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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이해-비평론

수로보니게 여인 2010. 9. 15. 00:20

 

 

비평론(1)

                                                                                                                                      박태상 교수


 

1회 1강.


1. 역사 전기적 비평


 어떤 작품이든지 그것을 낳게 한 역사적 배경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는 명제에서 문학비평의 역사주의 방법은 시작된다.

말하자면 작품을 이해할 때 작가가 작품의 역사적 배경, 사회적 환경, 작가의 전기 등 문학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체계와 관련시켜서 문학을 다루는 방법이다.

  역사 ․ 전기적 비평이 하나의 방법론으로 정립되는 데는 19세기 프랑스의 비평가인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 1904~60)와 테느(Hippolyte Adlphe Taine, 1928~93)의 선구자적 연구에 기인한다. 생트뵈브는 “내가 확립하고 싶은 것은 문학의 박물학이다”라고 언명하면서 초지일관 전기적 접근법을 활용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나는 서슴없이 ‘그 나무에 그 열매(tel arbre, tel fruit)'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고로 문학연구는 자연스럽게 인간 자체 즉 윤리연구로 옮겨진다”고 하여 위대한 작품은 바로 그것을 낳게 한 위대한 작가의 창조력에서 기인함을 강조하였다.

생트뵈브의 실증주의적인 측면을 좀 더 체계화하고 발전시킨 비평가가 바로 문학결정의 요인설을 제기한 테느이다. 그는 그의 「영문학사」(1963) 서문에서 인종․환경․시대(race, milieu, moment)의 3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인종(race)이란 개인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오는 선천적 및 유전적 기질을 뜻하고, 환경(milieu)이란 한 인물을 변화시키게 되는 후천적 성향 및 사회적 환경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3의 원인으로 내적 세력(인종)과 외적 세력(환경)이 이미 생산해 낸 작품이 또 다시 다음 작품을 생산하는 데 기여하게 되는 것을 시대(moment)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랑송의 과학적인 실증주의적 방법론이 역사 전기적 비평방법이 형성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주로 원고의 이해, 서지, 연대기, 전기 작품에 대한 비평 등 보조과학이나 다른 모든 과학들, 즉 주로 역사학, 문법학, 철학사, 과학사, 민속사 등을 경우에 따라 차례차례 이용함으로써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하나의 텍스트를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 텍스트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아는 일이다. 즉 서지에 의하여 정정되고 보완된 전통은 우리들에게 우리 연구의 자료인 작품들이 어떤 것인가를 지시해준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생트뵈브와 테느 그리고 랑송의 방법론은 현재의 역사․전기적 비평이 정립되는데 모태가 되었다. 한편 역사주의 비평가인 그레브스타인(S.N. Grebstein)은 「현대비평의 전망」(1968)에서 역사․전기적 비평의 6가지 주요요소를 열거하였다. 원전(text), 언어(language), 전기(biography), 명성과 영향(reputation & influence), 문화(culture), 문화적 관습(convention)이 바로 그것이다.

 그레브스타인은 “역사적 비평의 중심적 원리, 즉 그 기본적인 확신조항은 어떠한 문학작품도 그 자체로써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여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비평의 원천에서 연역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위의 여섯 가지 주요요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가하고 있다.


 ① 역사적 비평가는 믿을 만한 원전(text)을 사용하고 잇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② 그는 작품이 창조된 당시의 특수한 시간과 장소에 작요했을 작품의 언어를 의식하고 작업한다.

 ③ 그는 작가의 인생과 물질적 환경, 특히 지금 면밀히 검토 중인 작품의 구성에 영향을 미친 환경에 비추어서 작품을 연구한다. 또한 작가의 전 생애의 문맥에서 작품을 생각한다.

 ④ 그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전시대 또는 동시대의 것과 비교하며, 그 작품을 한정했을 제 영향을 평가한다. 동시에 역사적 비평가는 그 작품 자체의 평판과 다른 작품 및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

 ⑤ 그는 작품을 ‘한 시대에 소속된’ 것으로 본다. 즉 작품을 이루어놓은 문화의 표현으로, 그리고 그 문화의 제 사건과 조건의 가능한 반영으로 본다.

