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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사회와 문화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24. 16:27

 

서양 중세사회와 문화  


 게르만족(영)Germanic peoples/Teutonic peoples.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통칭.


게르만족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청동기시대 말 스웨덴 남부, 덴마크 반도, 엠스 강과 오데르 강 및 하르츠 산맥 사이의 독일 북부지방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게피다이족·고트족은 BC 1, 2세기경에 스웨덴 남부를 떠나, 오데르 강과 비수아 강 사이에 있는 발트 해 남쪽 연안지역을 차지했다. 초기에는 독일 서부지방의 대부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켈트족을 몰아내고 남쪽과 서쪽으로도 이주했다. 켈트족의 일파인 헬베티족은 BC 1세기에는 오늘날의 스위스 지역에만 살고 있었지만, 한때는 마인 강 연안까지 퍼져 있었다.


게르만족 대이동 (유럽 역사)  [Volkerwanderung]

AD 4세기말에서 6세기말에 일어난 게르만 여러 부족의 대규모 이동.


이는 4세기말 서쪽으로 이동하던 훈족(族)의 자극으로 게르만계(系)의 여러 부족이 로마 제국의 영토로 옮겨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부족들은 제국 곳곳에 정착했고 6세기말경까지는 여러 부족왕국을 세웠다.→ 로마사, 유럽의 역사와 문화  

 

백년전쟁 (유럽 역사)  [百年戰爭, Hundred Years' War]

14~15세기 유럽에서 프랑스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포함한 여러 문제를 놓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벌인 전쟁.

 

100년 내내 지속되지는 않고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수세대에 걸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들의 싸움이 되었다. 문서상으로 볼 때 이 전쟁은 1337년에 시작되어 1453년에 끝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프랑스에 있던 잉글랜드의 봉토를 놓고 일어났던 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12세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중세에는 어떤 왕이 자신의 왕국 밖에서 작위를 상속하면 다른 왕의 봉신이 될 수 있었다.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1066년에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 1세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했다. 이후 결혼동맹과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프랑스 내에서 잉글랜드 왕에 대한 작위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1328년 죽었을 때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기옌(프랑스 남서부에 있던 아키텐의 일부) 공작이자 퐁티외(영국 해협에 있음) 백작이었다. 게다가 샤를 4세에게 아들이 없었고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점을 들어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그에 맞서 상속권을 주장한 발루아 백작은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손자로서 손아래 가계 출신이었다(→ 중세, 발루아 왕조). 프랑스 의회는 발루아 백작(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왕위계승을 결정했다. 에드워드 3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프랑스 내에 다른 왕의 세력이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한 필리프 6세가 1337년 기옌 영지를 몰수하자 다시 왕위를 요구했고 플랑드르로 군대를 보냈다.

중세의 전투에는 쌍방이 격돌해서 승부를 가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이 행해진 방법은 요새를 겸한 주요도시를 오랫동안 포위공격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군에 맞섰던 필리프 6세(1350 죽음)와 장 2세(1350~64 재위)는 계속 방어만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잉글랜드가 프랑스 지방을 점령하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칼레 시를 포위공격해 이듬해 점령했다.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에드워드 흑세자는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장 2세를 사로잡았으므로 프랑스는 협약을 맺어야만 하는 상황에 빠졌다. 칼레 조약(1360)으로 에드워드는 이전에 그가 필리프 6세의 봉신으로서 갖고 있던 영토에 대한 완전한 종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조약의 조항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장 2세가 감금 도중 죽었고, 그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샤를 5세는 조약 준수를 거부해 다시 분쟁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잉글랜드 쪽이 프랑스에 맞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입장이 되었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점령지는 차차 줄어들어 갔지만 1380년 샤를 5세의 죽음으로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1380년 이후 두 나라는 각각 내부의 권력다툼에 휩싸여 불안정한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플랑드르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리처드 2세가 결국 폐위당하고(1399), 그의 사촌인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는 정신병 발작으로 통치를 못하게 된 샤를 6세 대신 실권을 차지하려고 샤를 5세의 형제들이 싸우고 있었다.

