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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흐름/ 일제강점기

수로보니게 여인 2009. 5. 7. 16:10

 Daum 백과사전

목차

한국문학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개화기

일제강점기

식민지 상황과 문학의 변화

근대소설의 성립

자유시의 형성

계급문학운동

식민지 시대 후반의 문학

소설의 다양성

시와 모더니즘

근대극의 확립

분단시대

현대 한국문학의 성격 


일제강점기의 문학

식민지 상황과 문학의 변화


한국문학은 1910년 일본의 강점에 의해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부터 역사적 시련을 맞고 있다. 일본은 한일합병을 강제로 체결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후 한국에 대한 무단통치를 실시한다. 개화기 문학에서 볼 수 있었던 자주적인 국권 회복과 문명개화에 대한 의지는 엄격한 언론 출판에 대한 규제로 인하여 더 이상 표출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일본 유학생들을 통해 서구적인 개념에 따른 문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개인적 정서에 근거한 예술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진다. 이광수는 〈문학의 가치〉(1910)에서 '인간의 정적 분자를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라는 뜻으로 문학의 개념을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개인의 내면적 고뇌를 그려낸 단편소설 〈소년의 비애〉(1917)를 발표하고, 장편소설 〈무정〉을 내놓으면서 문단의 중심인물이 된다. 〈무정〉은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인식에 철저하지는 않았으나, 개인의 운명적인 삶과 시대적 조건을 결합시킨 장편소설로서 그 근대적 성격이 인정되고 있다. 〈무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요소는 자아의 각성에 근거한 사랑과 배움의 문제를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의 각성은 사회 현실에 근거하여 한 개인이 자기 존재의 인식을 확대시켜 나가는 태도를 가리킨다. 〈무정〉은 이같은 문제성에 접근하면서 전통적인 윤리 의식과 규범으로부터의 개인의 해방 그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반성적인 자기 각성의 단계를 거쳐 사회적인 존재 의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계몽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대의 한국문학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민족과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자세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3·1운동을 통해 촉발된 민족적 자기 각성에 힘입어, 문학은 자아의 발견과 개성의 표현에 적극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현실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게 된다. 〈창조〉(1919)·〈폐허〉(1920)·〈백조〉(1922) 등의 문예동인지가 등장하여 문단이 형성되었으며, 〈개벽〉(1920)과 같은 종합지의 발간으로 문학 창작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한다. 특히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의 민족지가 간행됨으로써, 문예활동의 폭넓은 기반을 제공하게 된다.


근대소설의 성립

1920년대 초기의 문학은 근대적인 자아의 추구로부터 민족적 현실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소설의 경우에는 암울한 현실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리기도 하고 비참한 노동자·농민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김동인은 일본 유학 시절 문학동인지 〈창조〉의 발간을 주도했고, 〈약한 자의 슬픔〉·〈배따라기〉·〈감자〉 등을 통하여 근대적인 단편소설의 성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배따라기〉는 열등의식과 오해가 빚어낸 형제간의 파멸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훼손된 삶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헤매는 주인공을 통해 삶의 비극적인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감자〉는 주인공이 가난 속에서 도덕적 의지와 윤리 의식을 상실한 채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사건의 경과만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간결한 문체가 특히 주목된다.

현진건은 〈백조〉 동인에 참가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좌절과 고뇌를 그린 〈빈처〉·〈술 권하는 사회〉·〈타락자〉 등과 함께 궁핍한 노동자의 삶의 단면을 그려낸 〈운수 좋은 날〉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나도향은 〈백조〉 동인의 한 사람으로 〈벙어리 삼룡〉·〈물레방아〉·〈뽕〉 등을 발표했다. 〈벙어리 삼룡〉은 신분적 육체적 불구성을 자기희생의 과정을 통해 극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물레방아〉와 〈뽕〉은 빈궁과 애욕의 문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염상섭은 〈폐허〉의 동인으로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했으며,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함께 3부작을 이루고 있는 〈암야〉·〈제야〉 등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위치를 분명하게 한다. 그의 초기 작품 가운데에서 〈만세전〉이 특히 주목된다. 이 작품은 3·1운동 직전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인 동경 유학생이 조선에 있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는 동안 목격하게 되는 여러 가지 현실의 문제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식민지적 현실에 대한 사실적 인식이 이 작품에서처럼 구체화된 경우를 이전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작품에서부터 개인의 문제와 사회적 상황을 통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근대소설의 면모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자유시의 형성

