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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수로보니게 여인 2010. 6. 9. 17:49

제 5장 이광수(1)


근 ․ 현대 작가 중에서 이광수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작가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광수에 대한 평가는 3.1이 지난 후부터 긍정적, 부정적 평가로 엇갈려 많은 독자로 하여금 오랜 시간 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광수에 대한 독자들의 찬반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를 평자인 이성태는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유교에 대한 반기, 둘째는 자유연애, 셋째는 변절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수난의 시대에 한때 선구자적 삶을 살려고 한 그의 생애(1892~1950)와 그의 방대한 글(장편37편, 단편 28편, 50여 편의 문학비평, 30여 편의 논설, 그 밖의 많은 수필과 시 등으로 원고 매수 10만 매로 추정함)을 살펴봄으로써 작가의 다각적인 목소를 듣게 된다. 이광수의 이러한 다성적인 목소리는 일관된 관점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난한 시대적 변수와 그의 기구한 생애, 그리고 그의 독특한 기질과의 맞물림 속에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1. 춘원의 변모과정


이씨 가문이 무너지고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시기에 자아의식이 강한 춘원은 혁명적인 기질이 뿌리깊이 박힌 정주를 떠난다. 정주 고을을 떠나면서부터 그에게는 어디에고 안주할 집이 없다. 정신적인 방랑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낯선 공간은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고 또다시 위기의 한가운데라는 것을 안다. 춘원의 낯선 것으로의 여행은 끓임 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신기루의 주인공처럼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고아신세가 된 춘원은 몰락하는 나라의 가부장제의 인습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었다. 나아가서 조선왕조의 금기를 서슴없이 깨뜨린다. 춘원의 공격은 조선왕조시대의 유교이념에서 연원한 과거중심(분묘, 제사, 지나친 효로 인한 자녀 희생 등), 허례허식을 겨냥한다. 그는 국권을 박탈한 일본에 가서 서구문명의 세례를 받아 자아각성하고 삼종지도의 여권유린과 조혼제도의 폐습을 소설과 논설을 통하여 지탄한다. 그는 근대화의 신문명개화를 통해 주자주의적 조선을 거부하고 신교육을 통한 미래의 신기루를 역설한다. 또한「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춘원이 동년 상해로 망명하여 임정기관지『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던 시절에 쓴 논설은 급진적 반일투쟁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반일항쟁의 선도자로 치열하였던 춘원은 21년 2월 상해에서 동경시절 그의 애인이었던 허영숙과의 귀국 후 민족개조론이라는 점진적인 개량주의의 성격을 띤 논설을 발표한 후 사태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급진적인 혁명론자가 점진론적인 개조주의자로 변모한다. 춘원은 한 민족의 역사는 그 민족의 변천의 기록이라고 하고, 고도의 문명을 가진 민족의 목적의 변천은 의식적 개조의 과정이라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춘원은 한국 유일의 생로는 민족성을 개조하는 것이며 민족성 개조는 개인성격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격개조는 덕(德), 체(體), 지(知), 삼육(三育)의 교육적 사업에 의거하되 세계 각국에서 쓰는 문화운동의 방법에다가 조선의 사정에 응할 만한 독특하고 근본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을 첨가한 것이다. 민족개조의 근본사상은 무실(務實)과 역행(力行)이다. 무실과 역행사상의 거울에 비친 민족성의 결함은 하위, 공론, 나태, 불신, 불충, 비협력, 빈궁 등이다. 이러한 열악한 성격은 특히 근대 조선왕조의 지배층에 속하는 주자학파의 고식적인 결과임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고조선이나 삼국시대의 양질의 민족성을 부활하고 발전시키는 교육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춘원의 『흙』을 비롯한 많은 역사소설(『이순신』,『단종애사』,『세종대왕』)등은 조선시대 민족성의 타락을,『사랑의 동명왕』,『원효대사』,『마의태자』등은 고조선과 삼국시대의 활달한 기상과 진취적인 민족성을 구현한 것이다)등은 민족개조론을 뼈대로 한 것이다.

우리는 일제 말엽 내선일체의 식민정책으로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애국지사들이 해방 후 훼절자로 낙인찍혀 민족의 배반자로 반민특위의 재판을 받은 사실도 있다. 여기에 대표적인 인사로 춘원은 손꼽힌다. 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을 한 춘원은 일제 말엽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병을 권유하고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여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2. 위기에 선 경계선의 작가


고향과 조국을 상실한 떠돌이, 춘원 그는 언제나 과도기 조선의 경계선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였다. 예측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확실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그는 교차되는 시대의 문턱에서 서성거렸다. 그는 고향을 탈출하고 국외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일제와 투쟁하였고 봉건적인 주자주의를 신봉하는 후예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을 끝내 부정하지 못한 채 타협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춘원의 비극적인 한계다.