샤를 6세의 삼촌들 중 하나인 부르고뉴 공작이자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가 1404년 죽은 뒤 그의 아들 은 경쟁자인 삼촌 오를레앙 공작 루이 당주를 1407년 암살했다. 결국 프랑스는 아르마냐크파(오를레앙을 편들며 뒤에는 왕세자 샤를을 지지한 무리)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이 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틈타 다시금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전쟁을 재개했다. 부르고뉴 공작 장이 보복으로 아르마냐크파에 암살당하자 헨리 5세는 장의 아들인 필리프를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1422년까지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은 파리를 포함한 루아르 강 이북 지역의 프랑스 땅과 아키텐을 지배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쪽의 운세는 기울게 되었다.

헨리 5세는 어린 아들을 남기고 1422년 죽었으며, 통치능력이 없던 샤를 6세 역시 몇 주 뒤 죽었는데 그의 왕위는 아들 샤를 7세가 이었다. 1429년 잔 다르크의 구원병이 잉글랜드군의 오를레앙 포위를 풀게 함으로써 전쟁은 중대한 전환점에 접어들었다. 그뒤 부르고뉴인들에게 붙잡힌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 측에 팔려 이단죄로 재판을 받은 후 화형당했다. 그러나 프랑스같이 넓은 나라에서 프랑스인 귀족들의 폭넓은 지지가 없는 한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필리프 공작은 1435년 프랑스 쪽으로 돌아섰다. 파리는 다시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샤를 7세는 잉글랜드의 왕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장미전쟁을 틈타 노르망디를 정복하고 1453년까지는 아키텐 전역을 점령했다. 프랑스 땅에 잉글랜드가 최후까지 가지고 있던 거점인 칼레는 1558년에 프랑스로 넘어갔다.

역사가들은 백년전쟁을 서유럽 국민의식의 발전에서 한 이정표로 간주하고 있다. 수많은 승리와 좌절을 맛본 뒤 결국 잉글랜드는 유럽 대륙에 간섭하려는 야망을 버렸고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국내 발전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힘들게 싸워 마침내 왕위를 지킨 발루아 왕가로 인해 프랑스는 단지 이름뿐인 왕국에만 머물지 않고 유럽 내의 독립 군주국가로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장미전쟁 (영국 역사)  [Roses, Wars of the]출처: 브리태니커

영국 역사에서 강력한 튜더 왕가 정부가 탄생하기에 앞서 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치열한 내전(1455~85).

 

왕위를 놓고 랭커스터 가문요크 가문이 싸운 전쟁으로, 여러 해가 지난 뒤 요크 가문의 하얀 장미와 랭커스터 가문의 빨간 장미 문장(紋章)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양쪽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주장했다. 1399년부터 랭커스터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15세기 중엽 거의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지 않았다면 요크 가문에서는 왕권에 대한 권리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1422년 헨리 5세가 죽은 뒤 오랫동안 헨리 6세의 파당적인 소수당이 집권했다. 사병(私兵)을 가진 실력자들은 시골지역을 지배했고 무법상태가 만연했으며 세금 부담은 힘겨웠다. 헨리는 무기력하고 모자라는 사람으로 나중에는 광기까지 보였으며 야심만만한 왕비 앙주의 마거릿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마거릿의 추종자들은 프랑스 내에서 잉글랜드의 입지가 나빠지고 있음을 참견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헨리는 1453년 완전히 정신이상 중세를 보였고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귀족들의 동맹은 요크 공작 리처드를 섭정으로 세웠다. 1455년 건강을 회복한 헨리가 마거릿 일파의 권위를 재확립시키자, 요크는 자기방어를 위해 무기를 잡아야 했다. 세인트올번스에서의 첫전투(1455. 5. 22)는 요크 일가의 승리로 끝났고 4년 동안의 불안한 휴전을 가져왔다(→ 세인트올번스 전투). 1459년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요크 가문은 블로어히스(9. 23)에서 싸워 이겼으나 소규모의 러드퍼드 다리(10. 12) 전투 이후 흩어지게 되었다(→ 블로어히스 전투, 러드퍼드 다리 전투). 프랑스에서 워릭은 요크파 군대를 다시 모아 1460년 6월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노샘프턴(7. 10)에서 랭커스터 군을 크게 물리쳤다(→ 노샘프턴 전투). 요크는 왕위에 오르려 했으나 헨리가 죽은 뒤에 계승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고 타협했다. 이것은 사실상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의 계승권을 빼앗은 것으로, 마거릿 왕비는 계속해서 이에 반대했다.

