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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의 흐름/ 문학에 대한 총체적 이해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21. 12:27

 

현대문학의 흐름 

 문학에 대한 총체적 이해  

 

 1. 문학의 본질

                                                                                                                                  국문학과 교수 박 태 상

1.1. 문학의 기원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문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나라마다 문학의 개념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서 다르며 작가에 따라서도 달라 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정의를 쉽사리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문학에 대한 많은 해명이 있어왔지만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작가에 따른 서로 다른 문학의 개념과 정의를 넘어서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언어학의 발달과도 연관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문학은 언어예술이라는 정의이다.
한마디로 문학은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문학적으로 과학이나 실용적인 지식에 반대하는 개념으로서의 예술에 속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매체는 언어이다. 문학의 매체인 언어는 회화나 조각의 매체인 시각적 징표나 음악의 매체인 소리와 구별된다. M. H. 브럼즈는 거울과 램프에서 문학을 예술의 형식으로서 정의하는 방법을 우주, 독자, 작가, 작품이라는 네 가지 좌표로 나눠 다루었다. 그리고 각각을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 존재론(객관론)이라고 명명하였다.
문학의 기원설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그것은 크게 심리적인 욕구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입장과 사회적인 욕구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의 둘로 요약된다. 전자는 예술의 창작심리, 즉 예술본능을 중심으로 예술의 기원을 고찰하는 경우인데, 이에는 모방충동설, 유희충동설, 자기과시설 등이 있다. ‘모방충동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왔다. 예술이란 모방이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영어의 art, 독일어의 kunst는 모두 ‘모방의 기술’, ‘모방의 기교’라는 뜻으로 쓰여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에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는 것이요, 또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모방을 잘 하는 동물이요, 처음에 이 모방에 의하여 배운다”고 기술하였다. 모방충동설이란 그러한 충동이 예술을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으로 희랍시대 이래 칸트의 유희충동설이 나오기까지 가장 권위있는 견해로서 인정되어 왔다. ‘유희충동설’은 인간에게는 본디 유희본능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유희본능에서 예술이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원래 유희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보다도 한층 높은 자리에서 앉게 한다. 다른 동물들은 종족보존과 생명보존을 위하여 모든 정력을 다 바치고 있지만, 사람은 그것만이 아니라, 「정력의 과잉」이 있어, 그것이 즉 유희본능의 시원이 된다. 그리고 예술은 이 유희본능이 밖에 나타난것에 지나지 않는다. ” 이와같이 스펜서에 의하면 예술은 실제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은 칸트가 <무목적성의 목적>이라고 예술을 無償性으로 규정한 것에 해당된다. ‘자기과시설’은 허드슨이 주장한학설로서 예술은 자기를 과시하려는 본능에 의하여 창작되어진다는 것이다. 허드슨은 그의 저서 문학연구서설에서 문학을 만드는 인간의 심리적 동기로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1)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표현의 욕구, 2)우리들이 인간과 그 활동에 흥미를 갖는 것, 3)우리들이 현실의 세계 및 공상의 세계에 대한 흥미, 4)우리들이 형식을 형식으로서 기뻐하는 마음 한편 후자 즉, 예술이 ‘사회적인 욕구’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로는 헌과 그로세의 ‘발생론적 기원설’이 있다. 헌(Y. Hirn)과 그로세는 근대에 이르러 발달한 원시 인류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 등의 도움을 받아 일체의 예술현상을 사회성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이들의 학설에 의하면 유희충동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였는데, 우선 유희 자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유희는 결코 그 유희충동설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실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을 회복시키고 생기있게 하는 필요에서 유희가 생겼다는 것이다. 타일러 또한 원시문화 에서 우리의 문화제도와 인공물들이 선대 사회로부터 주어진 패턴들의 반복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예술의 기원이 심미성이 아니라 실용성에 의하여 발생하였음을 밝혀주고 있다. 문학기원설중 원시종합예술설 ballad dance은 실용성과 심미성이 결합되어 동시에 작용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한국문학 또한 시가는 원시종합예술로부터 비롯되었다. 옛날로 거슬러 오르면 시가는 독립된 양식으로서가 아니라 음악과 무용과 함께 미분화 상태로 있었다. 시가, 음악, 무용의 위일체 그러한 미분화 상태가 시가의 기원이자 원천이다. 그만큼 한국 시가는 처음에는 구비문학의 단계를 거치다가 문자발생 이후 기록문학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나 이른 시기의 시가에 관한 자료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진수의국지 「위지동리전」에 보이는 원시종합예술인 원시가무의 자취와 현존하는 호남지방의 강강수월래 와 영남지방의  쾌지나 칭칭나네 와 같이 고대의 집단예술을 방불케 하는 민속가무 등을 통하여 그 편린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이른 시기의 사람들의 예술활동은 주로 집단이 모여 음주가무하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농경생활 및 제의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1.2. 문학의 어원과 개념


