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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이 버렸던 글

수로보니게 여인 2010. 6. 18. 21:40

 

연암(燕巖)이 버렸던 글                                                               2010. 6. 14. (월)



  글이 말과 다른 점은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만큼 할 말을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는 것일 터이다. 자기가 한 말이라도 마땅치 않았음을 깨닫고 후회할 때가 있거니와 글은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글은 신중히 써야 하고 자기 글에 책임을 져야 하며, 자기가 쓴 글을 잘 가려 뽑아서 책으로 간행해 세상에 내어놓는 것이 독자들에 대한 예의이다. 연암 박지원(朴趾源)과 같은 대문호의 문집에도 연암 자신이 버리고 싶었던 글 한 편이 실려 있다.


 〈초구기(貂裘記)〉는 젊을 때 작품일 뿐 아니라 문장 수준도 그리 높지 못하니, 생각건대 연암이 이미 하찮게 여겨서 버린 글일 것입니다. 그 시 중의 네 구(句)를〈이통제비명(李統制碑銘)〉에 따다 쓴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특별히 뽑아서 싣는 것은 아마도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게다가 말이 남인(南人)에 미친 곳마다 적신(賊臣)으로 지목하였으니, 이 근방의 독자들 중 불평을 품는 이가 많을 뿐 아니라 이 분의 만년에 툭 트여 높고 넓었던 식견조차도 이것에 가려지게 되었으니, 탄식할 만합니다.
그 나머지는 굳이 깊이 논할 것은 없습니다만 오행(五行)이 상생(相生)한 적이 없다는 주장은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잡고 웃게 합니다. 이 분은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오행의 기(氣)인 줄도 알지 못했단 말입니까. 상생하는 것은 기(氣)이고 상극(相剋)하는 것은 질(質)입니다. 그런데 연암은 질을 가지고 기를 말하면서 대뜸 “상생하는 이치가 없다.” 하였으니, 문장가가 이치를 궁구하지 않고 가벼이 글로 쓰는 것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이것이 농암(農巖)이 촌(申象村)을 비판한 까닭입니다. 계곡(谿谷)도 이러한 병통이 있습니다.
공의 문집〈잡언(雜言)〉중에도 이와 같은 글이 몇 단락 있는데 산삭(刪削)하여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貂裘記旣是少作, 文亦不甚高, 意此老已芻狗之. 觀其詩中四句摘用於李統制碑銘, 可知矣. 而今特表而存之, 恐未爲允. 且其語及南人處, 每以賊臣目之, 非但此近讀者多懷不平, 而此老晩年通達高曠之趣, 亦爲此所翳, 可歎. 其他有不必深論, 而五行未甞相生之說, 令人捧腹. 此老曾不知春夏秋冬之爲五行之氣乎 相生者氣也, 相克者質也. 今以質而論氣, 輒謂無相生之理, 文章家之不窮理而輕立說類如此. 此農巖所以譏申象村也. 谿谷亦有是病. 大集雜言中似此者亦尙有數端, 恨未並刪以就潔凈耳.]


-조긍섭(曺兢燮), 《암서집(巖棲集)》, 제8권 ,〈김창강에게 보냄[與金滄江]〉


 김두량_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_국립중앙박물관 소장_한국의 미(산수화) 인용


[해설]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이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에게 보낸 편지이다.

