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 ı Łονё 歷史

유럽국가체제의 수립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28. 23:23

     

 

 

유럽 국가체제의 수립   

 

우리의 근대에 시작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전체 없이 일부를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속한 그 전체를 발견한” 바로 그 순간에 있다. …… 이때부터 서구사상은 현기증에 사로잡혀 오늘날까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전체와 부분들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가. 분할과 단일성의 기를 꺾어버리는 무한한 잡종교배의 복잡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콜럼버스의 시대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바이다. …… 대발견의 매혹 다음 곧바로 정복의 환멸이 이어진다. 진보와 퇴행이 떼어낼 수 없게 서로 뒤얽혀 있다. 거대 문명들이 소멸하고 더불어 무수한 인간들이 사라지는 사이, 휴머니즘들이 그 발견의 충격으로부터 탄생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말들을 통해 ‘타자문제’에 대한 원칙을 정립하면서 말이다. 

                 

                                                                        - 에드위 플레넬, 김병욱 옮김. 『정복자의 시선』.마음산책, 2005

  

 

 

근대 세계의 출현

'지리상 발견의 시대'가 열린 후 몇 세기 동안 북쪽 길을 통해 동양으로 가는 편한 길을 찾겠다는 꿈은 깨지고, 익명의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대신 오스트랄라시아의 남극 대륙을 발견했으며, 대륙 내부의 지형적 주요특징들을 확인했다. 그 전의 몇 세기 동안 그렇듯이 이 시대에도 상인과 선교사들은 대담한 탐험가이기도 했지만, 이 지리상의 발견의 시대에는 지식 자체를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유럽의 팽창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오스만투르크)]

14세기 비잔틴 제국의 쇠퇴로부터 1922년 터키 공화국이 건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던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족이 세운 제국.

1300년대에 오스만투르크로 알려진 이슬람교도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오늘날의 터키로 이주했다. 그들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을 세웠다. 16세기 중엽까지 이 제국은 대부분의 북아프리카, 중동, 남부 유럽을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은 결국 쇠퇴하여, 19세기와 20세기에 유럽의 국가들은 한때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많은 지역의 통제권을 얻었다. 오늘날 터키만이 투르크의 손에 남아 있다.

비시니아의 아미르였던 오스만(아랍어로는 'Uthmān')의 이름을 딴 명칭이다. 그는 1300년경 인근 지역을 정복하면서 왕조를 창건했다. 오스만 제국사의 제1기인 1300~1481년은 전쟁과 동맹, 그리고 영토의 현장 매입에 의한 거의 끊임없는 팽창의 시기였다. 오스만과 그의 계승자들인 오르한(1324~60 재위), 무라드 1세(1360~89), 바예지드 1세(1389~1402) 아래 아나톨리아의 거의 전역이 정복되었다.

비잔틴 제국 내의 여러 분파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1346년경 유럽에 발판을 마련했다. 즉 갈리폴리로부터 트라키아·마케도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 등으로 진출했다. 1389년 코소보에서 무라드는 발칸 동맹군을 무찌르고 이 지역에 대한 오스만의 지배를 확립했다. 바예지드는 오스만의 지배를 더욱 강화했고, 카이로의 칼리프에게서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년~1324년) 이탈리아의 탐험가]《동방견문록

인쇄술이 도입된 이후 서구에서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었다. 아직 대항해의 시대가 열리기 전, 중세의 유럽인들은 지중해 너머에 있던 인도나 중국과 같은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확인되지 않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양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중세 유럽인들에게 ‘동방견문록’은 미지의 동방 세계에 대한 놀라운 지식의 보고(寶庫)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럽인들은 동방의 향료나 비단, 귀금속 등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나 아리비아의 상인들을 통하지 않고 아시아에 직접 연결되는 항로를 찾으려고 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새로운 항로 탐색을 위한 기술적 뒷받침을 마련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지리적 팽창은 유럽에 커다란 경제적 변화를 몰고 왔으며, 초기 자본주의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상업혁명과 가격혁명을 이루며 경제 활동의 증대촉진이라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7년전쟁[七年戰爭, Seven Years' War]브리태니커

프랑스 혁명 이전에 벌어졌던 마지막 주요전쟁(175663).

   유럽의 열강들이 모두 참전한 가운데 프랑스·오스트리아·작센·스웨덴·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하노버·영국에 맞섰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에 있어서는 그 지리적 영역이 확대되었다. 전통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 양국 간의 주요 전장(戰場)은 유럽이 아니라 식민지로, 북아메리카 및 인도를 둘러싼 패권경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전쟁의 결과는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1756년에 시작되었는데, 몇 년 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 지방을 프로이센에게 빼긴 오스트리아가 그 땅을 회복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러시아의 여황제 옐리자베타가 죽고 프로이센 찬미자인 표트르 3세가 뒤를 잇게 되면서 러시아는 프리드리히와 강화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과 스웨덴 간의 강화를 중재했으며, 결국에는 프리드리히와 연합해 오스트리아군을 슐레지엔에서 몰아내려는 노력까지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표트르는 암살당했지만 그의 계승자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에 다시 대항하지는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으며, 그의 동맹자인 브라운슈바이크의 페르디난트가 빌헬름스탈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루터베르크에서 작센군을 격파한 후 중요한 도시인 괴팅겐을 함락시켰다. 1762년 말 종전이 임박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 없이 전쟁을 계속해봐야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슐레지엔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지원하는 데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으며, 영국도 프로이센을 지원하는 데 대해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1763년 2월 10일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조인된 파리 조약으로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인도를 획득해 해외 식민지 경영에서 선두주자가 되었다. 5일 후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에서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에 대한 프로이센의 영유권과 유럽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정했다.
 