1)문학의 어원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literature)은 원래 라틴어 litera에서 왔는데, 그 뜻은 ‘언어로 된 모든 글’을 의미하는 letter와 같은 개념이었다. 즉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에 나무껍질 등을 벗겨 동물의 뼈로 글을 쓴 것이다. 동굴의 벽에 글을 써놓은 것 등이 모두 litera의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예술적인 글뿐만이 아니라 실용적인 글의 개념도 모두 포괄하는 것이 문학의 원초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학의 최근의 개념은 예술적인 의장이 포함되어 있는 글 즉 상상력에 바탕을 둔 미적인 범주의 글만을 포괄한다.
그리고 문학은 예술의 하위장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음악, 미술, 무용, 문학, 건축, 사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다음 항목인 문학의 속성에서 좀더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문학은 예술 중에서도 ‘언어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매체는 언어이다. 문학의 매체인 언어는 회화나 조각의 매체인 시각적 징표나 음악의 매체인 소리와 구별된다.

2)문학의 속성

인간은 누구나 이데올로기나 유토피아를 가진 존재로서 진, 선, 미의 균형, 조화를 이룬 전인격체를 지향한다. 진, 선, 미중 어느 한 가지라도 갗추지 못한 인격체는 절름발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중 예술은 미(美)를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장르이다. 예술(art, 독 kunst)의 어원은 라틴어 ‘ars'로서 조립하다, 궁리하다의 뜻으로 어려운 과제를 솜씨있게 해결할 수 있는 특수하게 숙련된 기술을 가리킨다. 학문과 경험의 중간형태인 테크네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생활상의 필요에 의한 기술‘과 ’기분전환과 쾌락을 위한 기술‘의 둘로 나누고 후자를 ’예술‘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예술에는 음악, 미술, 무용, 문학 등 다양한 장르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의 공통점은 아름다움(미)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에 대한 인식과 예술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에는 과학적 언어와 문학적 언어가 있다. 과학적 언어는 개념의 정확성을 바탕으로 는 언어를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언어는 대상과 언어의 관계가 1대 1의 대응관계에 있을 때를 뜻한다. 수학에서 1 + 1 = 2라는 수식은 답이 분명하다. 이런 경우 1이라는 숫자는 단 하나의 지시대상과 관계된다. 철학에서는 이런 관계를 외연( denotation)이라고 한다. 언어를 과학적 입장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외연에 충실하도록 또는 개념지시가 명백하게 되도록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언어의 사용을 지시적 사용이라고 한다. I.. A. 리차즈는 이러한 것을 진술이라고 명명하였다. 과학적 진술이나 법정 진술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한편 문학적 언어는 과학적 언어와 대척적인 관계에 놓인다. 문학적 언어는 내포를 통한 언어의 사용을 의미한다. 언어의 외연적인 측면을 개념지시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내포에 의한 사용을 우리는 함축적 의미에 의한 사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프랑스에 가자

