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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사상과 문화

수로보니게 여인 2009. 4. 2. 23:39

 

 

계몽주의 사상과 문화


백과전서의 목표는, 지나간 세기의 성취들이 이어질 세기들에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우리의 자손들이 보다 박식해지고, 동시에 보다 덕스럽고 행복해지도록,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인류로서 부여받은 좋은 자산을 결집시켜서 그 일반적인 체계를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우리들 뒤에 올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드니디드로, 『백과전서』중 「백과전서」항목

 

 

백과전서[百科全書, Encyclopedie, 앙시클로페디] 

정식 이름은 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

(프랑스어로 '과학·예술·기술의 이론사전'이라는 뜻). 18세기 계몽 사상가들이 편찬한 백과사전.

개방적인 태도로 과학과 사상의 진흥을 부르짖은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위대한 문예 위업 가운데 하나이다.

〈백과전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수십 년 동안 프랑스의 정치·사회·문화·학문 모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흔히 이 백과사전의 기고자들을 '백과전서파'라고 한다.(제네바 항목에는 세속화가 기독교를 잠식해감을 시사하고 있다)

 

이신론[理神論, Deism]비정통적인 종교적 태도의 하나.

17세기 전반 에드워드 허버트에서 시작하여 18세기 중엽 볼링브룩 자작 1세 헨리 세인트존에 이르는 영국의 작가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대체로 이신론은 자연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 개념이며, 자연종교란 계시나 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얻는 지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타고났거나 이성을 사용하여 얻을 수 있는 종교적 지식체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종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3가지 지적인 관심사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의 증가, 독단주의와 불관용을 초래한 종교적 계시에 대한 불신, 질서정연한 우주의 합리적 건축자로서의 신(神)의 이해가 그것이다.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이신론은 기독교 자체의 신성함은 인정하면서도 이성과 계시의 결합의 가능성을 보였던 초기기독교 자세를 지향했다. 예를 들어 뉴턴은 지상에서의 사물의 움직임이라는 관점에서 우주의 운행을 설명하며 자연합리성을 입증하려 했지만, 신의 개입가능성과 불확실성의 여지를 남겨놓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성의 관점으로는 교회뿐만 아니라 기존의 기독교 교리도 지탱시키기 어려운 가운데, 계몽사상가들은 이성과 계시의 조화 가능성 조차도 포기하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했다.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  [Huguenot]브리태니커

16세기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동안에 성장했으며 여러 해 동안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다. 위그노라는 이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16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킬 때 분명히 쓰였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마르틴 루터의 저작물들이 유럽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프랑스에서도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는 시작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최초의 순교자가 1523년 화형에 처해졌다. 1534년 10월 가톨릭 미사의식을 맹렬히 공격하는 플래카드가 거리와 왕궁에서 발견되자 가톨릭 세력은 큰 충격과 함께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와 더불어 장 칼뱅을 포함한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피신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곧 귀족들 가운데서도 지지자가 생겨났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도 계속되었으며 1명씩 처형되던 관행이 대량학살로 비화했다. 앙리 2세 치하에서는 대개의 감옥이 위그노들로 가득 찼다.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브리태니커

(프)Siècle de Lumières (독)Aufklärung. 17·18세기 유럽의 지적(知的) 운동.

신(神)·이성(理性)·자연·인간 등의 개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합한 사상운동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예술·철학·정치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이성중심이며, 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지식·자유·행복이 합리적 인간의 목표라고 보았다.

이성 중심 사상을 맨 처음 탐구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로서, 그들은 자연의 질서정연한 규칙성에 지적인 정신이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로마는 자연의 합리적인 질서와 자연법사상을 포함해 그리스 문화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이고 보존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혼란기 동안 개인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고, 이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연결되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점차 그들이 물려받은 그리스-로마 유산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절정을 이룬 '스콜라 철학'이라는 사상체계는 사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이성을 부활시켰으나 동시에 이성을 영적(靈的) 계시와 그리스도교의 계시된 진리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중세 유럽에서 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던 그리스도교의 지적·정치적 체계는 인간중심주의 운동인 르네상스종교개혁에 의해 신랄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인간중심주의 사상은 다시 프랜시스 베이컨,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험적 과학과 르네 데카르트, G. W. 라이프니츠, 뉴턴의 수학적 엄정성을 낳았다. 르네상스는 고전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을 창조적 존재로 이해하는 인식이 부활되었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으며 장기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베이컨·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루터 역시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이성을 적용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프톨레마이오스가 과학에서, 교회가 영적인 문제에서 지녀왔던 권위는 이제 해방된 인간 정신의 검토대상이 되었다. 

