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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사회 ‧ 문화적 변화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26. 00:44

  

종교개혁과 사회 문화적 변화

마르틴루터의 종교개혁  

 

중세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16세기 서방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일어난 종교혁명.


이 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는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다. 광범위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영향을 미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의 3가지 주요분파 중 하나인 개신교를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출현한 중세 후기의 가톨릭 세계는 복잡했다. 여러 세기 동안 교회, 특히 교황청은 서유럽의 정치생활에 깊이 관여했다. 늘어나는 교회의 권력 및 부와 결탁하여 발생한 음모와 정치 공작은 영적 세력인 교회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면죄부(또는 영적인 특권)와 성물 판매, 성직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경건한 자들이 착취당하고 교회의 영적인 권위가 와해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그 이전에도 이미 선례가 있었다. 성 프란키스쿠스, 페터 발도, 얀 후스, 존 위클리프 같은 중세 교회 내의 개혁자들은 이미 1517년 이전에 수세기에 걸친 교회생활의 악습을 폭로했다. 16세기의 위대한 인문주의 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교회에 만연된 미신과 도덕적 악습을 공격하고 최고의 교사인 그리스도를 모방하라고 촉구한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의 주요 주창자였다. 이 개혁운동은 전통적으로 종교개혁이 시작한 날로 여기는 모든 성인의 날 전야, 즉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모든 성인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기 전에도 여러 해 동안 교회 내부 개혁을 위한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해왔다.

마르틴 루터는 그 자신과 과거의 개혁자들은 분명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교회 생활의 타락을 공격한 반면, 자신은 모든 문제의 신학적 근원인 구원은총에 관한 교회의 교리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주임사제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선행의 복잡한 체계에 하느님의 가없는 은총의 선물이 얽매어졌음을 개탄했고, 95개조 반박문에서 교황은 연옥에 관한 권한이 없고, 성인의 공덕에 관한 교리는 복음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면죄부 체계를 공격했다. 이것이 교회의 윤리적·신학적 개혁에 대한 루터의 핵심적 관심사이다. 즉 성서만이 권위가 있고(sola sciptura), 의인(義認)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sola fide)는 것이다. 그는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교황권과 곧 충돌하게 되었다. 1521년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결국 파문당했다. 내적인 개혁운동으로서 시작한 것이 서구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초래한 것이다.

중세 말기에 인문학자들은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풍자하며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못 박은 사건은 로마 가톨릭의 유럽 지배 종식의 기점이 되었다. 물론 중세인들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신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고, 인위적인 평안이 아닌 신이 직접 내리는 평안을 절실하게 요구하였다. 루터는 바로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켰다. 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적 경건과 예리한 지성으로 중세교회의 부정과 인위적인 가면을 벗기고 복음의 실체를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물했다.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남과 더불어 스위스에서는 칼뱅의 개혁운동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개혁파의 신학은 점점 칼뱅의 신학으로 수렴되면서 칼뱅주의는 대륙 쪽 개혁파 신학의 주류가 되었다. 칼뱅의 제자였던 녹스는 영국으로 가서 개혁파 신학을 전하였다. 이렇게 16세기 유럽은 대변혁을 맞았다.

이렇게 유럽이 점차적으로 교황청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면서 인문주의도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문예부흥을 불러왔다.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박해받던 유럽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제 몫을 찾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공격을 받은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개신교에 반격할 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내부 개혁을 실시해 쇄신하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개혁과 함께 해외 선교에 힘을 쏟는 예수회가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서 창설되기도 하였다. 

 

농민반란 : 고대·중세 시대 농민이 기존의 사회질서나 지배층의 폭정에 대항하여 일으킨 봉기.


농민반란은 농민혁명, 농민전쟁과는 구분되는 용어이다. 근대사회를 성립시킨 시민혁명과 연계하여 발생한 농민봉기를 농민혁명, 봉건사회 해체기에 일어나 혁명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농민봉기를 농민전쟁이라 부르고, 농민반란은 전근대사회의 발달과정에서 발생한 농민운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14~15세기를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발생했던 농민봉기를 일컫는 반면 동양에서는 통일왕조 성립 이후 발생한 대규모의 민중봉기를 모두 농민반란으로 취급하고 있다.

