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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수로보니게 여인 2010. 6. 12. 21:24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1기 조선후기(1)                        박종성 교수

 설명 불가 묘사로의 전환

개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국문학사에 역사적 전환기를 만드는 충격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조선조 사회와 경제의 기반이 붕괴되고 사상적 변화가 일어났다. 전란의 체험이 반영된 문학작품이 생산되었으며, 근대적 서사문학의 대표적 양식인 소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문학관에서도 인간의 본연의 성을 긍정하고 국문학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시각이 생겨났다. 중인 이하의 사회계층이 한문학과 국문문학의 담당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 문학사의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는 일이다. 한문문학과 국문문학과 구비 문학의 교섭이 크게 일어나서 영향을 활발하게 미치면서 문학사를 역동적으로 전개시켰다. 

 

개요

   전란을 겪으면서 이룩된 각계각층의 수많은 기록과 증언, 술회와 상상은 문학사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했다. 엄청난 시련이 닥치자 지금까지 존중하던 격식을 버리고, 보고 느끼고 통탄한 바를 생생하게 나타내는 새로운 표현을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야 했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 상하층의 간격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좁아졌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이 바로 거기서 출발했다.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관원이 남긴 실기나 일기류라도 전란의 경과나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참상을 절실하게 묘사하면서 개탄하는 마음을 나타내 감명을 준다. 워낙 새로운 경험을 했으므로 설명을 할 수 없어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시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비슷한 것이 국문본으로도 나와 국문 사용의 확대라는 양상을 보였다. 소설 역시 자아와 세계가 대결하는 삶의 이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대거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소설의 시대로 들어서는 길을 마련했다.


1.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사의 특징을 이해한다.
2. 민족 수난기의 문학적 대응 방식을 이해한다.
3. 정통 한문학의 양상을 이해한다.
4. 본격적인 소설의 시대로 진입하는 과정과 양상을 이해한다.


동인(東人)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훈구파들이 물러나고 중앙 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신진 관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당파이다. 명칭은 후배측(신진 사림세력) 입장에서 분파의 계기를 이룬 김효원(金孝元)의 집이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중심 구성원은 유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우성전(禹性傳) ·최영경(崔永慶) 등이었다. 대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처음부터 학연적 성격이 짙었다. 특히 심성(心性)을 강조하면서 훈척정치(勳戚政治)와의 투쟁과정에서 사상적 지주로 형성되어온 이황의 학문이 사상적 중심이 되었던 만큼, 구체제의 요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렬하고 훈구정치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수뢰혐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 등의 방식으로 서인을 압박하였으나, 그러한 공세적 입장으로 인하여 오히려 시류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가담함으로써 순수성이 훼손되는 부작용도 겪었다.
1582년(선조 15) 이이(李珥)가 중재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을 자처한 이후로 그들과의 사이에 굳어진 양당체제에서 명분과 실력면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1589년 자파 인물인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수세에 몰렸으나, 2년 후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鄭澈)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에 의해 축출되자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국가적 위기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인들은 서인 정철에 대한 처벌 수위를 둘러싸고 격화되어 동인세력이 분리될 지경이었다. 정철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산해, 정인홍(鄭仁弘) 중심으로 유영경, 기자헌,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홍여순, 임국로, 이이첨 등이 북인(北人)으로 분류되고 온건론을 주장하는 우성전, 유성룡, 이원익, 이덕형, 이수광, 윤승훈, 이광정, 한백겸 등이 남인(南人)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이산해의 집이 강북이었기 때문에 북인이라고 불렀고 유성룡의 집이 강남이었기 때문에 남인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조식의 문인이고 후자는 이황의 문인이라는 학연적 성격을 가졌다.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기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질성(同質性)이 사라지고 모두 동인이라는 명칭도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들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예상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지만 동인들은 서인 세력을 몰아내는 데에만 골몰하여 이를 일축하였다. 특히 1590년 일본 통신사로 갔던 동인 김성일이 국가의 운명보다는 당파의 이익에만 치중하여 일본의 침략대비에 반대하였던 일화는 유명하다.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했던 서인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북인들이 1608년 광해군이 등극하자 정인홍을 중심으로 정권을 잡았다. 이어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살해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북인들은 조선정치의 중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서인(西人)

