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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대한 이해 / 훈민정음 제작의 목적 / ‘한글’의 유래에 대하여

수로보니게 여인 2009. 5. 29. 21:13

 

 

제12강 언어에 대한 이해 

                                                                                    

                                                                                                             이호권 교수

      

1. 언어 습득을 설명하는 두 가지 이론


(1) 경험주의적 이론 또는 행동주의적 이론

  원리: 어린이의 언어 습득은 인간의 선천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경험적, 후천적 훈련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는 언어에 대한 아무런 선천적 지식이 없는 백지상태에서 언어를 반복해서 듣고 따라하고 시행착오들을 교정해 가면서 언어를 습득한다.

  ☞ 문제점: 반복 학습에 의해서 언어가 습득된다면 언어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문장을 무한히 만들어 내거나 이해하는 능력을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4-5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무한한 수의 문장을 생성하는 창조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


(2) 합리주의적 이론

  ☞ 원리: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일반 언어에 대한 구조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을 타고난다. 이러한 언어 능력은, 어린이가 생후의 언어 경험을 통해 특정 언어를 빠르고 완전하게 습득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 언어 습득 과정

     ■ 개별 언어에 대한 경험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가설 세운다.

     ■ 경험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가설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좀 더 타당성 있는 가설로 발전시킨다.

     ■ 개별 언어를 완전히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규칙 체계를 형성한다.

  ☞ 합리주의적 이론의 근거

     ■ 인간만이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유사한 유인원이 인간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때 인간은 경험에 근거해서만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언어 능력을 타고난다고 가정함으로써 인간만이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 인간은 누구나 완전하게 언어를 습득한다.(언어습득의 균일성)

        수학이나 과학을 배우는 데에는 능력의 차이가 있지만 언어는 지능에 관계없이 누구나 능숙하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습득한다.

     ■ 인간은 언어를 완전히 능숙하게 습득한다.(언어습득의 통달성)

        어린이들은 각각 다른 환경에서 불완전한 언어 경험을 가지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능숙한 정도로 언어를 습득한다.

     ■ 언어는 극도로 추상적이고 고도로 복잡하다.

        언어학자들이 수백 년 동안 이상적인 문법을 써보려고 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을 정도로 언어는 추상적이고 복잡하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불완전한 자료를 이용하여 매우 짧은 시간에 언어를 습득한다.

     ■ 인간을 언어를 창조적으로 사용한다.

        인간은 무한한 수의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주어진 문장에서 생략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등 단순히 경험에 의한 지식이라고 이해하기 어려운 창조성을 발휘한다.


2. 언어와 문화, 언어와 사고

언어와 문화, 언어와 사고는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1) 언어와 문화, 언어와 사고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 에스키모 말에는 눈(雪)을 가리키는 말이 발달되어 있다.

 ■ 언어에 따라 색을 구분하는 단어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무지개 색의 수를 다르게 이해한다.

 ■ 인구어에는 열(熱)을 가리키는 동사는 없고 명사만 있었기 때문에 열을 역학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2) 언어와 문화, 언어와 사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다.

 ■ 단어가 없다고 해서 인식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 언어가 없어도 사고할 수 있고 음악이나 미술로 표현할 수 있다.

 ■ 문화나 사고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은 실제 세계에서 남녀의 성(性) 구분을 잘 하지만 언어적으로 성 범주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제13강 훈민정음 제작의 목적

 

훈민정음(국어학)  [訓民正音]브리태니커

조선시대에 한글이 창제·반포되었을 당시의 공식 명칭, 또는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

여건-동기-역사적 사명 등을 따로따로 구분해서 고찰해야.

