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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이해

수로보니게 여인 2010. 11. 22. 00:25

 <문학의 이해> 




                                           김영구(중문과교수)

                                           박태상(국문과교수)

                                           서정기(불문과교수)

                                           이원주(영문과교수)   

                                           장부일(국문과교수)

                                           조남철(국문과교수)





 

◈  목     차  ◈

 

 

 

 

 

제1장 사회학적 비평

제2장 형식주의 비평과 심리주의 비평

제3장 신화비평, 작품의 열림

제4장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문학비평이 상정하는 언어에 대한 인식차이                 

제5장 형식주의 비평

제6장 소설론

 

 

 

 

                       

    제 1장,  사회학적 비평

                                                                                                                                     김영구(중문과 교수)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은 다른 학술 활동이나 정신 활동에 비해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문학은 작가의 개성이나 세계관 혹은 무의식의 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마치 상식처럼 받아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한 작가가 문학작품을 창작했다고 해서 그 작품이 꼭 그 작가의 개인적 세계하고만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19세기 이후 서서히 확산되었다. 드 스타엘 부인, 셍트뵈브, 텐와 같은 비평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이론적 틀을 갖추기 시작했던 이런 생각은 작가를 개인이면서 동시에 해당 사회와의 유기적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복합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에 기초하였다.

그들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는 사회에 의해 규정되고 사회를 반영 혹은 표현하며 어떤 경우에는 사회를 변모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문학을 통해 드러낸다고 보았다. 특히 귀족과 특권계급의 살롱을 벗어나 문학이 불특정 다수의 독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생산되기 시작하던 19세기에 들어와 문학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런 생각이 점차 힘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형성된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중시하는 문학비평의 흐름을 사회학적 비평으로 묶어 보기로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학은 사회과학의 한 분과학문으로서의 사회학(Sociology)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해당 사회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하여 문학에 대해 논의하는 비평적 관점을 말한다. 사회학적 비평과 비슷한 용어로는 사회문화적 비평, 문학사회학 등이 있다.

사회학적 비평의 흐름은 19세기에 대두한 리얼리즘을 원류로 하여 형성되었다. 문학상의 리얼리즘은 낭만주의, 이상주의를 비롯하여 현실이 아닌 상상, 환상 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려는 경향과 대비되는 현실적 측면을 보다 중시하는 문학적 관점을 말한다. 19세기의 서구 작가들 가운데에는 발자크, 졸라와 같이 개인적 정서의 묘사보다도 사회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분석, 동시대의 풍습에 대한 정밀한 묘사, 근대과학의 성과에 대한 긍정적 태도 등을 중시했던 작가들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리얼리즘,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둔 사회학적 비평의 흐름이 낭만주의와 예술지상주의적 흐름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던 배경은 단순히 문학 내적인 것은 아니며 매우 복합적이다. 우선 자본주의적 사회체제가 서구 전역에서 급격히 발달하고 그에 발맞추어 생산의 효율성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인간 활동의 가장 중요한 능력, 나아가 미덕으로 등장하였다. 그에 따라 오랫동안 존중되어 온 개성이나 품위와 같은 낭만주의적 가치들이 주변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시대상황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2차산업을 주요 산업으로 한 근대적 도시들이 발달하고 임금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대량으로 거주함에 따라 형성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발달도 큰 요인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중교육의 발달과 센세이셔널한 토픽을 일상적으로 제공하는 근대적 저널리즘의 발달도 리얼리즘의 유포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람들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선동적 언사,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충격적인 범죄, 새로이 개발된 재화와 상품에 대한 소식을 저널리즘을 통해 날마다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이 문학의 독자로 등장한 도시의 시민과 노동자들로 하여금 신, 운명, 자연 등과 같은 낭만주의적 소재에 대한 생각보다도 이웃사람들의 생활과 자기의 생활을 비교하고 자신의 물질적 욕망과 현재의 상황에 대해 반추하는 것과 같은 매우 리얼리즘적인 문제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리얼리즘과 그에 토대를 둔 사회학적 비평은 이렇게 하여 19세기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서구 비평을 지배해 왔던 문학을 자연의 모방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을 비판하고 문학을 당대 현실의 재현이라고 보는 관점을 제기했던 텐은 사회학적 비평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그는 문학의 형태와 내용을 결정짓는 세 가지 원천으로 종족, 환경, 시대를 꼽았다. 그는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범주화시키고 그에 입각하여 문학작품이 지향하는 인물의 전형이 무엇인가를 발견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전형이란 물론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집약한 일종의 문학적 거울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현실의 주요 요소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문학을 설명하려고 했던 텐의 관점은 이후 사회학적 비평이 발달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학적 비평의 주류는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점차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발전해 나갔다. 물론 우파적 범주의 사회학적 비평도 발달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발달에 비교해 볼 때 그 역사적 궤적은 암만해도 현실사회주의를 등에 업은 사회주의 리얼리즘만큼 확고하지는 못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발자크와 졸라의 문학에 대해 열정적인 비평을 시도하고 자신들의 세계관이 문학을 통해 투영되는 메커니즘을 정립하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대체로 원론적 차원에 머물렀으며 그들이 지향한 고도로 발달된 사회학적 비평은 루카치, 브레히트, 하우저, 골드만, 바흐친 등에 의해 이룩되었다.

사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하나의 범주로 묶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함의를 갖고 있다. 서구의 좌파 문학이론가들은 나름대로 유럽적 상황에 접목된 사회학적 비평의 흐름을 발달시켰으며, 소련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 사회주의 국가는 자신들의 수요와 필요에 부응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발달시켰다. 그런가 하면 동구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북한, 쿠바,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도 각기 자신들의 역사적, 문학적 상황과 접목된 사회학적 비평이론 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발달시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더 큰 범주에서의 사회학적 비평은 원래부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원리나 설명 방식을 지향하는 이론적 관점이 아니고 구체적인 현실과 문학을 연관시키려는 관점이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부르조아 리얼리즘 혹은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19세기적 리얼리즘을 계승발전한 것이면서 동시에 비판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각 사회주의 국가는 물론 관점을 달리하는 비평가들 사이에 많은 편차를 보인다. 그러나 그 다양한 차이를 전제하면서 공통적인 측면들을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세기 리얼리즘이 현실에 대한 묘사와 비판에 주력한 데에 비해 20세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방도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런 경향은 자연스럽게 작가가 단순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혁명적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태도로 창작이라는 문학적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로 나아갔다. 또 19세기 리얼리즘이 사회현실의 묘사와 분석에 효과적인 소설 특히 장편소설 양식에 국한되었던 데에 비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독자와의 포괄적이고 기동성 넘치는 교류를 위해 시, 산문, 연극, 영화 등 거의 모든 양식으로 시야를 확대하였다. 이는 현실 사회의 혁명적 변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사명을 상정하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서는 현실적 역량의 강화를 위해 채택해야 할 당연한 방향이었다.

