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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 이해조

수로보니게 여인 2010. 6. 9. 17:40

 

제3장 이인직


 1. 이인직의 삶

 

 이인직은 1862년 7월 27일 경기도 음죽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성문(聖門), 호(號)는 국초(菊初)이다. 자료 부족으로 이인직 당대의 집안 형편을 정확히 고증할 순 없으나 그가 명문가 출신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명문가 출신임에도 관비유학생으로 도일, 나이 마흔 한 살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이인직의 정치적 야망이 남달랐을 것임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4대째 벼슬하지 못하고 갈수록 주변부로 밀려나는 집안의 역사는 이인직의 정치적 야망을 매개하고 증폭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이인직은 구한국의 권력체제 속으로 진입하는 대신 일본에 유착함으로써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는 길을 택했다. 이인직 또한 당대의 개화 지식인 일반과 마찬가지로 망국 직전에 도달한 한국 사회를 되살릴 수 있는 방안으로 근대화를 지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침략자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시대정신의 전달자로 구한말 한국 사회를 덮쳐온 일본을 향해 뻗어 있었다.

 1902년 관비유학생으로 도일, 동경정치학교에서 청강생 혹은 과외생으로 수학, 『도신문사(都新聞社)』 견습사원으로 신문 문화 공부, 1903년 한국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에 따라 귀국, 러일전쟁시 일어 통역, 천도교에서 낸 『만세보』에 간여, 그리고 『대한신문』의 사장으로서 이완용 내각의 친일정책을 열렬히 옹호 선전했던 그의 일련의 행적은 마침내 이완용의 밀사로서 한일합방의 성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서 그 완성된 형식을 얻는다. “이천만의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육천만의 일본인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양자택일의 길밖에 없다는 인식 속에 담긴 비장함은 개화운동의 한쪽에 내재한 비극성의 반응이기도 하다.


2. 개화지성의 한계


 『혈의 누』는 주인공 김옥련이 걷는 여행길을 따라 구축된다. 옥련의 조선-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여로를 통해 작품이 드러내고자 한 주제는 분명하다. 근대화가 한국사회가 나아갈 유일한 길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신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옥련과 구완서의 입을 통해 피력되는 자유연애, 자유결혼의 사상은 이에 비한다면 부차적인 것이다. 이때 옥련의 여로는 외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수동적인 모습을 갖는다. 이 같은 수동성은 현실에 대한 반성적 탐구와, 작가가 제시하고자 한 새로운 이념에 대한 검토의 전적인 결여를 반영한다. 당대 한국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새로운 이념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 전제되어 있기에, 옥련과 그를 따라가는 독자 역시 근대의 표상인 일본, 미국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한 점검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다. 일본, 미국이 표상하는 근대의 절대화가 이처럼 옥련의 여로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근대화에 대한 갈망은 옥련이 고아상태에서 여로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과 대응한다. 부모와 헤어져 이국인 가정에서 자라나는 옥련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전통 바깥으로 벗어난 자유인이다. 완전한 백지 상태에 놓인 자유인이기에 그녀는,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는 무관하게 절대화된 근대라는 이념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은 『무정』의 이형식과 동일하다.

 『혈의 누』는 고아상태에 놓인 주인공을 통해 근대화라는 새로운 이념의 절대성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이인직은 어떤 점에서 근대화가 절대적인 정당성을 지녔는가를 해명하지 못했는데, 이를『은세계』에서 정치적 타락의 일면을 제시하며 설명하려 한다.

 『은세계』의 중심인물은 최병도이다. 삼대독자 외로운 태생인데다 조실부모하고 홀로 자라났으니 『혈의 누』의 주인공과 동질의 인물형이다. 옥련이 일본, 미국을 거치며 근대화의 절대적 신봉자가 되었듯이, 최병도 또한 김옥균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그는 타락한 정치의 폭력에 치어 압살당하고 만다는 점에서 옥련과 큰 차이를 지닌다. 그러니까『은세계』는 타락한 정치의 폭력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근대화라는 새로운 이념의 정당성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키고자 한 작품인 것이다. 이인직은 이를 최병도의 근대화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과 아버지의 뜻을 좇아 새로운 삶을 열어나가는 옥남, 옥순의 행로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은세계』에서 대관령은 폭력적인 봉건 지배 권력과 정당한 ‘나랏법’에 따라 살기를 갈망하는 백성들을 가르는 상징물이다. 이인직은 최병두를 통해 대관령을 넘어 봉건 지배 권력을 정면으로 돌파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이상을 드러낸다. 그 이상을 견인한 것은 바로 근대화에 대한 절대의 신념이었다. 봉건 지배 권력의 타락성이 곧바로 근대화의 정당성에 대한 절대의 신념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이인직이 넘어설 수 없는 지점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정호웅, 「이인직론-개화지성의 한계」,『한국현대소설가론』(새미, 1996)

 

 


 

제4장 이해조


1. 이해조의 삶


 열재 이해조는 조선조 16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4자 복평군(용성대군의 계자)의 10대손임이 밝혀졌다. 그는 아버지 이철용(李哲鎔)과 어머니 청풍(淸風)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은진(恩津) 송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교육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한 이해조는 부친 이철용과 운영 김윤식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일찍이 한학에 뛰어났다. 그는 신교육을 통해 새로운 학문의 세계와 접하면서 소설 창작에 임하게 된 근대적 지식인 계층의 작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일찍 향리 포천을 떠난 서울로 이주한 후 대부분의 생애를 임낭굴(현재 익선동), 와룡동, 도렴동 등에서 살았다. 그의 작품들에 나타난 배경들이 대체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원임은 이와 같은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조는 19세에 과거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25, 26세에 대동기문회(大東期文會)라는 한시를 즐기던 유학자들의 모임을 주관하면서 그 동호인들의 글을 모아 편집 ․ 발간한 것이 구체적인 문학 활동의 첫 출발이다. 일본어를 독학으로 습득하여『철세계』,『화성돈전』,『앵속화제조법』등을 번역하였다. 그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신소설 창작에서부터 비롯되며 4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여 신소설 작가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겨 놓고 있다. 또한 그는 언론 ․ 출판 ․ 교육계 등에서 활약하며, 한말에는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하였다.