문자생활을 하지 못하는 하층민들을 위해 만들어짐(한자폐지 설 NO) 

 

1443년(세종 25년) 완성되어 1446년 음력 9월 상순(양력 10월 상순)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말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한때 언문(諺文)·언서(諺書)·반절(反切)·암클 등으로 낯춰 불리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한글'이라고 한다. 문자체계의 특징은 한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는 음소문자(音素文字)이면서 음절단위로 적는 음절문자의 성격을 함께 지닌 점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체계는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모두 28자였으나, 그중 초성의 ',,ㅿ'과 중성의 ''가 폐기되어, 오늘날에는 24자만 쓰인다. 그밖에 28자를 이용한 병서(竝書)·연서(連書) 문자가 쓰였으며, 성조를 표시하는 방점이 쓰였다.

〈훈민정음〉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랏말

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 이런 젼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 노미 하니라 내 이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를 노니 사마다 니겨 날로 메 便安킈 고져 미니라"라는 서문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함께 새 글자 창제의 바탕을 이룬 정신이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가 중국 글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고 있으나 이는 중국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우리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한 점에 민족자주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어린(어리석은) 백성'이란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민본정신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제과정은 조선시대의 일종의 연구소인 집현전의 학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지속적으로 세종의 사업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당시의 유일한 언어학이었던 중국 운학(韻學)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중국 운학은 일종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연구로서 그 주된 목적은 운서편찬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 운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문적 경향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북돋우었고, 그것이 국어의 표기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이어진 결과 훈민정음 창제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세종이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의문나는 점을 물었고,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랴오둥[遼東]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찾아가서 음운에 관하여 물어보게 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 세종은 3년간의 보충연구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어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는 한편,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소개하는 책 이름을 글자 이름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 하여 판각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1940년 7월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이한걸(李漢杰)의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을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한문본, 〈훈민정음〉원본이라고 한다. 목판본 1책 33장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 : 네 테두리가 2줄로 됨)에 유계(有界 : 책의 행간에 경계선이 있음)이고, 소흑구(小黑口 : 책의 중간인 판심의 위아래에 가느다란 검은 줄이 있음)로 되어 있다. 발견 당시 책의 처음 2장이 빠진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을 때 실수하여 '세종어제서문'의 끝자인 '耳'자가 '矣'자로 바뀐 듯하다(〈세종실록〉에는 '耳'자로 기록됨). 이밖에 주해본 〈훈민정음〉으로는 희방사본(喜方寺本)·박씨본과 일본의 궁내성본(宮內省本)·가나자와본[金澤本] 등이 있다.


 제작 목적

                                                                                                                                                    이호권 교수


1. 훈민정음 제작의 목적은 훈민정음(訓民正音)서문에 있는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사마다  수 니겨 날로 메 便安킈 고져  미니라)’ 즉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라는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2. 여기 훈민정음서문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한문을 사용하는 지식인 계층과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자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일반 백성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3. 만약 훈민정음이 지식인 계급까지 포함하는 모든 백성을 위한 문자라면 순전히 훈민정음으로만 씌어진 서적이 한 권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지만 세종 때에 간행된 서적 가운데 한자가 사용되지 않은 서적은 단 한 권도 없다.

4. 당시의 서적들을 검토해 보면, 지식인 계급만을 염두에 둔 각종 공문서나 역사 기록, 학술적 논의 등에는 순전히 한문만을 사용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교화할 목적으로 간행된 서적에만 훈민정음을 사용하는 이원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5.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세종은 한자와 훈민정음(한글)을 함께 사용하는 이원적인 문자 생활을 계획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6. 한 서적 안에서 한자와 훈민정음을 함께 사용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한자음 없이 한자만을 쓰는 방식이 한 가지이고, 한자에 한자음을 다는 방식이 다른 한 가지이다.

  예) 海東 六龍이 샤(용비어천가 제1장)

      世솅尊존이 象頭山산애 가샤(석보상절 6:1)

7.  용비어천가 」에서와 같이 한자음을 달지 않고 한자만 사용하는 경우는 그 독자가 한문에 능통한 사람인 경우이고, 석보상절 에서와 같이 한자에 한자음을 다는 경우는 그 독자가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백성까지 포함하는 경우이다.