이 시는 정지용이 청년기에 쓴 시이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외래어의 남발과 도시적 서정을 노래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카페 프랑스에서 거론되는 ‘뱀’의 뜻은 적어도 사전적 의미를 크게 벗어난다. 실제의 뜻이 더 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문학에서의 언어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방향으로 언어가 사용되어 비유, 비약, 생략, 또는 상징 등의 용법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개개의 사물과 육체의 미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플라톤은 이것을 미의 가장 저급한 형태로 보았다. 즉 사물과 육체 등의 미는 주관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감각적 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참으로 순수한 최고의 미는 이미 감각적 세계를 초월해 있는 궁극적, 객관적 실재이고, 존재의 존재인 이데아 자체인데, 그것은 순전히 지적 직관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감각적, 현상적 세계에 있는 것은 미의 이데아의 불한 반영일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름다운 것일 수 없다. 플라톤에 의하면 미는 모두 명석한 것, 명백한 것이지만, 그중에도 최고의 존재이자 이데아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는 미를 관조하는 정신보다는 미의 빛나는 극치로서 현현하는 것이다. 즉 인식의 궁극에 가서야 비로소 미의 체험도 극에 도달하게 되고, 그리하여 미의 문제는 이데아의 변증법과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전개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미에 대해 가장 통일적으로 서술한 것은  『향연』  드로스 이다. 사랑은 미를 향유하려고 하는 정신의 강렬한 파토스적 일종의 광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은 이 에로스에 이끌려 감각적 현태의미로부터 출발하여 보다 고차적인 미를 추구하면서 점차 존재의 단계를 밟고 올라가 마침내 이데아 자체의 미를 바라봄과 동시에 참된 실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와같이 플라톤이 지니고 있는 미의 본질 또는 가치는 정신으로 하여금 감각적 찌꺼기의 오염으로부터 스스로를 전화시키고, 현상적 세계의 속박을 탈피하여 영원한 존재와의 한 조화, 근본적 통일을 달성하도록 하는 작용에 있다. 한편 플라톤은 예술을 일종의 기술로 파악하였다. 인간의 행위가 어떤 대상과 목적을 갖는 경우에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이론적 지식, 방법이 기술인 바, 플라톤은  소피스트 에서 여러 가지 기술을 열거하여 그 분류와 평가를 행하고 있다. 거기에 따르면 기술은 우선 획득적인 것과 제작적인 것으로 양분되고 여기서 또 전자는 협의의 실천적 기술(수렵술, 상업술, 전술 등)과 인식적 기술로 나뉘어 지며, 후자는 신적인 자연의 생성과 인간에 의한 그 모방의 기술, 즉 예술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중에서 예술과 인식적 기술을 모두 모방적 기술이라고 부른다. 인식은 덕을 획득적으로 모방하고, 예술은 자연을 제작적으로 모방한다는 것이다. 예술을 이렇게 규정하면, 예술의 합목적성과 진리성이 당연히 문제가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기술은 단순한 육감과 경험적 숙달로부터 순수한 학적 인식에 이르는 모든 이론적 지식과 방법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하여 제작적․모방적 기술로서의 예술이 진리성의 측면에서 기술의 어떠한 단계에 놓여야만 하는가는 똑같은 모방적 기술인 이론적 인식과의 대비속에서 결정되는 바, 플라톤은 이것을 예술의 평가 그 자체로 간주했다. 폴리테이아에서 이데아의 모방인 침대를 또 다시 모방하여 묘사한 화가가 진리로부터 세 번째에 즉 침대를 만든 직공보다도 낮은 위치에 놓인 것은 예술의 대상과 내용이 예술가의 대상인식의 정도와 직접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여러 예술형식들간의 서열도 생겨난다. 회화는 거짓된 것, 외관을 표현하는 것으로 모든 예술중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연극, 조작, 건축 등은 대상을 전형으로서 파악하고 조화와 균제에 보다 부합하는 것이므로 회화보다 높이 평가된다. 그리하여 계율과 조화 자체를 표현하는 음악과 시는 가장 창작적인 예술로서 특별히 포이에시스라고 불린다.