 

 

    15세기 초엽까지 동양에 비해 열등했던 서유럽이 근대사를 주도하게 된 원동력은 르네상스의 진취적인 개척정신에서 비롯한 지리상의 발견이었다. 지리적인 팽창에는 종교적 동기 및 동야에 대한 호기심 외에도 경제적인 동기가 크게 작용했다. 또한 항해술 및 조선술의 발전, 중앙집권화 된 민족 국가의 출현은 현실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최초로 인도 항로를 탐색한 포르투갈은 동양 무역의 실권을 장악 했으며,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와 필리핀을 장악해 해산제국을 건설했다.

지리상의 발견은 동양물산을 대량 유입하여 유럽인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대량의 귀금속은 가격혁명을 초래했으며, 넓은 해외 시장은 상업혁명을 야기하여 유럽의 상업규모를 비약적으로 확대하고 경제의 중심을 이슬람 및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의 민족국가로 이동 시켰다.

중상주의는 이에 따라 나타난 경제적 이데올로기로서 중금주의, 무역차액설, 중공주의, 식민지절책 등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초기적인 발전을 꾀했으나 자유로운 경제발전을 저해하기도 하였다. 중상주의는 국가주의로서의 면모도 지녀 유럽 민족국가를 위한 포괄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이상의 경제적 발전은 절대주의적인 정치체제를 등장시켰다. 절대주의 시대로 불리는 16~18세기의 유럽은 사회, 경제, 문화면에서 근대적 발전이 두드러졌지만 봉건적 요소도 잔재했다. 중세 말부터 국가통합의 중심이 되었던 왕권은 이때에 절정에 달해 절대 왕권의 정치체제를 이루어, 관료제와 상비군제도 및 전국적인 조세 제도와 사법제도를 설치했다. 절대주의 국가는 근대적인 국민국가라기보다는 국왕과 왕조의 이익을 위한 국가였다. 잔재된 봉건적 부담, 길드제도 등은 자유로운 경제발전을 저해했으며, 시민계급과 귀족 계급의 세력 갈등은 절대왕권의 군림을 허용했다.

에스파냐는 이슬람교도의 축출을 통하여 일찍이 중앙집권화에 성공했으나 국내산업 기반을 육성하지 못하여 이류 국가로 전락했다. 점진적으로 그러나 전형적인 형태로 수립된 프랑스의 절대주의체제는 대표적인 절대군주 루이 14세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 구조적인 모순은 프랑스 혁명으로 폭발하였다. 영국의 튜더왕조는 15세기 말 의회에 입각한 강력한 절대 왕권을 수립했는데, 당시 크게 성장한 농업자본가의 젠트리 계층은 프랑스적인 절대왕권을 수립하고자 한 스튜어트 왕실의 시도를 영구히 차단하고 의회 중심적인 입헌군주제를 확립했다. 한편 프로이센과 러시아에서는 토지귀족관료와 농노로 구성된 봉건적 성격이 강한 절대왕권이 수립되었다.


근대적 세계체제 확립의 전주곡


16세기 이래 유럽인들의 팽창과 함께 그 진출 및 점거의 대상이 되어왔던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일부 지역은 이른바 중심부- 주변부간의 지배-종속 관계를 기초로 한 ‘근대적 세계체제’에 편입되었으며, 19세기 말에 본격화 된 제국주의 시대에는 서구 열강들의 분할대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대부분의 식민지는 독립했지만 전날의 식민지배 및 제국주의적 지배로 말미암은 상처와 굴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탈식민지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더구나 이 지역들은 대체로 제3세계로 재형성되어 현대의 국제질서에도 상당한 변수가 제공되고 있다. 요즘도 경제적인 경쟁과 함께 지역분쟁, 문화 상품화 등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있는 우리들이 다시 한 번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요약

     ** 서유럽에서는 시민계급과 귀족계급의 세력균형이 절대왕권을 출현시켰다.

     ** 동유럽에서는 봉건적 성격이 강한 절대왕정이 수립되었다.

     ** 관료제, 상비군, 전국적인 조세제 등에 의해 유지 되었다.

     **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 강력한 절대주의 국가를 이루었다.

     ** 에스파냐는 일찍이 중앙집권화에 성공했지만 국내 산업기반을 육성하지 못하여 이류 국가로 전락했다.
     ** 프로이센Preussen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융커Junker 계층의 주도로 군국주의적 성격이 강한 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 바로크 예술은 긍정적이며 귀족적이고, 인간의 힘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토대로 하고 있다.

     ** 루벤스, 렘브란트 등은 이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이다.

     ** 지리적 팽창에 따른 유럽주도적인 세계사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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