   15세기 말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 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훈구정치(勳舊政治)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후배 관인들인 동인(東人)에 대립한 선배 세대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명칭은 분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도성 안 서쪽에 있었던 데서 기인하였다.
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이나 확고한 중심인물이 없었지만, 중립적 입장에 서서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가 동인 일부의 극단적인 주장에 그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임을 자처하게 되자 그와 성혼(成渾)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대 중반까지 적극적인 체제 개혁을 내세운 동인의 공격을 받는 수세적인 입장에 있다가, 1588년(선조 21) 모반을 기도했다는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계기로 정철(鄭澈)이 중심이 되어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아들이 없자 정철이 후궁인 공빈김씨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국왕의 후계를 세우자고 건의한 것이 선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서인들은 다시 실각하게 되었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정치의 주도권을 남인과 북인에게 넘겨 준 상태에 있었으나, 광해군대 북인이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1623년에 무력을 동원하여 인조를 추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인조반정].
   인조대에는 공신세력과 일반 사류들의 대립이 계속되어 통일된 정파적 입장을 가지고 정치를 운영하지는 못하였고, 효종 즉위 후에 공신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강력하게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육(金堉)과 김집(金集)의 대립 등 그 내부에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후 현종대 왕실 상례(喪禮)문제 등을 쟁점으로 남인과 크게 대립하였고[禮訟] 숙종대에 들어가서도 계속되는 공방전에 진퇴를 거듭하였으나 1694년의 남인 축출로 권력을 확고히 함으로써 조선 후기까지 중앙권력은 대개 이들의 후계세력이 장악하였다. 숙종 초기에 이미 그 내부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파되었고,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蕩平策) 밑에서 정치세력과 명분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므로, 한 정파로서 어느 정도 통일된 입장을 유지한 것은 숙종대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고 이이와 성혼의 권위를 적극 내세웠으므로 그들을 성균관(成均館)의 공자 사당[文廟]에 모시려는 정책이 남인과의 대립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그 학통은 김장생(金長生)·김집·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고, 17세기에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예론(禮論)의 정리를 과제로 하였다. 학문과 정치의 주제로 삼은 명(明)나라에 대한 사대나 왕실 상례 등이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것들 자체가 사회 주도이념으로서의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구성원들은 대동법(大同法)·호포제(戶布制)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농사 방법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노론(老論)

   소론(少論)과 함께 앞시기의 서인(西人)에서 갈라져 나왔다.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서인 내부에는 정치운영 방식, 훈신(勳臣)·척신(戚臣) 등 특권세력과의 제휴, 남인(南人)에 대한 처리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거기에 지도자인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 윤증(尹拯) 사이의 불화가 거듭되는 상황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파를 이루어 남구만(南九萬) 등을 중심으로 결집한 소론과 대립하였다.
   숙종대에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정쟁(政爭)의 축을 이루었으나, 남인이 중앙정국에서 몰락한 뒤 경종대와 영조대에는 소론과 대립하면서 중앙정치를 주도하였다. 특히 경종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동생인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을 후원한 것이 반대파인 소론에게 반역으로 몰려,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大臣)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형되는 사건[辛壬士禍]을 겪음으로서 소론과의 융화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에 소론을 반격하여 소론 4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제거하였고, 소론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뒤로는 조정에서 확고한 우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蕩平策)으로 붕당을 깨고 국왕의 국정운영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국왕의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가 점점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전통적인 붕당의 의미는 퇴색되어 갔다.
   18세기 말에는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높이는 데 찬동하는가의 입장 차이에 따라 시파(時派)와 벽파(僻派)가 대립하였다. 그것은 노론 자체의 분기라고 설명되는 경우가 많지만, 남인과 소론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그 이후 노론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던 데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시파와 벽파는 노론 내부의 분열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에 의한 결집이었다. 노론의 명분과 이념은 19세기 이후로도 존속하였으나, 정권을 잡아 정부를 운영하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노론의 사상은 대개 이이(李珥)를 거쳐 김장생(金長生)·송시열에 의하여 조선식으로 소화된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였고 이단을 적극적으로 배격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중원에서 명(明)나라의 멸망으로 끊어진 천하의 정통성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조선중화사상(朝鮮中華思想)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으로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또 정치이념에서는 사족(士族)의 정치주도권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정파를 군자가 모인 군자당(君子黨)으로 여기고 반대당을 소인당(小人黨)으로 규정함으로써 반대파의 숙청과 권력독점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이념은 남인과 소론 등에 의하여 비판받았고, 내부에서도 세계의 객관적인 인식과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파(北學派)가 성장함으로써 극복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론(少論)

