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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사-중세 전․후기문학

수로보니게 여인 2010. 5. 24. 21:42

    


중세전기문학 제1기- 삼국남북국시대

  

왕조사에서는 통상적으로 통일신라로 분류된 이시기를, 국사학계서는 발해와 남쪽의 통일신라를 삼국남북국시대로 구분 짓고, 중세를 전․후기로 나누어 중세전기 제1기에 그 위치를 둔다.

 

개요

고구려, 백재, 신라로 나뉘어졌다가 신라로 통일 된 후 발해와 신라가 남북국 시대를 이어간 시기이며. 따라서 문학은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문학은 고대 자기중심주의에서 중세 보편주의 특성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 전체의 공동문어인 한문이 세계종교인 불교를 받아드리면서 문화적 보편주의를 구현하게 된 것에서 시작된다. 정치, 경제, 법률 등 사회전반에까지 기록문학의 활용이 중요한 척도가 된 한문은 구비로 전해오던 고대의 문학에서 기록으로 전해지는 중세문학 즉, 공동문어문학의 단초를 열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형성된 한문학은 한시라고 하는 격조 높은 서정시의 창작까지 그 폭을 넓혀 갔으며 주된 담당층은 성골과 진골로 구성된 육두품 계열의 문인들이었다. 19세기까지 이어지며 지배적 위치를 견고히 했던 한시는 어순이나 문법이 우리말과 다른 것이 문제가 되어 우리말 어순으로 된 서기체[誓記體]글을 짓게 되었고, 이어 한자의 음과 뜻을 따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향찰[鄕札] 만들어 내기도 한 것이다.

본래의 한문과 우리말투의 한문 두 가지 글이 있던 이러한 현상은 중세의 특징적인 문화적 이중구조라 하겠다.

이런 가운데 이때까지 문학을 담당했던 담당층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도피유학을 선택하게 되었고 대표적 인물로는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인물이 있다.



향가[鄕歌]의 작가

향가의 작가로 현재 그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들은 득오곡(得烏谷)·충담사(忠談師)·처용랑(處容郞)·희명(希明)·광덕(廣德)·월명사(月明師)·융천사(融天師)·신충(信忠)·영재(永才)·균여 등이  있다. 이들은 당대의 승려나 화랑들로서 특히 충담사·월명사·균여 등은 승려로서 향가를 매우 잘 하여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에 나타나는 향가의 작가들 중 상당수는 실존인물이 아닌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즉 《안민가》를 지은 충담사는 실존인물이 아니고 경덕왕(景德王)이 올바른 왕도정치를 행하여 백성들을 복되게 해 달라는 <충성의 말(忠談)>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고 희명은 눈 먼 자녀의 개안(開眼)을 기원하는 뜻으로, 융천사는 하늘의 괴변을 융화시킨 인물이라는 뜻으로, 영재는 향가를 잘 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가공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작가 추정이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즉 《원왕생가》의 작가는 광덕·광덕의 처(妻)·원효(元曉)·작가미상 등의 설과, 《헌화가》의 작가로 알려진 견우노옹(牽牛老翁;소를 끄는 노인)의 신분을 선승(禪僧)·농부·신(神)으로 보는 경우, 처용을 화랑·무부(巫夫)·선승·지방호족(豪族)·이슬람 상인으로 보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양주동은 향가의 작가를 동요·민요 2명 2수, 국선(國仙)·화랑 2명 2수, 승려 4명 6수, 여류 2명 2수, 기타 2명 2수로 분류하고 성분별로는 승려·화랑·노인·여성·아동 등 각 계층이 망라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자들마다 의견 차이가 있다.

 

6두품[六頭品]

신라 신분계급의 하나. 두품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으로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 6두품은 왕족인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에는 미치지 못하는 중앙의 귀족으로서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는 오를 수 있었지만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었다. 6두품은 신라의 골품제(骨品制) 사회에서는 정치적 실권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신분의 한계성을 학문을 통하여 극복하려 하였으며 정치적 출세를 위하여 왕권과 결탁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유교적 정치이념을 내세워 골품제에 반발하였고, 신라 하대에는 골품제 자체를 비판하고 개혁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체제 안에 안주(安住)하려는 개혁이라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세전기문학 제2기-고려전기(무신란 몽고란 이전)

왕권은 바뀌었으나 문학 담당층이 이어짐으로 1기와 연속시기 즉, 중세 전기에 그 위치를 둔다.