 

계몽주의[계몽주의 시대, 계몽사상]한국어 위키백과

계몽주의(啓蒙主義)란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정신사상으로, 계몽사상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18세기를 중심으로 서양철학과 문화적 삶에 있어서 한 시기를 묘사하는 용어로 쓰인다. 그 시기에 이성(理性)이 권위의 주요한 요소이자 기본이라고 지지되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에서 발전되었고 이 운동은 러시아와 스칸디니비아를 포함한 많은 유럽지역에 퍼져 나갔다. 계몽주의 원리는 미국 독립선언,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 권리장전, 그리고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서명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영국의 1689년의 권리장전은 계몽주의 시기보다 앞선 시기이다.

계몽주의의 뜻

Enlightenment(프랑스어 Lumières, 독일어 Aufklärung)를 번역한 한자어 계몽(啓蒙)이란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nlightenment 사상의 다만 한 부분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한자어 번역이 그러하듯이 이 번역은 한국어로 그리 또렷한 뜻을 전달해 주고 있지는 않다.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이른바 계몽사상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문명에 고취되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을 앞에 내세우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의 힘을 빌어 자연과 인간  관계, 사회와 정치문제를 낙관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시대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정신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권을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중세 시대를 지배한 종교 신학의 독단 교시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으며, 이 노력의 첫 장을 연 철학자로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존 로크를 손꼽을 수 있으며 그리고 프랑스는 계몽주의의 꽃을 피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계몽주의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게 후반에 걸쳐서 일어났던 유럽의 지적인 운동이다. 특히 절대주의 구체제사회의 일반적인 세계관과 철학 및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맹렬한 지적 공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작업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몽테스키외, 볼테르, 달랑베르, 디드로, 루소 등 이른바 계몽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신, 이성, 자연, 그리고 인간 등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여 종합적인 세계관을 이루어 내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지적인 제안이 당시에 광범위한 동의를 얻은 동시에 예술, 철학, 정치학, 등에서 혁신적인 움직임을 산출해냈다는 것이다. 특히 계몽주의 사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이성이다. 즉, 인간은 이성의 힘에 의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조건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적인 인간이 추구해야할 목표는 지식, 자유, 그리고 행복으로 간주 되었다.

계몽주의는 또한 문화현상이기도 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성적인 상태와 지적인 성취에 기반하여 기존의 가치관 및 관습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인간 사유와 행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문인이고 예술가였다. 이들의 저서와 작품은 사회 곳곳으로 전파되어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수용되기도 했다.

대부분은 부르주아, 일부는 귀족 출신이었던 계몽 사상가들은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었지만, 인간의 이성에 의한 진보를 확신했다. 특히 이들은 합리주의적이고 진보주의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일반적 진보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믿음은 물질적인 풍요와 편의의 증진에 대한 전망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도 함축했다. 예컨대 볼테르는 안이한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은 채, 사회 전체적으로 건전한 이성이 행사될 때에만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반면 이성과 정념의 충돌을 암시했던  장 자크 루소는 물질적 진보를 인간 불행의 원인으로 파악했다.

계몽주의가 와해된 시기를 정확히 포착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아마도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시기일 것이다. 특히 그 기반이 되었던 합리적인 자연관과 인간관이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히면서 계몽주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고 계몽주의가 쇠퇴하던 시기에 서구정신은 끊임없는 변화라는 관점에서 모든 인간사 및 과학적 문제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고, 이는 19세기적 사유로 나아가는 기반이 되었다.