<참고문헌>

윤홍로,「이광수」, 황패강 외 공편, 『한국문학작가론 4』(집문당, 2000)

 


 

제6장 이광수(2)


 한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광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김동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동인의 『춘원연구』에 대한 서문을 쓴 전영택은 “창작에서뿐만 아니라 평론에도 누구에게나 뒤떨어지지 않는 동인의 역작인 『춘원연구』가 출간되는 것은 참으로 경하할 일이다”고 감동 섞인 서문을 썼다. 또한 백철도 “동인선생은 우리 신문학사상에 있어서 천재가 소설 방면에서만 빛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재능은 동시에 직예(直銳)한 감상과 대담한 판단으로서 평론분야에서도 보증(保證)되어 있다”고 남다른 애정이 담긴 서문을 썼다. 물론 이들의 서문은 객관적 평가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당대의 작가들이 평가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는『춘원연구』의 구체적인 목차와 그 내용 검토를 통해 작가 연구의 한 본보기를 파악하고자 한다.


 1. 서언(緖言) :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통틀어 조선 시대에 평민 문학이라 할 『춘향전』,『흥부전』등이 남았다고 기술함. 이후 “황량한 한국의 벌판에 문학이라는 씨를 뿌린” 이인직은『귀의 성』,『치악산』,『혈의 누』등을 남겼고 이후 이광수가 태어났다고 기술함.


 2. 춘원 이광수 : 춘원의 전기적 사실들을 요약정리 함. 1) 출생 및 출생지 -1892년 3월 평북 정주읍 출생 2) 가세의 몰락으로 8,9세 때 나무하고 소를 밭에 끌고 다님 3) 조실부모 고아의 성장기, 그리고 오산중학 교사, 육당 최남선이 간행한 잡지 『청춘』에「어린 벗에게」,「소년의 비애」(당시 24세)를 발표함


3. 「어린 벗에게」와「소년의 비애」기타

  1)「어린 벗에게」

   - 이후 「젊은 꿈」으로 개명됨

   - 서양 문학 영향을 받은 최초의 소설이라는 평가   

   - <나>라는 청년이 사랑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그대>라는 미소년에게 보낸 편지 형식

  2)「소년의 비애」

   - 「소년의 비애」(1917.1.1 조(朝)) -사촌동생에 대한 사랑을 테마

   - 「실향(失鄕)」(1917. 1. 11 야(夜)) - 남자끼리 동성애 테마

   - 동경 유학생 감독부(監督府) 기숙사에서 썼다는 점에서 춘원의 심경을 짐작


4.『무정』과 『개척자』

   - 창작배경-동경 유학생 감독부 기숙사에서 집필, 창작욕과 학비를 보탤 수 있는 고료 때문

   - 소설을 설교 기관으로 삼았다고 평가

   - 줏대 없이 흔들리는(돈과 신학문을 가진 선형과 순정과 자기희생이 큰 사랑을 가진 영 채 사이에서) 주인공 이형식을 춘원과 동

      일시함 - 아직 신도덕보다는 구도덕에 가치를 둔 작품으로 썼기에 춘원 이광수 의식의 모순으로 지적


5. 물어(物語)와 사어(史語)의 소설


6. 허생전(許生傳)


7. 설춘향전(說春香傳)


8.『재생』

   - 상반부와 하반부를 나누어 집필 - 상반부 집필 후 폐 수술

   - 통속 소설의 비방은 면하지 못하지만, 기교는 만점으로 평가(전체적으로는 실패작)

 

9. 『마의태자』

   -『마의태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고 혹평함


10. 『무정』에서 『마의태자』까지


11.『단종애사』

   - 춘원이 사석에서『단종애사』만은 욕하지 말라고 함

   - 사화(史話)의 기록자(記錄者)라는 서기역(書記役)에서 사실의 재생이라는 소설역(小說 役)으로 약상(躍上)할 노력을 포기(抛棄)   한 데 이『단종애사』의 치명상이 있다. -역사적 사실을 소설화하지 못한 채 단순한 역사 서술에 멈추었다는 비판을 가함. 


12.『흙』

   - 『무정』,『재생』,『흙』. 장편 3부작은 주인공의 연령, 직업, 교양, 환경의 유사점이        많다. -> 이러한 점을 김동인은 춘원은 자신이 쓰는 소설에 대해 얼만큼 관심을 가        지고 있는가라고 혹평함.