1920년대의 시문학은 서구적인 자유시 형태를 수용하면서 한국 근대시의 독자적인 형식을 추구하고 있다. 초기 시들은 감상주의에 빠져들어 현실 도피적인 경향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현실적 상황에 대한 시적 인식의 확대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적인 운율의 발견을 통해 한국 근대시의 시적 형식을 새롭게 발전시키고 있다.

주요한의 〈불놀이〉(1919)가 보여주고 있는 자유시에의 지향은 시적 자아의 확립과 개성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시형식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시의 기반을 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김소월은 시집 〈진달래꽃〉(1925)에서 전통적인 민요의 율격을 재구성하여 서정의 세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으며, 이상화는 시대의 고통과 개인의 고뇌를 극복하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시적 인식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1926)에서 역사에 대한 신념을 여성적 어조로 형상화하여 새로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김소월의시는 한국 현대시의 발전 과정에서 시적 형식의 완결을 추구해온 개인적인 노력이 독자적인 성과를 거둔 대표적인 예로 손꼽을 수 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시적 형식은 전통적인 민요의 율조와 토속적인 언어 감각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김소월은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그려내기보다는, 개인적인 정감의 세계 속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그 정조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에서 즐겨 다루어지고 있는 자연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 공간으로 바뀌고 있으며, 개별적인 정서의 실체로 기능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진달래꽃〉·〈산유화〉·〈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접동새〉 등이 모두 이같은 예에 속한다. 김소월의 시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미덕은 토착적인 한국어의 시적 가능성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가 실감의 정서를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언어적 특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한용운은 '님'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적 관심은 모두 님이라는 존재에 집중되고 있으며, 시를 통해 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켜 놓고 있다. 님은 시적 자아와 함께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님은 이미 현실에서 떠나가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용운은 님이 떠나버린 슬픔은 말하면서도, 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님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신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용운의 시는 의지적이며 강렬한 어조가 돋보인다. 한용운의 시의 정신은 역사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가 삶에 대한 정직성을 지키고, 악에 항거하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투쟁했던 행동적 실천가였음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의지를 시적으로 구현하면서 가장 서정적인 어조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일이다.

이상화의 현실 감각은 김소월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보다 더 비장하고 절망적이다.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경우에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서정 자아가 이상화의 시에서는 파멸하는 존재로 부각되는 경우도 많다. 무자비한 고통의 현실을 이상화는 어둠의 동굴, 죽음의 공간으로 그려낸다. 시적 주체로서의 서정적 자아는 어둠의 현실을 등지고 동굴과 밀실 속으로 도피하고 격앙된 어조로 삶의 구원을 희구한다. 이상화의 시에서 시적 주체가 어둠의 현실을 뚫고 현실의 한복판에 나서는 경우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역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급문학운동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국문학은 식민지 현실에 대응하여 민족주의적 이념을 추구하는 경향과 사회주의적 이념을 지향하는 경향 사이에 갈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3·1운동 직후의 현실지향적인 문학의 경향이 사회주의 사상과 접맥되면서 계급문학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1925년에 결성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을 중심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계급문학운동은 계급의식의 고양과 정치적 투쟁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조직을 확대하고,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념적 규정을 강화하게 된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KAPF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두고 정치· 사회단체와도 횡적인 연대를 확보함으로써, 문학운동의 집단적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계급문학운동은 신경향파의 시대를 지나 목적의식기로 접어들면서 이념성이 강조되고 있다. 1927년의 방향전환 이후에는 대중성의 획득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상대로 하는 노동문학과 농민문학의 실천에 주력한다. 그 결과로 소설의 경우, 최서해의 〈탈출기〉(1925), 조명희의 〈낙동강〉(1927), 이기영의 〈고향〉(1934), 한설야의 〈황혼〉(1936) 등이 발표된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계급의식에 기초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강조하고 있으며, 계급투쟁이라는 무산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내세우고 있다.