 예술은 어떤 대상을 모방하는 행위를 통하여 성립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모방이라고 하는 것에서 찾았던 참된 의미는 모방하는 사람이 그의 모방행위를 통하여 스스로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과 유사한 것으로 된다는 데에 있다. 즉 예술가는 어떤 대상에 공감을 느껴서 표현활동(모방)을 행함으로써 또 향수자는 거기에 표현된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 어떻게든 모방의 대상에 스스로 접근해간다. 플라톤에 의하면, 예술의 이러한 존재방식이 예술의 독자적 의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되면, 참된 예술은 이상적 형식, 전형적으로서의 미를 표현함으로써 이것을 향수하는 자의 정신에 훌륭한 조화를 가져다 주고, 그리하여 선으로 향하는 습성을 만들어 내게 한다. 또한 예술은 그것을 향수하는 사람에게 쾌락을 준다. 플라톤은 그 쾌락의 질이 예술적 표현의 질과 깊이 관련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폴리테이아 에서는 저급한 감정을 자극하는 예술을 배척한다. 정신의 고귀한 부분이 예술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참된 예술적 쾌락이다. 그것은 미적 쾌락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보다 고차적 존재와의 부합, 조화로 이끄는 정신적 감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플라톤이 이데아를 관조할 때 체험하는 순수한 정신적 신비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 바의 것이다. 뛰어난 예술에 관계하는 사람은 이러한 정신적 감동에 의해서 참된 존재를 모방하도록 촉발되는 것이다. 즉 예술가는 미의 이데아로부터 오는 영감, 신적 광기에 의해서, 향수자는 예술로부터의 쾌락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주로 수학적인 본질직관과 논리적 사변을 가지고, 종교적, 윤리적 혹은 정치적인 가치판단과의 연관 속에서 미와 예술의 본질을 규명했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형상과 질료의 목적론적, 역동적 상관관계 속에서 바라보면서 미, 예술일반의 개념규정 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현실에 작용하는 경험적, 심리적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미 일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은 일반 그리스인과 그리 다르지 않다. 즉 미는 선과 함께 목적인으로서 ‘인식과 운동의 원리’이고, 그 주된 형식이 질서와 균제와 한정이므로, 수학적 학문의 대상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 』) 그러나 이러한 미 일반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각 예술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미의 양태를 명확하게 인식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비교했을 때 그 독자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예술이 자연과 다른 점은 예술가의 내면적인 원리에 따라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개개의 사상으로서의 존재로 보면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속에 있다. 그러나 예술가가 이것을 대상으로서 하나의 통일원리에 기초하여 그 미를 ‘종합함으로써’ 전형화하고 이상화할 때, 비로소 자연의 미를 보완, 완성하는 예술의 독자적인 미가 성립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에서 “미는 크기와 질서에 있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예술미 성립의 통일원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질서는 그 객관적, 형식적 측면을 대표한다. 음악과 시에서의 리듬, 하모니, 선율, 운율 등은 바로 거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형식적 미 중에서 뛰어난 것으로 내적 형식을 들고 있다. 르네상스 이래의 고전주의 연극론에 의해 ‘3통일의 원칙’으로 편협하게 외적, 형식적으로 이해되었던 비극의 구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오히려 줄거리가 내적 필연성에 의한 통일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완성된 전체로서 구성될 것을 요구하고 작품의 각 부분들 상호간의, 또한 내용과 전체의 길이 간의 내적인 비례관계에서 균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크기의 개념은 미의 주관적 상대성의 자각에 기초를 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에 대한 사상에 두드러진 특징을 부여하고 있다. 크기는 사물 본래의 성질과 주체의 관조라는 양자에 들어맞아야 하는데, 그러한 점에서는 보다 커다란 것이 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표현하는 미를 엄숙하고 숭고한 것에 한정하지 않고, 골계, 우아미 등등 비속한 것의 아름다움도 인정했다. 그러나 ‘크기’를 미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자를 후자 보다 탁월한 미로 간주한다. 