13. 단종전후 역사와 문헌


14. 춘원의 『단종애사』



<참고문헌>

김동인, 『춘원연구』(신구문화사, 1956)

박종석, 『작가 연구 방법론』(역락, 2002)

  


   

제8강. 이광수와 한국 근대소설(1)


이광수(李光洙, 1892~1950.10.25)는 호는 춘원(春園)으로,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이다. 소작농 가정에 태어나 1902년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후 동학(東學)에 들어가 서기(書記)가 되었으나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경하였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추천으로 도일, 메이지[明治]학원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10년 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재차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무정(無情)』을『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여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귀국하여 허영숙(許英肅)과 결혼,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마의태자(麻衣太子)』,『단종애사(端宗哀史)』, 『흙』등 많은 작품을 썼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 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 8·15 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밖의 작품에 「윤광호(尹光浩)」 등의 단편과 『이차돈(異次頓)의 사(死)』, 『사랑』,『원효대사』,『유정』등 장편,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시편들이 있다.

「소년의 비애」는 1917년『청춘(靑春)』지 8호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문호(文浩)는 여러 종매(從妹)들 가운데서도 사랑스럽고 얌전한 난수(蘭秀)를 가장 좋아한다. 16세가 되어 난수는 어느 부잣집 아들과 약혼했다. 신랑 되는 사람이 《논어(論語)》의 한 줄을 사흘에도 못 외는 모자라는 사람이란 말을 듣고 문호는 슬퍼한다. 국한문(國漢文) 혼용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구성이나 표현이 아직도 미숙하고 그 주제도 선명하지 못하지만 신소설이 가진 줄거리 위주의 소설을 부정하고 권선징악적인 요소를 극복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며,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한 면에서 근대소설의 길을 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무정(無情)』은 1917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된 한국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 경성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이형식은 미국에 유학하려는 김 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개인 지도한다. 그러던 중 형식은 선형에게 차츰 연정을 품게 된다. 그 무렵, 형식의 어린 시절 동무이자 옛 은사 박 진사의 딸인 영채가 하숙집에 찾아온다. 영채는 애국지사로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 있었다. 비록 몸은 기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말을 굳게 믿고 형식을 사모하며 절개를 지켜왔다. 형식은 선형과 영채 사이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 때 영채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경성 학교 교주의 아들 김현수는 배 학감으로 하여금 그녀를 청량사로 유인하게 하여 겁탈한다. 형식이 영채를 구하려 청량사로 가지만 이미 때가 늦은 다음 이었다. 다음날 형식은 영채가 있는 기생집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영채는 형식에게 유서를 남기고 평양으로 떠난 뒤였다. 영채는 평양행 기차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동경 유학생인 신여성 김병욱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는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귀향하는 길이었는데, 영채의 신세에 대하여 듣고는 영채를 깨우치기 시작한다. 한편, 형식은 영채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면서 그녀를 찾아 평양으로 갔지만, 영채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에 오니 김현수는 거짓 소문을 내어 형식을 경성 학교에서 쫓아낸다. 그러나 김 장로는 난관에 빠진 형식을 자기의 딸 선형과 결혼시켜 둘이 함께 유학을 갈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런데 신혼여행 겸 유학길인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형식과 선형은 영채와 병욱을 만나게 된다. 영채는 병욱의 도움으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고, 이제 일본으로 음악과 무용을 공부하러 가는 길이었다. 기차는 삼랑진 수해 현장에 이르러 출발이 지연된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수재민 의연금 모금을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고, 민중 계몽과 민족의 미래를 담당할 주체임을 역설한다. 세월은 흘러 형식과 선형은 금년 9월에 시카고 대학을 마치면 전후의 구라파를 돌아서, 영채는 동경 우에노(上野) 음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2월에 각각 고국으로 돌아와 모든 문명사상의 보급에 힘쓸 예정이다. 자아의 각성을 바탕으로 한 남녀 간의 애정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민족에 대한 각성으로까지 확대한 『무정』은 신소설에 비해 남녀 간의 애정문제를 구체화하였고, 섬세한 심리묘사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가부장적 윤리에 매인 영채와 신여성인 선형의 사이를 오가는 형식의 의식은 전통과 근대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시대질서를 따른 도식적 구도에 의해 진전된다는 점에서 계몽적 관념에 머물러버린 한계가 있다. 결국『무정』은 낡은 체제를 해체하고 새 질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과도기적 인간상으로서의 이형식과 예속적 존재에서 독립적 존재로 해방되는 박영채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신소설을 계승 발전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정 속에 나타난 형식의 사랑 분류