이기영은 계급 문단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농민들의 삶을 다룬 〈홍수〉·〈서화〉 등을 발표한다. 장편소설 〈고향〉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 허덕이는 소작 농민들의 고통과 이들을 착취하는 지주 세력의 횡포를 대조적으로 제시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지식인 청년의 등장과 함께 점차 계급적 자각과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에 눈을 뜨는 농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서로 단합하여 지주 세력에 대응하게 된다. 농촌 현실과 농민들의 의식의 성장 과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농민들의 삶과 그 풍속적 재현에도 성공하고 있다.

한설야는 〈과도기〉·〈씨름〉·〈사방공사〉 등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인 형성과정과 그 의식의 추이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장편소설 〈황혼〉은 방직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식민지 예속 자본가 계층의 생활과 의식이 그 전반부의 줄거리를 형성한다.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자본가들의 행태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 자체가 일본 군국주의의 확대과정과 맞물려 있고, 그러한 현실적 상황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노동계급의 조직적 실체를 확인하고자 한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시의 경우, 박세영· 박팔양· 임화· 김창술 등이 식민지 현실의 계급적 모순을 비판하고 계급투쟁 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시를 많이 발표하고 있다.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네거리의 순이〉 등은 이른바 단편 서사시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기도 했는데, 계급적 현실의 모순을 시적 정황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식민지 시대 후반의 문학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문학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화되고 문학에 대한 사상적 탄압이 자행되기 시작하면서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KAPF의 해체(1935)를 고비로 하여, 192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주조를 형성하고 있던 집단적 이념 추구의 경향이 사라지고 개인적 정서에 기초한 순수문학의 다양한 경향이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다.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시문학〉·〈시인부락〉·〈자오선〉·〈삼사문학〉·〈단층〉 등의 시 동인지가 발간되면서 소그룹의 동인 활동을 중심으로 창작에 참여하는 문인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신동아〉·〈조광〉·〈중앙〉과 같은 월간 종합잡지를 신문사에서 간행하여 문예의 영역에 대한 관심을 확대시켜 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특히 1930년대 말기에 간행된 〈문장〉·〈인문평론〉은 순문학잡지로서 문학 활동의 중요한 매체가 되어, 많은 신인들을 배출하고 중요작품들을 널리 수록하고 있다. 구인회와 같은 문학동인 조직이 형성되어 소설의 영역에서 이태준·박태원·이효석·이상·김유정 등의 활동이 두각을 드러내었고, 시 동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정지용·김영랑·박용철 등 시문학파의 등장으로 시의 모더니즘적 경향이 자리 잡게 된다. 서정주·오장환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시 동인지 〈시인부락〉의 경우에도 인간의 삶의 본질과 생명 의식에 대한 시적 추구작업을 전개한 바 있다. 이 무렵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본격적으로 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이 해외문학에 대한 소개도 활발하게 함으로써, 문학의 경향이 더욱 다채롭게 전개된다.

 

소설의 다양성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소설에서 가장 주목되는 특징은 정치적 이념이나 사회적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문학 내적인 요건에 대한 예술적 추구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계급문단의 강제 해체 이후에 민족과 역사, 계급과 현실에 대한 관심을 배제시킨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문학적인 테마로 다룰 수 없게 되자, 일상적인 개인의 삶과 내면 의식을 추구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소설적 기법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공간 의식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적인 소설이 많이 등장했고 예술의 자율적 속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가능해진다. 특히 다양한 주제의 장편소설들이 등장하여 소설문단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박태원은 일상의 의미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모더니즘의 소설적 경향을 대표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성탄제〉·〈천변풍경〉 등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은 주변의 생활이나 다른 인물들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도시 공간을 방황한다. 사회적인 현실과 단절된 상태로 개체화되어버린 인간의 내면 의식을 따라가는 심리소설 기법이 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이상은 〈지주회시〉·〈날개〉·〈동해〉 등의 작품에서 현실과 대립된 자아의 욕망과 그 존재의 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날개〉는 자아의 형상과 그 존재 방식에 대한 회의와 그로부터의 탈출 욕망을 공간화의 기법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도시의 병리를 대표하는 매춘부인 아내와 기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무기력한 주인공이 좁은 방으로 표상되는 비정상적인 삶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 소설의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 이태준은 인물에 대한 내관적인 묘사와 치밀한 구성을 통해 한국 근대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달밤〉·〈가마귀〉·〈영월영감〉 등의 작품은 허무와 서정의 세계 속에서도 시대정신에의 강렬한 호소를 드러내는 그의 대표작이다. 〈달밤〉은 변해가는 세태 속에서 여전히 아름답게 남아있는 인정미를 그려내고 있으며, 〈가마귀〉는 죽어가는 인물을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나가는 작가의 감각적 묘사 능력이 잘 나타나 있다.