이것은 그가 선량한 성격을 표현할 것을 주장하고, 신과 영웅의 위대한 행위를 엄숙하게 묘사한 호메로스를 칭찬하고 있는 데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으로서의 예술의 본질을 모방의 개념으로 포괄하고, 여기에 대응하여 예술을 향수하는 측면에 대해서는 미적 효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개념을 오로지 심리적으로만 고찰함으로써 예술의 독자적인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예술의 모방은 고도의 기술적 제작이며, 단지 관습에 따른 직공의 제작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예술의 모방은 그 합목적성의 측면에서 볼 때 자연의 생성원리에 비교되지만, 그 합목적성은 예술가의 자각적 의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행위의 모방을 통해서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무용도 신체의 리듬에 의해서 성격, 정서, 행위를 모방하며, 또한 음악도 성격의 직접적 표출인 리듬과 선율을 표현형식의 기초로 기 때문에, 시와 동일한 예술의 계열에 놓여진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성격표현의 방식은 모든 예술을 단지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평가하는 하나의 규준으로 된다. 예컨대 조형예술(특히 회화)을 사물의 감각적 형태의 모방이라고 해서 한 단계 저급한 예술로 간주하는 것은 성격을 모방하는 직접성의 정도에 따른 평가이다. 또한 시는 로고스를 매개로 인간의 행위를 전형화, 이상화함으로서 전형적, 이상적 성격을 여타의 예술보다 한층 잘 표현할 수 있으며, 감각적 대상을 넘어섬으로써 예술의 최고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도 한층 더 철학적이며 한층 더 뛰어난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나아가 예술적 모방은 매체, 대상, 방법의 세 가지 관점에서 형식적으로 분류된다.
예술은 또한 미적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카타르시스(배설, 정화)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예술의 독자적인 본질에 대해 매우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즉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이 정서의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 에서 음악의 교육적 효과와 나란히 카타르시스적 효과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듯이, 카타르시스는 비극이나 어떤 종류의 음악 등과 같은 예술에 항상 수반되는 미적 효과이며, 울적한 감정을 쏟아버림으로써 정신을 정서의 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일종의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는 비극의 구성요소로서 줄거리, 성격, 사상, 대사, 선율, 장면을 들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줄거리’, 즉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위’의 전개이며, 그 중요부분을 이루는 페리페테이아(급전)와 아나그노리시스(발견)에 의해서 정서가 격렬하게 유발되어 그 정서의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 3.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정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우선 표현매체를 언어로 한 모든 글들이 모두 문학에 속한다는 정의이다. 이렇게 테두리를 넓게 잡으면 중국의 오래된 모든 기록이나 고대 인도나 이집트의 기록들 심지어 역사서까지도 모두 포함이 된다.
하지만 범주를 좁히면 근대 이후 예술적인 장식의 글들만을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상력에 의거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이렇게 범주를 좁힐 때 거기에는 시와 소설, 희곡, 수필 등이 포함이 된다. 한마디로 문학이란 인간 정신이 빚어낸 교묘한 구조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문학이란 무엇인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문학은 작가와 작품과 독자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현실(세계 / 대상) 사이의 유기적 관계의 총합이기 때문에 상당히 광범위하고 고차원적인 범주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것의 개념정의를 쉽게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선 범주를 좁혀 나가기 위해 설명하자면 문학은 예술의 하위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예술은 바로 미(美)라는 고전주의적 예술관에 의해 개념이 정의내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자연과학의 현저한 영향에 의해 예술학을 별도로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에 따라 미와 예술을 구분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우선 고전주의의 문학관을 따르면 예술은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고등인간인 지성인의 경우 진, 선, 미가 조화 균형상태에 있는 완벽한 인격체가 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전인격체가 되는데 중요한 미적인 가치를 예술이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하위장르로 음악과 미술과 무용 등을 거느리고 있다. 이중 미술은 색채로 미적 가치를 구현한다면, 음악은 멜로디로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그리고 무용이 몸짓을 통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면 문학은 언어로 미를 맘껏 그려내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매체는 언어이다. 문학의 매체인 언어는 회화나 조각의 매체인 시각적 징표나 음악의 매체인 소리와 구별된다.