2. 문학관


 이해조는 신소설 작가 가운데 문학 특히 소설에 대하여 소박하나마 그 나름대로의 견해와 주장을 가진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산견되는 그의 소설관은 어떤 이론적 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신소설 작가로서 소설에 대해 개인적인 확신을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다는 점은 비평사적인 입장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허구성과 사회적 기능, 고대 국문소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정신에 관한 이해조의 인식은 그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가 된다. 즉, 이해조의 소설관은 소설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한 나머지 소설의 교훈적 가치에 대하여 깊이 인식한,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은 소설관이라 할 수 있다.


3. 작품연구


 이해조는 1912년까지 적어도 30여 종의 소설을 썼다. 그러나 1912년까지(「탄금대」이전까지) 20여 종의 작품밖에 확인되지 못하였으니 나머지는 무기명 소설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1912년까지 30여 종의 작품을 썼다는 작가의 말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이해조는 평생에 50여 종의 작품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현재 확인된 작품만도 40여 편에 달하고 있으니, 이해조는 가히 신소설 작가 중 가장 다작의 작가임이 틀림없다.

(1) 『빈상설』,『구마검』,『자유종』

 『빈상설』은 1908년 7월 5일 광학서포에서 발행한 작품이다. 임화는 『개설 조선신문학사』에서 이 작품을 <『자유종』의 정론성, 『구마검』의 계몽성과 더불어 이해조의 절충성을 대표하는 소설>이라고 평하고 있다. 절충성이란 <불철저한 종합성>이며 <각개의 경향이 충분히 개성을 발휘한 채 종합되지 않고 소박하게 편의한 대로 수습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인직과 같이 종합화의 길을 개척하지 못한 이해조의 예술적 성격 및 능력의 표준이 되는 작품이라고 평가한 임화의 편견은 후학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이해조의 작품을 온당하게 평가하는 데 저해요인이 되었다.

 『구마검』은 1908년 12월 대한서림 발행 이래 박문서관과 이문당에서 발행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찍이 『자유종』다음 가는 작품이라는 임화의 평가 이후, 주로 이 작품에 나타난 정론성과 계몽성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되어 왔다. 그래서 이 작품은 <미신타파>를 중심으로 설명되고 이해되어 왔다. 이 작품은『자유종』과 함께 2대 수작으로 이해조의 효용주의적 정론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이다. 미신타파라는 모티브는 구질서의 부패상을 거부하는 시대적 반영으로『자유종』에서도 누누이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유종』은 1910년 7월 30일 광학서포에서 발행한 이해조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작품은 전체가 40여 페이지 정도로 이해조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짧은 작품이지만, 당시의 사회상과 작가의 개화의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널리 알려진 이해조의 초기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시대적으로 <태평시대>가 아닌 <가련한 민족이 된> <수참하고 통곡할 시대>의 어느 날인 이매경의 생일날이며, 공간적으로 이매경의 집으로 되어 있다. 등장인물은 신설헌, 이매경, 홍국란, 강금운 네 여자이며 서두에서 화자가 출현한다. 네 사람의 토론자가 주고받는 열넷의 대화와 서두에서 화자의 대화를 합쳐 열다섯 개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 토론소설 형식의 정치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2) 『원앙도』

『원앙도』는 1911년 12월 30일 보급서관과 동양서원에서 발행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립과 갈등구조가 가장 뚜렷하며 개연성이 있는 작품이다. 개화기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시조에 따라 변화해 가는 두 벼슬아치의 집안과 그들의 슬기로운 자식들의 지혜로운 삶의 이야기로 작품 수법상 거의 근대적인 작품에 접근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의 주요한 등장인물인 민군수의 아들 말불이와 조감사의 딸 금쥐의 대립갈등이 결국 만난을 극복하고 화해의 경지로 나아갈 것임을 원앙을 통해 암시한다. 작품은 말불과 금쥐의 대립, 갈등을 보여주는 전반부와 백년가약과 파란만장한 서건 전개 끝에 주인공들을 해외로 출국시킴으로써 사건의 대단원을 맺는 후반부의 양대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의 치밀한 구성력에 비해 말불과 금쥐의 백년가약의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후반부에서는 음모와 우연성의 연속이 전지적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다.

 소박한 의미에서 소설이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때, 이해조의 작품 역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정치 ․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인신매매, 관리들의 부패상 등은 신소설 작품에서 대체로 나타난 제재로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서양으로부터 문명을 받아들어야 한다는 주장과, 개화기 여성들의 목소리를 신장하자는 이해조의 주제의식은 당대 사회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용남,「이해조」, 황패강 외 공편,『한국문학작가론 4』(집문당,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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