  형식은 선형에 대하여서나 영채에 대하여서여서는 아직 참된 사랑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대개 형식의 사랑은 아직도 외모의 사랑이었다. 형식은 선형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선형의 성격은 한 땀도 몰랐다.
선형이가 냉정한 이지적 인물인지 또는 열렬한 정적 인물인지, 그의 성벽이 어떠하며 기호(嗜好)가 어떠한지, 그의 장처가 무엇이며 단처가 무엇인지, 또는 그와 자기의 어떤 점에서 서로 일치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 모순되는지, 따라서 그의 성격과 재능ㄹ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발전될는지 모르고 그저 맹목적으로 사랑한 것이다.
  그의 사랑은 아직 진화를 지나지 못한 원시적 사랑이었다. 마치 어린애끼리 서로 정이 들어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요, 또는 아직 문명하지 못한 민족들이 다만 고운 얼굴만 보고 곧 사랑이 생기는 것과 같은 사랑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다름이 있다 하면 문명하지 못한 민족의 사랑은 곧 육욕을 의미하되, 형식의 사랑에는 정신적 분자가 많았을 뿐이다. 그러니 형식은 다만 정신적 사랑이라는 이름만 알고 그 내용은 알지 못하였다. 진정한 사랑은 피치에 정신적으로 이해하는데서 나오는 줄을 몰랐었다.
  형식의 사랑은 실로 낡은 시대, 자각 없는 시대에서 새 시대, 자각 있는 시대로 옮아가려는 과도기의 청년(조선청년)이 흔히 가지는 사랑이다. 자기의 사랑이 이러한 사랑인줄 깨닫는다 하면 형식의 전도에는 대변동이 일어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는 형식에게는 지나간 한 달 동안에 행하여온 일이 현미경으로 보는 것같이 분명하게 떠나온다.

우선


  그전에는 한 미인으로 우선이가 영채를 사랑하였지만은, 영채가 형식을 위하여 지금토록 정절을 지켜오다가 청량리사건으로 인하여 죽을 결심을 한 것을 보고는 영채를 색과 재와 덕이 겸비한 이상적 여자로 사랑하게 되었다.
만일 형식을 위한 우정이 아니었던들 어떤 정도까지나 열광하였을지도 모를 것이다.
자기가 미치게 사랑한 계월향이가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키는 박영챈 줄을 알 때에 우선은 미상불 창자를 끊는 듯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우정을 중히 여기고 협기 있기로 자임하는 우선은 힘껏 자기의 정을 누르고 형식과 영채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주기로 하였다.
  우선의 일부다처주의나 형식의 일부일처주의가 반면은 각각 조선 도덕과 서양 예수교 도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반면은 확실히 자기네의 경우에서 나온 것이다.
외모의 사랑은 얕다. 그러므로 얼른 식는다. 정신적 사랑은 깊다. 그러므로 오래간다.
그러나 외모만 사랑하는 사랑은 동물의 사랑이요, 정신만 사랑하는 사랑은 귀산의 사랑이다. 정신과 육체가 합한 사랑이라야 마치 우주와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고, 봄날과 같이 조화가 무궁한 사랑이 된다.
사람들이 입으로 말은 아니 하지마는 속으로 밤낮 구하는 것은 이러한 사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마치 금과 같고 옥과 같아서 천에 한 사람, 십 년, 백년에 한사람도 있을 듯 말듯 하다.
그래서 여자는 춘향을 부러워 하고 남자는 이도령을 부러워한다. 자기네가 실지로 그러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매, 소설이나 연극이나 시에서 그것을 보고 좋아서 웃고 울고 한다.
  조선서는 천지개벽 이래로 오직 춘향, 이도령의 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저마다 춘향이 되려하고 이도령이 되려 하건마는, 다 그 곁에도 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의 흉악한 혼인 제도는 수백년래 사람의 가슴속에 하늘에서 받아가지고 온 사랑의 씨를 다 말려 죽이고 말았다. 우선도 그 희생자의 하나이다.

차창에는 비가 뿌려서 눈물 같은 물방울이 떼구루루 굴러 내리다가는 다른 물방울과 합하여 흘러내린다.

  “그러나 저는 제가 살아있는 줄을 알게 하는 것이 도리어 선생님께 부질없는 근심을 끼칠 줄로 알았어요.