 

1.4. 문학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


문학은 언어예술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정의는 언어학의 발전과 궤도를 같이한다. 물론 어원을 따져 문학 literature의 어원이 라틴어 litera에서 왔는데, 그 말의 뜻이 문자나 글과 연관이 있다는 해석이다. 이렇게 볼 때 이미 우리는 언어와 문학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개 언어를 구분할 때 문학적(예술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로 나누게 된다. 일상적 언어는 일상대화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경우에는 예술적 언어를 사용한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관료적이고 경직된 대화라고 말하고 후자의 경우를 우리는 개방적이고 부드러운 대화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부하직원이 상사를 “우리 상사는 호랑이야 ”라고 말했다면 이것은 예술적 언어를 구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언어와 예술적 언어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과학적 언어는 언어의 지시적 사용에 몰두한다. 로만 야콥슨이 6가지 언어의 기능을 말했지만, 그중 첫 번째 기능인 언어의 지시적 기능(참조적 기능)은 대상에서 화자가 체험한 것에 기호형식을 부여한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한 가지 대상에 한 가지 의미만이 부여되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를 르네 웰렉은 외연이라고 말했다. 즉 언어대 대상의 관계가 1 : 1의 대응관계를 있을 때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예술적 언어의 경우 언어의 함축적 사용을 구사한다. 즉 한 가지 대상에다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를 내포라고 흔히 말한다. 이를테면 정지용의 모더니즘 시는 비가 오는 스산한 도시문명을 다음과 같이 “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 카페 프랑스에 가자”라고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대상에 여러 가지 작가가 느낀 복합감정을 담아놓은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즉 대상 대 언어의 관계가 1: 多의 복잡다기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포는 언어의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한편 리차즈는 시를 假진술(pseudo statement)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외연적 의미를 사용하는 과학적 언어는 진술에 해당한다. 즉 한 가지 사물에 한 가지의 의미만을 담게되는데 비해 내포는 여러 가지 복합적 의미를 담게 됨을 말한다. 이렇게 문학은 언어와 밀접한 관계에 서있는데 그중에서도 예술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특징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언어를 시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한다. 쿤즈는 워즈워드의 <서곡>을 현상학적으로 해명하는 자리에서 경험의 철학적 진술과 시적 진술을 논증(argument)과 표현(performance)으로 구별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논리적 필연성과 타당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논증이며 시인의 타고난 감수성인 공감각과 기억의 재료를 사용하는 언어행우이가 표현이라는 것이다. 앞서의 리차즈는 이러한 차이를 과학적 인식적 언어용법과 시적 정의적 언어용법으로 구별한 것이다.


1.5. 문학의 네 가지 관점

문학은 어떠한 기능을 가졌고 어떠한 목적 아래 쓰여지며 어떠한 효용을 나타내는가 작가들은 왜 창작하고 독자들은 왜 작품을 읽는가 이렇게 제기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령 독자들은 왜 작품을 읽는가 하고 묻는 경우, “교양을 높이기 위하여”, “권태에서의 해방을 위하여”, “미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상상력의 영역을 넓히기 위하여” 작품을 읽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이런 이유에서보다 많은 사람들은 재미가 있기 때문에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다. 주제가 새롭다느니, 묘사가 훌륭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모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고, 끝까지 읽고 나서 책을 덮은 다음에 우선 먼저 나오는 말은 “재미있었다”, “재미없었다”하는 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인상적인 반응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효용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거울과 램프를 쓴 영미비평가 브럼즈는 문학의 관점에 대해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 존재론의 네 가지를 제시하였다. 이중 세 가지만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모방론<작가 입장에서>

모방론적 관점은 문학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관점이자 가장 오래된 입장이기도 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의 고대 그리이스의 플라톤이나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대상과 연관을 맺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세계 / 대상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관계에 서기도 한다. 모방론은 문학을 이러한 삶의 현실(세계 / 대상)과 연관시켜 정의를 내리는 입장을 말한다. 문학은 모방의 형식이라고 정의를 내릴 때 그것은 사물 그 자체, 자연의 실재, 삶의 원리 등 이른바 삶의 현실을 언어로 재현 또는 재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방론의 원조는 역시 <<공화국(이상국)>>의 저자인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그의 사상이 이데아사상인 것이다. 플라톤은 위의 저서에서 문학은 복사의 재복사라고 비방하는 말로 문학을 정의하였다. 플라톤은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성의 활동을 그는 중시하였다. 이성의 원활한 활동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에 도달하는 지름길이라는 입장이다. 플라톤은 순수한 이성을 통해서만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그룹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시인이나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집단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뜨거운 가슴 즉 인간의 감정 정서에 호소하여 표현을 하게 되므로 감정의 격정을 통해 쉽게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에 눈이 멀도록 유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하여 가짜에 빠지게 하는 것이 시인 등이므로 그들을 이상국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시인추방론을 주장하며 또 한편으로는 문학검열제도를 도입할 것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에 비해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세계를 어떤 것의 단순한 그림자(복사)로 보지 않았다. 그는 모방본능은 어린 시절부터 인간에게 심어져서 인간을 동물과 구분시켜 주는 주요한 징표로 보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을 인간이 지닌 속성 가운데 중요한 하나로 보았던 것이다. 그가 스승의 이론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한 대안이 바로 개연성의 법칙이다. 문학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행동을 모방하지만 보편타당한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에 가짜인 역사보다도 진실에 가깝게 된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역사는 이미 있던 일이나 일어나고 있는 세계를 역사가의 사관에 따라 그리지만 문학은 있을 수 있는 세계를 그린다는 것이다. 즉 허구의 세계를 예술가가 꾸며내지만 무의미한 허구가 아니라 의미있는 즉 인간의 진실성을 담고 있는 보편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개연성의 세계란 인간에게 보편적 진리로 느껴지는 세계를 의미하지만, 인간에게 보편적 진리로 다가오는 세계는 결국 그 자체가 수미일관한 통일성의 세계일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총일성이 있는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작품의 유기적 구조에 의하여 제시되는 것이다.