잉글랜드 북부에서 병력을 모은 랭커스터 가문은 12월 웨이크필드에서 요크를 기습해 살해한 뒤 남쪽으로 런던을 향해 진군하던 도중 제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1461. 2. 17)에서 워릭을 물리쳤다(→ 웨이크필드 전투). 한편 요크의 맏아들이며 후계자인 에드워드는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2. 2)에서 랭커스터군을 무찌르고 런던 탈환을 위해 진군하여 2월 26일 마거릿보다 앞서 도착했다. 젊은 요크 공작은 3월 4일 웨스트민스터에서 국왕 에드워드 4세로 선포되었다. 이어 에드워드는 남아 있던 워릭의 병력과 함께 마거릿을 타우턴까지 추격했다(→ 타우턴 전투). 요크는 거기서 혈전을 벌인 끝에 완승을 거두었으며 헨리와 마거릿 및 그들의 아들은 스코틀랜드로 도망갔다. 이로써 전쟁의 제1국면은 랭커스터파가 아직도 저항하고 있는 소수 고립지역의 진압만 남겨두고 모두 끝났다.

다음 국면의 전쟁은 요크 가문 내의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워릭과 그 일파는 점점 에드워드 왕권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워릭은 외교문제에 있어 왕과 의견을 더욱 심각하게 달리했다. 1469년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워릭과 반항적인 에드워드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는 북부에서 반란을 선동했다. 그들은 7월 에지코트(밴베리 근처)에서 에드워드의 지지자들을 물리치고 에드워드를 포로로 삼았다(→ 에지코트 전투). 1470년 3월경 에드워드는 다시 통치력을 회복했고 워릭과 클래런스는 프랑스로 도망갔다. 거기서 그들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 및 과거 그들의 적이었던 앙주의 마거릿과 손을 잡았다. 잉글랜드로 돌아온(1470. 9) 그들은 에드워드를 폐위하고 헨리 6세를 왕으로 복위했다. 에드워드는 추종자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도망갔다가 부르고뉴 사람들의 도움을 확보한 뒤 1471년 3월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에드워드는 워릭을 물리친 뒤 클래런스의 충성을 다시 약속받고 4월 14일 바넛에서 워릭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다(→ 바넛 전투). 바로 그날 마거릿은 웨이머스에 상륙했다. 바넛의 소식을 들은 그녀는 서쪽으로 진군해 웨일스의 안전지대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세번 강에 먼저 도착해 투크스베리(5. 4)에서 마거릿을 붙잡은 다음 그녀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녀 아들을 죽였다(→ 투크스베리 전투). 그후 얼마 되지 않아 헨리 6세는 런던 탑에서 살해되었다. 에드워드는 왕위를 지키며 무사히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1483 죽음).

1483년 에드워드의 동생 리처드 3세는 조카인 어린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오름으로써 많은 요크 가문사람들을 따돌렸으며 이렇게 따돌림당한 사람들은 마지막 희망을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뒤의 헨리 7세)에게 걸었다. 프랑스와 요크파 망명자들의 도움으로 헨리는 1485년 8월 22일 보즈워스 평원 전투에서 리처드를 죽이고 전쟁을 끝냈다. 그는 1486년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계승권 주장을 하나로 만들었다. 헨리는 1487년 6월 16일 왕위 요구자 램버트 심널을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킨 요크파를 물리쳤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보통 전쟁이 끝난 시기로 삼는 1485년보다 바로 이 날을 전쟁이 끝난 날로 보기도 한다.

