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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 현진건

수로보니게 여인 2010. 6. 9. 18:11

 

제7장 김동인


 이광수에 뒤이어 한국 현대소설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이야기되는 김동인(1900~1951) 은 식민지시대의 숱한 작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고 논의된 인물의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각도에서 김동인의 삶과 문학을 다루어 볼 것이다. 편의상 그 각각을 출신배경, 시대적 위치, 생활방식 등으로 명명하며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1. 출신 배경


 김동인의 고향은 평양, 즉 서북지방의 중심지이다. 서북지방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조사회의 정치질서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지역이다. 이로 인해 그 곳은 이조사회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유교 이데올로기의 중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거니와, 기독교를 위시한 소위 신문물의 세례를 서북인들이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와 무관하지 않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김동인의 집안 역시 이러한 큰 흐름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그의 아버지와 형이 모두 교회 장로였다는 사실에서 손쉽게 입증된다. 김동인 역시 유교적 이념으로 대표되는 과거 전통사회의 무게를 크게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새로운 문학을 쉽사리 선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처럼 전통사회의 무게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는 사실은 김동인의 문학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한 점도 없지 않다. 김동인의 문학에서 우리가 자주 느끼게 되는 공허함은 그가 자기 시대의 근원적인 고민들을 깊이 있게 깨닫고 있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그 상당부분이 유래하고 있거니와 이는 그가 전통사회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고 그것과 맞붙어 고투한 경험이 없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서북지방의 지주계층에서 태어난 김동인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상당한 유산을 술과 여자와 실패한 사업에 거의 다 탕진하고 급기야는 원고료에 매달려서 살아가야 하는 숱한 ‘글장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략했다. 말년의 가난과 병마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식에서 지주계층 출신의 특징은 계속 견지된다. 이는 작품속의 대부분의 인간을 눈 아래로 보고 경멸하는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에서나, 소설 속 인물들 대부분이 일관되게 수동적인 인생관을 보인다는 것에서 잘 나타나는 바이다. 이러한 그의 출신배경과 생각은 그가 견지한 인형조종술이라는 창작방법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형조종술은 ‘참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창조’하고 ‘그 인생을 자유자재로 인형 놀리듯’하는 것을 작가의 권리이자 긍지로 삼는 태도이다.


 2. 시대적 위치


 유교이념과 거기에 기초한 사회질서가 명백히 붕괴해버린 반면 새로운 이념과 사회질서는 아직 정립되지 아니한 과도기적 혼란 속에서 김동인은 살았다. 그럼에도 김동인 자신은 이념의 차원에 대하여 전혀 흥미를 갖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고 또 낡은 사회체제의 압박도 남들보다는 덜 느끼면서 자라난 축이여서 자신이 처한 시대의 성격을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동인 역시도 그 시대의 과도기적 혼란에 전혀 무감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작가로서의 본능에 의하여 자기 시대의 혼란과 상처를 단편적으로나마 감지하였고 그것을 작품 속에 투영시켰다. 「감자」와 『김연실전』을 위시한 그의 많은 소설들은 바로 그가 처했던 혼란에 찬 시대, 의지할 이념도 신뢰할 사회질서도 모두 부서진 시대의 조그마한 초상인 것이다. 비록 김동인이 식민지 현실을 문학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만 비순응적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엄연한 한계를 갖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3. 생활방식


 성인이 된 후에 김동인이 보여준 삶의 방식은 그가 수리사업에 실패하여 파산선고를 받은 1927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진다. 편의상 그 둘을 각가 전기, 후기로 명명한다면 전기는 스스로 무덤을 파들어가는 지주층 후예의 생활을, 후기는 현대사회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룸펜 문사의 생활을 각각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평양을 주된 무대로 하여 이루어진 전기 김동인의 삶은 호사를 극한 방탕과 도락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이는 김동인이 살았던 식민지 시대가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일대 전환기였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중요하다. 그 이전에는 지주계급이 사회의 지배세력을 독점한 존재였고, 따라서 거기에 속하는 개인은 식민지 시대에 이르러 이미 그러한 관성의 보호 작용이 소멸해 버렸는데도 여전히 옛날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안이하게 처신하다가 파산을 맞는 철부지들로 변모해갔다. 

 그러나 김동인은 파산을 당하고 서울로 옮겨온 뒤, 원교로 수입을 생계의 주된 밑천으로 삼아 생활해야 했다. 그러나 돈 때문에 그처럼 탄식을 연발하면서도 그는 돈의 문제를 작품 속에 끌어들일 만큼의 현실의식을 키우지 못한다. 전에는 눈 아래로 멀찍이 내려다보기만 하던 시정의 숨 가쁜 삶을 이제는 스스로 체험하게 되었으면서도 이웃 인간들에 대하여 그가 갖는 이해의 폭은 넓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에게 생활의 전환은 너무 늦게 왔다고 볼 수도 있다. 김동인 작품세계의 기조를 이루는 인간관, 현실관, 문학관들은 꽤나 일찍부터 그 형태를 굳혔고 또 그렇게 굳어진 모습대로 장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웬만한 충격으론 미동도 하지 않을 만큼 되어 버렸던 것이다.