2)효용론 <독자 입장에서>

효용론은 문학작품과 독자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이론이다. 독자들이 왜 문학작품을 찾게 되는가에 관한 의문을 풀어주는 입장이 바로 효용론이다. 조선조의 양반사대부들은 소설을 멀리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교적인 공리성의 효용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공자의 말씀인 “소설은 비록 小道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생활을 하는데 가히 볼만한 것이 그 안에 있다”라는 어록을 중시하였다.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大道를 배워야 하는데 그것은 성현들의 말씀을 담은 경전이나 역사에 담겨있다는 입장이다. 조선조의 양반사대부들은 중국에서 유입된 4대 기서인 국지연의나 수호지 등을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자신들의 자녀들에게는 금서로 정하여 읽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 世敎의 가르침이 없이 잡된 생각만 담고 있다고 꼬집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모두 독자들이 예술작품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효용론에 해당된다. 또 공자는 “시백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시의 효용성 즉 공리주의 내지 교훈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효용론에는 크게 공리설(교훈설)과 쾌락설(오락설)이 있다. 공리설은 문학작품이 독자들의 인생의 질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감동을 담고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견해가 톨스토이의 예술감화론이다. 위대한 문학은 독자들에게 삶의 지혜를 줄 수 있어야 하며 인생의 감화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학의 가치를 그 시회적 효용의 면에서 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교훈주의 문학관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교훈이란 말을 좀 더 넓게 해석하면 지식의 전달과 도덕적 가르침이란 뜻을 동시에 포함하게 된다. 역사, 과학, 기술 등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쓰여진 문학은 고대에는 적지 않았다. 중국의 <<역경>>은 당시의 우주과학 내지 형이상학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운문시이며 로마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농사짓는 기술을 가르치기 위하여 <게오르기카>라는 장시를 썼다. 한편 도덕적 가르침을 위한 문학은 문인이 사회에 대하여 선각자, 스승, 교사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생길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문인이 있지만, 특히 문학적으로 도덕적 취향이 강한 시대가 있다. 한국 신문학 초창기가 바로 그러한 시대로서 이광수는 특히 계몽주의자, 즉 몽매한 민족을 새롭게 깨우치는 선각자의 입장을 취했다. 현대에 있어 교훈주의 문학은 창작의 목적이나 결과라기 보다는 해석의 태도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상 모든 문학은 그 저자가 교훈적으로 의도하였든 안 하였든간에 교훈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좋은 문학은 넓은 의미의 인간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국은 사람에게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공리설에서 강조하는 도덕률이란 시대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교훈적인 해석은 임시성을 면하지 못한다. 물론 많은 경우에 있어서 문학은 저자의 명백한 교훈적, 또는 정보제공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간성에 호소하는 자유로운 상상의 질을 구현하고 있는 까닭에 창작 당시에만 효과가 있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도 있다. 이른바 고전이란 것이 그것이다. 결국 교훈주의는 현실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 효용성을 극도로 강조하면 문학은 선전(propaganda)이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투쟁의 도구로 문학작품을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 것이 그것에 해당된다.
한편 공리설과 달리 문학작품이 단순히 재미를 주고 여가선용에 도움이 되며 작품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쾌감을 준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쾌락설(오락설)이다. 이러한 입장의 대표적인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충동설에 근거한 쾌락설이다. 조선조 양반사대부들이 흔히 말하던 感人이나 破閑이 여기에 해당된다. 서포 김만중은 효자였는데 그가 유배갔을 때 어머님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구운몽>을 지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쾌락설에 가까운 효용설이라고 할 수 있다. 호이징가는 인간의 본성을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 보다는 호모 루덴스로 보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놀이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잉된 생명력의 발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그외에 모방본능의 충족, 또는 긴장완화에 대한 욕구로 보기도 한다. 글쓰기나 글읽기도 일종의 놀이본능에서 왔다고 볼 수 있으며 그런 측면에서 호모 루덴스는 쾌락설의 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앞의 논지로 돌아가면, 독자들이 무협지나 청춘소설 또는 에로소설을 찾게 되는 경우는 쾌락설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90년대 들어와 독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바탕한 가벼움의 미학을 겨하거나 환생소설이나 SF소설류를 기는 것도 모두 이러한 효용설에 바탕한다고 할 수 있다.

