 뜻 또한 심공과 같았으리라.


而凡諸寬閒之地敞豁之搆問其主之見在之否乎無人焉이라하다  

 그러나 여러 곳에 있는 넓고 한적한 땅에 탁 트이게 지은 건물은 그 주인이 지금 있는지 없는지 물어본다면, 대개 사람이 없다고 한다.


而其目謀心會之狀2)一任過客之臨賞何者

 눈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깨닫게 하는2)  광경을 하나같이 지나는 길손이 감상하게 맡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顯位重祿하면有足蠱心하고而江山風月未暇取覽이라

지위가 높고 녹봉이 많으면 마음을 갉아먹기에 족할 뿐, 강과 산과 바람과 달을 취하여 즐길 겨를이 없다.


  故富貴者未甞不有欲閒之念이나雖有欲閒之念이라도而無得閒之人이라

 이 때문에 부귀한 사람은 한가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은 적이 없지만 비록 한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한가함을 얻은 사람이 없는 법이다.


  是亦有自然者存而然歟抑富貴之有優於閒而然歟

이 또한 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부귀함이라는 것이 한가함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然而歷觀古今하면富貴者常多하고閒者常小

그러나 고금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부귀한 사람은 늘 많고 한가한 사람은 늘 적었다.


則是知自然而得閒抑有難於自然而得富貴歟

그렇다면 저절로 한가함을 얻게 되는 것이 또한 저절로 부귀해지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若我今日之閒可謂其自然之會而二公無今日之閒亦可謂不得其自然之會歟3)

   내 오늘의 한가함과 같은 것은 저절로 얻은 것이라 하겠지만, 두 공이 오늘의 한가함을 얻지 못한 것 또한 저절로 오는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  『白下集』<卷之十>  )

 




1) 《세설신어(世說新語)》에 간문(簡文)이 화림원(華林園)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마음에 맞는 곳이 반드시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그윽한 숲과 물에서 절로 호복 사이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고 한 고사에서 속세를 떠나서 자연을 즐기는 마음을 호복간상(濠濮間想)이라 한다.

2) 유종원(柳宗遠)의〈고모담서소구기(鈷鉧潭西小丘記)〉에 “맑은 모습은 눈과 함께 도모하고, 시원한 소리는 귀와 함께 도모하며, 여유 있게 텅 비는 것은 정신과 함께 도모하고, 고요하게 깊이가 있는 것은 마음과 함께 도모한다(清泠之狀,與目謀, 瀯瀯之聲與耳謀, 悠然而虚者與神謀, 淵然而靜者與心謀)”라 하였다.

3)  1703년 스물넷의 젊은 시절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차군정에 붙인 글이다. 차군정은 도계(桃溪) 심제현(沈齊賢)이 세운 정자다. 심제현은 심육(沈錥)의 백부로 학문뿐만 아니라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차군정은 그가 살던 남산 자락의 집 서쪽에 지은 정자였다. 볏짚으로 지붕을 이고 대나무로 시렁을 단 소박한 집이었다. 심육의 기록에 따르면 심제현은 그 안에서 시를 짓고 벗들과 술을 나누었는데 영달한 벗과 곤궁한 벗이 함께 모여 현달한 이는 그 현달함을 감히 말하지 못하였고 곤궁한 이는 그 곤궁함을 잊었다 한다. 술잔을 돌리면서 시와 바둑을 두면서 봄부터 중양절까지 이렇게 즐겼다고 한다. 정자가 좁아 젊은 사람들은 땅에 돗자리를 깔고 몰려들었으며, 해학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돌아갈 것을 잊었다 하니 무척 호인이었던 모양이다.
     삶의 여유는 누리는 자의 몫이다. 심제현은 삶의 여유를 누리고자 하였지만 부귀를 위하여 벼슬살이를 하느라 차군정에 눌러 앉아 있지 못하였다. 청빈한 삶으로 명망이 높았지만 젊은 시절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지내느라 조운선을 타고 다녀야 했고 이후에도 조야(朝野)에서 벼슬을 지내느라 바빴고 결국 삼척부사로 있던 중 객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 차군정은 이명필(李明弼)에게로 넘어갔다. 이명필은 윤순의 손아래 동서였고 심제현과 친분이 있었다. 젊은 시절 윤순 등과 함께 이 정자에 자주 출입한 바 있다. 심제현을 이어 이명필이 차군정의 주인이 되었지만 풍류는 옛만 같지 못하였다. 훗날 심육을 만났을 때 심제현이 살아있을 때의 풍류를 추억하면서 사대부의 풍류가 예전 같지 못함을 탄식한 바 있다. 이명필 역시 지방관으로 떠도느라 차군정의 주인이 되지 못하였다.
       차군정의 주인은 윤순이 되었다. 윤순은 부귀한 사람은 한가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은 적이 없지만 비록 한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한가함을 얻은 사람이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차군(此君)’은 대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진(晉)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사랑하여 남의 집에 잠시 거처하면서도 대나무를 빨리 심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하루라도 어떻게 ‘이 친구’를 대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何可一日無此君)”라고 답한 고사가 있다. 윤순에게 차군정은 ‘이 친구’로서의 차군(此君)이 아니라 벗으로부터 빌린 ‘차군(借君)’을 연상하였는지 모르겠다. 부귀함에 바쁜 벗으로부터 정자를 빌려 한가함을 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