만일 제가 선생님의 몸에 누가 되어서 명예를 상하게 한다든지 하면 도리어(주저하다가) 선생님을 위하는 도리가 아니겠고…

그래서 억지로 참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고 또 영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형식이 영채의 하는 말을 듣다가 눈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디까지든지 자기를 위하여 주는 영채의 심정이 더욱 감사하게 생각된다.

죽으려 한 것도 자기를 위하여, 살아있는 줄을 알리지 아니하는 것도 자기를 위하여 한 것임을 생각하매

자기의 영채에게 대한 태도가 너무 무정함이 후회된다.
마주앉은 눈물 흘리는 영채를 보고, 또 저편 차실에 앉은 선형을 생각하매 형식의 마음은 자못 산란하다.

세 사람 사이에는 한참 말이 없고 기차는 어느 철교를 건너가느라고 요란한 소리를 낸다.

창에 뿌리는 빗발과 흘러가는 물소리는 큰 비가 아직 계속하는 줄을 알게 한다. 홍수나 아니 나려는지.



  형식은 생각한다—나는 선형을 어리고 지각없는 어린애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 보니 선형이나 자기나 다 같은 어린애다 조상 적부터 전하여 오는 사상의 계몽은 다 잃어버리고 혼돈한 외국 사상 속에서 아직 자기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택할 줄 몰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오라비와 누이— 생활의 표준도 서지 못하고 민족의 이상도 서지 못한 세상에 인도하는 자도 없이 내어 던짐이 된 오라비와 누이—이것이 자기와 선형의 모습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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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러 간다.

너나 내나 다 어린애이므로 멀리멀리 문명한 나라로 배우러 간다.

형식은 저편 차에 있는 영채와 병욱을 생각한다.
‘불쌍한 처녀들



“저는 수확을 배울랍니다.”
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말하였다. 학교에서 수확을 잘한다고 선생에게 칭찬받던 생각이 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수확이 좋은 것은 줄은 알았으나 수확과 인생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모른다.
“그 담에는 자네 차례일세.”
“나는 붓이나 들지.”
한 참 말이 없었다. 제가끔 제 장래를 그려 본다. 그리고 그 장래의 귀착점은 다 같았다. 우선이가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형식이가,
“왜, 오늘은 그렇게 점잖아졌나
하고 웃는다. 우선이가 고개를 들더니,
“언젠가 자네가 날더러 인생은 장난이 아니라고, 나는 인생을 희롱으로 본다고 그랬지. 진지하게 생각지를 않는다고
“글쎄, 그런 일이 있었던가.”
“과연 그게 옳은 말일세.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장난으로 보아 왔네. 내가 술을 많이 먹는 것이라든지… 또 되는 대로 노는 것이 확실히 인생을 장난으로 여기던 증거지. 나는 도리어 자네가 너무 진지한 것을 속이 좁다고 비웃어 왔지만은 요컨대,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여….”
여기까지 와서는 형식이가 우선의 말이 오늘은 농담이 아닌 것을 깨닫고 정색하고 우선을 본다. 세 처녀도 정색하고 듣는다. 과연 우선의 얼굴에는 무슨 결심의 빛이 보인다.
우선은 말을 이어,
“오늘 와서 깨달았네. 오늘 정거장에서 음악회를 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네. 나는 차타고 지나오면서 산기슭에 선 사람들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나기는 났지만은 그 꾀죄하고 섰는 양이 우스워서 웃기부터 하였네. 나는 어떻게 하면 저들을 건지나 하는 생각도 아니 하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도 아니 흘렸네. 그리고 차를 내리면 얼른 구경을 가리라, 가서 시나 한 수 지으리라, 하고 울기는커녕 웃으면서 내려가지고, 그 말을 들을 때에는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네. 더구나 젊은 여자가….”
하고 감격한 듯이 말을 맺지 못한다. 듣던 사람들도 묵묵하다. 우선은 말을 이어
“나는 오늘 이때, 이 땅 사람이 되었네. 힘껏 붓대를 둘러서 조금이라도 사회에 공헌함이 있으려 하네. 이제 한 시간이 못하면 자네와 작별을 하면 아마 사오 년 되어야 만나게 되겠네그려. 멀리 간 뒤에라도 내가 이전 신우선이가 아닌 줄로 알고 있게. 나는 자네와 떠나기 전에 이 말을 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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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선은 그로부터 일절 화류계에 발을 끊고 예의전심, 일변 수양을 힘쓰며 일변 저술에 노력하여 문명(文名)이 전토에 떨쳤으며 

 

 

제9강. 이광수와 한국 근대소설(2) - 역사소설


이광수는 여러 편의 역사소설을 장편 연재하기도 했다.