 

요약     

     **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서 일어났던 유럽의 지적운동이었다.

     **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달랑베르, 디드로, 루소 등이 있다.

     **  하나의 사상인 동시에 문화현상이었다.

     **  새로운 후원자가 등장하면서 예술 감상자 층이 증대했다.

     **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단순한 장인과 구별하기 시작했다.

     **  프로이센은 프랑스 문화를 추종했다.

     **  기존의 모든 가치와 신조들을 비판했다.

     **  19세기적 사유가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주의 사유의 성과를 종합했다.


영원성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발견과 통찰의 충격에 따라 사유의 흐름이 이동되거나 중단되곤 했다. 

절대주의체제의 위기라는 현실을 배경으로 서구 문명사에 존재했던 모든 가치와 신조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반의 확립을 모색, 인간중심적인 합리주의라는 종합을 이루어냈다. 무엇보다도 이 속에서 역사의식이 성장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계몽주의가 쇠퇴하던 시기에 서구정신은 끊임없는 변화의 관점에서 모든 인간사 및 과학적 문제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게 되었고, 19세기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길을 연 것이다.  

대표적 계몽사상가

존 로크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헤겔

장 자크 루소

칸트

 


계몽주의의 사상과 문화, 요약

                                                                                                                                   박 경 우 교수


1. 계몽주의의란 무엇이며, 계몽주의 문화적 측면에 대해 설명하시오.


계몽주의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서 일어났던 유럽의 지적 운동이었으며, 거기서 사람들은 신, 이성, 자연, 그리고 인간 등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여 종합적인 세계관을 이루어 내려 했다. 또한 이 비판적인 작업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을 몽테스키외, 볼테르, 달랑베르, 디드로, 루소 등과 같은 이른바 계몽사상가라는 사람들과 일치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 사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이성의 축성이다. 즉 인간은 이성의 힘에 의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조건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적인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지식, 자유, 그리고 행복으로 간주되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계몽주의의 움직임에는 프랑스 사람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유럽 전반적인 지적 움직임이었고, 프랑스 이외의 지적인 전통과 업적에도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는 여러 국면에서 위기가 표출되었던 시기이다. 문화적인 국면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루이 14세 치세가 종식되면서 종래에 신성시되었던 군주제의 표상체계는 철학서적의 유통 및 종교 관행의 변화와 함께 약화 문학과 예술은 궁정이 아니라 대귀족과 대부호의 살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리하여 궁정 중심적인 문예활동이 귀족의 도전을 받은 후에 다시 부르주아적 주관주의에 의해 문화적 해체과정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18세기 초에 새로운 예술사조로 나타난 로코코 양식이다. 와토(Watteau)는 감각적이면서도 경쾌한 양식과 현란한 색채는 당시 사교계의 특성을 상징하고 있다. 아카데미가 주도했던 인습적이고 궁정적인 경향에 반발하여 보다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며 은밀한 예술관을 지향했던 이 양식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부유한 귀족과 대 부르주아들을 위한 향락적인 양식이었다.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지의 문화적 융해의 양상을 띠기도 했지만 동시에 경직된 사회적 위계 속에서 심화된 양 집단의 문화적 경쟁을 반영하기도 한다. 여기서 부르주아는 점차 자연주의적 경향에 기울어가면서 실천적,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표현해가는 문화적 분화현상을 보인다.

 

1750년경 로코코 양식에 대한 새로운 반동으로 신고전주의가 나타난다. 맑스주의자들은 신고전주의가 사회의 가장 진보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부르주아의 이념과 정열을 대변하고 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디드로(Diderot, 17131784년)는 로코코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으며, 화가인 그뢰즈와 샤르댕은 교양 있는 중간층 시민들을 위한 교훈적인 풍속화들을 발표하면서 디드로의 이론적인 입장을 예술적으로 형상화시켰다.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삶은 신고전주의에서 보다 진보적인 사상을 전달하는 기능을 부여받았다. 권위주의적 왕실의 영향과 후원제는 여전히 완강하여, 예술가 개인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 당시의 문화적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볼테르(Voltaire, 1694~1778년)식의 냉소적 태도와 온건한 반발을 동반한 문화적 비관주의였다.

 


2. 계몽주의의 사상적 사유(종교, 과학, 국가,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하시오.