이효석의 문학 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도시와 유령〉·〈노령근해〉 등 계급적 경향의 소설을 발표했던 동반자 작가로서의 활동이 그 전기에 해당한다면, 1933년 〈돈〉을 기점으로 하여 〈산〉·〈메밀꽃 필 무렵〉 등을 발표하게 된 것이 후기에 해당한다. 이효석의 후기 작품들은 인간의 본능적인 성적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 많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효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의 문맥을 통해 읽어 낼 수 있는 자연과의 친화, 본원적인 인간의 삶과 원초적인 사랑은 이효석 문학의 주제로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배경과 인물 및 사건의 긴밀한 조화를 추구하는 서정적 문체는 이효석 문학의 독특한 스타일로 평가받고 있다. 김동리의 문학 세계는 토속성이 근간을 이룬다. 그의 소설이 지닌 토속성은 〈무녀도〉에 잘 투영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소설 창작의 원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무녀도〉에서는 토속신앙과 외래 기독교 신앙의 충돌로 인해 생기는 정신사적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황토기〉의 경우에도 토속적인 신비의 세계가 등장한다. 이밖에도 김유정의 〈동백꽃〉, 최명익의 〈장삼이사 張三李四〉, 허준의 〈습작실에서〉, 박화성의 〈홍수전야〉, 최정희의 〈흉가〉,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로 지목되고 있다.

1930년대의 장편소설 가운데 채만식의 〈탁류〉는 한 여인의 비극적이 삶이 이야기의 주류를 이루지만, 실상은 전통적인 인습과 새로운 풍속이 서로 맞부딪치는 과정 속에서 한 개인이 겪어야 했던 시련과 역경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염상섭의 〈삼대〉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의 한 단면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와 그들의 삶의 태도 등이 입체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삽화 중심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이야기와 소도구처럼 개별화된 등장인물들의 배치를 통해, 일상적 공간의 소설적 재현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 1930년대 후반의 소설 문단에서는 역사소설의 등장이 주목된다. 홍명희의 〈임꺽정〉, 이광수의 〈마의태자〉,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현진건의 〈무영탑〉, 박종화의 〈금삼의 피〉 등은 역사적 사실에서 소재를 빌어 온 작품이다. 이밖에도 현진건의 〈적도〉는 애정 갈등을 주축으로 물신주의와 향락이 판을 치는 세태의 변모를 묘사하고 있으며, 심훈의 〈상록수〉는 농촌 계몽 운동의 실천적 방향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이광수의 〈흙〉, 김남천의 〈대하〉, 이기영의 〈봄〉, 한설야의 〈탑〉 등도 이 시기 소설적 성과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시와 모더니즘

1930년대의 시는 시적 대상에 대한 언어적 감각의 혁신을 통해 모더니즘의 시대를 열고 있다.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1935), 김영랑의 〈영랑시집〉(1935), 김기림의 〈기상도〉(1936), 오장환의 〈성벽〉(1937), 김광균의 〈와사등〉(1939) 등과 같은 시집을 보면, 새로운 언어적 감각을 바탕으로 하여 특이한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시들이 많다. 정지용은 시에 있어서의 언어의 중요성을 각별하게 인식했던 시인이다. 그는 다양한 감각을 선명한 심상과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으며, 감상성에 치우쳤던 시적 정서를 절제하고자 했다. 그의 시에서 모든 대상은 이미지를 통해 공간적으로 구성되어 나타난다. 김영랑의 경우에도 섬세한 언어적 감각을 바탕으로 시의 리듬을 민요적인 가락으로부터 개성적인 율격으로 바꿔놓고 있다. 오장환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면서도 도시와 항구의 새로운 근대적 문물을 비판적으로 노래했고, 김광균은 시적 언어의 감각성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회화적인 수법이 특히 주목된다. 김기림은 시정신의 건강성을 강조하면서 시적 정서를 언어적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이미지로 구현하고자 한다. 그는 근대적 문물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모더니즘 문학론을 전개한 바 있다.