마의태자(麻衣太子)』는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이광수가 쓴 최초의 역사소설이자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장편 역사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마의태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로, 국운이 쇠한 신라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던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 옷, 즉 마의(麻衣)를 입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다가 일생을 마쳤다는 사실(史實)이 전해 온다.

그러나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의 주인공은 제목과는 달리 궁예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궁예의 출생과 입신출세의 과정이, 또 후반부는 왕건의 후삼국 통일 과정이 주요한 줄거리를 이룬다. 마의태자는 소설의 말미에서 신라의 초빙을 받은 왕건이 데리고 온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와의 관계에서 특히 드러나 있을 뿐이다.

그를 연민하는 낙랑공주에게 마의태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주, 후생이라도 망국하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지 말 것이, 천하에 욕심을 둔 왕의 딸로도 태어나지 말을 것이 …부디 잊지 말지어다." 그의 비극적인 삶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소설에서 궁예는 담대하고, 용력이 출중하며, 진실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신라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궁중의 음모로 인해 버려지고 다시 자신의 힘으로 자수성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에 비하면 궁예의 동문으로 그려져 있는 견훤이나, 궁예를 배반하고 왕권을 찬탈한 왕건조차도 부정적인 인물로 표현되어 있다.

이광수에게 역사소설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그려내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념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광수의 역사소설은 그의 사상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과 밀접하게 대응된다. 『단종애사』, 『이순신』의 경우는 민족주의 및 준비론의 이념과 대응되고, 『이차돈의 사)』, 『세조대왕』은 불교적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으며, 『원효대사』는 친일(親日)로 기운 이광수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의 첫번째 장편 역사소설인 『마의태자』는 비교적 예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강조되는 것은 흥미로운 후삼국시대의 역사적 상황 자체이며, 군담소설(軍談小說)적인 무용담, 궁예의 입신출세담 등이기 때문이다.

단종애사(端宗哀史)』는 1928년 11월부터 1929년 12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소설로,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 그의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쫓기어 강원 영월에서 죽은 사실(史實)을 충실하게 서술한 작품이다.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던 당시,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의 직시와 충군(忠君)사상을 고양하며 실재인물을 문학적으로 재현시키려 한 것이다. 단종의 탄생과 성삼문 ·신숙주에 대한 고명, 수양대군과 권람의 밀의(密議)의 고명편(顧命篇),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죽여 등극의 기반을 마련하는 실국편(失國篇), 정인지 등이 단종의 선위를 전하여 세조가 등극하고 사육신(死六臣)이 죽음으로 충의를 바치는 충의편, 노산군(魯山君)이 된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는 혈루편(血淚篇)의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종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세조의 입장에서 본 김동인(金東仁)의『대수양(大首陽)』과 대조를 이룬다. 이광수도 이 작품에서 세조를 너무 악하게만 표현하였다 하여 후에『세조대왕』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김동인은 수양대군을 정치이념이 확고한 역량 있는 통치자로 묘사한 데 반하여 이광수는 어린 왕 단종을 정통왕권으로 간주하고 수양대군의 왕권 찬탈을 비판적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대수양』의 중요한 대목을 보면, 수양의 아우 안평대군을 에워싼 김종서(金宗瑞)의 세력이 수양을 거부하고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수양이 알고 그 세력을 모두 제거한다. 나이 어린 단종은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수양은 대권을 쥐게 되고 문화 창조와 그 창달에 진력한다는 것이다. 김동인은 수양배격론을 사료로 삼았다고 하며, 그는 이 그릇된 사료를 바로잡아 대담한 허구적 작품을 통하여 개혁적인 사상과 일제강점기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고취하려고 했던 것 같다. 김동인은 이광수의 보수적 정통론적 사관(史觀)을 비판적으로 보았고, 그러한 견지에서 이광수의『단종애사』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문학적 시도로『대수양』이 쓰여졌다고 생각된다. 

『원효대사』는 1942년 3월부터 10월까지『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이것은 작가가 가장 원숙했던 시기에 겪어야 했던 민족적 질곡과 친일 등의 갈등 ·시련을 안고 쓴 작품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를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원효가 세속적인 체험을 승화시켜 수도승의 고행을 하면서 구국(救國)까지 한다는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원효는 도둑과 거지 떼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여러 가지 수난을 겪지만, 마침내 그들을 모두 신라군에 편입시켜 황산벌싸움에 나가서 큰 공을 세우게 한다. 또 원효는 자신에 대한 요석공주와 아사가의 사랑을 불심(佛心)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고행에서 얻은 득도(得道)의 결과이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해박한 지식, 심오한 불교관과 신앙을 엿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멸사봉공으로 일본 제국에 협력해야 한다는 이광수의 친일 논리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제10강. 이광수와 한국 근대소설 (3) - 그 외 장편소설



『개척자(開拓者)』는 1917년 11월 10일부터『매일신보』에 연재를 시작해 1918년 76회 분으로 완료된 이광수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계몽성을 띤 일종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소설로서 봉건사상과 자유연애관이 대립하던 근대화시기를 배경으로, 봉건적 인습의 타파와 신사상(新思想)의 고취를 주제로 다루었다.