 

소설로 본 중세 가톨릭교회

    장미의 이름』

 

《장미의 이름》(이탈리아어: Il nome della rosa)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로 1327년 11월의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이 소설은 당시 교황과 황제 사이의 세속권을 둘러싼 다툼, 교황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이의 청빈 논쟁, 제국과 교황에 양다리를 걸치려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입장, 수도원과 도시 사이에 흐르는 갈등 등도 다룬다. 이탈리아에서 1980년 처음 출판되었다. 이 소설은 이윤기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한국어판은 1986년 5월 15일에 초판이, 1992년 6월 25일 개역판이, 2000년 7월 10일 3판이, 2006년 4월 15일 4판이 발행되었다.

1986년 영화화되었다.

줄거리
프란체스코 수도사, 바스커빌 출신의 윌리엄과 그를 모시는 수련사, 멜크 수도원의 아드소는 황제측과 교황측 사이의 회담 준비를 위해 회담이 열릴 수도원에 도착한다. 그 수도원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져서 원장은 윌리엄에게 이 사건을 풀어달라고 간청한다.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에도 몇몇의 수도사들이 사망한다. 윌리엄은 이 사건의 중심에 미궁의 장서관이 있다고 보고 그곳을 조사하는 한편, 수도사들을 탐문한다.

결국 윌리엄은 여러 자료를 통한 추론으로 장서관의 밀실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낸다. 장서관의 밀실에는 윌리엄의 예상대로 호르헤 노수도사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윌리엄과 호르헤는 마지막 논쟁을 펼친다. 장서관의 비밀을 지키려는 호르헤에 의해 장서관은 불에 휩싸인다.

본관 3층의 장서관에서 본관 전체로, 본관에서 다른 건물로 계속 불이 옮겨 붙고, 그 불은 사흘 동안 타오른다. 기독교 최대의 장서관을 자랑하던 그 수도원은 결국 폐허가 된다. 이후 아드소는 멜크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윌리엄은 흑사병 유행기에 사망한다.


이 소설에서 호르헤와 윌리엄은 각각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과 그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려는 사람으로 나온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에 나오는 ‘웃음’의 수용 여부이다. 그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사소한 문제 일 수 있겠지만, 중세 말기의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가치체계, 심지어 인간 삶의 모든 국면에 얽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신앙과 교회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상에 구체적으로 구현된 물리적인 조직이며, 또한 전 사회를 통제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연히 권력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교회는 확립된 교리체계를 통하여 인간의 신앙생활, 곧 신과 인간,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 해석하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을 독점하고 강요했다. 호르헤가 온갖 억지와 폭력, 심지어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끔찍한 죄악까지 동원해 가면서 금서로부터 수도사들을 격리시키려고 했던 것도 바로 교회 권력의 유지라는 측면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당시의 복잡하기 그지없었던 보편논쟁을 둘러싼 교회 내부의 대립, 또 그 이면이라고 할 수도 있는 교황권과 세속 권력 사이의 힘겨루기는 그의 몸부림을 더욱 절박하게 만들고 있다.