1930년대 시에서 볼 수 있는 모더니즘적 경향과는 달리 시를 통해 서정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인생과 자연을 관조하며 인간의 원초적인 생명 의식을 추구한 시인들도 있다. 서정주의 〈화사집〉(1941), 유치환의 〈청마시초〉(1939), 김광섭의 〈동경〉(1937) 등이 이같은 특징을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서정주는 토속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생명력을 관능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토속적인 자연 속에서 한국인들이 영위해온 전통적인 한의 삶을 노래하기도 한다. 유치환은 인간의 죽음과 삶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생명 의지의 시적 구현에 힘쓴다. 그의 시들은 생명에 대한 애착과 사랑, 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1930년대 후반의 시에서 주목되는 경향의 하나는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시적 저항과 그 비극성이다. 이육사의 〈육사시집〉과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모두 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해방이 이루어진 후에 출간되었다. 이육사의 시에서 널리 확인할 수 있는 자기인식과 그 정신적 초연성은 그가 보여준 현실에서의 실천적 행동과는 대조적인 일면도 있다. 신념에 가까운 고결한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그의 시는 절제와 균형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현실 체험의 공간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육사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에서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의 인식이 시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자기 성찰은 그것이 실천적인 행동의지로 외현화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뒤돌아봄을 통해 현실의 문제에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극의 확립

일제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파극의 영향을 벗어나 근대극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연극운동도 일어난다. 도쿄[東京] 유학생을 중심으로 토월회(1923)와 같은 극단이 조직되었으며, 조명희의 희곡 〈파사〉(1923), 김우진의 희곡 〈산돼지〉(1926) 등이 발표되어 극문학의 발전도 가능하게 된다. 계급연극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이동소극장을 중심으로 하는 연극 공연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신건설사와 같은 전문적인 계급연극 극단이 결성되어 계급연극의 대중화를 촉진하게 된다. 이와 함께 송영의 희곡 〈일체 면회 거절하라〉·〈황금산〉 등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1930년대에는 극예술연구회(1931)의 창립과 함께 수준 높은 번역극의 공연이 이루어지고 창작극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극문학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유치진의 경우에는 〈토막〉 등의 문제작을 내놓으면서 사실주의적 연극의 새로운 성과를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식민지 한국에 대해 무자비한 희생을 강요한다. 한국인들의 성씨를 모두 일본식으로 개칭하게 하고, 한국어와 한글을 일체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모든 힘을 전쟁에 투입한다. 이 시기 한국문학은 일본어로 만든 친일적인 〈국민문학〉의 창간(1941), 친일 문학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의 결성(1943) 등으로 이어지는 강제된 친일문학운동에 빠져들면서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닷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로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년 〈개벽〉 6월호에 발표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민족현실을 '빼앗긴 들'로 비유하여 노래한 민족시이다. 비록 국토는 잠시 빼앗겼다 해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준 시로서,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이상화   

이상화 시비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민족시를 발표하여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본관은 경주. 호는 무량(無量)·상화(尙火 : 또는 想華)·백아(白啞).

아버지 시우(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 사숙(私塾)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에게 교육을 받았다. 1916년 경성중앙학교에 입학해 1919년 수료하고, 강원도 일대를 방랑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백기만과 함께 거사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잠시 서울에 피신했다.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 동인에 가담했고,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1925년 박영희·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참여했고, 1927년 대구에 돌아왔으나 여러 번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의열단 이종암사건에 말려들어 구금되기도 했다. 1937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인 이상정 장군을 만난 이유로 5개월 정도 옥살이했다.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1937년 이후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교남학교에 권투부를 신설했다. 1940년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위암으로 죽었다. 1946년 경상북도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가 세워졌다. 


