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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사회와 문화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24. 22:07

  

“진실을 아는 것보다 선을 지향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 페트라르카Petrarca, Francesco(이탈리아 시인·인문주의자) 

 

르네상스의 사회와 문화


위대한 조물주는 인간을 정해지지 않는 성격을  보유한 존재로 만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담, 우리는 네가 살 고정된 장소도, 너에게 특유한 어떠한 형상도, 또한 너 혼자만이 보유하는 어떠한 기능도 부여하지 않겠다. 네 바람과 판단에 따라 너는 스스로 선택한 장소와 형상과 기능을 어떤 것이라도 지닐 수 있다…… 우리는 너를 세상의 중심에 놓아 네가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하겠다. 우리는 너를 천상의 재료나 지상의 재료, 혹은 불멸의 것이나 필멸의 것 중 그 어느 것으로도 만들지 않았다. 따라서 넌,s 자신을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과 권위에 의해서 어떠한 것으로도 만들 수 있다. 너는 보다 열등한 짐승의 수준으로 스스로 타락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지만, 또한 네 지성과 판단 안에 포함되어 있는 보다 숭고한 능력, 즉 신성한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능력 역시 부여 받았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15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 : 중세(中世)를 뒤이은 유럽문명의 한 시기.

문자 그대로는 '재생'을 뜻하는 이 시기는 고전 학문과 그 가치에 대한 관심의 확대가 그 특징기이다. 또한 신대륙의 발견과 탐험, 지동설이 천동설을 대체하는 변화, 봉건제의 몰락, 상업의 성장, 종이·인쇄술·항해술·화약과 같은 혁신적인 신기술의 발명 및 응용이 이루어졌다. 당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에게 르네상스는 무엇보다 오랫동안의 문화적 쇠퇴와 정체의 시기가 끝나고 고전 학문과 지식이 부활되는 시기로 여겨졌다. 

 

메디치가(프)Médicis이탈리아의 부르주아 가문.
메디치 가문의 문장메디치 가문(이탈리아어: Medici) 또는 메디치가(Medici家)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세 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레오 11세)과 피렌체의 통치자를 배출하였으며,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왕실의 일원까지 되었다.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그들도 자기네 도시 정부를 지배하였다.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의 권력 아래 피렌체를 두었으며, 예술과 인문주의가 융성한 환경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페라라의 에스테, 만토바의 곤차가 등 다른 위대한 귀족 가문과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하였다.

 

인문주의人文主義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는 정치사상이다(휴머니즘humanism).

넓은 범위에서 철학의 한 분과인 윤리학에 해당하며, 합리성을 비롯한 보편적인 인간의 입장에 호소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사상에 기본을 둔 대한민국의 동학이 있으며, 프랑스 같은 나라들도 이 사상을 기본 이념으로 두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휴머니즘은 이러한 인간성 존중의 태도를 포함하는 것을 모두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로는 특히 14세기말 이탈리아에서 기원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확산된 이래 근대문화의 요소들 중 하나를 형성한 철학 및 문화 운동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의 휴머니즘은 인류역사에 있어 사회와 국가 조직 및 학문과 문화가 성립되어 있던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 및 사회의 여러 제도들이 형성되면 지배와 피지배, 객관적 제도와 개인적 욕구 사이에는 괴리와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인간성에 대한 왜곡과 억압에 저항하는 흐름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 시대의 인간성 존중, 인간해방의 사상은 그 시대의 인간성의 완성과 인간적 교양의 원동력으로서 작용했다. 그러한 사례들은 그리스인들의 수준 높은 학문과 예술,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등의 종교문화, 인도에서의 힌두교·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의 탄생, 중국의 유교문화 및 로마의 정치·법률과 관련된 실용적 문화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좁은 의미의 휴머니즘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수사학·웅변술·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중세를 지나면서 상실했던 자유의 정신의 재생(renaissance)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인간이 합리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었으며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과 역사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그것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운동은 앞서 언급한 대로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데, 단테·페트라르카·보카치오 등이 대표적인 선구자들이다. 이들을 선두로 하여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상공업의 발달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에 부와 권력이 집중됨에 따라 봉건사회의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고 정신문화면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어 사상의 혁신에 대한 요구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는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르네상스 운동의 전개를 촉진했다. 그는 과거와 단절하고, 철학의 1차적 목표로서 자기 지식을 해명함으로써 유럽의 소크라테스적 전통을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영향력은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보카치오, 콜루치오 살루타티의 저작 속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보카치오는 토속어를 가지고 최초로 서사시를 썼으며, 〈데카메론 Decameron〉이라는 유명한 저작을 남겼다. 살루타티는 페트라르카처럼 도덕론과 정치학에 관한 필사본을 수집했다. 그는 인문주의적 방법의 핵심이었던 문헌 비평의 원리를 수집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15세기에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는 지적이고 예술적인 모든 분야들을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이 시기에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은 메디치가(家)를 비롯하여 피렌체의 여러 유력 가문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인간과 신의 관계,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모든 정신적 태도를 포괄했다. 철학적으로 휴머니즘은 인간을 모든 사물의 매개로 만들었다. 고전문헌을 광범위하게 탐구하면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연구하게 되었다. 성서의 원문대조비평과 문헌학이 탄생했으며, 그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와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다(→ 원문 비평). 또한 후원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고전적인 이상과 형식을 모방한 예술이 융성했다. 고전시대로 돌아가면서 휴머니즘은 진리와 선(善)에 대한 개인적인 탐구에서 영감을 얻었다. 편협한 철학체계, 신학적인 도그마, 절대적인 추론 등은 인간적인 가치를 위해 배격되었다. 그리스도교 사상과 고대 철학을 연관시키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으로 귀결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이탈리아 화가·조각가·건축가) 는 평온함이야말로 회화의 정신이며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평온함을 과학적 정신으로 승화시켜 많은 실험과 발명을 하였으며 인체의 구조를 탐구하여 예술작업에 원용했다.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은 그의 자연주의적 정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진지한 관점에서 비롯한 세밀한 관찰과 강렬한 심리적 통찰이 종합됨 작품들이다. 또한 그는 원근법과 구도를 조화시켜 부드러움과 웅장함을 동시에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서출로서 정규교육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어 라틴어를 배우지 못했던 그는, 오히려 과감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탐색하고 많은 실험을 하였으며,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대단히 혁신적인 제반 기계설계도들을 남겼다. 