 ⑥ 그는 작품을 문학적 전통․관례․양식 또는 장르 속에 놓고, 그것과 다른 비슷한 작품의 관계를 결정한다.



1회 2강


2. 형식주의 비평 -신비평


 형식주의 비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후 가장 오래된 정통적인 비평의 방법이다. ‘문학은 작가의 인격과 환경의 반영이다’, ‘작가의 의도와 텍스트는 일치한다’라는 역사적 방법의 반명제로서 형식적 방법은 문학이 문학다운 속성 곧 ‘문학성’을 철저하게 그 언어적 조직과 일체화시켜 분석하고 기술한다. 신비평이란 말은 랜섬(J. C. Ransom)의 ������뉴우 크리티시즘������에서 비롯되었다. 

 런던, 파리, 뉴욕 같은 문화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 남부의 도시 내쉬빌에서 랜섬은 1919년에서 1925년까지 제자, 동료, 유지들이 참여하는 <도망자>라는 문학 동인회를 주도했다. 이 모임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한 동인이 제안하여 채택하게 된 이 동인회 명칭에 대하여 주요 동인이던 앨런 테잇은 <도망자란 간단히 말해서 시인이다. 그는 방랑자, 유랑의 유태인, 소외된 자, 세상의 비밀한 지혜를 지닌 자이다>라고 설명한다. 테잇 이외에 로벗 펜 워른도 <도망자>의 동인이었다. 두 사람 다 나중에 쟁쟁한 문인들로 성장했다. 잘 알려진 대로 대학생 중심의 동인 모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도망자> 동인들은 1922 - 25년 사이에 모임을 가지며 동인지 ������도망자������를 내고는 흩어졌다. 클리언스 브룩스는 도망자들이 흩어진 직후 밴더빌트에 와서 랜섬에게 배웠다.

 1928년경에 랜섬, 테잇을 비롯한 몇몇 <도망자> 동인들은 문예 운동에서 소박한 정치운동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이른바 <농본주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북부의 산업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남부의 전통적인 농본주의를 부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다분히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고, 또한 사실적 기반이 미약한 문인적 환상에 가까웠다. 더욱이 남부의 농본 사회가 과거에 흑인 노예의 강제 노동에 기초했었을 뿐 아니라 이렇다 할 정신적 유산을 남긴 것도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남부 문화 우위론이 대체로 허황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1930년대 초의 대공황은 북부의 산업 자본주의의 폐해를 실감케 하여 토착적 농본 사회의 순후한 인간관계의 회복은 얼마쯤 감상적인 대안이 되기도 했다. 랜섬, 테잇 등은 이때 정치적 논문들을 발표할 만큼 심각한 태도로 임했으나 루즈벨트 정부의 뉴딜 정책 실시 이후 자연 쇠퇴하여, 1937년 랜섬이 밴더빌트를 떠나 북부의 케년 대학으로 옮겨가자 시들해지고 말았다. 케년대학은 오하이오주에 있는 작은 장로교 계통의 대학으로서 별로 유례가 없는 영문학대학을 설치하여 랜섬에게 맡기고 또한 ������케년 리뷰������라는 문예 계간지를 창간, 편집케 했다. 이 이름 높은 계간지는 1938년부터 1959년까지 랜섬의 편집으로 영미의 가장 유명한 비평가, 사상가들의 글을 실었다. 한편 랜섬의 제자 브룩스와 워른은 미국 남단의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의 교수가 되어 1942년 계간지 ������서던 리뷰������를 창간했다. 이 역시 성공적인 평론 전문지가 되었다.