20세기의 문학적 상황을 돌아볼 때 다양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체적 내용들이 어떤 한 비평가나 혹은 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골고루 드러나지는 않았다. 비평가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다양한 스펙트럼은 상당한 편차를 드러냈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비판의 차원이 한 극단이라면 현실분석보다는 혁명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각성시킨다는 선전과 선동의 차원은 또 다른 한 극단일 것이다. 서유럽의 사회학적 비평가들이 두 극단 사이의 다양한 지점에 비교적 고루 분포하고 있었다면 소련과 중국의 비평가들은 선전과 선동 쪽에 훨씬 치우쳐 있었다. 특히 공산당과 좌파가 부닥친 국내외적 상황이 가혹했던 중국의 경우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냉정한 시각을 추구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마오저뚱이 작가들을 소환하여 직접 발표했던 “연안문예좌담회의 강화”는 선전과 선동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한 표본이었다.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는 좌파적 세계관을 일관되게 신념으로 유지했으나 문학을 사회적 현실에 대한 실천적 결단과 개인의 운명에 대한 사색의 결합으로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탐색과 방황을 거듭했던 사회학적 비평가들을 대표한다. 그는 선전과 선동을 주저 없이 제기하는 이른바 “편협한 주제소설”과 뿌리칠 수 없는 그리고 실재하는 “개인적 삶의 즐거움”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소설의 사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리얼리즘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찾고자 했던 “제3의 길”은 문학이 함유하고 있는 “표현”과 “설교”를 동시에 아우르고 본질과 현상이 수렴되고 합류되는 총체성의 리얼리즘 문학이었다. 결국 종결되지 못한 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본질의 탐색 그 자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뤼시앵 골드만(1913-1970)은 루카치가 명료한 이성적 시야 안으로 파악해 들이는 데에 실패하고 결국 총체성이라는 모호한 관념으로 후퇴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본령을 “현실 전체에 대한 조리 있고 통일된 관념”이라는 이른바 “세계관”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설명하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세계관이란 개인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 아니고 동일한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처한 어떤 인간 집단의 보편적 사고 체계라고 규정하였다. 명확하지만 사실은 관념적이고 도식적인 세계관에 대한 규정을 통해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현실과 지향을 명료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작가란 그 세계관을 탁월한 직감과 예민한 정서를 통해 표현해 내는 천재라고 설명되었다. 위대한 작가란 문학적 영역 속에서 작품의 구조가 집단 전체가 지향하는 구조와 일치하는 상상적이면서 동시에 조리 있는 어떤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성공하는 예외적인 개인인 것이다. 골드만에 의하면 이렇게 창작된 작품은 집단 의식의 “반영”이 아니라 그 집단으로 하여금 그 집단이 생각했거나 느꼈던 것을 명료하게 의식하게 해 줌으로써 집단 의식을 구성하고 집단 의식을 풍요롭게 해 주는 소산이었다. 19세기적 리얼리즘과 결별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길로 나아갔던 20세기의 사회학적 비평의 주류는 골드만에 이르러 다시금 서구 근대문학의 비평적 유산과 접합을 시도한 것이라 하겠다.

20세기 사회학적 비평의 주류를 형성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흐름은 국가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뒷전으로 퇴조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사회주의적 실험은 비록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층간, 민족간, 인종간의 불평등에 대한 각성의 고취, 민주주의적 가치의 보편화와 복지제도의 확산 등 많은 유산을 남겼다. 이처럼 사회주의 실험이 20세기 인류문명사의 최대 사건이었던 것처럼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서구 근대문학 이후 수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에 의해 열정적으로 추구되면서 개성과 탐미주의에 편향되었던 서구 문학의 흐름에 인간 존재의 사회성과 집단성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이처럼 사회학적 비평은 서구의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문학관과 상충적이고 동시에 상보적인 기능을 수행하면서 20세기 문학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제 2장 형식주의 비평과 심리주의 비평


                                                                                                                  국문학과 교수   박 태 상



1. 형식주의 비평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텍스트 자체의 우위성을 옹호하려는 입장의 문학활동을 말한다. 형식주의 이론의 주요 용어들을 들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즉 작품 분석시 작품 외적 요소의 지나친 개입을 경계하기 위해 고안한 ‘의도의 오류’와 ‘감동의 오류’, 전통적인 문학 용어이지만 그들이 특별히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아이러니(irony)’와 ‘패러독스(paradox)’, 그들이 거의 새롭게 창안하다시피 한 ‘모호성(ambiguity)’, 시 구조 분석의 기초가 되는 ‘어조’ ‘운율’ ‘은유’ 등의 비평용어가 이에 해당한다. 

형식주의 비평의 이해를 위한 중요한 어휘들로는 우선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와 ‘감동의 오류(affective fallacy;감정의 오류, 영향의 오류)’를 들 수 있다.

비어즐리(Monroe C. Beardsley)와 윔저트(W. K. Wimsatt)가 1946년에 「의도의 오류」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 이래 현대 문학이론의 큰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 글에서 그들은 앞서의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작가의 본래의 의도와, 작품에서 성취된 의미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그것들을 혼동하는 데에서 작품의 이해와 평가가 잘못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는 비평가나 작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작품은 그것이 탄생하는 순간 곧바로 그 작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세계 속에 떠나가 버린다. 시는 공중(public)에 속하는 것이다.”

 한편 런던, 파리, 뉴욕 같은 문화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 남부의 도시 내쉬빌에서 랜섬은 1919년에서 1925년까지 제자, 동료, 유지들이 참여하는 <도망자>라는 문학 동인회를 주도했다. 이 모임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한 동인이 제안하여 채택하게 된 이 동인회 명칭에 대하여 주요 동인이던 앨런 테잇은 <도망자란 간단히 말해서 시인이다. 그는 방랑자, 유랑의 유태인, 소외된 자, 세상의 비밀한 지혜를 지닌 자이다>라고 설명한다. 테잇 이외에 로벗 펜 워른도 <도망자>의 동인이었다. 두 사람 다 나중에 쟁쟁한 문인들로 성장했다. 잘 알려진 대로 대학생 중심의 동인 모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도망자> 동인들은 1922 ~ 25년 사이에 모임을 가지며 동인지 <<도망자>>를 내고는 흩어졌다. 클리언스 브룩스는 도망자들이 흩어진 직후 밴더빌트에 와서 랜섬에게 배웠다.

 1928년경에 랜섬, 테잇을 비롯한 몇몇 <도망자> 동인들은 문예 운동에서 소박한 정치운동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이른바 <농본주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북부의 산업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남부의 전통적인 농본주의를 부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다분히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고, 또한 사실적 기반이 미약한 문인적 환상에 가까웠다. 더욱이 남부의 농본 사회가 과거에 흑인 노예의 강제 노동에 기초했었을 뿐 아니라 이렇다할 정신적 유산을 남긴 것도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남부 문화 우위론이 대체로 허황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1930년대 초의 대공황은 북부의 산업 자본주의의 폐해를 실감케하여 토착적 농본 사회의 순후한 인간관계의 회복은 얼마쯤 감상적인 대안이 되기도 했다. 랜섬, 테잇 등은 이때 정치적 논문들을 발표할 만큼 심각한 태도로 임했으나 루즈벨트 정부의 뉴딜 정책 실시 이후 자연 쇠퇴하여, 1937년 랜섬이 밴더빌트를 떠나 북부의 케년 대학으로 옮겨가자 시들해지고 말았다. 케년대학은 오하이오주에 있는 작은 장로교 계통의 대학으로서 별로 유례가 없는 영문학대학을 설치하여 랜섬에게 맡기고 또한 <<케년 리뷰>>라는 문예 계간지를 창간, 편집케 했다. 이 이름 높은 계간지는 1938년부터 1959년까지 랜섬의 편집으로 영미의 가장 유명한 비평가, 사상가들의 글을 실었다. 한편 랜섬의 제자 브룩스와 워른은 미국 남단의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의 교수가 되어 1942년 계간지 <<서던 리뷰>>를 창간했다. 이 역시 성공적인 평론 전문지가 되었다.

신비평의 원칙들은 근본적으로 ‘언어’와 관련된 것이다. 다시 말해 문학이란 것도 속성으로 보아 과학의 언어나 논리적 언어와 체계상 대척에 서는 특정 종류의 언어라고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이 비평의 주요 개념은 단어의 의미와 상호작용, 비유, 상징 등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언어적 요소들이 하나의 중심테마 주위에 조직되어 있으며, 신비평가들은 이 조직이 형성시키는 시의 특징을 ‘결’(texture, 랜섬), ‘긴장’(테이트), ‘아이러니(리차즈), ’파라독스‘(브록스) 등으로 부르고, 이러한 것들은 ’다양한 충동들의 조화‘ 내지 ’상반되는 세력들의 균형상태‘인 하나의 구조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고 본다.