정지용의 문학세계

 

유리창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은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  

 

이 작품은 시인이 29세 되던 1930년『조선지광』에 발표한 작품이다.

어두운 유리창 앞에 서서 느끼는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견고한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정지용의 문학세계는 대략 3가지로 구분될 수 있으며, 섬세한 이미지 구사와 언어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보여준 것이 특징이다. 첫째는 1926~33년으로,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보인 모더니즘 계열의 시이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23년경이었다고 하나, 발표되기는 1926년 〈학조〉 6월호에 실린 시 〈카페 프란스〉·〈마음의 일기에서〉 등에서 시작된다. 이어 이미지 시의 면모를 보여준 〈바다〉(조선지광, 1927. 2)와 〈향수〉(조선지광, 1927. 3)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이런 경향은 〈시문학〉의 향토적 정서, 섬세한 이미지 표현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 시기의 시들은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면서도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아울러 보여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 리야"(〈향수〉 1연)와 같이 곱게 다듬어진 우리말의 언어적 세련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형상화하고 있다. 둘째는 〈가톨릭 청년〉에 관여하던 1933~35년에 보여준 종교적인 시이다. 이 시기에는 절대적인 신에게 관심을 갖고 시대적 상황에 무력한 자신의 정신적 허기와 갈증을 신앙을 통해 메우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갈수록 열악해지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시인의 정신적 방황을 드러내는 것이며, 특히 〈나무〉(가톨릭 청년, 1934. 3)의 "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발이 항상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한갖 나무만도 못한 욕되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참회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셋째는 1941년까지 발표한 동양적 전통과 정신에 바탕을 둔 산수시이다. 이 시기에 그는 동양적 정신과 산수의 풍경을 그리는 여행을 떠남으로써, 시적 소재가 〈바다〉(시원, 1935. 12)를 거쳐 〈옥류동〉(조광, 1937. 11)·〈비로봉〉(청색지, 1938. 8)·〈장수산〉(문장, 1939. 3)·〈백록담〉(문장, 1939. 4)으로 바뀐다. 바다를 거쳐 산으로 오르는 이런 시세계의 변모는 즉 일제강점기 말의 암울한 현실에 구애됨이 없이 자연에 몰입하고자 하는 시인의 정신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시어의 조탁(彫琢)과 섬세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독특한 시세계

를 표현했는데, 이러한 성격은 한국의 서정시를 계승한 것으로서 이후 제자격인 청록파의 시세계로 이어졌다. 100여 편이 넘는 시 외에도
 

 소설 〈3인 三人〉(서광, 1919. 11)과 평론 〈조선시의 반성〉(문장, 1948. 10)·〈문학으로 사는 길〉(세계일보, 1949. 1. 5) 등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1935)·〈백록담〉(1941)·〈지용시선〉(1946)과, 이론서로 〈문학독본 文學讀本〉(1948)·〈산문 散文〉(1949) 등이 있고, 1988년 민음사에서 〈정지용선집〉을 펴냈다.

  도시샤 대학의 정지용 시비 

웹사이트 정지용 사이버 문학관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나라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자처서 도라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린다.


1939년 4월호 『여성지』에 발표된 이 작품은 해방 직후 간행된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김기림(1908. 5. 11 함북 학성~?) 시인·평론가·영문학자. 본명은 인손(仁孫), 호는 편석촌(片石村).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立敎] 중학에 편입했다. 1926년 일본대학 문학예술과에 입학, 1930년 졸업 후 바로 귀국했다. 같은 해 4월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으며, 이듬해 고향에 내려가 무곡원(武谷園)이라는 과수원을 경영했다. 1933년 이태준·정지용·이무영·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했다. 1936년 일본 센다이[仙臺]에 있는 도호쿠대학[東北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3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해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계속했다. 1942년에는 경성중학교 영어 교사를 지냈는데, 이때 배운 제자가 시인 김규동이다.