1756년 달랑베르(d’Alembert, 1717~1783년)는 『백과전서』의 “제네바” 항목에서 세속화가 기독교를 잠식해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일종의 전환의 기회를 마련코자 했다. 여기서 세속화란 종교적인 제도와 해석이 점차 사람들 삶의 주변으로 밀려남을 의미한다. 17세기 말에는 종교의식의 규칙성과 보편성이 확보되었다. 반면 대조적으로 18세기에 들어서는 절대왕정이 약화되어 가면서 사람들의 종교적인 태도에서도 근본적인 변화 곧 세속화의 양상이 나타난다.


지성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세속화양상은 자연과학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8세기 중반에 자연과학자들은 객관성이라는 기준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과학적 관찰과 연구에 입각한 지식을 더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세속화양상이 두드러지는 것과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이신론의 영향력이 커져갔다. 이신론은 종교를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로서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자체의 신성함은 인정하면서 이성과 계시의 결합이 가능했던 초기 기독교를 지향했던 이신론은 결코 하나의 조직된 종파나 움직임이 될 수는 없었지만, 두 세기에 걸쳐서 기존의 기독교와 대면하고 충돌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이신론의 영향이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으며 또한 그 급진성의 강도도 강했다. 이 중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년)는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지만, 볼테르는 뉴턴의 사상을 수용하되, 그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는 과격한 이신론의 입장을 보였다. 볼테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사회적 유용성에 따라 ‘시계 제작자’로서의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종교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 계몽 사상가들은 절대왕정의 제반 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과학혁명의 지적 성과를 본격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학을 제창한 것이다. 18세기 중반의 계몽 사상가들은 세속화된 뉴턴주의의 이름으로 ‘개별’로부터 ‘전형’을 탐색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인간관에 적용시켜 나갔다. 이는 뉴턴과 로크의 경험주의에 입각하여 17세기의 지적 주류였던 데카르트의 관념론적인 합리주의에 가하는 도전을 의미했다. 또한 이것은 원죄설에 입각한 기독교의 비관주의적인 인간관에 대한 반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은 ‘본질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고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보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사회과학자로서의 특성은 사회 개혁에 대한 강렬한 욕구이다. 몽테스키외의 실증적인 상대주의의 입장으로 표출 신앙, 전통, 체제, 풍속의 다양성이 여행자들에 의해 입증되면서 이러한 다양성을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원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19세기 콩트에 앞서서 계몽주의자들은 사회과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로크적 경험주의보다 다시 데카르트적인 합리주의에 기우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따라 사회과학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개념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특히 그들이 독자적인 방법론과 새로운 학문적 발견을 제공했던 전문학자들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사회개선을 추구했던 박식가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지식과 실천 간의 조화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계몽 사상가들의 요망사항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론을 포기할 수도 없었지만 현실에 안주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3. 계몽주의자들의 계몽주의적인 개혁 프로그램이 각각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설명하시오.


계몽주의의 실천과 원칙 사이의 관계는 복잡한 문제이지만, 그 개혁 프로그램에 따라 다양한 정치, 사회 및 경제 사상이 출현했다. 정치적인 국면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절대주의체제를 극복했던 영국과 네덜란드를 모델로 보다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통치형태에 꾸준한 관심을 할애했다. 그렇지만 절대주의체제의 완강함 앞에서 어떠한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몽테스키외는 입헌군주정의 수립을 추구했는데, 그 체제에서 왕권은 고등법원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었다. 또한 중산층 출신이었던 볼테르는 특권층의 보루인 고등법원의 대표성을 부인하고 왕권을 지지했으나, 일관된 입장을 보였다기보다는 경험 혹은 상황에 따랐고, 디드로는 왕과 귀족 사이에서 벌어졌던 분쟁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수시로 입장을 바꾸어 갔다.


무력한 분위기 속에서도 탁월한 정치이론을 제시한 사람은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1762년)을 집필루소(Rousseau, 1712~1778년)는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억압하는 문명을 총체적으로 공격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그 도덕적 능력을 함양할 수 있는 사회를 모색했다. 자신의 사회계약론으로 그 미비점을 극복하고 보다 혁명적인 전망을 제시한 것이다.