윌리엄은 새로운 해석이 하지만 그것은 또한 확실한 근거에 입각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윌리엄의 태도는 방자할 뿐만 아니라 위헌하기 그지없다. 인간의 지적인 탐구가 기존의 가치체계와 신이 부여해 준 진리를 훼손시키고 혼란을 가중시키면서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윌리엄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사람은 기존의 질서를 수호하려고 했던 호르해였는지도 모른다. 이 두 입장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인지는 각 사회가 놓여있는 상황과 역량, 또 그 구성원들의 능력과 노력여하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지점을 택하든지 그 역시 불안정하고 많은 문제를 내포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계속 바뀌어 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서임권 분쟁 또는 서임권 투쟁 (敍任權分爭)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평신도의 성직임명권인 서임권을 놓고 벌인 권력다툼을 말한다. 이 서임권 분쟁으로 독일에서는 약 50년동안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귀족 계급이 황제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기원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교회의 책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세속의 권력에 의해 임명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주교와 대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는 직위에 따라 토지를 갖고 있었고 교회 직무뿐만 아니라 세속 직무도 수행하기 때문에 이들의 임명은 세속 권력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의 임명에 대한 특별한 권리가 있었고 교황은 황제의 대관식을 치루어주고 차기 황제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으므로 다른 세속 권력에 비해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이러한 성직자 임명권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컸다.

서임권 분쟁의 발단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운동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세속 권력이 가지던 서임권을 교회로 다시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그레고리오 개혁론자들은 황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교회권력을 추구했는데 마침내 1056년 하인리히 4세가 6살의 어린 나이로 독일 왕으로 선출되자 개혁론자들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1059년 로마에서 벌어진 교회 회의에서 개혁론자들은 교황의 선출에 세속권력이 관여하지 못하도록하고 추기경단의 임명에도 관여하지 못하게 선언했다.

교황청은 교황임명권을 되찾게 되자 다른 성직 임명권도 교회의 권력으로 가져오려고 시도하였다.

 

    

카노사 (이탈리아 성 [城]) [Canossa]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아토아달베르트, 카노사의굴욕, 이탈리아성[城],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레조넬에밀리아 남서쪽에 있는 폐허가 된 10세기의 성(城).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만난(1077) 장소로 유명하다. 이 성채는 940년경 아토니가(家)의 시조이며 카노사의 초대 백작인 아토 아달베르트가 건설했다. 1077년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서임권 논쟁 때 교황을 강력히 지지했던 카노사의 백작 부인 마틸데(토스카나의 마틸데)의 초청으로 그에 반대하는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독일로 가던 길에 이 성채에 머물렀다. 자신이 폐위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하인리히는 단순한 고해자 자격으로 카노사를 방문하여 3일 동안 기다린 끝에 1월 28일 면죄를 받았다(카노사의 굴욕). 이 사건이 교황권의 지속적인 승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노사라는 이름은 세속적 권력의 교회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로마 가톨릭 실력자들에 대항해 문화 투쟁을 벌일 때 공언한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 사건에서 유래한다. 이 성은 1255년 레조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카노사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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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 성에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카노사의 굴욕 (독일어: Gang nach Canossa; 이탈리아어: l'umiliazione di Canossa)은 1077년 1월경,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관용을 구한 사건을 말한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분쟁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의 대립의 정점에 있었던 사건으로 이후 교회의 권력에 세속 권력이 굴복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지칭 된다. 

역사적 의미
이 사건으로 세속의 권력에 대해 교황권력이 항구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카노사 라는 이름은 세속적 권력의 교회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게 되었다. 나중에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항해 이른바 ‘문화 투쟁(Kulturkampf)’을 벌일 때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라고 연설했는데 이 말은 바로 이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독일은 로마 교황청 등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문화적·종교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라는 천명이었다.

한편 이 사건을 일부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북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으로 간주한다. 교황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가 독일을 몰아내기 시작한 단초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 카노사라는 말은 일종의 굴복, 복종, 항복을 나타낸다. ‘카노사로 가다’라는 표현(영어: "go to Canossa"; 독일어: "nach Canossa gehen"; 스웨덴어: "Canossavandring"; 이탈리아어: "andare a Canossa")은 하기는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쓰인다.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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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라틴어: croisade)은 교황의 호소로 조직된 기독교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군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는 직접적으로 성지와는 관계없는 레콩타나 동유럽에 파견된 동방십자군, 발트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원정을 감행한 북방십자군, 이단에 대한 알비 십자군 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그 취지와는 다르게 십자군측이 예루살렘을 확보한 기간은 1099년 1187년 및 1229년 1244년뿐이었다. 이후 20세기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당시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십자군은 의로운 군대로 이 전투는 성전이 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세계의 여러 나라들 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 문화권이였던 동방정교회의 나라들까지 공격해 들어간 침략군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사자심왕 리처드 등 서유럽의 대표적인 세 나라의 군주들이 함께 참가한 제3차 십자군이 가장 유명하고,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이었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약탈행위 등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했다.