1945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중앙대학교·연세대학교 강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조교수, 신문화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1946년 2월 8일에 열린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에서 '조선 시에 관한 보고와 금후의 방향'이라는 연설을 했다. 같은 해 임화·김남천·이태준 등이 중심이 된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시부위원회(詩部委員會) 위원장을 맡았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88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기림의 모더니 시론은 1920년대초 우리나라 시문학의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와 1920년대말부터 1930년대초까지 목적성에 치우치는 프로 문학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평론〈시인과 시의 개념〉(조선일보, 1930. 7. 24~30)·〈시의 기술·인식·현실 등 제문제〉(조선일보, 1931. 2. 11~14)·〈시작(詩作)에 있어서의 주지주의적 태도〉(신동아, 1933. 4)·〈현대예술의 원시에 대한 욕구〉(조선일보, 1933. 8. 9~10) 등을 발표하여 기존의 감상주의적 경향을 비판했다. 즉 감상주의는 눈물과 슬픔 등의 과잉정서에서 오는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이것을 극복한 건강하고 명랑한 정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성에 호소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시의 음악성 및 시간성을 비판하고, 회화성·공간성·감각성을 강조하면서 정지용·신석정·이상·김광균 등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1934~35년에 세계정세가 위기에 처하자 현대문명의 비인간성에 반대하고 휴머니즘을 내세웠다. 또 자신의 초기 모더니즘 시론이 문명예찬 및 기교주의에 치우쳤음을 비판하고, 사상과 기교가 통일된 '전체로서의 시'를 제기했다. 이와 같은 생각은 평론 〈신휴머니즘의 요구〉(조선일보, 1934. 11. 16)와 〈오전의 시론〉(조선일보, 1935. 4. 20~5. 2)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인문평론, 1939. 10)에서는 당시 문단의 위기를 경향파와 모더니즘의 종합이라는 방식으로 타개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침탈이 극심해져 민족의 언어보존조차 어려운 때였으므로 그 해결책은 공허한 것이 되었다. 한편 그는 '과학적 시학'이라는 시 비평 원리를 모색하기도 했는데, 이는 언어학·심리학·사회학 등의 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평론집으로 '문학의 과학'을 내세운 〈문학개론〉(1946)과 1930년대 영미의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우리나라 시단의 분위기를 바꾸어놓은 〈시론〉(1947), 영국의 비평가 리처즈의 심리학적 이론에 따라 계몽적인 시론을 펼친 〈시의 이해〉(1949) 등이 있다. 그밖에 수필집으로 〈바다와 육체〉(1948)를 펴냈고, 소설과 희곡을 5~6편씩 남겼다.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하나 찍어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로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갗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시상까지

낳지 못하는 쫒기는 새가 되었다.   - 1969


이 시는 비둘기를 통해서 본 우리의 메마른 삶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그 주제는 작품 곳곳에 스며있는 씁쓸한 어조와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김광섭의 문학세계브리태니커

1927년 와세다대학 조선인동창회지에 시〈모기장〉을 발표한 뒤, 〈해외문학〉·〈문예월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본격적인 시창작은 1935년 〈시원〉에 주권을 상실한 우리민족의 좌절과 절망을 읊은〈고독〉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집으로 〈동경 憧憬〉(1938)·〈마음〉(1949)·〈해바라기〉(1957)·〈성북동 비둘기〉(1969)·〈반응〉(1971) 등을 펴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초기·중기·후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해방 이전으로 일제강점기의 우수와 불안, 비애와 절망 그리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관념적 저항을 노래했다. 중기는 시집 〈마음〉과 〈해바라기〉를 펴낸 시기로 지적 관조의 시, 옥중시, 조국해방을 노래한 시,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향일성(向日性)의 의지를 읊은 시이다. 여기서 관조의 시는 현실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자연에의 몰입으로 나타나며, 옥중시는 일제 말기 자신의 옥중체험을 바탕으로 인생무상을 노래한 것이다.

후기는 시집 〈성북동 비둘기〉와 〈반응〉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체적 삶의 재발견 및 사회문명 비판의식, 생의 달관과 화해, 평화에의 추구가 중요한 시적 주제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이전의 불투명한 관념의 세계가 현실과 결부되면서 구체성을 띠게 되는데, 이같은 특징은 병상에서 깨달은 자연·인생·문명에 대한 통찰을 읊은〈성북동 비둘기〉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마지막 시집 〈반응〉은 시인의 지적 의지로부터 나온 '사회시집'(社會詩集)이다.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0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과 국민훈장모란장, 197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7년 대한민국건국포장 등을 받았다.  