수량에 관심이 많았던 계몽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 분야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유럽의 지배적 경제이념이었던 중상주의는 권력을 부에 우선 시켰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산층은 권력보다 부를 중시하는, 요컨대 덜 호전적이고 보다 역동적인 경제이념을 열망하게 된다. 이미 루이 14세 치세에서 케네(Quesnay, 1694~1774년) 등은 중농주의 이론을 통하여 토지 소유자들에게 농업경영에 투신할 것을 촉구했다. 중농주의자들 역시 자연적 조화와 합리적 체계라는 관점으로 경제를 파악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스코틀랜드인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이론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물론 스미스는 이들 중농주의자들의 이론에서 그 농업중심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그것을 산업화를 위한 경제이론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디드로 등의 계몽주의자들도 농업만이 아니라 각 경제부문의 목소리를 존중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의 개입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경제적 논의는 재산권의 측면에서도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계몽 사상가들은 ‘신성한 재산권’이라는 로크의 생각에 동의하여, 기존하는 부의 분배구조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반면 루소는 경제적 평등이 동반되지 않으면 정치적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18세기 후반의 비등(飛騰)하는 분위기는 평등한 공동체라는 루소의 개념까지도 넘어서는 급진적인 사상가들을 출현시켰다. 모렐리(Morelly)와 마블리(Mably, 1709~1785년)는 ‘평등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사유재산이 사회적 불행의 원천임을 설파함으로써 소위 공산주의적 계몽주의의 입장을 수립시킨다. 프랑스 혁명 중 바뵈프(Babeuf, 1760~1797년)는 진정한 평등이야말로 자연의 규범이라 생각하여 그 규범을 확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혁명을 모색하다가 처형당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19세기의 사회주의를 예비했던 셈이다.



4. 당시의 구체제의 현실과 계몽주의의 전망에 대해 설명하시오.


절대왕정은 문예정책을 시도하여 이데올로기적인 국가기구를 창출코자 했다. 새로운 문화집단 및 문화적 기준의 창출을 통하여 일종의 전(全) 사회적인 통제를 추구한 것이다.


절대주의의 문예정책은 지식인과 문인들에게 지위와 수입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그들 사이에 위계와 차별을 산출해내기도 했다. 즉 절대주의적인 후원제도 안에 들어와 있는 문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구분, 그리고 그 틀 안에서의 위치에 따른 서열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결과로 17, 8세기의 문인들은 권력에 대한 감각과 욕구를 드러내기도 했으며, 독특한 집단의식을 표명하기도 했다. 17세기의 피에르 베일은 학식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폐쇄적 성격의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는가 하면, 18세기에 들어와서 몽테스키외는 귀족 엘리트들에 의한 권력의 재 장악을 원하였다. 이런 점에서 “문단정치”, 요컨대 “지성의 지배”가 정치적인 장과 문학적인 장 사이의 관계를 변모시켰다는 토크빌의 분석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사회 안에서의 명확한 지위와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바램과는 달리 지식인들은 여전히 상당한 딜레마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영국의 성장, 즉 정치적 자유, 종교적 관용, 경제적 성공, 문화적 근대성, 과학의 발전 등에 자극받아서 새로운 언론지, 클럽, 도서관들을 무대로 한 논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교회의 통제는 완강했고, 여기에 의회와 정당 등 정치적 토론을 위한 공적인 공간의 부재, 자유 언론의 미흡함, 특히 문맹 대중의 존재 등 현실적인 제약을 뛰어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사회구성 면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당시 시민과 귀족, 왕권은 각기 대립하고 있었고, 시민 역시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문화적 복잡성을 노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지적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야심으로 가득 찼던 계몽주의 지식인, 그리고 신분상승 및 정계 진출이 순조롭지 못하여 불만에 가득 차있던 제3신분, 이 양자 사이의 연대가능성도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난처함 속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일종의 타협을 택하기도 했다. 즉 개혁은 활발하고 개명된 주권자인 계몽 전제군주에 의해서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다는 계몽 전제주의의 입장을 시도해 본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던 군주들은 서유럽에 비해서 여러 모로 낙후되어 있었던 동 유럽의 절대군주들이었다. 즉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등이었다. 이들은 계몽주의자들의 사유를 받아들여 주로 정부조직의 합리화, 세금감면, 무역에 대한 부담 제거, 법률의 합리화 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프랑스 재정 위기를 해결하려는 루이 16세의 시도에서도 계몽사상의 영향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계몽 전제 군주들의 개혁은 계몽주의의 이론보다는 16, 17세기부터 비롯되었던 관료제적 합리주의의 전통에 의존한 바가 더 크다. 오히려 계몽 사상가들이 계몽 전제군주의 힘과 권위를 정당화시키면서 절대주의적 사고방식을 조장하고 거기에 덧붙여 전쟁과 농노제와 같은 잔인한 사회정책을 용인한 측면 또한 없지 않다.