 

미켈란젤로[Buonarroti Simoni, Michelangelo di Lodovico]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와 교황의 후원을 받았던 미켈란젤로는, 폭풍 같은 정념과 기질, 자존심으로 다소 뒤틀렸지만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완전히 해방된 천재의 개념을 제시, 단순히 아름다움에만 그치지 않고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꿰뚫고자 했다. 성모마리아의 모성적인 고뇌와 경건한 신앙심이 신비롭게 조화된 <피에타 상>은 최초의 걸작이었으며, <다비드 상>은 젊은이의 오만한 자신감으로 약동하고 있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현란하고 과감한 묘사로 상당히 세속화 되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한편, 삶의 복잡하고 다양한, 심지어 상호 충돌하는 요소들까지 복합적으로 표현하여 섬세하고 인상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와 함께 비장함까지 드러내는 불후의 명작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고전주의는 라파엘로에서 절정을 이루며 끝났지만, 형식에 대한 엄격한 추구, 대상으로서의 광범위한 자연에 대하여 통일의 주제를 이루는 예술이라는 관점은 이후 가장 중요한 저류로 남게 된다.


16세기 중엽이후 해방된 예술가들은 독자적인 창작활동을 하면서 자의식의 증대와 지위향상에 힘입어 귀족으로의 길을 걷기도 하며,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인문주의자들도 역시 예술을 지적이고 도덕적인 교양의 요소로 평가하기 시작했으며, 예술가들도 인분주의적인 교양내지 만능인의 이념에 접근해갔다. 그렇지만 길드로부터 해방된 예술가들이 인문주의 지식인들의 권위에 종속, 동화되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 [Shakespeare in Love]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경쾌하고 교묘하게 재구성하면서, 셰익스피어(조지프 파인스)가 글을 쓰던 중 부딪힌 장벽을 새로운 사랑에서 얻은 영감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 생활을 재구성해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해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시대에 대해 알려진 사실들과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조합해 교묘하게 장난을 친다.


전반적으로 북서유럽 르네상스의 성격은 기독교 인문주의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가 세속주의적인 문화운동의 성격을 띠었다면, 북서유럽의 인문주의는 고전 연구의 비판적 방법을 성경의 해석과 번역 등에 적용하면서 원시 기독교 정신으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종교 비판과 사회 비판의 움직임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16세기 초의 급격한 사회변화로 말미암은 일반인들의 정신적 불안정과 동시에 자신감, 그리고 종교적이며 경제적인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철학체계.

종교 교리의 근원을 찾고 신앙과 이성, 의지와 지성, 실재론과 유명론, 신 존재의 증명과 같은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르네상스에서 19세기초까지 스콜라 철학이나 중세라는 말은 경멸과 비난의 표현으로 쓰였다. 중세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근대 사이의 하찮은 막간극으로 여겨졌으며, 스콜라 철학은 단순히 교훈적 방법을 사용하여 전통적 가르침을 고수하고 쓸모없는 현학적 논의만 일삼는 철학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시기가 진정한 철학전통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고대와 근대에 견줄 수 있는 중요한 철학자들을 배출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에라스무스(Erasmus, Desiderius)네덜란드 출신의 인문주의자.
   북유럽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학자로 〈신약성서〉를 최초로 편집했고, 교부학과 고전 문학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개척한 문헌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특히 그리스어 〈신약성서〉와 교부들에 대한 연구에서 과거에 대한 역사적·비판적 연구의 토대를 이루어 놓았다. 그의 교육에 관한 저술은
형식에 치우친 과거의 교과과정을 지양하고 인간성을 중시하는 고전문학을 새롭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교회의 악폐를 비판하고 먼 옛날의 좋았던 시절을 강조함으로써, 점증하는 개혁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이 욕구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뿐 아니라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에도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앙고백을 통한 격렬한 논쟁의 시대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태도(그는 마르틴 루터의 예정설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황이 주장하는 권력도 인정하지 않았음)를 유지했기 때문에 양쪽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에게는 의혹의 대상이 되었고, 신앙의 정통성보다 자유를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비추는 횃불이 되었다. 

당시 사회와 교회를 풍자해 점진적 개혁을 제시한 『우신예찬』으로 유명하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 2, 7- 1535, 6, 6).

잉글랜드 왕국 시기의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정치가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그는 평생 스콜라주의적 인문주의자로서 덕망이 높았으며, 1529년부터 1532년까지 대법관을 포함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모어는 1516년에 자신이 저술한 책에서 묘사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지닌 상상의 섬나라에 주었던 이름인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주로 헨리 8세가 주장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령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 죄로 정치 경력이 끝남과 동시에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토머스 모어를 시성하였으며,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인력에서 토머스 모어의 축일은 존 피셔와 같은 날인 6월 22일이다. 모어는 1980년 영국 성공회의 성인력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투표 조사에서 37표를 받았다.

토머스 모어는
종교개혁을 부정하고 적극적으로 탄압하였으며, 가톨릭교회를 통한 평화와 사회정의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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