 

유치환[柳致環]1908. 7. 14 경남 충무~1967. 2. 13 부산. 시인·교육자.

 

생명(生命)의 서(書)   

                                        유치환

   

나의 지식(知識)이 독(毒)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不死身)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一切)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苦悶)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烈烈)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生命)이란

그 원시(原始)의 본연(本然)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白骨)을 쪼이리라


이 작품은 시인이 생명파로서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주는 작품이다. 고민과 좌절, 절망의 끝에서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의 삶에의 자세에 깃든 진지함이 이 시를 지탱하고 있다.


유치환은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를 진지하게 추구했다. 본관은 진주. 호는 청마(靑馬).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김광균[金光均]1914. 1. 19 경기 개성∼1993. 11. 23 서울. 시인.


김기림에 의해 도입되고 이론화된 모더니즘 시론을 주조로 하여 1930년대 후반 모더니즘 시운동의 정착에 이바지했다. 송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산과 용산 등에서 공장 사원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뒤 〈병〉(동아일보, 1929. 10. 19)·〈야경차〉(동아일보, 1930. 1. 12) 등을 발표했다. 1936년 〈시인부락〉 동인,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했다. 초기에 쓴 시 27편을 모아 제1시집 〈와사등 瓦斯燈〉(1939)을 펴냈다. 8·15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관계하면서 이념 대립을 지양하는 '제3문학론'을 내세웠으나, 곧 문단을 떠나 사업에만 열중했다. 8·15해방 이전까지 쓴 시 19편을 모아 제2시집 〈기항지 寄港地〉(1947)를 펴냈다. 6·25전쟁 이후 건설공사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제3시집 〈황혼가〉(1957)를 펴냈다.

당대의 비평가 김기림·백철이 "청각조차 시각화하는 기이한 재주", "무형적인 것을 유형화하는 능력"으로 평가했듯이 그의 시는 현대문명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풀어내는 언어의식 및 회화적 이미지 같은 모더니즘론에 근거했다.

그의 시는 자신이 꾸며낸 세계와 상상력에 의한 사물 제시보다 정서적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시적 구조에 있어 공간성을 긍정하고 도시 문명의 혼란 속에서 현대성을 찾는 시어를 사용한 특징을 가진다. 특히 본격적인 의미의 모더니즘 시보다는 독특한 의미의 이미지즘 시를 보여주었는데, 그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간적 형식의 탐구로 현대 문명이 음악적 본질보다는 회화적 본질, 즉 추상보다는 구체, 청각보다는 시각으로 조직된 까닭에 문명의 탐구는 공간적 이미지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시에서 이러한 공간성은 자연과 문명 등 시간적·지리적으로 단절된 이중구조로 나타난다. 둘째, 대상을 시각적·회화적 이미지로 한정해야만 사물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색채 감각어를 자주 썼다. 이미지를 감각적 형태에 응결시키고 사물 자체를 직접적으로 정밀하게 한정하는 태도는 서구 이미지즘 시의 창작원리를 따른 것이다. 셋째, 그는 감상적 정서의 표출로서 단순히 주관적으로 나타나는 낭만주의적 감상이 아닌, 객관화되어 특정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감상성은 주로 회복되지 않는 과거 및 실향의식으로 나타나 단절된 역사의식이나 현대 문명에 대한 소외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실적 체험과 동떨어진 몽롱한 분위기를 강조해 모더니즘의 미학적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과거와 현실 사이의 불연속, 단절감에서 비롯된 감상성은 시 구조상 이질적인 공간 구조를 형성했지만 T. E. 흄이 제시한 불연속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있다. 또 문명비판의 태도 역시 전통과 역사의식에 의거한 문명의 재생을 바탕으로 하는 T. S. 엘리엇의 문명관과 다르게 소외의식만을 강조한 것은 모더니즘 시로서 그의 시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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