  랜섬은 결(texture)이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랜섬은 리차즈의 정서론을 비판한다. 그리고 다시금 자기의 비유 ‘아름다운 시는 시민들의 개인적 성격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목적을 실현하는 민주국가라 할 수 있다’는 비유를 말한다. 또는 ‘아름다운 시는 우리가 시인하는 객관적 논의로서 우리가 좋아하는 객관적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순전한 과학적 논의는 중성적, 기능적 부분들만이 있고, 그래서 ’결‘과 아름다움을 갖지 못 한다’ 미적 경험은 우리의 삶의 ‘결’에 있으므로, 그런 경험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여기서 랜섬은 드디어 ‘결’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결’이란 구체적 사물의 직접적 촉감에 의하여 경험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결’때문에 시는 구체적, 객관적 사물로 인식된다. 랜섬은 은유야말로 복잡다단한 세부 사항들이 집적되어 글을 빽빽하게 만든 것, 즉 ‘결’ 그 자체라고 본다. 시의 빽빽함, 리차즈의 말대로 하자면, 그 함축성은 세상의 빽빽함을 반영한다. 결국 리차즈가 말하는 비유의 ‘취의’는 랜섬의 논리적 핵심, 또는 논리적 구조이고 ‘매개어’는 랜섬의 결인 셈이다. ‘나의 연인은 붉은 장미’라 했을 때 ‘장미’는 매개어이고 ‘어여뿐 아가씨’는 비유의 취의라는 것이 리차즈의 이론인데, 랜섬에게 있어서는 ‘어여뿐 아가씨’는 논리적 구조이고 ‘장미’는 결인 것이다. ‘장미’는 곱다는 것 이외에도 봄에 피는 빨간, 향기로운, 탐스러운, 가시가 있는 등등 많고 많은 구체적 경험들이 이루는 결의 덩어리이다.

 랜섬의 제자 테잇은 ‘긴장(tension)’이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그는 시의 중요원칙으로서 ‘긴장’을 들고 나온다. 좋은 시들은 동일한 성질을 공통으로 갖고 있는 데 그것을 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고 그는 전제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다만 더 예리한 이해를 위한 방법임을 천명한다. 그러한 성질들의 하나를 그는 ‘긴장’이라 부르기로 제안한다. 먼저 테잇은 ‘전달의 오류’를 거론한다. 시는 관념을, 사상을,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신비평가들의 특징적인 비평 밥법은 설명 내지 정독이 된다. 다시 말해 한 작품 속에 내재한 구성요소들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자세하고 정교하게 분석해 나는 일이다.  이 복합적인 요소들을 엠프슨은 ‘애매성’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윌리엄 엠슨의 말로 하면 이것은 “같은 언어작품에 대해 다르게 반응할 여지를 주는 -아무리 사소한 뉘앙스라고 해도 그것까지 포함하는-언어상의 모든 뉘앙스”이다. 엠슨은 의미의 결정불능성을 지지하는 현대의 비평가들을 앞질러 문학작품의 풍부함과 미묘함의 많은 부분은 애매성에서 생겨나므로 시적 언어를 정의하는 특징은 애매성이라 해도 좋다고 주장했다.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애매성의 일곱 유형」(1930)은 영국시의 역사적 흐름을 가로질러 애매성의 효과들을 분류하고 분석했다.


2. 심리주의 비평

문학은 작가의 심리적인 소산이기 때문에 그 분석과 해석에 심리학이 응용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대두함과 함께 심리학과 문학은 더욱 긴밀하고도 뚜렷하게 결합되어 새로운 차원에 들어서게 되었다. 양자의 상관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하나는 문학 작품이 심리학자의 연구 자료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심리학의 이론과 방법이 문학적 고찰을 위한 새 발판으로 적용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심리주의 비평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본격적인 비평방법으로서 인간의 심리와 문학에 대한 연계는 20세기에 들어와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텍스트 해석에 적용하는 것으로 정신분석비평이라고 불린다. 현대 심리학에 대한 프로이드의 가장 큰 기여는, 인간심리에 있어 무의식적 양상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몇 가지 믿을 만한 증거들을 통하여, 인간의 대부분의 행동은 우리가 아주 제한된 지배력밖에 지니지 못하는 정신적인 힘에 의해서 유발된다고 하는 사실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부분보다도 마치 빙산처럼 물 속에 잠긴 부분의 활동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속으로 잠겨 있는 정신적 부분을 ‘무의식(das Unbewußtsein, the unconscious)’이라는 말로 표현했으며, 이에 바탕하여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역동적(dynamic), 경제적(economic), 지형학적(topographical) 관점 등 세 가지 관점에서 본다. 서로 배타적인 해석이 아니고 마음 전체의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정신을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려던 프로이트의 시도를 드러낸다.

역동적 관점은 본능적 충동이 외부 현실의 요구에 부딪힐 때 생기는 긴장으로부터 발생한 정신 내의 여러 가지 힘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드러낸다. 정신은 육체로부터 나온다.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육체 자체의 욕구이다. 이 욕구는 쾌락이나 고통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쾌락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육체가 어떤 자극에 의해 방해를 덜 받을수록 증가한다. 이 방해가 증가하면 불쾌를 느끼게 된다. 육체와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소위 프로이트의 에고(ego)는 정신의 일부로서 육체가 자기 욕구를 적절히 만족시키도록 육체의 행위를 조정한다. 특히 에고는 자기 보존에 신경을 쓴다. 말하자면 에고는 본질상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원시적 본능을 통제해야 한다. 경제적 모델에서 이것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사이의 갈등으로서 나타나고 이 갈등에서 육체는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쾌락을 늦추고 어느 정도 불쾌를 받아들여야 함을 배운다.

세 번째 지형론적 관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여기서 공간적 비유로 파악된 심리적 장치는 에너지의 갈등을 중재하는 하위 체계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학설에서 프로이트는 정신을 의식(das Bewußtsein, the conscious), 전의식(das Vorbewußtsein, the preconscious), 무의식(das Unbewußtsein, the unconscious)의 3중 구조로 파악한다. 의식은 외부 세계를 느끼고 질서 짓는 인식 체계, 전의식은 언제라도 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는 경험의 요소들, 그리고 무의식은 전의식과 의식의 체계 밖의 모든 것이다. 무의식은 억압의 순간에 깊숙이 정착된 본능을 담은 표상, 사상, 이미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역동적이다. 이들은 안정된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서로 연합되어 하나의 영상이나 사상에서 다른 것으로 옮아가는 감정의 전이를 부추기는 역동적 상호작용을 겪는다.

지형론적 체계의 두 번째 학설은 1923년에 소개되었다. 여기선 그는 정신을 세 개의 작인(作因)으로 구분한다. 육체의 필연적 욕구에서 기인하는 본능적인 충동에 해당하는 이드(ES, id), 이드에서 발전하여 충동을 조정하고 억누르는 에고(das Ich, ego), 그리고 충동에 대해 부모나 사회의 역할을 감당하며 외부적 작인이라기보다 이 영향력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초자아(das Über-Ich, superego)이다.

그런데 본능적 충동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두 가지 기본적인 전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는 충동들이 대립한다는 것으로 성적 충동, 자기보존충동, 공격충동 등의 협동작용과 길항작용이 궁극적으로는 온갖 다채로운 삶의 현상들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가 ‘정신분석학의 전구조가 의존하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억압>이다. 이드는 자신의 소망이 외부의 요구와 양립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을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억압(의식 밖으로 내몰리게)된다. 그런데 이러한 충동이나 소망은 억압되었다가 타협을 거쳐 되돌아오면서 위장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 위장되어 드러난 것(증상, 꿈, 말실수) 등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기본적인 텍스트다. 또 이 텍스트를 통하여 무의식에 다가가는 과정이야말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문학텍스트의 해석인 비평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뒤에서 보여주듯 고전적 정신분석비평의 방법론은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방법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다.

심리주의 비평이 지니는 일반적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작가를 다룰 때, 심리주의 비평가는 먼저 작품 뒤에 숨은 인간, 즉 작가가 작품 속에 투사된 사실을 밝힌 다음,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개성이 어떻게 그의 문체와 주제를 선택하고, 인물이 성격 묘사를 결정하는가를 알아본다.

둘째, 작품을 다룰 때, 심리주의 비평가는 심리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등장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거나, 한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개인적인 상징을 해명한다. 또는 작품의 표면적 내용과 잠재적 내용, 즉 작품이 말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을 구분하여 작품 속에 숨은 뜻을 탐색하기도 한다.