8.  용비어천가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는 내용으로 굳이 일반 백성들이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온전히 한문으로 씌어진 문헌이고 그 중간 중간에 위의 예에 보이는 국한혼용의 노래가 들어 있다. 한문에 능통하지 않은 일반 백성은 본문이 한문으로 씌어진 이 문헌 자체를 읽을 수 없었고, 자연히 국한혼용의 노래도 읽을 기회가 없었다고 할 것이다.

9. 반면 석보상절 은 석가의 일대기를 다룬 종교 서적이므로 일반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널리 읽힐 가치가 있었다. 따라서 한자가 책을 읽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훈민정음으로 한자음을 달아두어야 했던 것이다.

10. 이원적 문자 생활을 목적으로 했던 세종의 뜻은 후대에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1. 성종 12년과 13년에 각각 간행된  「 두시언해와 금강경삼가해 가 그 좋은 예이다.

  예) 東녀그로 萬里예 녀가 興을 탐직니(두시언해 7:2)

      다 隔격야셔  보고 곧 이  알며(금강경삼가해 2:3)

12. 두시언해의 한자에는 한자음이 달려 있지 않고,  금강경삼가해 의 한자에는 한자음이 달려 있음을 볼 수 있다. 

두시언해는 고급의 문예물이라고 할 수 있는 두보의 한시이므로 그 독자가 지식인 계층으로 한정되고 따라서 굳이 한자음을 달 필요가 없었다. 한편 금강경삼가해는 종교 서적이므로 교화 대상인 일반 백성을 위하여 한자음을 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3. 문헌의 성격이 한자주음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불교 관련 서적이라고 해서 한자주음이 반드시 행해진다거나 문예물이라고 해서 한자주음이 절대로 행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4. 오대산 상원사 중창시에 세조가 내린 대산어첩(臺山御牒) (상원사 중창 권선문)은 불교와 관계가 있는 내용이지만 한자 주음(注音)이 행해지지 않았고, 문예물인 백련초해(百聯抄解) 에는 언해 부분에 한자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15. 대산어첩 은 임금이 내리는 어첩이라는 글의 특성상 일반 백성을 독자로 하지 않기 때문에 한자주음이 불필요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에 백련초해 는 문예물이기는 하지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배려하여 한자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16. 이상의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세종은 모든 백성이 문자 생활을 하도록 할 목적으로 훈민정음을 제작하였으나, 이는 한자를 폐지하고 훈민정음만 쓰자는 것은 아니었다. 한자를 쓸 수 있는 계층은 한자를 쓰고 그렇지 않은 계층은 훈민정음을 쓰는 일종의 이중적인 구조를 의도하였던 것이다. 

 

 

석보상절(세조 편역서)  [釋譜詳節]브리태니커

조선 세종수양대군이 한글로 편역한 석가모니의 일대기.

 

보물 제523호. '석보'는 석가의 일대기, '상절'은 중요한 것을 상세하게 쓰고 그렇지 않은 것은 생략한다는 을 뜻한다.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가 1446년(세종 28) 세상을 떠나자 그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종은 석가의 일대기를 엮도록 명했다. 〈월인석보서 月印釋譜序〉에 의하면 승(僧) 우(祐)와 도선(道宣)의 〈석가보〉·〈석가씨보〉를 토대로 책을 만들어 이를 번역했다고 한다. 〈석보상절〉에는 위의 두 책 외에도 〈법화경 法華經〉·〈아미타경 阿彌陀經〉·〈지장경 地藏經〉·〈약사경 藥師經〉 등 여러 불경이 포함되어 있다. 모두 24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 전하는 것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권6·9·13·19의 4권과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권23·24 2권의 초간본과 복각(復刻)된 중간본인 권3·11의 2권이 있다.

