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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이해

수로보니게 여인 2010. 5. 9. 17:57

 

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연표)  v  d  e 

구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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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환인
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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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진국
삼한

 



 
 
 


 
 
 


   

   
 


고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삼별초의 항쟁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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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후기 경제 발전과 사회 동향

 

 

조선후기 경제발전과 사회동향


조선후기에는 정치적으로 붕당정치가 시행됐는데, 이는 정책대결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결국 일당독재로 나아갔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붕당정치의 실상과 이를 극복하려는 영․ 정조시대의 탕평책 [탕평당]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모든 분야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농업, 수공업, 광업문야에서 생산이 발전하고, 생산된 물건을 팔고 사는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였다. 이는 모든 산업에 상품생산을 확대하도록 자극하여 분업화, 전문화를 통한 생산력 발전을 앞당겼다.

양난을 거치면서 대외관계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청에 대해서는 화이론과 북벌론을 내세웠으나 점차 청의 존재를 받아드리기 시작하였다. 일본과도 국교가 다시 정상화되면서 통신사의 왕래가 양국간의 교역과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 중세 해체기의 사회모순이 심화되면서 이를 해결하려는 방안이 모색 되었다. 지식인들 사이에 실학이 대두하여 사회개혁에 대한 논의, 나아가 국학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란과 호란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조선왕조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갈 즈음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력 속에서도 파벌이 생기는 등 정치적으로 붕당정치가 시작 되었다. 이는 정책 대결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일당독재 폐단의 우려도 있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붕당정치를 극복하려는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왕권강화를 위한 발판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정조대에는 특히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고, 문화적으로도 성숙하여 ‘문화적 르네상스기’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조선후기는 사회적으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농업생산력이 향상된 가운데 논농사에서는 이앙법으로, 밭농사에는 그루갈이와 견종법이 확대 되었다. 농업생산이 발전하면서 지주전호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보다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수확을 얻게 되면서 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부농이 되기도 하였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많은 이득을 얻기도 하였다. 토지도 상품으로 거래되는 가운데 서민지주가 등장하면서 양반지주와 전호농민을 바탕으로 한 조선 사회의 기본 틀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수공업에서도 조선전기에 활성화 되었던 관청 수공업은 거의 없어지고, 관청에서도 필요한 물건은 공인을 통해 구입하게 되었다. 수공업분야의 전문성도 강화되면서 전문 수공업자들이 모여서 물품을 만드는 점촌이 생겨났다. 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광업도 함께 발달하면서 광업 분야에서는 분업과 협업이 출현하였다. 이렇게 상품생산이 점차 고급화, 전문화되는 가운데 수요가 늘면서 물건을 사고파는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였다. 또 전국적인 유통망(5일장)과 교통의 발달로 여각과 객주 등 신종 직종이 등장하기도 하였고, 상품생산의 분업화․ 전문화를 위한 새로운 자본 임노동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왜란과 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의 대외관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청에 대해서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나라로서 북벌론을 내세우며 인정하지 않았지만, 점차 청과의 왕래가 잦아지고 또 많은 지식인들이 청의 문화를 인식하면서 청의 존재를 받아드리기 시작하였다. 왜란으로 인해 왜와의 관계도 단절되었지만, 왜국의 요청으로 국교가 다시 정상화 되었다. 특히 조선이 왜에 파견한 통신사는 양국 간의 교역과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 서구의 서적과 문물이 들어오고 과학기술 및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서양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였다.

조선 후기의 사회모순이 심화되면서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성리학으로부터 이탈하는 지식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사회모순을 극복하려는 방법 등을 제시하며 다양한 서적을 저술하였다. 특히 청의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여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타났으며, 상공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또 조선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이 강화 되면서 국학이 발달하여 관련서적, 특히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김정호의『대동여지도』와『청구도』는 19세기 최고수준의 지도라 할 수 있고, 회화부문에서도 새로운 화법이 나타났는데 산수화에서는 정선이 진경산수화라는 화법을 써서 우리나라의 자연을 그려냈고, 풍속화에서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농촌과 도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서예에서는 김정희가 추사체를 개발하여 격동기 속에서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 놓은 시기라 하겠다.



사씨남정기 (김만중 고전소설) [謝氏南征記, 남정기]      

 

조선 전․ 후기 사회변화.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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