   숙종 초기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서인과 대치하고 있었다. 1680년 남인의 이환(李煥)이 한성부 파자교동(把子橋洞)에 괘서(掛書)를 하여 서인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였고, 이듬해에는 허적의 장막어용사건(帳幕御用事件)이 발생하여 그가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이에 더하여 서인 김석주(金錫冑)와 김익훈(金益勳) 등이 허적의 서자 견(堅)과 복창군(福昌君) 정(楨) 삼형제가 역모를 꾀한다는 내용의 고발사건이 발생하여 남인이 대거 정계에서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환국이 단행되었다. 이후의 처리과정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서인 내부적으로 강경론을 주장하는 측과 온건한 해결을 주장하는 측으로 나뉘었는데 전자가 노론이고 후자가 소론이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에 달한 것은 경종 때였다. 숙종 말 경종의 왕위계승을 지지했던 소론과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지지한 노론 사이에 나타난 정쟁이 그것이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들은 연잉군을 보호하기 위해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代理聽政)까지 추진하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쳤다. 소론은 경종이 젊은데도 불구하고 노론들이 강제로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추진하였으므로 그들을 역적으로 몰아갔고, 결국 신임옥사(辛壬獄事)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이어지면서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 이른바 노론을 이끄는 4대신이 처형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충역(忠逆)의 논리로 발전되어 갔다.
이로써 경종 때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입장이 바뀌어 노론들은 소론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영조 때 노론의 4대신이 신원되는 등 소론이 정권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하였으나 영조 전시기로 볼 때는 노론 위주로 정국을 운영하여 갔다.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1기 조선 후기(2)

 

  조선조 후기 영 정조 시대는 문학사의 전환기였다. 어느 시대보다 활발하게 일어난 사회적인 변모와 가치관의 변화가 문학작품에 반영되었다. 시조의 형태가 해체되고 다양한 내용을 담으면서 사설시조가 등장했다. 가사도 변화하는 세상의 체험을 담으면서 교술적 기능 외에 서사적․ 서정적 기능을 포괄하는 쪽으로 개방되어 나갔다. 새로운 시대와 지도자를 염원하는 설화, 현실사회의 다면적 면모와 가치관의 변화를 반영하는 야담과 한문소설 등이 나타났다. 판소리가 활발하게 공연되고 이와 관련된 소설작품이 인기를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탈춤 등의 연극이 시장 경제의 성장에 힘입어 활발하게 공연되었다.  

 

개요

   문학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재검토하면서 기존의 性情論이나 載道之器論의 확정적 규범에서 벗어나 문학의 독자성과 문학담당층의 확대를 견인하는 문학론을 전개한다. 天機論이나 神氣論 등이 그것이다. 근대문학 형성의 前段階에서 이러한 변화 양상을 주목해야 한다.