과학입국(科學立國)을 지향하는 동경 고등공업학교 출신 젊은 과학도 김성재와 자유연애에 의한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여동생 김성순, 자연을 사랑하는 화가 민은식 등, 당시 사회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가부장적인 봉건사회의 폐습을 타파해가는 모습을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다. 화학자 김성재는 7년 동안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가산을 담보로 잡히고 얻은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 함사과(咸司果)에게 가산을 모두 차압당한다. 이에 성재는 대대로 교분이 있는 함사과와 그의 법률대리인 이변호사에게 눈물로 호소하지만 외면당하고 인격적인 모욕까지 당한다. 끝내 저당잡힌 재산은 다른 이에게 팔리고 가정은 파산지경에 이른다. 이로 인해 성재의 아버지 김참서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내는 실의에 빠진 남편을 버리고 친정으로 가버린다.

오빠를 하늘처럼 존경하는 여동생 성순은 오빠의 성공을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한다. 그런데 파산해 노동자로 전락한 성재는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여동생 성순을 부자인 변이라는 청년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성순은 집안의 일방적인 요구로 약혼한 변이라는 청년을 거부한다. 성순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화가 민은식을 사랑하게 되어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봉건적인 사회인습은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이다. 성순은 오빠가 변씨에게 자신의 결혼을 허락하자, 황산을 마시고 민은식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눈을 감는다.

이 소설은 이광수의 문학활동기를 4단계로 나눠볼 때 인도주의적 계몽사상기인 제1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근대적 형태의 계몽소설인『무정』,『선도자』등과 함께 개성에 눈을 뜬 주인공들이 개화와 계몽을 외치며 유교적 전통과 인습에 저항하는 내용을 주로 담고, 대중적인 성향과 더불어 계몽주의적·이상주의적 경향의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소설은 개화기 소설의 형태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일상어를 사용한 산문문장과 소설구조의 확립, 장편소설의 가능성 등을 보여 준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1925년 이경손(李慶孫)에 의해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흙』은 1932년 4월에서 1933년 9월까지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되었다. 작자의 계몽사상이 가장 짙게 반영된 작품이다.

보성전문 법과에 다니는 허숭(許崇)은 여름방학 때 고향 살여울에 돌아가 야학을 열고 아낙네들을 가르치는데 유순이라는 처녀에게 마음이 끌린다. 졸업 후 변호사가 된 허숭은 장안의 갑부인 윤참판의 무남독녀 정선과 결혼하지만 유순을 못 잊는다. 그 무렵 살여울에서는 유순이 농업기수에게 뺨을 맞고 한갑이라는 청년이 그 농업기수를 때려 뉜 사건이 일어났다. 허숭은 허영과 사치만 알고 행실마저 단정치 못한 정선이와 헤어져 한갑이를 변호하고 농촌계몽에 헌신하고자 귀향을 결심한다.

그가 타고 가는 기차에 투신자살을 기도한 정선은 다리가 절단된 뒤 과거를 뉘우치고 허숭과 함께 살여울로 내려간다. 그들은 유치원을 열고 농민 구제사업에 전념하는데 허숭이 고리대금업자 정근의 모함으로 투옥되나 그가 나올 때까지 정선은 살여울을 지킨다.


『유정』은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 작자의 정신주의 애정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이다. 바이칼 호반에서 최석(崔晳)은 ‘믿는 벗 N형’에게 자기와 남정임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고백적 수기를 쓴다. 정임은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한 친구의 딸로서 그 친구의 유언에 따라 석이 서울에 데려다 기른 것이었다. 석의 부인은 친딸 순임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정임을 질투하게 되고 이는 정임에 대한 석의 동정심을 자아내 끝내 가정불화가 생긴다. 정임은 석이 교장으로 있는 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간다. 정임은 도쿄에서 폐병으로 입원하게 되고, 찾아간 석에게 한 번만 안아 달라고 호소한다. 한편 석은 질투에 눈이 먼 부인의 오해와 학생들의 조소에 못 이겨 가정과 사회를 버리고 시베리아로 방랑의 길을 떠난다. 정임과 순임은 석을 찾아 시베리아로 가지만 그땐 이미 석이 죽은 뒤였다. 정임은 그 곳에 혼자 남는다. 사제지간이고 부녀지간이며, 이성지간(異性之間)이기도 한 석과 정임의 미묘한 애정관계를 종교적인 세계로 승화시킨 작자의 애정윤리를 엿볼 수 있다.