조선 초기 국어와 한자음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유려한 문장으로 다른 불경언해와 달리 문학적 가치가 높다. 최초의 번역불경이며, 또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국문활자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권6·9·13·19는 1955년 한극학회에서 영인했고 권11은 1959년 어문학회에서, 권23·24는 1967년 동악어문학회에서 영인했다.(국어로 쓰인 산문의 효시)

 

참조항목 

불경언해의 범주에 대한 적용문제

<월인석보>의 설명부분

<월인천강지곡>의 편찬배경

조선의 역경(譯經)사업

한글맞춤법의 역사  

 

두시언해(조선 시집)  [杜詩諺解, 분류두공부시언해]브리태니커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 한시를 언해한 시집.

  원이름은 〈분류두공부시언해 分類杜工部詩諺解〉이다. 활자본. 전 25권으로 간행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1·2·4·5·12권이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초간본은 세종~성종 대에 걸쳐 왕명으로 승려 의침·유윤겸·유휴복·조위 등이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 간행되었다. 두보의 시 1,64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52부로 분류하였다. 당시 두시에 밝은 사람은 신분과 상관없이 기용한 대대적인 번역사업이었다. 중간본은 목판본으로 150년 뒤인 1632년(인조 10)에 간행되었다. 이 중간본은 초간본을 복각한 것이 아니라 교정한 것이므로, 초간본의 15세기 국어에 비하여 17세기 국어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 가치를 지닌다. 초간본과 중간본을 비교해 볼 때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초간본에는 '△'·''·''을 사용하였고 자음동화 현상이 뚜렷하지 않으며 구개음화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 중간본에서는 '△·' 이 'ㅇ'으로 바뀌고 받침 'ㄷ'이 'ㅅ'으로 변화되었다. 자음동화 현상에 의해 표기가 달라졌으며(뇨→뇨), 구개음화 현상이 나타난다. 한글음운변천과정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순수 고유어가 풍부하게 쓰였고 문체에서 운문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최초의 국역(國譯) 한시집이며 국어국문학연구의 중요한 문헌이다. 7, 8, 15, 16권, 20~25권은 통문관(通文館)·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에서, 6권은 국어학회에서 영인·간행되었다. 


 제14강 ‘한글’의 유래에 대하여

                                                                                                                                              고성환 교수


  ‘한글’은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 사용되는 문자이다. <국어> 제14강에서는 ‘한글’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유래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와 관련하여 ‘한글’이라는 이름을 갖기까지 우리 문자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 왔는지 간략히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우리 문자 이름의 변천

   

1. 훈민정음(訓民正音)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은 세종 임금이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한 문자를 완성한 1443년(세종 25년) 이후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당시 세종 임금이 새 문자를 만들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새 문자의 제작 원리를 해설하기 위해 펴낸 책인 <훈민정음>(1446년)은 문자의 이름이 그대로 책의 이름이 된 것이라 하겠다.  ‘훈민정음’이란 이름을 풀이하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인데, 글자의 이름에 ‘소리’가 들어간 것은 새로운 문자가 한자처럼 뜻을 나타내는 뜻글자가 아니고 소리를 적는 소리글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편 ‘훈민정음’은 줄여서 ‘정음(正音)’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려 있는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보면


          癸亥冬我殿下創製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 以示之, 名曰訓民正音 …

(계해년 겨울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라는 구절에서 ‘정음’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2. 언문(諺文)

  ‘언문’이란 말은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전에 이미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는 한문에 상대되는 뜻으로 ‘격이 낮은 글’을 뜻하던 것이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문자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게 된 듯하다. <세종실록> 계해년(1443년) 12월조에 보면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 乃成字 …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는데, 그 글자는 고전을 본땄으며, 초․중․종성으로 나뉘어 합한 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고 하여 당시에 이미 ‘언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언문’이라는 이름은 세종 26년 최만리 등이 낸 상소문에서도 여러 번 나온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고,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이제 (중국과) 글과 법을 같이 할 때에 이르러 언문을 만든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설혹 언문이 모두 옛 글자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 새 글자가 아니라 해도…


  한글은 ‘언문’ 외에도 ‘언서(諺書)’, ‘언자(諺字)’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언서’라는 이름은 한문을 ‘진서(眞書)’라 부르는 것에 대하여 구별 짓기 위한 말이었다. ‘언자’는 입말에는 쓰는 일이 별로 없고 글말에서 주로 쓰였다고 한다. ‘언서’와 ‘언자’는 각각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쓰인 예가 발견된다.