셋째, 독자를 다룰 때, 심리주의 비평가는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을 파악함과 동시에 작품에서 얻는 독자의 개인적인 체험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 작품의 내용과 일치하는가를 살피려고 한다.

                                   


제3장 신화비평, 작품의 열림


                                                   서정기(불문과 교수)  


1. 뮈토스와 로고스

신화비평은 그 시도에 있어서 현대에 시도되고 있는 모든 문학 연구 방법들 중에서 어쩌면 가장 야심만만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학을 단순히 개인적이며 역사적인 산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무한한 인문주의적 자산과 연관을 맺고 있는 초역사적인 산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게다가 그 구체적인 실행에 있어서도 모든 미학적 관점과 광범위한 학문적 성과를 두루 포괄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인문학적 이론을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화비평적 입장에서 씌어진 글들이 일견 잡다해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대한 욕망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신화비평가는 인간에 관한 것이면 어떤 것이든 참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사실 신화비평 방법을 원용하는 -이론적으로 그것을 충실히 따르든, 아니면 단순한 원용에 불과하든 -모든 연구자들이 내심 조심스럽게 품게 마련인 야망이지만, 사회학에서 출발하여 상상력의 인류학적인 구조를 밝혀 보인 뒤, 그 작업에 기초하여 ‘신화비평’과 그것을 사회학적으로 연장한 ‘신화분석’을 제안하는 프랑스의 상상력 연구가인 질베르 뒤랑은 누구보다도 그러한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어 보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뒤랑보다는 노드롭 프라이의 연구가 더욱 알려져 있는 편인데, 물론 시기적으로도 프라이의 저서가 훨씬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신화비평의 입장을 취하는 연구자들은 어쨌든 그 근본적인 출발에 있어서 거의 모두 융과 엘리아드, 바슐라르, 그리고 카씨러 등을 참고하고 있다. 신화비평의 바탕은 20세기 초에 발달하기 시작한 심리학과 그리고 특히 민속학의 발달에 의하여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학문들의 발달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그때까지 의심의 여지없는 가치라고 여겨왔던 이성과 그것에 기초하여 수립된 자신들의 문화의 우수성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신화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장구한 서구 지성사를 참고해보면 극히 최근의 일에 불과하다. 신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태도가 경멸적이었다는 사실은 신화의 어원에서부터 이미 드러나고 있다. 불어의 mythe, 영어의 myth, 독일어의 mytos, 스페인어와 이탈리어의 mito의 어원이 되고 있는 고대그리스어의 muthos는 플라톤 이전에는 단순히 ‘표현된 생각’, ‘의견’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플라톤은 철학자들의 언술을 시인들의 언술과(그것을 폄하시키면서) 구별하기 위한 필요에서 뮈토스를 로고스와 대립시키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형태를 가지게 되는 신화는 어떤 한 집단이 기억하고자 하는 것 -대개는 그 기억은 그 신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기억할 수 없는 아득한 과거에 속해 있다 -을 전수한다. B. C. 8세기경까지 신화는 단지 구전되었을 뿐이다. 신화의 구전은 직업적인 경우에는 시인들이, 그리고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노인들이나 여성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어느 경우에든 신화의 커뮤니케이션 안에서 실행된 행동은 모방에 속한다. 시인들과 신화의 구전자들은 그들이 해석하는 인물을 위해서, 그들의 자아를 소외시킨다. 신화의 커뮤니케이션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은 신화의 해설자로부터 수화자에게 전수되는 모방이다. 신화의 수화자는 정서적 융합의 끝에 재현된 인물과 동화되려고 애쓴다. 플라톤이 신화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모방의 문제 때문이다. 신화는 수화자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그것을 전하는 시인은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보지 않는다. 따라서 시인의 담론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는 검증되지 않는 ‘의견’ 즉, 환상을 유포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그가 발전시키고자 했던 새로운 담론의 형태, 즉 앞으로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야기인 뮈토스를 배격하고 논증적인 담론인 로고스를 내세워 언술행위의 우열을 못박아놓는다. 따라서 신화는 가장 지위가 떨어진 상태에서 그 이름을 얻은 셈이다.


2. 정신분석 비평에서 신화비평으로- 욕망에서 동경으로

인류가 또는 그동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서구가 의심의 여지없는 가치로 숭앙해마지 않았던 역사주의적 발전의 이데올로기가 독주를 하고 있었을 때, 신화가 겪어야 했던 운명은 예견된 것이었다. 몇몇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재야의 입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신화와 그리고 그것의 창조적 원천인 상상력이 새로이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낭만주의 시대부터이지만, 이 정서적 혁명이 이론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이다. 프로이트의 발견은 심리학 뿐 만이 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창조와 그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신화비평은 작품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입장을 따르는 문학분석 방법인 정신분석비평과 근본적인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신화비평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출발했으나 집단무의식과 원형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분석심리학의 길을 연 융의 심층심리학에 그 이론적인 근거를 두고 있다.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의 의식적 자아와 구별되는 무의식적 자아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융의 이론을 따르는 신화비평 방법은 정신분석학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을 단지 하나의 병리학적 보고서로 취급하는 정신분석학의 시각을 단호히 배격한다.

융의 이론이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부분은  집단무의식의 개념과 원형이론,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비도에 대한 생각이다. 리비도가 예술작품의 창조적 원천에 놓여 있다는 생각은 심리학자의 이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지만,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단지 억압된 성충동이라는 임상 강박으로 이해하고 있는 데 반해서 융은 그것을 삶을 추동시키는 에너지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곧 생명에너지의 법칙이다. 동양적 관점으로 보자면 氣라고 이해될 수도 있을 이 에너지는 인간이 개별적 자아로 살아가면서 상실하게 되는 우주적인 ‘하나’에 대한 직관을 내포하고 있다. 융에 의하면 어린이와 같아진다는 것은 리비도의 보배를 간직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외부의 사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세계 내 존재로서의 충일감을 상실한다. 그런데, 예술가들이란 바로 이 원초적 충일감에 대한 직관을 날카롭게 간직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술작품을 개인사적 욕구불만 그것도 단일한 성충동의 좌절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정신분석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심리적 승화의 기제로서 작용하고 있는 예술작품을 단순한 병리적 현상으로 취급하는 우를 범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바슐라르가 정신분석비평에게 가하는 호된 비판의 주된 이유도, 바로 그것이 작품을 환원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작품의 향기를 빼앗아 버린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정신분석 비평은 그것을 수용하는 비평가들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보다는 작품 뒤에는 작가라는 ‘인간’을 찾아내는 데 애를 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인간’은 꼼짝없이 역사와 환경에 붙잡혀 있는 좌절된 인간이다. 작품을 쓰는 작가의 욕망은 신경증환자의 욕구불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신화비평은 작가의 욕망이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해있는 것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정신분석학과 결별한다. 그것은 좌절된 유아 성충동이라는 단일한 욕망이 아니라, 다양한 창조적 에너지이며, 궁극적으로는 삶을 견딜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만들어 주는 원초에 대한 직관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이제 동경으로 전이된다.  욕망은 날개를 얻는 것이다!


3. 작품의 진정한 의미 -개인과 인류

융에 의하면, 창조적 인간이란 모순된 성격의 양면적 존재이거나 아니면 종합적인 성격의 존재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개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체성이 무시된 창조적 과정, 즉 보편적 예술 속의 보편적 존재이다. 융에게 있어서 인간은 예술에 의하여 포착된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집단적 또는 몰개성적 개체로서 인류의 무의식적인 생명력을 형상화하는 존재이다. 신화비평은 작가보다는 작품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뒤랑은 ‘작가 없이는 작품도 없다’는 실존적 정신분석 비평의 명제를 뒤집어서 ‘작품 없이는 작가도 없다’고 (이 명제를 더욱 연장시키면, 작품 없이는 인간도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말한다. 뒤랑은 “하나의 작품은 그것이 익명일 때는 덜 예술적인가”라고 물으면서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일리어드이다”라고 못박는다. “작품이 없이 인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 없으면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인간을 하나의 작품에 연결시켜 주는 이해와 해석의 관계 없이 인간은 없다.”