원인 및 배경
3세기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의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 순례 여행을 해왔다. 이슬람의 통치자들이 종교적인 목적의 성지순례를 용인했음에도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를 시작으로 동로마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서유럽은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중심으로 성지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안티오키아(안타키아), 예루살렘 등 그리스도교 성지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단행한다. 그러나 성지 회복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동방정교회를 로마 가톨릭 관할권 아래 흡수, 통합시키고 교황권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더구나 당시 서유럽 내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대표적인 예가 1차 십자군에 참가한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그 동생 볼로뉴의 보두앵이다). 또한 도시 상인들의 시장 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밖에 서유럽 각계각층의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서 십자군원정이 단행되게 된다.

또한 중요한 점은 흔히 알려져 있는“셀주크 투르크의 으로 괴로워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라는 기록은 서유럽 측의 왜곡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당시 알렉시오스 1세 황제의 딸인 안나 콤네나 공주의 기록인 《알렉시아드》와 서유럽 측 역사가들의 기록이 많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평화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이슬람 세계는 내분이 일어나 서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일부 해적들을 제외하고는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십자군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1].

결과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이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아마드 딘 장기(통칭 장기)나 살라흐 엣 딘(통칭 살라딘으로 불림)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 점령시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보였고, 이는 이슬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했다. 심지어는 적인 어린이 십자군이 유럽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자 이들을 해방시켰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써 야기한 내부 분쟁이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라시를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점령한 적도 있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에서 십자군들이 벌인 동방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정교회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교인 동방정교회와 십자군 기사들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하게 고착되어, 1054년에 있었던 교회 역사 최초의 분열 사건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이 고착화되게 했다. 

총론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중세적 통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동질성을 부여해왔던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화되자 각 나라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각개약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 중 이슬람과 비잔티움에서 약탈한 물건들로 발전했다. 십자군은 기독교가 아닌 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렀고 근 1000년동안의 유대인 대학살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근 사백여년 동안 우호적이던 기독교와 이슬람이 적대적으로 되는 시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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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Scholasticism)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철학체계.


종교 교리의 근원을 찾고 신앙과 이성, 의지와 지성, 실재론과 유명론, 신 존재의 증명과 같은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르네상스에서 19세기초까지 스콜라 철학이나 중세라는 말은 경멸과 비난의 표현으로 쓰였다. 중세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근대 사이의 막간극으로 여겨졌으며, 스콜라 철학은 단순히 교훈적 방법을 사용하여 전통적 가르침을 고수하고 쓸모없는 현학적 논의만 일는 철학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시기가 진정한 철학전통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고대와 근대에 견줄 수 있는 중요한 철학자들을 배출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실재론實在論, Realism 인간 인식의 대상이 인간의 지각이나 사고에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철학적 견해.