분열된 통일신라 지역과 사회를 아우르며 고려가 성립되자, 신라의 대표적인 향가는 고착화 된 형태로 남게 되거나 변화되면서 고려의 서정문학으로 맥을 이어간다. 신라를 넘겨받으려는 영웅들은 건국신화의 주인공으로 장식되기도 하고 일부는 덧칠해져 설화 속 인물로 전해지기도 한다.

반란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로는 원종, 애노, 기훤, 양길, 궁예 등이 있었는데 이 중 견훤과 궁예가 위세를 떨치며 고구려를 재흥한다고 나섰다. 방편으로 건국신화의 정당성을 내세워 고대의 영웅시대로 회귀하려 하지만, 신화 속 건국의 주인공 즉, 자신들이 하늘과 통하는 신이한 인물이라고 꾸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담당층

진골, 성골: 지배층-한시를 짓던 세력

육두품: 지배층- 불교 융성

과거제(경전, 한문): 지배층- 한문을 배워 과거를 치루고 상층 세력에 중앙에 오른 세력


**불교 문학의 대표적 인물 김부식[金富軾]

 

 

  중세 후기 제 1기-고려후기

  

**무신란과 몽고란으로 중세 전․후기의 문학을 변별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사대부가 문학을 담당하게 됨으로 관념과 현실에의 이질성이 크게 대두되던 시기로 비평의식이 성장하던 시기이다.


안으로는 무신들이 집권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몽고군이 침략해왔던 이 시기의 문학은 역사적 격변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문학에서는 본격적인 문학론과 비평의식이 이루어지고 불교 문학도 선시와 가사를 통해 다양하게 전개되던 시기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을 소재로 한 전(傳)의 다채로운 내용이 서서문학사의 다양한 전개를 보여주었고, 연이 나누이고 후렴구가 발달한 고려가요의 형태는 그 내용과 더불어 당대의 서정문학의 다면적인 세계를 담아내었다. 이와 함께 가사가 경기체가와 더불어 새로운 시가 형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적 체험이 설화에 반영되고, 본격적인 연극이 구비적 희곡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표현되던 시기이다.

문벌 귀족의 특권을 무신란으로 쟁취한 무신들은 행정 실무를  할 수 있는 지식이 없었으므로 문벌 중에 행정을 볼 수 있는 인물을 육두품 자리에 둘 수 밖에 없었다. 과거제를 통해서 중인에서 승격 지배층에 합류, 문학 담당층에 속하게 된 시기이므로 문학적 이질성이 크게 일어났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위축되기보다 전대 이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는 무신의 횡포를 피한 문인들이 문학에만 매달릴 수 있었던데 따른 현상이기도 하고, 최충헌이나 그 후계자들이 문학을 장려한데 따른 이유로 보아도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 문학사적 위치를 중세후기에 둔다.


양상

무신의 우두머리끼리 정권다툼을 벌이던 시기에 세태를 비판하고 고결한 문학을 표방하면서도, 안 그런척 벼슬의 기회를 엿보던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의 죽립칠현이라는 이름을 본 따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했다. 그 중에 임춘은 과거를 통해 벼슬을 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문학의 본질과 기능에까지 관심을 기울인 인물로 국순전이나 공방정 같은 가전을 남기며 문학적 수준을 높여놓은 성과를 이루었다.

 

또한 최초의 시화집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문학적 의의를 둔 이인로의 파한집은 본격적 비평서로 ‘문학이란 무엇이며 글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것의 표출방법으로 공교로운 표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인로는 당대의 정권을 비판하거나 한탄하지 않으면서 용사를 중요한 창작방법이라며 평가 척도롤 삼아 소식(蘇軾)의 뒤를 잇고자 한 인물이기도 하다.

신흥사대부의 대표적 인물 이규보는 신의론을 주창하며 문벌귀족이 가졌던 규범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며, 민중의 삶에 대한 관심 속에 주체적인 문학을 이루려는 데 그 뜻을 두었다. 자기대로의 확고한 의식으로 무신정권에 참여하였으며 현실과의 호응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인로의 용사론을 배격하는 이규보는 현실에서의 경험을 생동하게 그리며 소재를 다양하게 개척해 문학의 기능을 따지고 사소한 소재라도 문학론의 문제의식과 관련지어 표현함에 따라 말을 다듬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작품이 긴장감을 가진다.