이러한 뒤랑의 비평적 입장은 사실 우리가 앞서 말한 융의 견해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지만, 그러나 융이 보편적 개체로서의 작가를 너무나 중시한 나머지 그의 개체성을 거의 무시하는 반면 뒤랑은 작가와 작품 이해의 궁극적인 관심사를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의 역동적 긴장을 이해하는 것에다 둔다.

뒤랑에 의하면 하나의 작품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다. 그것은 ‘독창적’이고 ‘개별적’이며, 동시에 대중의 이해와 해석, 친밀함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인 얼굴을 가진다(뒤랑은 그 두 얼굴을 독일어의 Schöpfung/Gestaltung으로 명명한다). 사실 이것은 문예학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구성하는 문제이다. ‘과학’이 되고자 할 때, 그것은 ‘일반적인 것에 대한 과학’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그것은 그 연구 대상이 모든 일반화를 배제시키는 극단적인 개별성 안에서만 그것에게 제시될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뒤랑은 그 모순을 제대로 이해할 때라야 진정한 문예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개인사적인 운명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앙드레 말로가 멋지게 표현한 바 있는‘反운명 anti-destin’을 구성할 수도 있다. 예술은 따라서 개인사와 거리를 두며, 작품은 인간이 ‘자연에 덧붙여지듯이 개인사에 덧붙여진다.’ 이렇게 말할 때 뒤랑은 신화, 그리고 그것과의 구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문학작품을 완전히 열려 있는 구조로 파악한다. 뒤랑은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를 닫혀진 구조로 이해하고 있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형식적 구조주의le structuralisme formel이라고 부르며, 그는 자신이 제안한 구조에게 형상적 구조주의le structuralisme figuratif라는 이름을 붙인다. 신화의 구조는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긴장관계에 의하여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생성되는, 역동적인 구조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비평적 관점을 수립하기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공리를 제안한다.

첫째, ‘문체는 인간이다’가 아니라 ‘인간은 작품이다’는 가설을 인정하는 것. 그 창조적 개별성 안에서 작품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하는 것.

둘째, 작품에 대한 지식, 즉 문화에 대한 과학(미학, 비평, 인류학)은 이해와 설명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작품보다 미리 설정된 ‘하부구조화하는’ 구조들의 질서를 거부할 것. 왜냐하면 구조들을, 그리고 조화롭거나 또는 상반적이며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구조들을 창조하는 것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셋째, 작품에 대한 지식은 이 구조적 긴장의 역동주의를 따라감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작품은 이질적이며 잡다하고 때로는 상호 모순되는 구조들의 얼개를 통해서만 이해된다(작품만이 그 구조들을 그 단일성unicité을 통하여 통합한다). 작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해는 이 긴장에 대한 이해 속에 놓여 있다.

사실 뒤랑의 이러한 비평적 시각은 서구의 논리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라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변증법이란 모순을 지워 버리기 위한 이원론적 전략에 불과하다. 그는 구조주의자들의 구조 개념이라는 것도 사실은 정신의 안전성에 의하여 세계라는 불안정성을 지배해보려는 지성적 환원주의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변증법이란 긴장의 변증법이다. 그 지점에서 그는 모순을 감싸안으며 수용하는 동양적 정신에의 경사를 드러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 인간은 드러나 보이는 것, 즉 자신이 지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만을 원하고 욕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이기 이전의 어떤 보편적 개체였을 때의 가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불안전성이기도 할 미지의 가치를 갈망한다. 뒤랑이 이해한 창조적 인간의 윤곽은 그처럼 자연 또는 비개인(非個人) 쪽을 향해 흐릿하게 지워져 있다. 그의 작품은 바슐라르의 아름다운 표현처럼 ‘작품의 천사’에 의하여 연장되는 것이다. 다시 바슐라르처럼 말해보자. 작품을 쓸 때, 그대는 그대보다 더 나은 그대의 싹인 것이다.


4. 신화비평의 실제-덕성과 한계-보다 나은 인간학을 수립하기 위하여

뒤랑의 ‘긴장의 변증법’을 수용하든 그렇지 않든, 신화비평이 받아들이는 작품은 개인사적 의미를 초월한다. 신화를 이야기의 구조적 원리라고 가정하는 이 비평적 관점은 문학이 어떤 특정 기간의 순간에 역사적 사실로써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원형적 인물, 이미지, 상징, 장면구성의 영원하고 반복적인 표현으로서 역사적 시간의 차원 밖에서 하나의 연속체로서 존재한다는 가설을 받아들인다. 하나의 작품은 개인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가치를 가진다. 작가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작품의 도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작품은 이미 그것 자체가 인류적 산물이다. 작가는 보통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이미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태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다 명확한 형태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원형’이라고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그 개념화되지 않은 형태에 대해서 작가 자신이라고 해서 일반인보다 더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화비평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인문학적인 다리를 놓아줌으로써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신화비평가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의 관점을 가지고 작품분석에 임하게 된다.

(1) 형식주의자들처럼 작품의 형식과 구조가 원형적 유형에 의해 결정되고 표현된 개별 작품의 유형의 형식과 구조를 연구한다. 그러나 이 때에도 신화비평가가 궁극적으로 가지는 관심은 신화나 제의 또는 원형 그 자체의 의미에 있지 않으며, 그것들이 문학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는가를 연구하는 데 있다. 좀더 세밀한 분석에 이르게 되면 주로 그는 이미지들과 상징의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

(2) 신화와 제의가 사회적 경험에 의하여 발생되었고 그것 자체가 사회적인 행위의 형태이므로 신화비평가는 문학과 사회의 상호 교통에 관심을 기울인다.

(3) 심리비평가와 같이 신화비평가는 문학 작품에 있어서 무의식적 자아의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원용하지만, 그러나 그는 환원주의적 해석방법을 거부하고, 심층주의 심리학을 주로 참고한다.

신화비평은 그 어떤 문학비평 방법보다도 작품과 작가에게 드높은 권위를 부여한다. 그 때문에,  신화비평은 특히 작가들의 환영을 받는 경향이 있다. 작가들은 자신의 단순한 환상이나 망상 또는 편집증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었던 이미지 또는 주제가 인류학적인 보편성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환호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신화비평은 작가들뿐 아니라 일반대중들에게도 이처럼 자신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도 있는데, 신화가 고대 사회에 가지고 있었던 교육적 기능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화 비평을 통해서 독자들은 당대의 작품으로만 국한시켜 읽었던 어떤 작품에서 통시대적인 통찰력을 발견하게 되고, 예술 작품의 가장 고양된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매개로 하여 서로의 내부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인류학적 합의를 공유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문학이 수대에 걸쳐서 쌓여온 인류학적 자산 위에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는 일종의 운명의 해결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비평가는 몇 가지의 함정에 빠질 위험을 언제나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단순화의 위험. 몇 가지의 너무나 뚜렷한 지배적인 원형들(예를 들면 무서운 어머니, 버림받은 아이 등)의 경우처럼, 기계적으로 문학 작품을 재단할 위험이 언제나 있다. 다만 종류만 조금 많아졌다 뿐이지 모든 것을 범성욕주의로 설명하는 정신분석비평의 환원주의적 시각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둘째, 예술로서의 작품의 기교와 고유한 성격보다 작품의 주제와 구조에 매달림으로써 신화비평은 분석적일 뿐,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반드시 바람직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실제로 순수하게 신화비평적인 방법만으로는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가려낼 방법이 없다. 실제로 신화비평은 기교적으로 고도의 세련성을 가지는 작품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다. 셋째, 문학작품의 초역사적 성격만을 부각시킨 나머지 그것이 사회, 특히 당대의 사회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관계의 의미를 등한시할 수 있다. 잘못하면 현실도피적이며 무반성적인 문학을 옹호할 함정에 빠질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신화비평을 과거의 문학 연구가 아니라 현장비평으로 원용할 경우 비평가들은 항상 이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신화비평는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그 목표로 가진다. 이 비평방법은 단순히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의 여러 장르에 원용될 수 있다. 특히, 이미지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논의되고, 인간의 언어행위가 근본적인 변혁의 징조 앞에 놓여 있는 지금, 무차별로 쏟아지는 무수한 가짜 신화들과 가짜 영웅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정한 신화의 의미를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학문적이거나 미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중요성과 긴급성을 가지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새로운 인간학을 쓰기 위해서 신화비평의 영역은 미래 쪽으로 무한히 열려 있다.