 

3)표현론<작가 입장에서> 


모방론이 작가의 현실체험의 예술적 형상화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표현론은 문학작품이 바로 작가의 창조력에 의해 완성되는 작품이라는 점에 관심을 보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현실에서 체험한 것을 바로 언어라는 기호로 다듬어놓은 것이 예술작품이라는 인식이다. 서구에서는 표현을 express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밖으로 몰아낸다’, ‘짜내다’는 뜻이다. 즉 뮤즈의 작용에 의해 외부로부터 신령스러운 기운이 시인의 마음내부로 스며 들어와 응어리져 있다가 그 심리적 다발이 다시 시인의 격정적인 흥분상태에 의해 시인의 입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시라는 한편의 예술작품이 된다는 입장이다. 즉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다. 낭만주의 시인의 대가인 워즈워드는 이 과정을 <시는 격정적 감정의 자발적 범람>이라고 말하였다.
표현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靈感說이다.   영감에 의해 작가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작품은 이러한 작가의 영감이나 천재성, 광기의 소산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낭만주의의 입장이다. 이에 비해 작가를 장인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고전주의의 견해인데, 문학적 표현을 하나의 조각처럼 한 자, 한 구절을 갈고 다듬는 것으로 생각하는 입장이다. 즉 작가는 뮤즈의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계산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4)존재론(객관론)


존재론은 문학작품 자체의 존재가치를 규명하는 관점을 말한다. 즉 텍스트 자체가 어떻게 생명력을 갖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문학이 하나의 믿을 만한 즉 개연성이 있는 허구가 되려면 언어를 가지고 그것이 믿을 만하게 되도록 꾸며야 할 것이다. 즉 의미들이 긴밀한 상호연락을 가짐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의미의 덩어리를 형성해야 한다. 이렇게 치밀한 내부적 조직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완성된 형상을 일러서 ‘구조’라는 이름을 붙인다. 일반적으로 구조라는 말은 조직이라든지 형식이라든지 하는 말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조직과 형식은 모두 구조에 포함되는 요소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조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의 총합이다. 이러한 구조라는 말을 사용할 때 문학테스트는 ‘동적인 구조(dynamic structure)’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적 구조는 건물처럼 일정한 공간을 점령하고 무변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있고 시간의 경과를 통하여 의식 속에서 파악되는 좀 까다로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 문학작품을 발달된 생물체의 조직과 같은 성질을 가졌다고 해서 유기체에 비유하는 학자도 있다. 이것을 소위 문학유기체설(organicism)이라고 한다. 유기체도 각 부분들이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 것이고 또한 필요한 부분을 다 갖추고 필요없는 부분은 안 갖춘 것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은 유기체처럼 스스로 생성, 발전, 쇠퇴, 소멸하는 것은 아니므로 유기체와의 유추관계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유기체설보다 구조주의설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구조주의에서 발전한 기호학에선 문학텍스트를 ‘자율적인 기호’나 ‘자율적인 실체’라고 파악한다. 부분이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유기체설에서 좀 더 발전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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