그의 문학은 주체적 역사의식의 표현과 민족정신의 고취를 제시하며 농민시를 통하여 현실의 의도를 파헤치려는 의도가 동명왕편에 실려 있다.  


의의

신라시대의 인습을 고집하고 권력을 독점하여 민족의 이익은 외면한 채 개인의 안일을 추구하던 문벌귀족의 문학을 청산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신흥 사대부의 문학이 시작된 데에 무신란의 문학사적 의의를 둘 수 있다.


결론

고대 문학의 구비로 전승되어오던 건국신화 즉, 신에 대한 노래로 군사적 기능을 길러내며 문학을 담당했던 군사귀족(상층귀족)에서-자기중심주의

보편성으로의 전환을 이루며 세계종교라 불리던 불교가 유입되면서 공동문어를 사용한 기록문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문학의 자랑이 될 만한 우리말 노래인 향가와, 보편주의 속에서 폭넓은 향유 층을 이루었다. 이에 머물지 않고 우리말 표현인 향찰로의  개별성을 이루어낸 민족사에 길이 남겨 족할 시기라 하겠다. 

 

문벌귀족

성종 이후 유교적 통치 질서가 강화되면서 호족 출신으로 중앙관료가 된 세력과 신라 6두품 계열의 문인 학자들이 핵심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중서문하성과 중추원 등의 고위 관직에 등용되면서, 음서와 공음전 등을 통해 자기네 집안의 특권을 유지시켜 나갔다. 이렇게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바탕으로 한 이들을 문벌귀족이라 칭한다. 이들은 문벌귀족들과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맺거나 나아가 왕실과 혼인하여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문벌 귀족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내부적인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왕들도 문벌귀족들의 세력을 강해지는 것을 막고자 측근세력을 기용하면서 정치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문벌귀족은 정치적으로 공과가 있을 수 있지만 이전 시기부터 한문학의 수혜를 입어 한문학적 소양을 깊이 있게 갖추었기 때문에 한문학의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점이 고려후기 무신세력이나 친원파를 비롯한 권문세족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수이전殊異傳

고려 문종 때 문인 박인량(朴寅亮)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한문설화집. 지은이를 최치원(崔致遠)이나 김척명(金陟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명칭도 <고본수이전(古本殊異傳)>,<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 전해지는 10여 편은 고승의 전기나 국조신화(國祖神話) 및 귀신지괴(鬼神志怪)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해지는 것을 보면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 <아도전(阿道傳)> <탈해(脫解)> <화왕(花王)> <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 <보개(寶開)> <최치원(崔致遠)> <수삽석남(首揷石枏)> <죽통미녀(竹筒美女)> <노옹화구(老翁化狗)> <선녀홍대(仙女紅袋)> <호원(虎願)> <심화요탑(心化繞塔)> 등이 있고,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에 수록되어 있다.

 

과거제科擧制

과거제도는 유교를 국가의 지도이념 내지는 실천윤리로 삼았던 나라에서 주로 유교경전의 시험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이와 같은 과거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천자가 귀족세력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으로서 수·당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비롯된 과거제도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광종 때였다. 광종은 고려 초기 왕권을 위협하던 호족 출신의 공신세력(武俠的功臣勢力)을 배제하고, 새로이 유교적 소양을 갖춘 문신관료 중심의 문치적 관료체제(文治的官僚體制)를 갖추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958년 중국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의해서 과거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의 관료선발제도로서 정착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과거는 크게 제술과(製述科)·명경과(明經科)·잡과(雜科)로 구분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술과와 명경과는 조선의 문과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합격하면 문관이 될 수 있었기에 가장 중요시되어 흔히 양대업(兩大業)이라 하였다. 제술과는 처음에는 시(詩)·부(賦)·송(頌)·시무책(時務策)이 주요 시험과목으로서 때에 따라 취사되었으나, 1004년(목종 7) 삼장연권법(三場連卷法:初場에 합격해야 中場에, 중장에 합격해야 終場에 응시할 수 있는 시험제도)의 시행과 함께 초장에 경의(經義), 중장에 시·부, 종장에 시무책을 시험보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초·중·종장의 시험 과목은 시대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 명경과는 제술과와 달리 ≪상서 尙書≫·≪주역 周易≫·≪모시 毛詩≫·≪춘추 春秋≫·≪예기 禮記≫가 시험 과목으로서, 그 내용을 읽고 뜻이 통하는지를 시험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는 한·당유학(漢唐儒學)의 영향으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양대업 가운데서도 제술업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秋夜雨中
崔致遠
가을 바람에 이렇게 힘들여 읊고 있건만
세상 어디에도 알아 주는 이 없네.
창 밖엔 깊은 밤 비 내리는데
등불 아래 천만리 떠나간 마음.
          秋風惟苦吟
          擧世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東文選』 권19)