결과적으로 계몽사상가들은 기존의 문명과 타협하는 동시에 또한 전쟁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스스로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때로 인식의 왜곡과 판단의 천박성을 보이기도 했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비생산적인 현학을 비판하면서도 무지를 규탄하고, 사변을 경계하면서도 지적 유희를 즐기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5. 계몽주의가 당시 여성의 성역할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시오.


계몽주의 문화 영역은 당시 여성의 활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당시 가장 ‘사교적’이고 ‘개화’되었음을 자랑하던 프랑스는 여성들에 대해서도 가장 호의적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여성들에게는 남성들과의 지적인 교류 영역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살롱을 제공되었으며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여성의 지적 활동을 옹호했다.


이런 점에서 루소의 반 여권론은 흥미롭다. 그는 당시의 살롱 여성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공연히 자신들에게 맞지도 않는 남성들의 영역에 끼어들어 쓸데없는 독서나 말장난을 일삼으면서 가정적인 불충실과 풍습의 타락, 도덕적인 해이를 초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여성들은 그 본연의 영역인 가정에 충실하면서 그 안에서 스스로의 권한을 신장시켜야 합당하다는 것이다. 루소의 주장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상류층 여성들은 그 표면적인 화려함과 발랄함에도 불구하고 부친 혹은 남편의 지위가 절대적이었던 가정의 틀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데 심한 장애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혁명 후 베르사유에 있던 루이 16세 일가를 파리로 데려오는 시민들의 행진에서 서민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데에서도 확인된다.


이상의 상황은 이후의 역사전개를 통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수립된 “루소적”인 공화체제는 점차 여성들을 정치적 참여 및 공공의 영역으로부터 배제시켜 갔다. 이와 함께 ‘사교적’이고 ‘개화’된 국가로서 프랑스의 위상은 깨어졌다. 화려하게 치장된 살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계몽주의기의 페미니즘은 불행히도 안정된 유산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이후 19세기의 가부장적인 부르주아의 사회의 지속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6. 계몽사상이 프랑스혁명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하시오.


계몽주의는 신분제에 기반한 특권집단에 맞서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민중을 제외한 모든 계층, 특히 절대왕정이 육성해 낸 특권집단에 의해서 주조되었고 또한 공유되었던 이념으로도 볼 수 있다.


분명히 혁명 이전의 프랑스 사회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시민사회 혹은 부르주아 사회는 아니었다. 소위 『백과전서』와 같은 서적의 독서 대중을 이루는 사람들도 상인과 실업가 집단이라기보다는 행정, 사법 분야에 종사하는 엘리트들이었다. 이는 기존 체제의 가치관이 그와 양립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와 병행하고 또한 잠식되어가는 동시에 그것을 포섭해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혁명과 관련되는 몇 가지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지적해 볼 수 있다. 우선 평등의 이념이다. 평등에는 세 가지 개념 정도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법 앞에서 평등이다. 이 개념은 1789년 10월 26일에 제정된 <인간과 시민을 위한 권리선언>에 명기되어 있다.


두 번째로 정치적인 평등의 조건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 경제적 평등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재산에 관한 문제와 결부시켜 볼 수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 사회ㆍ경제적 불평등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우선 앞서 언급한 <인권선언>은 재산의 신성불가침성의 이념을 천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유의 개념이다. 여기에도 인신 상의 자유, 사회활동의 자유 및 경제활동의 자유 등이 내포된다. 전반적으로 혁명은 제반 자유의 권리를 확립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주목할 것이 프랑스혁명으로 보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가능성이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계몽주의는 절대주의체제의 위기를 현실적 배경으로 하여 서양 문명사에 존재했던 모든 가치와 신조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모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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