  연암의 문장은 당시에 문풍(文風)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정조(正祖)가 읽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소위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그래서 연암의 손자로 영의정까지 지냈던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평양감사로 있을 때 아우가 《연암집》을 간행하자고 하자 공연히 문제를 일으킬 것 없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연암의 글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파격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연암집》을 창강이 1901년에 간행하였다. 이 편지는 이 무렵에 씌어진 것이다. 〈초구기(貂裘記)〉는 효종(孝宗)이 북벌(北伐) 때 추운 북쪽 변방에서 입으라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 하사했다는 초구(貂裘), 즉 담비갖옷을 보고 연암이 지은 글이다. 이 글을 심재는 《연암집》에 넣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우선 이 글은 연암이 젊을 때 지은 작품이고 연암의 다른 작품에 비해 그 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연암의 연보에 의하면, 〈초구기〉는 연암이 28세 때 지은 것이다. 그리고 〈초구기〉에 있는 몇 구절을 〈이통제비명(李統制碑銘)〉이란 글에 따다 쓴 것으로 보아 연암 자신이 이 글을 자기 문집에 남길 글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통제비명〉은 《연암집》 2권에 실려 있는〈가의대부 행도통제사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시충렬 이공 신도비명(嘉義大夫行三道統制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謚忠烈李公神道碑銘)〉을 가리킨다. 이는 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한 이확(李廓 15901665)의 신도비명이다. 살펴보면 〈초구기〉의 “우리 선왕에게는 또한 임금이 있었으니, 대명의 천자가 우리 임금의 임금이었네.[維我先王, 亦維有君. 大明天子, 我君之君.]”라는 네 구절을 〈이통제비명〉에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따다 옮겨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한문 문장에서 한 구절도 아니고 이렇게 네 구절을 두 편의 글에 함께 쓰는 경우는 드물다. 통상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중요한 글이므로 문집에 싣지 않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초구기〉의 글귀를 신도비명에 그대로 썼으니, 〈초구기〉를 후세에 남길 글로 여기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남인(南人)에 미친 곳마다 적신(賊臣)으로 지목하였으니, 이 근방의 독자들 중 불평을 품는 이가 많다.’고 했는데, 〈초구기〉의 두 곳에서 우암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남인을 적신이라 지칭하였다. 심재는 영남 사람이므로 남인을 적신이라 한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연암은 반남박씨(潘南朴氏)로 노론의 명문세신(名門世臣) 집안 후손이지만, 그는 노론의 세상에서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연암을 남인이라고 하는 주장도 나왔던가보다. 여하튼 당대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비판정신을 기대하며 연암의 글을 읽는 지금의 독자들이 노론의 영수인 우암을 기리기 위해 쓴 〈초구기〉를 읽고 좋아할 리는 만무할 것이다.

  오행(五行)의 상생(相生)을 부정한 연암의 견해를 보고 어처구니없다고 한 것을 보면 심재도 주자학자의 과구(窠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작 심재 자신도 도학자를 자임했지만 문장가로 더 알려졌다.

  서점에 가보면 책들이 범람하여 어쩌다 한 번씩 가는 나 같은 사람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곤 한다. 하루에도 새로 진열장에 꽂히는 책들, 창고로 밀려 나는 책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가위 서책의 바다요 정보의 홍수이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어떤 지식이든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시대가 있더냐고 좋아할 만하다. 그러나 비슷비슷한 내용, 그렇고 그런 글들 속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짜증이 나고 오래지 않아 지치고 만다. 옛사람들은 자기 저술을 남길 때 스스로 엄선하여 후세에 꼭 전하고 싶은 것만 문집에 실었다. 아예 생전에는 문집을 간행하는 법이 없었고, 작자의 사후에 문집을 간행할 때에도 지인(知人)들이 교정을 보면서 문장을 고치고 내용을 산삭(刪削)하기도 했다. 후세에 부끄러울 일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글이 그만 말이 되고 말았다. 글을 함부로 써서 세상에 내어놓고, 남의 글을 자기 마음대로 세상에 공개하기도 한다. 연구자들은 작자 자신이 문집에 싣고 싶어 하지 않은 글, 문집을 간행할 때 일부러 빼고 싣지 않았던 글들까지 속속들이 뒤지고 파헤치는 것을 아주 득의(得意)한 일로 여긴다. 변명할 수도 후회할 수도 없게 하고 만다. 인문학이 사람을 연구하고 사람을 위한 진리를 찾는 학문일진대 선악을 불문하고 지식과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고 사실을 보이는 대로 밝히는 것으로 할 일을 했다고 해도 될까. 글 한 편을 쓰기가 무서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