<참고문헌>

이동하,「자존과 시대고 - 김동인론」, 김용성 ․ 우한용 공편,『한국근대작가연구』(삼지원, 1985)




 

제8장 현진건


 빙허 현진건은 우리나라 근대문학 초창기에 해당하는 1920년대 초 『백조』파의 일원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놓은 후 근 20여 년의 작가생활을 통해서 23편의 단편과 4편의 장편을 쓴 작가로서, 김동인과 함께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기초를 세운 선구자이며, 염상섭과 함께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기초를 확립한 선구자의 일인으로 뛰어난 문학적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1. 현진건의 삶


 현진건(1900-1943)의 문학세계에 영향을 준 그의 전기적 사실을 검토함에 있어 먼저 언급하여야 할 것이 그의 집안 내력이다. 현진건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아치를 많이 낸 가문으로, 개화기에 이르러 새로운 개혁의지를 가지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개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그 충 특히 계부 영운은 대한제국의 군영부총장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친일파였으며, 반면에 재종형 상건은 역관으로 불란서 공사관에서 근무하다가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숙형 정건은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평양에서 옥사했다. 이렇게 현진건 집안의 사람들은 식민지 현실을 수용하는 입장과 저항하는 입장의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진건은 현실을 대처하는 지식인으로서의 행동양식에 대해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었으리라 짐작된다.

 현진건은 염상섭과 함께 『시대일보』 『매일신보』 등의 기자생활을 거쳐 한때 『동아일보』의 사회부장직에도 있었으나, 바로 1936년의 일장기말살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1년 언도를 받고 투옥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신문사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는 언론활동도, 작품 활동도 일체 중지한 채 창의문 밖 부암동에서 양계를 하며 침묵 속에 세월을 보내다가 해방 2년 전인 1943년 서거함으로써 그의 생을 마감하고 있다.


2. 작품연구


(1) 「빈처」


「빈처」는 현진건의 처녀작 「희생화」에 이어 두 번째 나온 작품으로 그의 출세작이면서 비로소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한 문제작이다. 이 작품은 초기의「술 권하는 사회」,「타락자」등과 함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소설이다. 이는 그가 소재를 자신의 주변 ․ 일상생활에서 가져와 평범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여러 문제점을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빈처」에서 그의 이상과 현실과의 갈등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은 <나>의 아내이다. <예술가의 처 노릇을 하려는 독특한 결심이 있는> 그녀이지만, 아내는 보수 없는 독서와 가치 없는 창작에만 전념하는 남편을 위해 혼자 6년간 집안 살림을 맡아 하면서 세간도 모두 바닥이 나버렸고, 이젠 더 이상 살길이 막막하여 자주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지친 표정을 짓는다. 이러한 아내를 지켜보며 가장으로서의 구실을 못 하고 있는 <나>는 또한 자주 <쓸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는 가난을 참고 견디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러한 아내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안타까움의 동시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빈처」에서 두드러진 구성상 특징은 은행원 T와 <나>, 처형과 아내의 대비를 통하여 당대의 전형적인 인물을 창조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나>를 통해서 개인적 입신출세주의와 물질주의라는 당시 사회의 윤리를 거부하고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몰이해를 참아 내며 가치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는 1920년대 지식인의 한 전형을 그리고 있으며, 또 다른 부류의 지식인인 은행원 T를 통해서는 사회와의 마찰 없이 개인의 재질을 수단껏 발휘하며 현실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물질 지향적인 인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가난함 속에서도 남편을 믿고 존경하며 장래의 기대 속에 살아가는 <나>의 아내와, 남편의 외도와 손찌검에 시달리면서도 물질의 충족만 있으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해하는 처형과의 대립된 인물설정은 당시 사회의 일면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전형성을 띠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빈처」는 치밀히 구성된 갈등구조, 대립구조를 통하여 물질 지향적인 현실 속에서 가치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는 한 지식인의 고뇌와 당대 사회의 윤리적 모순을 드러내려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 「고향」


 1926년에 발행된 현진건의 단편집 『조선의 얼굴』에 수록되어 있는 「고향」은 1920년대의 사회상과 당대의 작품경향을 잘 대표하는 작품이다.「고향」은 당대의 가혹한 식민지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 강렬한 역사의식이 사실적인 표현 기법을 통하여 매우 집약적으로 잘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근래에 그의 최고의 대표작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스토리는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비롯된다. 서술자이며 관찰자인 <나>는 한 사나이의 기괴한 옷차림에 흥미를 느낀다. <그>는 일본 기모노에 한국식 옥양목 저고리, 중국식 바지의 기묘한 옷차림을 하고 마침 공교롭게 동석을 하고 있는 일본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각기 어설픈 일본어와 중국어로 달갑지 않은 수작을 버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그>의 행동에 처음에는 냉담한 태도를 취했으나, 고통스런 삶의 비밀을 담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에 드디어 이끌리게 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서울까지 가게 된 <나>는 <그>와 그와 한때 약혼 말이 오갔던 한 여자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가 살아온 삶, 그것은 1920년대 농민들이 겼어야 했던 참혹한 수난의 한 전형적인 모습이다. 소작민인 그의 삶이 <세상이 뒤바뀌자> 서간도를 시작으로 신의주 ․ 안동현 ․ 쿠슈 ․ 오사카 등지로 가난 속에 흘러 다니는 신세로 전락한다. 오랜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온 <그>는 폐허가 된 고향을 보고 다시 서울로 상경하는 참이었다. 이렇게 삶의 뿌리가 뽑힌 <그>의 실향민으로서의 파멸적인 삶, 그것은 작가가 작품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로 동일화될 수 있다. 정든 고향에서 떠나와 만주와 일본으로 전전한 덕분에 동양 삼국 옷을 한 몸에 걸치고 삼국 말을 곧잘 지껄일 수 있는 <그>, 황폐화된 고향을 보고 가슴이 터지는 쓰라림에 굵직한 눈물을 떨어드리는 <그>, 다시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가고 있는 <그>는 바로 <조선의 얼굴>이었으며 일제하의 민족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송백헌, 「현진건」, 황패강 외 공편,『한국문학작가론 4』(집문당,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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