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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 중에 치매 환자가 적은 ‘문학적’ 이유

수로보니게 여인 2013. 5. 7. 17:25

문인들 중에 치매 환자가 적은 ‘문학적’ 이유

  • 박해현 논설위원

  • 입력 : 2013.05.06 23:29

    일흔여섯에 치매 걸린 영국 작가 아이리스, 머독을 빼곤 글쟁이가 치매로 고생한 경우는 보기 드물어
    글쓰기는 치매를 경고하고 예방한다, 서정주 시인은 山 이름을 詩로 노래해, 치매를 쫓아내며 편안한 노년을 보내

    
	박해현 논설위원
    박해현 논설위원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1919~1999)은 20세기 영국 문학의 지성(知性)을 대표하는 여성으로 꼽혔다. 그녀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전과 철학을 공부해 최우등생으로 졸업한 뒤 케임브리지 대학원에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땄다. 그녀는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다 서른다섯 살에 첫 장편 소설 '그물을 헤치고'를 발표했다.

    '그물을 헤치고'는 프랑스 소설을 번역해 먹고사는 작가 지망생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인간 희극이었다. 인문학 수재(秀才)였던 작가가 오랫동안 문학과 철학을 읽으며 익힌 고급스러운 재치와 유머가 번뜩이면서 삶의 근원에 대한 성찰까지 시도한 작품이었다. 머독은 첫 장편 이후 40여 년 동안 스물여섯 권의 소설과 다섯 권의 철학책을 냈다. 머독이 예순 살에 발표한 장편 '바다여, 바다여'는 영국 문학상 중 가장 권위 있는 부커상을 받았다. 머독은 일흔다섯 살에도 소설 '잭슨의 딜레마'를 펴내 지칠 줄 모르는 필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녀의 지성과 열정은 느닷없이 걸음을 멈추게 됐다. 이듬해 그녀는 뒤늦게 치매 진단을 받았다.

    머독은 급격하게 병세가 악화해 점차 '뇌가 텅 빈 상태'가 됐다고 한다. 소변을 아무 곳에나 누고 맘대로 집을 나가 떠돌기도 했다. 문학평론가였던 남편은 머독이 치매를 앓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 책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아이리스'가 여러 사람을 가슴 아프게 했다. 결국 머독은 요양원에서 투병하다 자기가 쓴 책을 한 권도 알아보지 못한 채 일흔아홉에 세상을 떴다.

    문학사에서 이름을 떨친 문인 중 결핵이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는 여럿 있다. 그런데 머독처럼 말년에 치매를 앓다가 세상을 뜬 사례는 극히 드물다. 머독은 전성기엔 거의 해마다 책을 낼 만큼 두뇌 노동이 왕성했던 작가였다. 그런 머독이 치매에 걸렸다니, 집필 활동이 치매를 100% 예방한다고 말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머독의 경우를 되짚어보면, 글쟁이가 다른 업종보다 치매를 조기 발견하기 쉽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004년 영국 런던대 인지신경과학연구소가 머독의 치매 발병에 대해 조사한 것이다. 연구팀은 머독의 첫 소설 '그물을 헤치고'와 예순 살에 낸 대표작 '바다여, 바다여' 그리고 일흔다섯 살에 쓴 마지막 소설 '잭슨의 딜레마'를 나란히 대조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물을 헤치고'는 당연히 휘황찬란한 지성과 감성의 결합이었다. '바다여, 바다여'는 풍부한 어휘력을 보여줬다. '글을 쓰는 나의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온화한 5월의 햇빛에 빛난다기보다 타오르듯 밝은 광채를 낸다'처럼 동일한 단어를 겹쳐 쓰지 않으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런데 머독의 마지막 작품은 문법적으론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어휘력에선 도저히 머독이 쓴 소설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오웬은 작은 테이블에 위스키와 붉은 포도주와 오렌지 주스와 햄 샌드위치와 올리브와 서양 자두와 체리 케이크를 놓았다'라는 식이었다. 마치 소녀가 서투르게 글을 쓰듯이 '와'라는 접속 조사가 여러 차례 나왔다.

    연구팀은 이런 데이터를 토대로 머독의 마지막 소설이 나오자마자 주변의 눈 밝은 비평가나 편집자가 작가를 병원에 데리고 갔으면 치매를 조기 발견했을 것이라고 봤다. 이 연구는 작가가 아니더라도 일반인이 일기나 수필을 꾸준히 써서 전문가에게 보이면 치매를 좀 더 일찍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글쓰기는 의식의 촉수를 예민하게 하므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치매의 증후를 감지하게 된다. 주변에 위험 신호도 울려준다. 치매를 일찍 발견하면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오랫동안 생각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치매 위험 연령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지금껏 글과는 담을 쌓고 살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써보는 게 어떨까. 연초에 일본에선 일흔다섯 살 할머니가 첫 소설을 발표해 문학상도 받았으니, 젊은 날에 미뤄뒀던 재능을 뒤늦게 활짝 꽃피울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고 해서 꼭 산문만 쓰라는 법은 없다. 시(詩)를 쓰는 것도 좋은 일이다. 서정주 시인은 고희(古稀)를 넘긴 뒤 날마다 전 세계 산 이름 1600여 개를 외웠다. 그냥 외우기만 한 게 아니었다. 시인은 그 산들 중 예쁜 놈들만 골라 시를 써서 한 권의 시집을 냈다. '그 누군가/ 흰 머리로 신선 되시어/ 영원한 새 청춘으로/ 하늘을 맡아 일어서시니…'라거나 '오스트리아의 산들에는/ 영원의 힘줄을 울린다는/ 큰 종소리의 종지기도 있고…'라며 흥얼흥얼 거렸다. 마치 "보시게, 내가 아직 치매에 안 걸렸네"라고 뽐내듯 했다. 여든다섯에 세상을 뜬 서정주가 말년에 쓴 시는 치매를 쫓아내는 주문(呪文) 같았다. 시인의 어투를 빌리면, '꿈에서 아조 깨어난' 글의 힘이었다. 누구나 글을 쓰면서 꿈결처럼 흘러간 생에서 문득 깨어난다면, 감히 치매가 어물쩍 덮치려다 놀라 자빠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