 


칼뱅주의 Calvinism : 프로테스탄트에서 장 칼뱅이 세우고 발전시킨 신학.


칼뱅주의는 칼뱅의 추종자들이 칼뱅의 교리 중 일부를 발전시킨 것을 가리키기도 하며 칼뱅과 그의 추종자들의 저서에서 유래하여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뚜렷한 특징이 된 교리와 신앙생활을 가리키기도 한다. 칼뱅은 성서의 폭넓은 가르침을 일관성 있게 배열했지만, 절대적인 논리적 정확성을 가지고 체계화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칼뱅의 추종자들은 부분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가 신학적 규정을 정하는 데 성공한 것에 자극을 받고, 또한 반종교개혁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균형 있는 칼뱅의 신학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칼뱅주의 5대 강령

델베르크 요리문답

 

주요 인물

장 칼뱅, 마르틴 루터, 존 낙스,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휘트필드, 찰스 스펄전, 아더 핑크, 프란시스 쉐퍼, 마틴 로이드 존스, 로버트 스프로울, 존 퍼, 김홍전


칼빈주의 5대 강령은 개혁주의에 반대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기한 다섯 가지 이의(Arminian remonstrance)를 반박한 도르트 총회의 결의문의 요약이다. 비록 칼빈 자신이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칼빈주의 구원론을 잘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 그 이름이 연유한다. 각 조항의 영여 앞 글자를 따서 TULIP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개혁주의의 특징인 전적은혜설(Sola Gratia)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Doctrine of Grace)라고도 불린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ethic는 유럽 가톨릭 국가들의 반종교개혁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이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독일의 여러 프로테스탄트 주(州)들이 만든 군사동맹(1608~21).


프로테스탄트 윤리

칼뱅주의에서는 이를 한 개인이 하느님에 의해 선택받았다는, 즉 영구히 구원받았다는 표시로 간주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1904~05)에서 유럽의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 프로테스탄트 집단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이 프로테스탄트 윤리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세속적인 성공을 하느님에 의해 선택받았다는 표시로 생각하여 이를 열심히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베버는 또한 칼뱅주의가 물질 숭배를 혐오한 점, 규율이 있고 개개인이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하느님이 내리신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종교적인 의무임을 강조한 점, 규율이 있고 체계화된 생활방식을 강조한 점 등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있어 경제적으로 중요한 측면이라고 보았다.

 

 30년전쟁[三十年戰爭, Thirty Years' War]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종교와 왕조, 영토 및 통상에서의 적대관계 등 다양한 이유로 벌인 전쟁(161848).

이 파괴적인 전쟁은 유럽 대륙 거의 전역에서 벌어졌으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유럽의 지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모했다.