제 4장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문학 비평이 상정하는 언어에 대한 인식의 차이

                                                            

                                                                                                                                                이원주(영문과 교수)  


1950년대에 맹위를 떨쳤던 구조주의가 ‘탈’ 내지는 ‘포스트’라는 수식어를 달고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로 변신하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 혹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post-structuralism’의 ‘post’를 ‘탈 내지는 포스트’라고 다소 애매하게 옮긴 것은 사실상 ‘탈’(脫)이라는 접두사를 붙일 경우 ‘구조주의’(structuralism)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에, ‘구조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려 했지만 ‘구조주의’의 근본 전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은 ‘post-structuralism’에 대한 명칭으로는 적절치 않아서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예 ‘post’를 소리나는 대로 옮겨서 ‘포스트구조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는 편의상 ‘탈구조주의’라고 부르기는 하겠지만, 그 의미는 유의해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출발점은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F. de Saussure)1)의 언어학 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소쉬르는 『일반언어학 강의』(Courses in General Linguistics)에서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랑그’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기존의 사회적 체계로서의 언어를 가리키고, ‘빠롤’은 언어를 실제 사용하는 과정에서 개별적으로 실현된 경우를 지칭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서로간의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것은 한국어에 있어서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된 언어체계인 ‘랑그’가 있기 때문이지만, 개인이 구사하는 개별적이면서도 일회적인 언어 그 자체는 ‘빠롤’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언어학 연구의 본질적 분야는 하나의 체계로서의 언어인 ‘랑그’라 할 수 있다.

소쉬르는 언어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쌓여온 어휘들의 집합체로 보거나 어휘가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상징이 아니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어휘는 글로 쓰거나 말로 표현된 부호인 ‘기표’(signifier 혹은 씨니피앙)와 이러한 기표에 의해 의미되는 개념으로서의 ‘기의’(signified 혹은 씨니피에)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서 붉은 색, 노란 색, 파란 색 신호등이 있다고 할 때에, 이러한 신호등의 색깔들은 ‘기표’이고, 붉은 색이 의미하는 ‘멈춤’(stop)은 ‘기의’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이라 할 수 있다. ‘붉은 색’(red)과 ‘멈춤’(stop)에 자연적이고도 본질적인 연관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호등의 색깔이라는 하나의 체계 내에서 다른 색깔과의 ‘차이’(difference)에 의해 의미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쉬르는 하나의 기의는 자기 나름의 기표를 찾으려는 자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덧붙임으로써, 비록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가 자의적인 것이긴 하지만,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형성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탈구조주의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에 주목한다. 기호(sign)는 양면을 가진 하나의 단위라기보다는 두 개의 움직이는 의미 층을 일시적으로 고정시킨 것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 예로 우리가 사전을 찾는 과정을 들 수 있겠다. ‘crib’이라는 기표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a child's bed’, ‘a hut’, ‘a plagiarism’ 등의 여러 가지 기의가 있을 뿐 아니라, 각각의 기의는 또 새로운 기표가 되어 또 다른 기의를 의미하게 된다. 즉, 기표로서의 crib을 사전에서 찾아 그 기의를 ‘a hut’라 규정할 경우에 ‘hut’는 새로이 하나의 기표가 되고 이는 ‘a shack’이라는 기의를 낳게 된다. 이 기의에 사용된 어휘인 ‘a shack’은 또 기표가 되어 기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처럼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끊임없는 의미의 차연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도표로 제시해 보면 아래와 같다.


    crib(signifier)→a hut(signified)

                    

                hut(signifier) → a shack (signified)

                                    

                                  shack (signifier) → a shanty (signified)

                                                        ↓

                                                        shanty (signifier) →


위의 도표에서도 보듯이 이 과정은 끝없이 이어진다. 아울러 ‘crib’이라는 기표를 사전에서 찾을 때에 여러 가지 기의를 찾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후 맥락에 따라 동일한 기표일지라도 서로 다른 기의를 지니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탈구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언어는 아무리 논리적이라 할지라도 기표들이 서로 상호 관계를 맺는 일을 계속할 뿐이고 어떤 궁극적인 기의에 도달하는 것은 무한히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2)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는 어떻게 보면 이처럼 단순한 이론적 전제의 차이에서 출발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차이가 문학 연구에 적용될 경우에는 본질적인 차이로 귀결된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안정되고 체계적인 통일성을 인정하는 구조주의의 전제에서 출발하는 담화 이론은 대개 이중적 대립구조를 상정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프로프(Vladimir Propp)는 문장 구조와 내러티브3) 사이의 유사성을 탐색함으로써 러시아의 동화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프로프는 러시아의 동화를 분석하여 러시아 동화 전체의 구조와 체계를 세웠는데, 한 문장의 구조를 담화구조에 적용시켜서 전형적인 인물들을 문장의 주어로, 전형적인 행위를 문장의 술부로 간주하여 31개의 ‘담화 기본단위’(functions)4)와 7개의 ‘행동영역’(actants)5)을 발견하기도 했다. 컬러(Jonathan Culler)는 촘스키(Noam Chomsky)의 용어를 원용하여 ‘문학 능력’(literary competence)의 개념을 내세우는데, 독자들이 어떤 텍스트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독자 개인을 초월한 공통의 제도와 구조 속에서 획득된 능력 때문이라 분석한다. 피시(Stanley Fish) 역시 ‘해석 공동체’(interpretive community)의 개념을 도입한다. 텍스트가 지니는 형식의 단위와 작가의 의도는 텍스트 안에 있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해석의 행위에 의해 실체를 지니게 되는 것인데, 그러한 해석을 행하는 독자와 독자가 속한 공동체의 해석 전략에 의해서 특정 요소들이 선별적으로 독자들의 반응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예에서도 드러나듯이 구조주의자들은 해석 그 자체보다는 독자들이 텍스트를 해석할 때 적용시키는 구조와 법칙에 주목한다. 

반면 탈구조주의자들은 구조주의에서 중시되던 전통, 문맥, 구조, 영향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비판하는데, 이는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디컨스트럭션’(Deconstruction)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데리다는 구조주의 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조 자체의 해체를 시도했다. 구조주의에서는 우연한 듯 보이는 잡다한 여러 부분들이 하나의 ‘중심’을 향하여 질서를 형성하고 이러한 것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고 여기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중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탈중심’을 선언한다. 데리다의 이러한 입장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는데, 앞서 제시한 도표에서 보듯이 기표와 기의가 서로 얽히고 설키는 과정에서 작가라는 중심이 결국 소멸되고,6)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한 ‘텍스트’라는 개념으로 대체되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로부터 벗어난 텍스트는 탈구조주의 비평가의 의도에 따라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탈구조주의 비평가는 기존 관념에서 해방되어 언어와 진리, 지식, 욕망, 권력과의 관계를 매우 자유롭게 다루게 되고, 문학과 비평, 글쓰기와 글읽기는 구별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작가와 저자는 소멸되고, 대신 독자가 개입하여 읽으면서 지어 나가는 텍스트의 개념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소멸되었듯이 독자 역시 허구의 존재인 것이고,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얽히고 설키면서 연결되는 텍스트들간의 상호 연결성 즉,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뿐이다. 어떤 작가의 텍스트(문학 작품)에 대한 어떤 비평가의 텍스트(비평문)는 앞서 그려본 기표와 기의의 관계처럼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에 대한 . . . 텍스트’일 뿐인 것이다. 탈구조주의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다양한 탈구조주의적 경향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기본적인 특징과 전제에 관한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제 5장 형식주의 비평


                                                                                                                                                장부일(국문과 교수)


형식주의 비평의 기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시학』은 최초의 본격적인 문학론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책에, 문학의 사회적․윤리적 책임을 물어 시인 추방론을 전개한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문학을 가치있는 것으로 승격시키고 본격적으로 철학적 반성의 영역으로 이끌어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 작품의 형식, 구조, 스타일 및 심리적 영향을 강조하여 문학작품의 형식주의적 접근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형식주의 비평의 성립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18세기 말의 칸트와 그에 영향을 받은 19세기의 콜리지이다. 칸트는 『심미적 판단력 비판』에서 예술 고유의 형식미에 대한 판단력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콜리지는 『문학평전』에서 상상력 이론을 전개한다. 이들의 이론은 구미에서 신비평의 이론으로 확립된다. 여기에 크게 기여한 학자들로는 엘리어트와 리처즈가 있다. 엘리어트는 모든 예술에는 어느 시대이고 진정한 예술가들 사이에 형성되는 어떤 무의식적인 공통적 질서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형식의 내적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리처즈는 『문에비평의 원리』에서 시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우게 된다. 그리하여 시학을 일종의 응용과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터놓게 된다. 1920년대에 엘리어트나 리처즈는 신비형을 하나의 확실한 문예운동으로 다져놓는다. 1930년대에 이르러 랜섬은 이 운동을 ‘신비평’이라 명명하게 된다.