1. 실학파 문인을 포함한 이 시기 문학론의 변화를 통하여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사의 특징을 이해한다.
2. 문학담당층의 확대현상을 통하여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사의 특징을 이해한다.
3. 민요와 한문학의 교섭양상을 이해한다.

 


천기(天機)

  天機라는 개념은 거론하는 배경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달라진다. 천기라는 단어의 최초 출처는 장자에서 시작되었다. 천기라는 것은 그 含意가 모든 것을 다 포괄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늘을 강조하는 천기란 '하늘의 신비’나 ‘우주의 조화’ 등으로 정의되고, 인간을 중심으로 볼 때는 ‘천부적인 자질’이나 ‘생득적으로 갖추어진 마음, 기질, 능력’ 등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분류는 서로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곧 하나의 선상에서 결합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천기론(天機論)

  천기는 하늘을 강조하는 천기란 '하늘의 신비’나 ‘우주의 조화’ 등으로 정의되고, 인간을 중심으로 볼 때는 ‘천부적인 자질’이나 ‘생득적으로 갖추어진 마음, 기질, 능력’ 등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천기론은 성정론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으로 개인적 천성을 강조하고 개인적 기질을 중시하며 인간의 본성은 천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에 서 있다. 허균, 장유, 김득신이 천기론의 단초를 마련하여 성정론의 극복논리로 삼았으며 여항문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문학담당층의 확대를 가져왔다.


성령론(性靈論)

  성령론은 시가 심성의 도리를 구현한다든지 정해진 격조에 따라야 한다든지 하는 데 대한 반론으로 시의 바탕이 되는 마음은 어느 한 가지로 정해질 수 없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성령은 마음을 일컫는 용어로 작가는 각기 자기의 성령을 따라야지 어느 한 가지 확정적 준거에 따라서 남의 개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점을 강조한다. 추사 김정희가 주장한 후, 조선후기 위항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1기-(3)

   

                                                                                                                                        박종성 교수


개요

시조와 가사는 상층 사대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가 이 시기에 와서 사대부 여성과 기녀 및 중인, 하층민 등 문학담당층의 확대를 꾀한다. 서정을 노래했던 시조와 교술을 담았던 가사가 각각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서사적인 내용과 교술적인 내용 및 서사적 내용과 서정적 내용들을 담아내는 변화 양상이 확인된다.


1. 시조와 가사의 변이 양상과 담당층의 확대 현상을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사의 특징과 관련하여 이해한다.
2. 국문표현의 영역 확대가 갖는 문학사적 의의를 이해한다.

 


가곡창과 시조창

   가곡창의 경우는 여러 악기들이 반주를 하고 시조라고 하는 노랫말을 唱하는 것을 말하며, 종장의 마지막 句를 모두 부른다. 반면에 시조창은 고급스러운 악기 반주가 없이 唱하는 사람이 시조의 노랫말을 부르는 형식을 지칭한다. 가곡창과는 달리 시조창을 부를 때에는 종장의 마지막 句가 생략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가곡창과 시조창은 시조라고 하는 노랫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구별되기 어려울 수 있으나 부르는 방식과 구연할 때의 구성이 다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십이가사

   가사체(歌辭體)의 장가(長歌)를 향토적인 가락으로 노래한 조선시대의 12속악. 중종(中宗)~선조(宣祖) 연간에 발생한 듯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전한다. 《백구사(白鷗詞)》 《죽지사(竹枝詞)》 《어부사(漁父詞)》 《행군악(行軍樂:길군악)》 《황계사(黃鷄詞)》 《춘면곡(春眠曲)》 《상사별곡(相思別曲)> 《권주가(勸酒歌)》 《처사가(處士歌)》 《양양가(襄陽歌)》 《수양산가(首陽山歌)> 《매화가(梅花歌)》 등 12편으로, 이 중 《어부사》만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개작한 것이고 나머지 11편은 모두 작자 ·연대 미상이다.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1기-(4)

 

 