  이 외 부녀자들이나 익히고 쓰는 문자라 하여 ‘암클’이라 부른 일도 있고, 세종대왕께서 용변을 보실 때 창살을 보고 만들었다는 터무니없는 설에 근거하여 한때 ‘창살글자’ 또는 ‘뒷간글자’라 불리기도 했다 한다.



3. 반절(反切)

  1527년(중종 22년)에 최세진이 펴낸 <훈몽자회(訓蒙字會)>라는 책에서 우리 문자에 대하여 ‘반절’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반절’이란 원래 한자의 두 자음(字音)을 반씩 따서 한자음을 표시하는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東(동)’자의 음은 ‘德(덕)’의 초성(중국 운학에서 말하는 ‘성모(聲母)’에 해당) ‘ㄷ’과 ‘紅(홍)’의 중성 및 종성(중국 운학에서 말하는 ‘운모(韻母)’에 해당) ‘옹’을 합친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


          東: 德紅[ᄃ + 옹] > 동


이러한 것을 ‘德紅反’ 또는 ‘德紅切’이라 표시한 데서 이러한 표기 방식을 일컫는 말로 ‘반절’이 쓰이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은 글자 하나하나가 한자처럼 하나의 음절에 대응하지 않고 초성, 중성, 종성 같은 음소에 대응하는 음소 문자이면서도 글을 적을 때에는 그것을 합하여 음절 단위로 적게 된다. 이러한 글자의 운용 방식이 ‘반절’의 방식과 비슷하다 하여 훈민정음을 ‘반절’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반절’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단지 한자의 음을 빌려 다른 글자의 소리를 나타내려 한 편법으로서, 우리 문자의 이름으로서는 적절하지 않았다.



4. 국문(國文)

  갑오경장 이후로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국어(國語)’와 ‘국문(國文)’으로 불러 왔다. ‘국문’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글’을 뜻하므로 ‘문자’를 가리키는 말로 적합하지는 않지만 문자와 글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국문’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국어 문법 연구에 온 힘을 기울였던 주시경의 저술이나 그가 관여한 단체의 이름에서도 ‘국문’이라는 말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주시경의 저서: 국문론(1897), 국어문법(1898), 국문문법(1905)

          주시경의 단체: 국문동식회(1896), 국어연구회(1907)



5. 한글

  오늘날 우리가 우리 문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글’이란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초의 일로, 이규영이 펴낸 <한글모죽보기>(조선어문회의 활동 내역을 기록한 책)에는 1913년 3월 23일 조선어문회의 임시총회에서 ‘배달말글몯음’으로 불리던 모임의 명칭을 ‘한글모’라 개칭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현재로서는 이것이 ‘한글’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최초의 기록이다.

  ‘한글’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던 사람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당시 학자들의 기록이나 자료를 토대로 볼 때 주시경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당시 주시경의 손으로 만들어진 각종 증서에 ‘한말, 배달말글, 한글’ 등의 이름이 실제 사용되었음은 ‘한글’이란 이름을 처음 만들어 쓰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그임을 뒷받침해 주는 강력한 증거라 할 수 있다.

 ‘한글’에서 ‘한’은 ‘하나의’, ‘큰’, ‘바른’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옛날 ‘삼한(三韓)’의 ‘한(韓)’과도 관련지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한글’이 우리 문자의 이름으로 보편화된 것은 1927년 동인지 <한글>이 간행되고 ‘가갸날’이라 불렸던 훈민정음 반포일이 ‘한글날’이라 불리게 된 이후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