이러한 구미의 신비평운동은 러시아 형식주의와 만나면서 형식주의 이론은 탄탄하게 자리 잡아가게 된다. 러시아 형식주의는 1910년에서 1920년대 사이에 러시아에 나타났던 문학비평 운동이다. 그것은 1920년대 러시아에서 제기된 예술의 자율성과 기능이나 기교 혹은 미학적 장치들과 같은 형식을 중요시했던 경향 전체를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들의 이론은 독자적으로 미학적인 가치를 생성하면서 그 자체가 목적화되기도 하는 ‘시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를 구별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시적 언어’는 일상적인 언어와는 다른 특별한 언어인데, 그 자체의 문법과 미학적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된다. 거기에서 나아가 문학 작품의 형태나 양식을 과학적으로 논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인다.

이들은 문학작품 외적인 일체의 요소를 배제하고 창작과정 그 자체의 비밀과, 기법, 리듬, 운 등 작품 그 자체를 구조적으로 연구한다.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의 계보를 보면 모스크바 언어학 서클의  R.O.야콥슨, 시적 언어연구회의 V.B.시클로프스키, B.M.에리헨바움, Y.N.티냐노프, B.V.토마셰프스키 등을 들 수 있다.

야콥슨은 '문학에 관한 학문의 대상은 문학이 아닌 문학성, 즉 어떤 작품을 문학작품답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문학자체의 구조적 원리를 강조하였고, 지금까지의 문학 연구가 문학사나 사회사 또는 심리학 및 철학에 근거를 둔 사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 같은 문학작품의 자율성 강조는 초의미적 언어, 즉 의미를 떠나서 존재하는 시 및 입체파, 회화 등과 궤도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즉, 내용이 아닌 형식을 우선적으로 문제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의 이론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인물이 시클로프스키이다. 그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것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술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일상 생활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의 모습을 일그러뜨려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낯설게 하기는 곧 이상하게 만들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친숙해져서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못하는 일상을 낯설게해서 충격을 유도하는 것이다. 운율이 예술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일상 언어의 억양을 일부러 일그러뜨려 우리의 습관화된 청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이란 여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보아왔던 것을 지금까지와는 달리 낯설게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형식주의자들은 “예술의 목적은, 사물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여러 테크닉은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고,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고 말해 낯설게 하기가 예술의 중심과제라고 강조했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구체적인 성과로는 시 분야에 관련된 것이 많다. 그러나  산문 분야에도 플롯 구성의 수법과 이야기․패러디 등의 면에 주목할 만한 성과가 적지 않다. 시클로프스키와 티냐노프의 문학사론, 나아가서는 V.Y.프로프의 『민화의 형태학』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이러한 러시아 형식주의는 1920년대 중반부터 반마르크스주의적이라는 비판과 비난이 거세어지면서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리하여 러시아를 떠나 체코, 미국등으로 그 계보가 이어진다. 야콥슨이나 르네 웰렉과 같은 학자들이 그러한 예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업적은 1930년대 후반 프라하 구조주의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고, 1960년대 이후 구조주의와 기호학이 발달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형식주의자들은 지금까지의 문학연구가 지나치게 문학외적인 요소에 의존하여 왔다고 비판하고 문학자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이른바 본체론적 비평이 그것이다. 비어즐리와 윔저트의 주장에 의하면 문학작품을 연구할 때 작가의 의도를 탐구하려는 시도는 ‘의도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곧 작품의 의도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가령, 이인직의 신소설을 보념 작가의 의도는 근대적 주제를 추구하지만, 이와 달리 인물들의 실제 행동에서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비어즐리와 윔저트는 또한 ‘감동의 오류’를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감동이란 문학자품이 독자나 연구자에게 유발하는 감동이다. 그러한 감동은 독자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자신의 감동에 의존하여 작품을 분석한다면 주관적이고, 인상주의나 상대주의적인 비평의 수렁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비어즐리와 윔저트의 주장은 작품 자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에 대한 반박 또한 만만치 않다. 자크 바르장은 작품 속에만 머무르겠다는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를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작품이 독자적으로 존립하면서 이해가능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자족적인 것이므로 아무런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대로 작품이 그 자체로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면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어떤 설명의 도구를 작품 밖에서 끌어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을 작품 그 자체로 연구해야 한다는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본체론적 오류’라고 한다.

낯설게 하기와 더불어 형식주의의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들로 모호성, 아이러니와 역설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형식주의자들이 문학작품의 형식을 연구하면서 주로 동원하는 개념이다. 모호성(ambiguity)은 엠프슨이 제시한 개념으로, 두 가지 이상의 모순되는 의미를 가진 표현을 말한다. 시를 풍성하게 하는 복합적인 암시성 혹은 언어의 다의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예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이 조국, 부처, 진리, 여인 등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아이러니는 표면적 의미와 내적 의미가 서로 다른 경우이다. 가령, 아주 나쁜 상황을 보고 ‘참 잘 되어가는구나’라고 표현하는 예가 있다. 이러한 표현에서 외면적인 진술의 의미는 그대로 ‘잘 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내면적 의미는 ‘상황이 아주 나쁘다’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외면적 표현 그 자체로는 모순된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을 내적 진술과 비교할 때에만 모순이 생긴다.

이와 달리 역설은 외적 표현자체에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와 같은 표현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는 ‘님은 갔다’, ‘님을 보내지 않았다’라는 모순된 두 진술이 있는 것이다. 역설은 이 모순된 두 항목을 동시에 배치함으로써 이 둘을 초월하는 경지를 보여주게 되는 신비한 면을 지니고 있다.



제6장 소설론


조남철(방송대 국문과 교수)


 소설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개념과 기원, 그리고 변천 과정을 알 필요가 있다. 소설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또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어 오늘의 소설로 발달하였는가를 앎으로써, 다양한 현대 소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 텍스트의 성분(elements)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써 소설의 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1. 소설의 개념


 소설의 개념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여러 가지로 바뀌어 왔다. 그것은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소설이 지닌 복합적 의미 중 어느 한 측면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소설을 이야기로 보아 설화성을 강조하는 경우나 역사나 현실의 반영으로 보는 반영설, 그리고 사람의 교화를 강조하는 교화설 등이 가장 두드러진 견해다.