* 崔致遠 (857~?) : 新羅 末의 文人. 字는 孤雲, 海雲. 諡號는 文昌侯. 唐에 유학하여 賓貢科에 급제하였다. 高騈의 從事官을 지내며 <討黃巢檄文> 등 많은 名文을 지었다. 신라에 돌아와 翰林學士가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을 보고 伽倻山에 은거하였다. 저서로 『桂苑筆耕』이 남아 있다.

(주)  * 知音 :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한 벗. 『列子湯問』에 보이는 伯牙와 鍾子期의 故事에서 온 것이다.
       * 三更 : 子正을 전후한 시간.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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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의 오언절구이다. 한시에서는 흔히 제목을 먼저 읽으라고 한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교훈을 다시 확인케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을은 시인의 마음을 공연히 멀리 떠나고 싶게 하는 계절이기도 하거니와, 이 시에서도 시인은 이미 가을 강물처럼 끝가는데 없이 떠나가고 있다. 우선 이 작품에서는, 가을과 밤과 비의 만남이 포개어져 화려한 꿈과 같은 것은 처음부터 去勢되고 있다. 때문에 그가 힘들여 익혀 온 浮華한 修辭의 솜씨도 엄두낼 필요가 없게 되어 있다. 창과 등불이 어울리어 한적한 秋夜長의 분위기를 끌어냄직도 하지만, 그러나 ‘萬里心’에 이르러 모든 것은 이미 끝나고 있으며 시인 자신도 이미 먼 곳으로 떠나 있다. 이 시는 흔히 結句의 ‘燈前萬里心’에 끌리어 만리 타국에서 고국을 그린 작품이라고도 하지만, 귀국 이후에 씌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자신을 용납해 줄 세상을 만나지 못한 悔恨을 독백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고려가 일어나고 신라가 망할 것을 豫料하고 “林黃葉, 鵠嶺靑松”(鵠嶺은 開城에 있으므로 開城을 가리킴)이라 한 그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최치원은 분명 우리나라 한문학의 開山始祖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각체의 문장을 두루 시범했기 때문에 『東文選』과 같은 시문 선집에서도 각체 시문의 맨 첫머리를 최치원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특히 文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여, 檄黃巢書같은 명문으로 한시문의 원산지인 중국에서 일찍이 이름을 떨쳤다.
(민병수, 서울대 명예교수)

 

 

중세후기문학 제2기-조선전기


개요

  사림파는 이 시기에 길재(吉再)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도학에도 힘써, 정몽주(鄭夢周)에게서 길재로, 길재에게서 다시 김숙자(金叔滋)로 학통이 이어졌다고 하는 계보를 확정하고, 기반을 딛고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선두에 서서 중앙정계로 진출하고, 훈구파와 맞서기 시작했다. 방외인에 속하는 부류는 한문학을 해도 진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바로 알아차리고, 관인문학이나 사림문학과는 다른 길을 택해 공인된 규범을 거부하고 내심의 반발을 나타내는 문학을 하게 되었다. 사상적으로 중세문학의 질서에 대한 심각한 비판과 역전을 꾀하려는 조짐을 보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산문으로 표현하는 내용과 대상, 방식이 다양해짐으로써 소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연극을 포함한 연희의 양상도 前代의 전통을 이으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 사림 문학의 특징과 문학사적 의의를 이해한다.
2. 방외인 문학의 특징과 문학사적 의의를 이해한다.
3. 산문 영역의 확대현상의 문학사적 의의를 이해한다.
4. 고전소설의 본격적 출현양상과 소설의 개념을 이해한다.
5. 연희와 연극의 양상을 이해한다.