한편 랜섬은 결(texture)이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랜섬은 리차즈의 정서론을 비판한다. 그리고 다시금 자기의 비유 ‘아름다운 시는 시민들의 개인적 성격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목적을 실현하는 민주국가라 할 수 있다’는 비유를 말한다. 또는 ‘아름다운 시는 우리가 시인하는 객관적 논의로서 우리가 좋아하는 객관적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순전한 과학적 논의는 중성적, 기능적 부분들만이 있고, 그래서 ’결‘과 아름다움을 갖지 못한다’ 미적 경험은 우리의 삶의 ‘결’에 있으므로, 그런 경험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여기서 랜섬은 드디어 ‘결’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결’이란 구체적 사물의 직접적 촉감에 의하여 경험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결’때문에 시는 구체적, 객관적 사물로 인식된다. 랜섬은 은유야말로 복잡다단한 세부 사항들이 집적되어 글을 빽빽하게 만든 것, 즉 ‘결’ 그 자체라고 본다. 시의 빽빽함, 리차즈의 말대로 하자면, 그 함축성은 세상의 빽빽함을 반영한다. 결국 라차즈가 말하는 비유의 ‘취의’는 랜섬의 논리적 핵심, 또는 논리적 구조이고 ‘매개어’는 랜섬의 결인 셈이다. ‘나의 연인은 붉은 장미’라 했을 때 ‘장미’는 매개어이고 ‘어여쁜 아가씨’는 비유의 취의라는 것이 리차즈의 이론인데, 랜섬에게 있어서는 ‘어여쁜 아가씨’는 논리적 구조이고 ‘장미’는 결인 것이다. ‘장미’는 곱다는 것 이외에도 봄에 피는 빨간, 향기로운, 탐스러운, 가시가 있는 등등 많고 많은 구체적 경험들이 이루는 결의 덩어리이다.

랜섬의 제자 테잇은 ‘긴장(tension)’이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그는 시의 중요원칙으로서 ‘긴장’을 들고 나온다. 좋은 시들은 동일한 성질을 공통으로 갖고 있는 데 그것을 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고 그는 전제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다만 더 예리한 이해를 위한 방법임을 천명한다. 그러한 성질들의 하나를 그는 ‘긴장’이라 부르기로 제안한다. 먼저 테잇은 ‘전달의 오류’를 거론한다. 시는 관념을, 사상을,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비평론(2)


2회 3강

3. 사회문화적 비평


  1) 토대와 상부구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예술은 사회적 의식의 형태 중의 하나이며, 결국 변화의 이유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명한 ‘토대와 상부구조’(Base and Superstructure)의 이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유물사관이며, 문학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계급투쟁의 표현이며 수단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모든 정신적인 것은 경제의 생산과 분배라는 하부구조 위에 구축되는 상부구조이며 그 시대의 지배자는 이 생산수단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은 생산수단을 쥐고 있는 사람, 즉 무산자 계급의 투쟁의 현실을 예각적으로 반영하여 그러한 투쟁의 사상, 행동, 감정, 생활을 얼마나 잘 그렸으며, 그것이 무산자의 승리를 예견 또는 보장하는 것으로 형상되었느냐 아니 되었느냐에 따라 가치를 판단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인간은 그들 생활의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일정한, 필연적인, 자신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관계, 즉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생산관계의 전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 실제적인 토대를 구성하며, 이 토대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구축되고 이 토대에 사회적 의식의 일정한 형태들이 조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고 밝혔다.

즉, 예술이나 문학이 경제적 조건의 단순하고 수동적인 산물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 사실은 위에 인용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중요한 전제인 첫 번째 명제, ‘즉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근본적으로 예술과 문학이 그것을 배태한 사회적 생활을 일차적으로 반영하는 정신적 활동의 기제라고 보지만, 동시에 문학 및 예술은 그것을 배태한 사회적 현실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개입하여,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그것을 변혁하는 데 중요한 무기이자 도구가 된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2) 게오르그 루카치의 총체성 이론


루카치는 문학이란 객관적 현실을 전체적 관련 아래 파악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얼리즘에 관한 여러 글에서도 그는 이 총체성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총체성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심은 그가 아직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기 이전에 썼던 초기 저작 ������소설의 이론������에서부터 후기 저작인 ������미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그의 미학적 사상체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주춧돌이 되고 있다.