 소설 개념의 첫 단계는 소설을 이야기로 보는 태도다. 소설의 이야기는 특정한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은 허구적인 이야기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이야기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래에 열거된 명제들은 소설이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현실과 다른 허구성을 바탕으로 하는 ‘서사적 허구’라는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소설은 증류된 인생이다. (C. 해밀턴)

▲ 소설은 인생의 해석이다. (W. H. 허드슨)

▲ 소설이란 무엇인가? 가공적인 이야기다. (앙드레 모르와)

▲ 소설은 이야기, 즉 캐릭터에 대해 꾸며 놓은 이야기다. (R. P. 워런 & 브룩스)


 이렇게 소설이란 엄밀히 말해서 작가에 의하여 창조된 가공적인 이야기요, 허구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픽션(fiction)이란 말은 작가의 주관과 상상력의 작용에 의하여 새로운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근대 소설의 특징은 그 허구성에 있다. 한동안 소설을 사회의 거울이요, 시대의 그림이라고 하여 소설의 사실성(actuality)을 중시한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소설이 현실 그대로의 복사일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작가의 주관으로 빚어진 창조요,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즉, 소설은 인생이나 사회의 거울이 아니라 그것을 그 나름대로 굴절시키는 렌즈와도 같다는 것이다. 작가를 제 2의 창조자라고 부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에 있어서 거짓말로 꾸며진 이야기는 진실성(reality)이 있는 참말 같은 거짓말 이어야 하고 가공의 진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소설은 꾸며진 허구의 세계라기보다는 내일의 지평을 위해 살아가는 현실이나 역사의 반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고 모방하되 단순한 반영이나 모방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소설은 삶의 총체적 인식을 형상화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지평을 가시화한다고 본다. 아래의 명제에는 전기한 소설의 특성이 지적되어 있다.  


▲ 소설은 실생활과 풍습과 그것이 씌어진 시대의 그림이다. (클라라 리브)

▲ 소설은 실생활의 반영이요 축도다. (솔로호프)

▲ 소설의 인생의 회화(繪畵)다. (피시 러벅)

▲소설은 현대의 문제적 개인 본래의 정신적 고향이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서는 동경과 모험에 가득 찬 자기 인식의 여정을 형성한다. (루카치)

 

 소설은 궁극적으로 인생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이다. 소설 문학이 묘사하고, 표현하고, 탐구하고, 발견하고, 창조하려는 것은 오직 인생 그것이다. 흔히 소설은 인간학이라는 말을 할 만큼 총체적으로 인간을 탐구하고 구체적으로 인생을 표현한다.

 또한 교화의 측면에서 소설의 의미를 부여하는 입장도 있다. 원래 동양에서는 예악야어서수(藝樂耶御書數)의 품격과 신언서판의 지혜를 지녀 치정(治政)과 예(藝)를 아울러 갖추는 것을 인간의 덕목으로 여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설은 전기한 덕목에서 이탈한 사회나 인간을 바로잡는 감계여야 한다고 보았다. 서구의 경우,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시인 추방을 주장하면서 소설의 교화적 기능을 강조하기도 했다. 루카치 등은 소설이 이념을 전파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 

 소설의 개념은 이렇게 시대나 상황에 따라 허구성과 반영 그리고 교화의 세 측면 중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경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세 측면은 소설 내에서 통합되어 소설의 예술적 특성을 형성하고 있다.


2. 소설의 기원


 소설의 기원 및 형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소설이 고대의 서사시(epic)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중세의 로맨스(romance)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대표적이다.


1) 소설의 서사시 기원

 소설의 근원을 고대의 서사 문학에서 찾아보려는 주장은 무엇보다 소설의 기본적인 특질이 이야기(story)와 서술(narration)에 있다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몰턴, 허드슨, 루카치 등은 소설의 기원을 서사시에 두고 있다. 우선 몰턴은 「문학의 근대적 연구」에서 “서사시․서정시․극시 그리고 역사․철학․웅변은 문학 형태의 여섯 가지 요소”라고 정의했다. 그는 앞의 셋을 ‘존재에 더하는 창작 문학’이며, 뒤의 세 가지는 ‘존재를 토의하는 토의 문학’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몰턴은 서사시는 ‘이미 우리가 보아 온 바와 같이 고대의 운문서사(verse-narrative)와 근대 소설을 포함하는 창조적 서술로서의 서사’이라고 말했다. 이는 서사시를 고대의 운문 설화나 근대 소설을 포함한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이 논리에 따르면 자연히 근대 소설의 기원은 서사시에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허드슨은 그의 「문학 연구 입문」에서 서사시의 종류를 「오디세이아」나 「일리어드」같은 고대나 중세 때의 ‘성장의 서사(epic of growth)’와 밀턴의 「실낙원」과 같이 문예 부흥 시대의 ‘예술의 서사시(epic of art)’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전기한 것은 아직까지는 서사시일 뿐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소설은 평범한 인물의 일상사를 다룬 인생의 서사(epic of life)로서 서사시에 포함되지만 서사시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은 ‘스토리적인 플롯이 내러티브의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는 서사시와 동일하지만 주인공이 저자 거리의 범속한 인물이라든지 산문으로 되어 있다든지 하는 특징 등은 서사시와는 다르다고 보았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호메로스 시대의 서사시가 ‘선험적 좌표에 힘입어 총체성이 지배하던 형이상학적 고향 속에서 인간의 영혼이 아무런 문제없이 안주하고 있던 그리스의 역사 철학적 산물’이라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현대의 서사 형식인 소설은 ’이미 선험적 좌표와 형이상학적 고향을 상실하고 서사시적 총체성의 세계를 다시 찾으려는 고독한 현대인의 영혼이 직면하고 있는 역사 철학적 상황‘의 산물로 보았다. 따라서 루카치는 소설은 문제적 개인이 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본래의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서는 동경과 모험에 가득 찬 자기 인식에로의 여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형식이라고 보았다. 


2) 소설의 로맨스 기원

 소설의 기원을 중세 로맨스에서 찾아보려는 주장은 티보데를 위시하여 일본의 문예학자 혼마 히사오라든지 우리나라의 백철 등 많은 사람들이 찬동하고 있다. 티보데는 그의 「소설의 미학」에서 소설이란 뜻을 가진 프랑스어 ‘roman'의 자의(字意)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소설(roman)은 그 이름이 가리키듯이 승려 문학자의 시대에 라틴어로 씌어지던 정규 서적과 달리, 세속의 언어로 씌어진 것을 의미한다. 로망이란 말이 마침내는 이야기를 뜻하게 된 것은 로망어로 기록된 것의 대부분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티보데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어어, 프로방스 어 등 중세에 있어서의 속어(俗語)로 된 이야기가 곧 소설의 기원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세의 로맨스는 흔히 사랑과 모험을 그린 것으로 대표적으로는 「아서왕 이야기」, 「샤를르마뉴 이야기」 등이 있다고 했다. 백철도 ‘소설의 전신은 로맨스며, 이야기다. 이것은 동서 소설의 기원을 찾아보는데 있어서 우연한 일치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라고 말하면서 동양에서도 소설은 설화와 전설 등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3. 근대 소설의 형성


1)근대 소설 형성의 시각

 소설이라면 근대 이후의 소설을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루카치의 경우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을 부르주아 시대의 서사시로 보아 소설의 발생과 근대 사회의 등장 사이의 관련을 설정하고 있다. 와트(I.Watt) 역시 「소설의 발생」에서 소설 형식이 근본적으로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형식임을 밝히면서 18세기 초 영국의 사회적 변화가 소설의 발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근대 사회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 근대 사회를 구성하는 두 요소로 자본주의와 시민 사회의 형성을 들고 있다.


4. 소설의 성분


 지금까지 소설의 이론은 성분론을 중심삼아 전개되어 왔다. 여기서 말하는 성분(elements)은 소설적 구조라는 전체에 참여하는 부분(parts) 또는 구성적 요소(component)의 유사 개념이다. 전통 시학에서는 소설의 성분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살피는 것을 관행으로 삼아왔다. 재료적 성분(factual elements)과 기술적 성분(technical element)이 그것이다. 언어, 인물, 주제, 작가의 세계관, 배경 등은 전자에 해당하는 성분이다. 기술적 성분은 주로 수사적 자질을 가리키는데, 시점(point of view), 아이러니, 어조(tone), 거리(distance)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차용해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시대 문학의 현상에 주목했으며, 그 중에서도 비극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분석해낸 극의 성분들은 행동, 인물, 운율, 사상(주제) 등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끌어낸 성분 자질들은 현실 속에 실재하는 사물들과 대응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문학의 성분을 현실 속의 상응물로 대치한 그의 방식은 문학과 예술을 현실의 모방이나 재현으로 본 그의 입장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인환 「소설의 영역」, 「현대 소설의 이해」, 문학사상사, 1996

한용환, 「소설의 이론」, 문학 아카데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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