  조선왕조의 시작과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 시기 문학사의 성격을 결정짓는 주요한 사간이었다. 악장이 성립되고 경기체가가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양반사대부들은 가사와 시조를 통하여 지배이념과 현실과 자연을 조화롭게 엮은 세계를 노래했으며, 관료로 발탁된 문인들에 의해 자난 시대의 문화적 유산이 정리되었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이 문학관에도 반영되었다. 역사이해와 사물인식을 드러내는 산문과, 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문제 삼는 소설의 출현은 서사문화적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중과 민간을 통해 공연 되던 탈춤과 꼭두각시극은 그 내용이 풍부해졌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지는데 대한 의의를 세우는 정책으로, 불교를 최고의 이념으로 삼았던 귀족을 대신해서 유학을 내세우는 사대부가 담당층으로 등장한데서 실질적인 변화의 양상을 찾을 수 있겠다. 고려나 조선의 건국은 둘 다 중세사회의 재건을 꾀하자는 것이었으나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중세사회의 위기가 한층 더 심각하게 나타났고, 그에 따른 대응책으로 획기적인 조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지배세력이 지나친 횡포를 스스로 제약하는 것으로 규범을 삼으며, 훈민이라는 이름으로 백성을 교화해야 중세사회의 질서가 재건되고 유지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필연적인 추세의 정확한 이해를 근거를 둔다. 유학을 신유학, 즉 성리학으로 체계화해서 어떤 반론도 해소할 수 있는 논리적 기틀을 마련하고자했고, 이러한 양상은 사대부문학으로 표현되었다.


특징

  고려전, 후기와 조선전기, 이 세시기를 견주어 보면 왕조의 지속과는 관계없이 고려전기 후기사이에는 이질성이, 고려후기와 조선전기사이에는 동질성이 두드러진다. 고려후기에 신흥사대부가 모색하고 주장하던 문학의 양상이 조선전기에 와서 구현되고 정착되었다. 신유학이나 한문학 뿐 아니라 경기체가 시조 가사 등에서도 지속성이 인정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에 나타났던 문학은 고려 후기동안에 모색했던 바가 구체화된 것이며, 조선 전기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조선후기까지 상당한 기능, 또는 역기능을 했기에 깊은 관심을 가질만하다. 왕조교체기의 문학이 물러나서는 마음의 도리를 온전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왕조사업을 위해 능력을 발휘하자는 것이야말로, 처사 문학과 관인문학이라는 조선시대 사대부문학의 두 가지 방향으로서 조화와 갈등의 관계를 아울러 가지며 언제나 공존했다. 

    


몽유록夢遊錄

  허구적인 수법에 의하여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지만, 몽유에서의 몽유세계는 사실이 아닌 지어낸 것이며, 사실을 작자의 의도에 따라 재배열하는 데에 그치고, 사실을 통해서만 몽유담의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구운몽>과 같은 소설유형과는 구별되는 산문 영역이다. 각기 독립되어 있는 내용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사건의 순서를 바꾸어도 작품의 의미를 읽어내는 데에 큰 변화가 없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몽유록은 작품외적인 인물과 사건과 관련된 역사적 지식을 알아야 하는 온전하게 작품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산문 유형이다. 역사적 토대 위에서 구축되는 것이면서 역사적 지식의 전달에 목적을 두지 않고 허구적 형식을 빌려 전달되는 특징을 갖기 때문에 서사적 교술장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笑謔之戱소학지희 

  배우지희(俳優之戱)·창우지희(倡優之戱)라고도 한다. 시사적 사건을 우스개로 표현한 풍자극으로 배우들이 시사 풍자나 사회 비판 내용을 소학지희에서 보여주었다. 고려시대에 다른 사람을 조롱 또는 희롱한 즉흥극인 조희(調戱)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 양반이나 파계승을 풍자한 민속놀이 가면극인 산대도감극 형성에도 참여하였다. 곡예와 춤을 중심으로 한 규식지희와 달리 배우가 어떤 인물과 사건 따위를 풍자하거나 비판하며 해학과 기지로 관객을 웃기려고 하는 즉흥적인 놀이의 연극이다

 

 

   가사체(歌辭體)의 장가(長歌)를 향토적인 가락으로 노래한 조선시대의 12속악. 중종(中宗)~선조(宣祖) 연간에 발생한 듯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전한다. 《백구사(白鷗詞)》 《죽지사(竹枝詞)》 《어부사(漁父詞)》 《행군악(行軍樂:길군악)》 《황계사(黃鷄詞)》 《춘면곡(春眠曲)》 《상사별곡(相思別曲)> 《권주가(勸酒歌)》 《처사가(處士歌)》 《양양가(襄陽歌)》 《수양산가(首陽山歌)> 《매화가(梅花歌)》 등 12편으로, 이 중 《어부사》만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개작한 것이고 나머지 11편은 모두 작자 ·연대 미상이다.

 

 

 

 

 

 

국문학사 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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