루카치는 문학에 있어서 객관적 현실을 실제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는 것과, 직접 나타난 것을 재현하는 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작가가 실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파악하여 서술하려고 노력하는 경우에는, 즉 작가가 현실적으로 리얼리스트인 경우에는 현실의 객관적 총체성이라는 문제가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이 총체성에 완전히 도달하기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작가는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현실의 온갖 측면, 온갖 관련을 탐구하여 파악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참다운 리얼리스트의 문학적 실천에는 객관적, 사회적 관련이 중요하며, 그 관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총체성에 대한 요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얼리즘적 작가의 형성의 깊이, 그 작용의 폭과 지속성은 그가 서술하는 것이 현실에 나타나 있는 것에 관해서 얼마만큼 밝히고 있느냐에 달린 경우가 많다. 루카치는 이처럼 리얼리즘 작가의 수준이란 주로 객관적 현실의 전체적 관련을 작가가 어느 정도로 파악하여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느냐에 의존한다고 보고 있다. 

 루카치는 현대를 헤겔과 함께 산문적인 세계상황으로 규정하고 호머의 서사시에 나타나는 시적 세계상황과 그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시적 세계상황의 특징은 자연과 정신, 도덕과 법률, 개인과 공동체, 다시 말해 내면세계와 외면세계가 아직 분열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원의 세계이며, 인간의 의식은 자체 반성의 필요 없이 수동적으로 외부세계에 순응하면 되는 것이며, 개인은 세계와 자신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생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세계이다. 루카치는 바로 그 세계를  전체성이 지배하고 있던 세계라고 말한다. 호머의 서사시 이후에 전개된 세계는 그런 호머적인 희랍적인 총체성이 상실된 세계이다. 그런 전체성이 상실된 세계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의식인의 넋을 지배하는 것은 호머적인 전체적 세계상황에 대한 향수, 동경이며, 그것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다. 소설은 바로 그 향수, 동경, 노력의 표현이다. 소설은 더 정확히 말하면, 형이상학적 실향의 시대, 형이상학적 지붕이 없는 시대에 총체적인 세계와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인 것이다.



  3) 뤼시앵 골드만의 방생론적 구조주의 이론


루마니아 태생의 비평가 뤼시앵 골드만은 텍스트가 개인의 천재성의 창조물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텍스트는 특정집단(또는 계급)에 소속된 ‘통개인적trans-individual 정신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세계관’은 사회 집단에 의해 눈앞에서 변화하는 리얼리티에 대한 반응으로 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정신적 이미지를 적응시킴에 따라서 쉴 새 없이 구축되고 또 와해되는 것이다.

골드만의 이른바 발생론적 구조주의는 고전적(내지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하였으며, 루카치의 소설론에 자극받은 것이다. 그는 ������숨은 신������에서 마르크스가 상부구조라고 말한 이데올로기의 건축을 추구하고 있는데, 그 이데올로기 건축의 토대는 물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 것이다. 그는 17세기 신학의 논쟁 가운데 가장 미묘하고 비세속적인 것에까지 얼마나 계급적, 전술적 요소가 침투하고 있는가를 입증하여 보여준다.

 골드만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가 구사하고 있는 ‘세계관’이란 개념이다. 그는 사회그룹이란 것을 상정하지만,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한정된 상황 속에서 하나의 독자적 전체를 이루고 있는 이 사회 그룹이 모두 사회 계급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사회 구조의 변혁을 향해 그 그룹이 움직일 때 그 그룹은 비로소 계급으로 바뀐다. 그 계급은 이데올로기의 국면에서 현재의 인간 총체, 그 질, 그 결점, 이상, 미래의 인간, 인간관계의 이상형 등에 대한 하나의 시점 또는 전망(vision)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시점은 한 계급의 가능한 의식의 최대치이다. 한 그룹의 성원을 모아주며 다른 그룹에 대립되게 하는 한 그룹의 열망, 감정, 사고의 총체를 골드만은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골드만에 의하면

1)모든 위대한 예술, 문학작품은 세계관의 표현이며,

2)세계관은 작가나 사상가의 의식 속에서 개념적, 감성적인 최대한도의 명확성을 얻은 집단의식의 현상이고,

3)사상가, 작가는 그 집단의식을 작품 속에 표현하는 ‘예외적 개인’이다.