개요

   야담은 동시대의 악부시와 상통하는 성격을 지녔다. 한문학이 중세보편주의를 구현하는 규범에 머무르지 않고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요구하는 민족과 민중의 발견에 동참한 성과를 산문과 시 양면에서 보여주었다. 한편, 설화를 받아들여 개작하면서 사회적인 의미가 강조된 대결구조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두 가지 소설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했다. 국문소설은 광범위한 독자의 공상적인 읽을거리로 발전하고 기존 윤리에 의한 지탄을 면하기 위해서 충신ㆍ효자ㆍ열녀의 이야기로 자처하면서 기반을 다졌지만, 傳임을 빙자하거나 야담으로서 성장한 한문소설은 애초에 있는 사실을 알린다는 것으로 존재 이유를 삼았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서사무가와 서사민요, 판소리는 기본적으로 구비서사시의 갈래에 속하면서 각기 같고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민속극은 농촌탈춤에서 떠돌이 탈춤으로, 다시 농촌탈춤으로 전문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무당굿놀이와 꼭두각시놀음과 같은 민속극 역시 탈놀이와 더불어 하층 민속공연물로서 그 성격을 지속하면서 한편으로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


1.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사에서 설화, 야담, 한문단편의 상관관계를 파악한다.
2. 소설의 성장 과정과 변모 양상을 온전하게 이해한다.
3. 서사무가, 판소리, 민속극과 같은 전통연희와 구비문학의 양상에 관하여 이해한다.



관우희[觀優戱]

   조선 순조 때의 문인 송만재(宋晩載 1788~1851)가 엮은 연희시(演戱詩). 간행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810년(순조 10)에서 1834년(헌종 9)으로 추정된다. 주요내용은 판소리 12마당을 밝혀 놓았으며, 이 외에도 광대들의 재주 부리는 모습과 생활상 등을 종합적으로 읊었다. 이 책은 판소리 12마당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판소리를 연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료이다. 판소리는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를 소리와 말로 엮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하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다양하고 많은 판소리가 있었으나 12마당으로 한정하여 정리한 것은 이 책과 일제강점기 때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있다. 다만 이 두 책은 똑같지 않고 1마당이 실제적으로 다르다. 송만재가 정리한 12마당은 장끼타령·변강쇠타령·왈자타령(曰者打令)· 배비장타령 ·심청가·흥보가·수궁가·춘향가·적벽가·강릉매화타령·가짜신선타령·옹고집타령 등이다.
이 가운데 오늘날 사설과 소리가 모두 남아있는 것은 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춘향가로서 판소리 다섯마당이라고 한다.


허두가[虛頭歌]

   광대가 판소리의 본 사설을 부르기 전에 간단히 부르는 준비창(準備唱). 초두가(初頭歌)·목푸는소리·단가(短歌)라고도 한다. 가령 판소리 《춘향가》의 한 마당을 부르려면 몇 시간이 걸리므로 미리 목을 풀기 위하여 간단한 허두가를 부르는 것이다. 대개 남도지방의 단가를 가리킨다.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1기-(5)


개요

   임진왜란을 겪은 다음 17세기에 시작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제1기가, 최제우(崔濟愚)가 동학(東學)을 창건한 1860년(철종 11)을 계기로 제2기로 바뀌었다. 제1기는 근대문학을 이룩하는 길을 스스로 모색했다면, 제2기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면서 전환을 더욱 가속화한 시기이다. 그리고 중세의 청산이 가까워 오면서 한문학 담당층은 위엄을 잃고 구비문학을 천대하는 사고방식을 계속 고집하기 어렵게 되었다. 국문문학은 근대민족문학으로 자라나기 위해서 규범화된 격식을 버리고 구비문학과 깊이 제휴할 필요가 있었다. 민중종교운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은 밑으로부터의 각성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구비문학이 민족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 강위, 황현, 이건창, 김택영, 김윤식 등의 문장가들은 이 시기 한문학의 사명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소임을 다하고자 하였다.