 

요약

이광수는 개화기의 식민지 시대의 계몽사상가, 민족주의자 그리고 문학가로 활동했다. 이광수의 사상과 인식에 영향을 미친 원형적 체험으로 고아로서의 체험, 엘리트로서의 체험, 약소민족으로서의 체험, 그리고 작가로서의 체험을 들 수 있다. 이광수의 원형적 체험과 사상의 관련양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아로서의 체험은 정신적․ 지적 조상이나 전통이 없다는 생각으로 확대 된다.

둘째, 엘리트로서의 체험은 자신의 행동을 이타적․ 시혜적(施惠的)․ 자기희생적인 것으로 과신․ 미화하는 나르시시즘으로 발전하

        게 된다.

셋째, 약소․ 망국으로의 체험은 민족주의자에서 친일주의자로의 변모양상과 관련된다.

넷째, 작가로서의 체험은 유․ 소년기의 한국과 동․서양문학의 체험이 그의 계몽사상에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계몽사상가로서의 이광수는 개화기 한국인의 폐습과 유교 윤리를 비판하고 실천윤리로서의 자유․ 자율․ 자동이라는 표어를 제시했다. 또한 자유연애와 자아중심주의를 주장했으며, 새로운 교육과 지식의 필요를 역설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몽사상은 논리전개에서 납득할만한 체계의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과 더불어 초기의 개인주의가 이후 복고적 집단주의로 변모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민족주의자로서의 이광수는 초기부터 투철한 상황의식적인 반일이나 항일보다는 오히려 풍속개량이나 근대적 의식개혁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식민지배세력의 혹독한 탄압에 신음하는 민족적 상황은 제처 두고, 기껏 개인의 윤리적 자세나 관습의 개량을 문제 삼은 그의 민족주의는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이처럼 상황의식 부재의 막연한 원칙론과 그 원칙론 자체의 전후 모순은 결국 친일활동으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의 변모는 물론 일본총독정치의 탄압에 기인한 점도 있지만, 그 변모․ 굴절이 소극적․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문학가로서의 이광수는 초기에 유미주의, 사실주의, 공리주의, 낭만주의 등 서양의 다양한 문학론을 수용했다. 이광수의 초기 문학관은 이후 계몽주의․ 민족주의 문학관으로 정립된다. 이광수의 문학관은 그의 계몽사상과 민족주의 사상의 문제점과 같은 측면, 즉 논리적 불투명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의 이론이 거의 전무하고 창작의 수준이 매우 미숙한 당시의 한국에는 이광수의 문학이론도 도움이 된 것으로 추축된다. 그리하여 형성된 그의 교훈주의적 계몽문학론은 김동인의 유미주의와 힘의 프로문학론 등을 통해서 극복되어 간 것이다. 또한 이광수는 한국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로 평가되는 <무정>을 통해 새로운 문제를 제시했다. <무정>의 문체는 서구 문장의 번역체로 볼 수 있다. ‘서구의 번역’은 그의 계몽사상에서 발견되는 서구 지향적 태도와 반유교적 이념과도 대응되는 것으로, 한국의 근대문학사에서 그의 역할을 특징짓는 요인의 하나라 하겠다. 



맺는말

이상에서 우리는 개화․ 식민지 시대의 선구적인 작가․ 지식인으로의 이광수가 보여준 공적과 과오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첫째, 그의 계몽사상은 여러 가지 모순과 미숙성이 있음에도 미성년 상태의 당시 한국사회의 관습과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 극히 짧은 기간이지만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항한바 있고, 그의 문학이론과 새로운 소설문장은 종래의 낡은 문학 유산을 극복 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그러나 그가 끼친 과오를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바른 역사의식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당면한 긴급한 현실의 정치적 상황을 외면하여 친일적․반민족적 활동에 열성을 다하였고, 이념이나 원칙이 없는 단편적 지식의 퇴적으로 말미암아 사고의 합리화․ 근대화를 저해한 점도 없지 않았다. 이런 점들은 분명히 이광수의 약점이요 과오라 하겠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그것은 오늘의 문학인과 지식인이 다 같이 극복해야할 문제로서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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