4)세계관은 어떤 사회 그룹과 그들의 사회적, 자연적 환경 사이의 심적 표현이므로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그 수를 분명하게 밝히기는 힘들지만, 세계관의 유형학은 인간 행위 연구에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골드만이 제시하고 있는 세계관은 플라토니즘, 신비주의, 경험주의, 합리주의, 비극적 세계관, 변증법적 사고 등이다.

한편 골드만은 ������소설사회학을 위하여������에서도 소설구조와 사회구조의 상동관계를 밝혀 나가고 있다. 즉 그의 저서의 중요한 가설 가운데 하나가 “고전적 소설구조와 자유주의 경제에 있어서의 교환구조와의 상동관계에 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소설구조에 대한 골드만의 정의이다. 골드만은 루카치와 지라르(R.Girard)의 소설 정의에서 암시를 얻어 주로 19세기의 소설구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소설은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양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로 특정 지어지며, 주인공에 있어서의 이러한 타락은 간접화(mediation)에 의해서, 즉 진정한 가치가 내재적인 수준으로 되어 명백한 현실로서는 소멸됨으로 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정의를 정리해보면, 우선 주인공이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반면 사회는 타락해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과 사회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진정한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서 타락한 사회가 제공하는 타락한 양식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주인공과 사회는 모두 타락해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과 사회 사이의 이러한 ‘대립’과 ‘연대성’의 동시적인 관계, 즉 일종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여기서 말하는 19세기 소설의 구조라는 것이다.

 골드만에 의하면 소설의 형식이란 시장을 위한 생산에서 태어난 개인주의 사회(즉 부르주아 사회)에 있어서의 일상생활을 문학적 차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즉, 소설형식과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과 재물관의 관계 사이에는 엄밀한 상동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재물과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관계는 생산이란 것이 예정된 소비에 의해서, 물건의 구체적인 품질에 의해서, 그 ‘사용가치’에 의해서 규제되는 관계이다. 그런데 이런 건강한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환가치’에 의해서 내재적인 것으로 되어버린다. 오늘날 빵이나 옷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손에 넣어야 한다. 빵이나 옷을 생산하는 사람은 그가 생산하는 물건의 사용가치보다는 자신의 수입과 관계되는 교환가치에 더 관심을 둔다. 이리하여 현대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물건의 질적인 면과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는 소멸되고,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까지도 간접화되고 타락한 관계로, 즉 교환가치의 관계로 바뀌어 가고 있다. 지금도 물론 사용가치는 존속되고 있으며, 최후의 수단으로 경제생활 전체를 규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용가치의 작용은 소설세계에서 진정한 가치의 작용이 그렇듯이 내재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소설에 있어서 주인공이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가 내재적인 것은 현대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사용가치가 내재적인 것과 대응한다는 뜻이다.


2회 4강.