30년전쟁을 초래한 분쟁은 수년 정도 앞서 발생했지만 일반적으로 이 전쟁은 1618년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1618년 장차의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의 자격으로 자신의 영토 내에서 가톨릭 절대 신앙을 강요하려고 하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디난트는 5년에 걸친 전투 끝에 승리했다. 1625년 덴마크의 스티안 4세는 이전에 스웨덴측에 발트 해 연안지방을 빼긴 손실을 상쇄하고자 점령 가치가 뛰어난 독일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러나 스티안 4세의 패배와 1629년의 뤼베크 평화조약으로 유럽 강국으로서의 덴마크 지위는 종말을 고했다. 한편 폴란드와의 4년에 걸친 전쟁을 마무리지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독일을 침공, 독일의 여러 제후들을 자신이 표방한 반(反)가톨릭 및 반(反)신성 로마 제국 노선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열강들의 정치적 야심으로 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발트 해 강국을 꿈꾸던 폴란드는 스웨덴과의 싸움이 무승부로 끝나자 러시아를 침공, 모스크바에 부아디수아프를 정점으로 독재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자국의 야심을 펼쳐 나갔다. 1634년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폴랴노프 평화조약은 폴란드의 러시아 왕위계승권 주장에 종지부를 찍었으나 폴란드로 하여금 발트 해 지역에서의 앙숙인 스웨덴과 맞서 다시 전쟁을 벌일 수 있게 해주었다. 당시 스웨덴은 독일의 혼란스런 상황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유럽의 심장부에서는 가톨릭·프로테스탄트·칼뱅주의 등 3대 교파가 각축을 벌였다. 각 군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외세를 불러들임으로써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난맥상을 나타냈다. 전체적으로 싸움은 가톨릭과 합스부르크 왕가가 대표하는 신성 로마 제국을 한편으로 하고, 반(反)가톨릭 세력의 근간을 이룬 스웨덴과 네덜란드에 의지한 프로테스탄트 도시들 및 공국을 다른 한편으로 했다. 네덜란드는 80년간에 걸친 투쟁 끝에 마침내 스페인의 억압에서 벗어난 나라였다. 평행선을 이룬 분쟁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및 스페인에 대한 프랑스의 경쟁의식이 깔려 있었는데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반(反)프랑스 연합전선의 구축을 시도해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간적으로 벌어진 30년전쟁의 주요무대는 독일 도시와 공국이었으며 이 지역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 참가한 많은 군인들이 용병이라는 점은 30년전쟁의 한 특징이다. 이들 용병 가운데 다수는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보급품 충당을 위해 시골마을을 약탈했으며 따라서 이 전쟁에서 하나의 전형을 이루는 이른바 '늑대 전략'이 시작되었다. 쌍방간의 군대는 모두 진군중에 약탈을 일아 도시와 마을 및 농장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열강들이 유혈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독일의 베스트팔렌에서 회동했을 때 유럽의 세력균형은 근본적으로 변해 있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의 주도적인 입지도 상실했다. 프랑스는 서방강국으로 부상했으며 스웨덴은 발트 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네덜란드는 독립된 공화국으로 승인받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소속 연방국가들에는 한 주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교황이 주도하고 세속적으로는 황제가 주도하는 유럽의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또한 주권국가들의 공동체라는 근대 유럽의 본질적인 구조가 확립되었다.

 

 종교개혁은…… 

  각 교파의 설득력 있는 교리와 의식, 효율적인 조직을 정비하여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과종에서 로마교황청 및 사제들의 종교적 의례에 대한 독점적 지위가 타파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개인의 지식과 감정이 보다 진지해진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나,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위협을 가한 측면도 없지 않다.
각 교파의 독단적인 교리와 종교 재판은 자유로운 사고와 감수성을 통제했고 국가 권력은 특정 교회와 결탁하여 개인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종교적 실천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전통적인 민중문화의 면모를 크게 변화시키고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종교개혁이 인간의 지적 활동을 촉구한 면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르네상스 이래 지속되었던 인간의 지적 발전을 위하여 조성된 제반 분위기와 환경은 종교개혁의 전개와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정치 시상의 발전은 종교 개혁의 또 하나의 성과였다. 종교분쟁 세속의 통치자들을 교회의 개입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광범위한 사회 대중을 동원하면서 다양한 정치적인 사유를 촉진했다. 근대 정치적 사유의 흐름을 주도한 주권론과 자연법사상도 주권의 문제를 사회의 주요 세력이었던 귀족과 부르주아의 입장을 중심으로 검토해 나간 결과라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 운동은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과 교회의 엄청난 재산 및 경제적 특권의 탈취를 노린 세속군주의 후원 없이는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시기를 포함하는 1618세기에는 국가 형성 및 상업자본 주의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와 함께 가부장 제도의 사유 재산제, 형통의 보존 등이 제도화 되고 개인의 행위에 대한 규제 기준이 정립 되면서 여성의 예속화 역시 본격화 되었다. 부부관계의 가족생활을 중시했던 개신교적 모델은 여성에게 보다 바람직한 상황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한편 모든 영역에서 남성과의 동반을 강조하여 여성의 독자적 조직과 주체성을 제거함으로써 종속화 경향을 강화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욱 강화된 부정적인 여성관은 상징적인 의미로 작용하였다. 문학, 예술, 축제 등을 무대로 하여 기존의 성 관념에 대립되는 ‘여성상위’의 이미지가 희극적이고 축제적인 방식을 통하여 다양한 형태로 표현 되었는데, 이는 희화된 ‘방자한 여성’ 의 이미지를 통하여 여성들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이미지는 일상생활에서 여성들의 상상력과 활동 범위를 넓혀주었고, 축제는 하층민들에게는 약간이나마 공식적인 저항의 통로를 제공하기도 했다(우리교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