1. 민중종교운동의 문학사적 의의를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사적 특징과 연관시켜 이해한다.
2. 한문학, 국문문학과 견주어 구비문학의 양상을 이 시기 문학사적 특징과 연계하여 이해한다.
3. 시대 상황에 대처하는 한문학의 대응방식을 이해한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김택영·왕성순 고문선집)

   조선 말기의 문장가 김택영(金澤榮)의《여한구가문초》를 왕성순(王性淳)이 첨삭하여 펴낸 古文選集. 11권 1책. 신활자본. 고려시대 이래 문장가 9명의 문장 95편을 선별하여 실은 김택영의《여한구가문초》에 제자인 왕성순이 스승인 김택영의 문장까지 덧붙여 1921년 간행한 책이다. 저자와 1914년에 쓴 량치차오[梁啓超]의 서문이 있고 양이(楊貽), 홍범구(洪範九), 손정계(孫廷階)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내용은 권1에 김부식(金富軾)의 표(表) 1편, 기(記) 1편, 전(傳) 4편, 권2에 이제현(李齊賢)의 서(書) 2편, 서(序) 4편, 기 2편, 권3에 장유(張維)의 서(序) 2편, 기 2편, 변(辨) 2편, 논(論) 2편, 제문 2편, 권4에 이식(李植)의 차자(箚子) 1편, 서(序) 2편, 인(引) 1편, 지(志) 1편, 묘표 1편, 권5에 김창협(金昌協)의 소(疏) 1편, 서(序) 2편, 기 1편, 서(序) 3편, 제사(題辭)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6, 7에는 박지원(朴趾源)의 의(議) 1편, 서(序) 3편, 제사 1편, 기 4편, 논 2편, 설(說) 1편, 애사 1편, 묘지명 1편, 신도비명 1편, 묘갈명 2편, 권8에 홍석주(洪奭周)의 서(書) 1편, 서(序) 4편, 변 2편, 서후(書後) 2편, 유허비 1편, 묘지명 1편, 권9에 김매순(金邁淳)의 서(書) 1편, 서(序) 1편, 기 2편, 논 1편, 기타 2편, 권10에 이건창(李建昌)의 송서(送序) 3편, 기 4편, 고문(告文) 1편, 전(傳) 1편, 명(銘) 1편, 묘지명 2편, 권11에 김택영의 서(序) 3편, 기 3편, 설 1편, 문(文) 1편, 행장 1편, 묘갈명 2편, 묘지명 2편 등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조선 후기까지 전해진 한문학 문장 가운데 훌륭하다고 판단되는 작품을 골라 실어, 좋은 문장의 본보기를 제시한 것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한문학 문장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화서아언

   조선 후기의 학자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문집(文集)으로 목판본 12권 3책이다. 이항로의 수고(手稿)와 경서(經書)에 대한 견해를 기록한 <가정습록(家庭拾錄)>과 그 제자들의 어록(語錄)을 함께 모아 김평묵(金平默)과 유중교(柳重敎)가 편집하여 1874년에 간행하였다. 수록된 글의 형식은 문집형식이 아니고 차례대로 성리학에 관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 당시 사회의 어지러움 때문에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후학양성에 전념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의 깊이는 큰 줄기를 형성한다. 책머리에 있는 도체(道體)에 관한 이론은 모두 송(宋)나라 주희(朱熹)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성리학적인 독서와 실천을 통해 이치를 궁구하고 인간의 본성과 심성을 함양해야 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교육을 바탕으로 가정생활과 국가경영에 중요한 덕목을 제시하고 그 실천을 주장하고 있다. 그 당시는 중세사회의 붕괴현상과 아울러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이 더욱더 거세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와 서양학문을 성리학적인 명분론인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그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적 사실 속에서 인물들의 득실을 논한 것에서 명분론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저자의 구국운동이 위정척사운동으로 나타나는 사상적 배경과 입장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