대상의 독립적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보면 이상할는지 모르나 철학적으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관념론자들은 이를테면 자주색은 마음 외부의 세계에 성질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순수한 자줏빛 단색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어떤 상황에서는 열이 차갑게 느껴지고 회전이 진동으로 느껴진다. 결국 성질들은 관찰자의 마음이 대상에 부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에게 남은 속성이란 무엇인가 대상의 모든 성질이 정신적인 것이라면 그런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실재론자들은 이 사항들을 감안하더라도 대상이 마음에서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어떤 의미가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 '지식', '참된 앎'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epistēmē에서 유래)

인간의 인식의 기원·본질·한계 등을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슨 권리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탐구대상이 인간이라면 인식론은 그 탐구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앎이란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깥 세계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의 문명과 과학의 발달은 바로 인간의 세계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눈부신 과학의 성취로 때로 인간은 세계에 관한 진리를 손에 쥔 것 같은 느낌을 갖기도 하지만, 인간은 또한 언제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이는 과학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 자신의 인식 능력을 탐구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된다. 곧 인식론은 지식에 관한 지식을 목표로 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탈리아 신학자·철학자)  [Thomas Aquinas, Saint, 아퀴나스]


인성·창조·섭리를 다룬 형이상학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들로부터 그 나름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이단 논박 대전 Summa contra gentiles〉이라는 2편의 걸작을 써서 라틴 신학을 고전적으로 체계화한 신학자였으며, 교회 전례에서 사용되는 몇 편의 아름다운 찬송가를 지은 시인이었다. 현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가운데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를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며 신학자로 인정한다(→ 토마스주의, 그리스도교)

 

길드 (유럽 조합) [guild]출처: 브리태니커


수공업자나 상인들이 상호 부조와 보호 및 직업상의 권익 증진을 위해 결성한 조합.
길드는 1116세기에 유럽에서 번성하여 당시 경제·사회 구조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었다.


중세의 길드는 일반적으로 상인 길드나 수공업 길드였다. 상인 길드는 특정 마을이나 도시에서 영업하는 상인들의 전부 또는 대다수가 참여하는 조합이었으며, 조합원들은 지방 상인이거나 원거리 무역상인일 수도 있고, 도매상이거나 소매상일 수도 있고, 취급하는 상품에 따라 각양각색일 수도 있었다. 반면 수공업 길드는 특정 산업의 모든 기술자와 장인을 포함하는 직업 조합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모직업에는 직공(織工)·염색공·축융공(縮絨工) 등의 길드, 건축업에는 석공(石工)·건축기사 등의 길드가 있었고, 도장공(塗裝工)·금속세공인·대장장이·제과기술자·푸주한·무두장이·비누제조공 등의 길드가 있었다(→ 중세). 길드는 지역경제에서 여러 가지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소재지에서나 특정의 산업에서 거래의 독점 체제를 수립하고, 상품의 질과 거래 관행의 보전을 위한 기준을 세우고 유지했으며, 거래 상품과 필수 일용품의 안정된 가격의 유지를 위해 힘쓰고, 조합원들의 권익을 증진하고 그들의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읍이나 시 정부를 통제할 수단을 강구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한 시대의 종식은 또 다른 시대의 출현을 의미한다. 중세 말기의 불안으로부터 근대 서양사회의 출현이라는 발전적 국면이 등장한 것이다. 먼저 중앙 집권적 왕권에 입각하여 통합된 극가들이 출현했다. 백년 전쟁 이후 프랑스와 영국이 중앙 집권화의 길을 걸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을 축출하는 재정복 운동을 통하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라는 두 통일 왕국이 출현했다. 그러나 모든 지역에서 국가적 통합이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는 명목상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최고 주군으로 군림했지만 지방 분권적인 제후 세력이 난립했다. 교황령을 비롯한 여러 공국들과 도시국가들이 분립해있던 이탈리아에서도 통일의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중세말의 사회‧ 경제적인 측면으로는 자본주의의 선구적 요소들이 성장해 갔음을 지적할 수 있다. 길드의 규제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기업 방식을 채택한 대상인 및 은행가들은 화폐라는 새로운 형태의 부를 통하여 봉건적인 경제체제를 붕괴시켰을 분만 아니라 군주 및 교황 등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국가의 형성에 기여했다. 게다가 이미 상당한 정도로 권위를 실추하고 도덕적인 부패와 타락이라는 고질적인 병폐를 안고 있었던 가톨릭교회는 16세기를 맞이하여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시련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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