4. 심리주의 비평


 사회학적 방법의 경우, 문학작품은 다른 모든 문화현상처럼 복잡하고 넓은 사회라는 조직구조의 반영이 되어준다. 그러나 작품을 사회라는 조직체로부터 떼어서 한 개인의 정신적 산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입장에 설 때 비평가는 자연히 심리학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나타난 이후 대부분의 문학비평은 심리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본격적인 비평방법으로서 인간의 심리와 문학에 대한 연계는 20세기에 들어와 프로이트(S. Freud)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텍스트 해석에 적용하는 것으로 심리주의 비평 또는 정신분석비평이라고 불린다. 현대 심리학에 대한 프로이드의 가장 큰 기여는, 인간심리에 있어 무의식적 양상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몇 가지 믿을 만한 증거들을 통하여, 인간의 대부분의 행동은 우리가 아주 제한된 지배력밖에 지니지 못하는 정신적인 힘에 의해서 유발된다고 하는 사실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부분보다도 마치 빙산처럼 물속에 잠긴 부분의 활동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속으로 잠겨 있는 정신적 부분을 ‘무의식(das Unbewußtsein, the unconscious)’이라는 말로 표현했으며, 이에 바탕 하여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역동적(dynamic), 경제적(economic), 지형학적(topographical) 관점 등 세 가지 관점에서 본다. 서로 배타적인 해석이 아니고 마음 전체의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정신을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려던 프로이트의 시도를 드러낸다.

역동적 관점은 본능적 충동이 외부 현실의 요구에 부딪힐 때 생기는 긴장으로부터 발생한 정신 내의 여러 가지 힘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드러낸다. 정신은 육체로부터 나온다.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육체 자체의 욕구이다. 이 욕구는 쾌락이나 고통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쾌락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육체가 어떤 자극에 의해 방해를 덜 받을수록 증가한다. 이 방해가 증가하면 불쾌를 느끼게 된다. 육체와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소위 프로이트의 에고(ego)는 정신의 일부로서 육체가 자기 욕구를 적절히 만족시키도록 육체의 행위를 조정한다. 특히 에고는 자기 보존에 신경을 쓴다. 말하자면 에고는 본질상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원시적 본능을 통제해야 한다. 경제적 모델에서 이것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사이의 갈등으로서 나타나고 이 갈등에서 육체는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쾌락을 늦추고 어느 정도 불쾌를 받아들여야 함을 배운다.

 세 번째 지형론적 관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여기서 공간적 비유로 파악된 심리적 장치는 에너지의 갈등을 중재하는 하위 체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학설에서 프로이트는 정신을 의식(das Bewußtsein, the conscious), 전의식(das Vorbewußtsein, the preconscious), 무의식(das Unbewußtsein, the unconscious)의 3중 구조로 파악한다. 의식은 외부 세계를 느끼고 질서 짓는 인식 체계, 전의식은 언제라도 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는 경험의 요소들, 그리고 무의식은 전의식과 의식의 체계 밖의 모든 것이다. 무의식은 억압의 순간에 깊숙이 정착된 본능을 담은 표상, 사상, 이미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역동적이다. 이들은 안정된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서로 연합되어 하나의 영상이나 사상에서 다른 것으로 옮아가는 감정의 전이를 부추기는 역동적 상호작용을 겪는다.

지형론적 체계의 두 번째 학설은 1923년에 소개되었다. 여기선 그는 정신을 세 개의 작인(作因)으로 구분한다. 육체의 필연적 욕구에서 기인하는 본능적인 충동에 해당하는 이드(ES, id), 이드에서 발전하여 충동을 조정하고 억누르는 에고(das Ich, ego), 그리고 충동에 대해 부모나 사회의 역할을 감당하며 외부적 작인이라기보다 이 영향력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초자아(das Über-Ich, superego)이다. 다음은 프로이트의 이드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본능적 충동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두 가지 기본적인 전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는 충동들이 대립한다는 것으로 성적 충동, 자기보존충동, 공격충동 등의 협동작용과 길항작용이 궁극적으로는 온갖 다채로운 삶의 현상들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가 ‘정신분석학의 전구조가 의존하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억압>이다. 이드는 자신의 소망이 외부의 요구와 양립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을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억압(의식 밖으로 내몰리게)된다. 그런데 이러한 충동이나 소망은 억압되었다가 타협을 거쳐 되돌아오면서 위장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 위장되어 드러난 것(증상, 꿈, 말실수) 등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기본적인 텍스트다. 또 이 텍스트를 통하여 무의식에 다가가는 과정이야말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문학텍스트의 해석인 비평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뒤에서 보여주듯 고전적 정신분석비평의 방법론은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방법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