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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문학의 이해와 역사

수로보니게 여인 2009. 5. 30. 15:54

 

제 17강 한국한문학의 이해와 역사

                                                                                                                            손종흠 교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으로 가자  


  교재 <한국 한문학의 이해>에서 개략적으로 다루고 있는 한문 산문의 종류는 요내의 십삼 분류법에 대한 언급이었다. 여기서는 현전하는 문체학 저서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심조룡』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이 교과서 다루고 있는 산문들의 문체에 대해서 공부해본다.    

1. <온달전>의 전

2. <상원백주승상서>의 상서

3. <진종사기>와 <야출고북기>의 기

4. <제김이호문>의 제문

5. <사호조참의소>의 주소



1. 傳


字書에 이르기를 “傳이란 傳(平聲-原註)이니, 事迹을 기재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漢나라 司馬遷이 ?史記?를 쓰면서 「列傳」이란 것을 만들어 한 사람의 일생을 적었는데, 후세 사가들이 끝내 아무도 그 체제를 바꾸지 못하였다. 이것을 이어서 山林이나 里巷에서도 더러 덕을 숨겨 드러나지 않거나, 평범한 사람이지만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전을 지어 그 사적을 전하고, 자기의 뜻을 부쳤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간혹 滑稽의 수단을 섞어 넣기도 하는데, 모두 전의 체이다. 이제 구분하여 열거하는데, 그 품격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史傳이고(正體와 變體 두 가지가 있다.-原註), 둘째는 家傳이고, 셋째는 托傳이고, 넷째는 假傳이니, 작자들이 살펴보기 바란다.


2. 上書


字書에 이르기를 “書란 舒이니, 그 말을 펼쳐서 簡牘에 진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인이 펼쳐 아뢰고 諫하여 설득하는(‘說’의 음은 ‘稅’이다 -原註) 말은 ?尙書?와 ?春秋?의 內外傳에 있는 것을 보면 자세하다. 그러나 모두 말로만 한 것이지 작품을 이룬 것은 아니어서 ?伊訓? ?無逸? 등의 편들은 마음대로 명명하여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역시 史臣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劉勰이 말한 “말과 글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다.”1)는 것이 바로 이때이다. 戰國시대까지는 아직 옛날 방식이 변하지 않아서, 왕에게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모두 上書라고 하였다. 秦漢 이후로는 여러 차례 변혁이 있었지만 옛날의 제도는 그래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왕왕 여러 문집 중에 보인다. 蕭統의 ?文選?에서는 신하의 書와 구별하려고 따로 한 갈래를 만들어 ‘上書’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이제 그 예를 따라 전대 여러 신하들이 천자에게 올린 글을 가려 본보기로 삼고, 列國의 신하들이 그 임금에게 올린 것도 역시 갈래에 따라 차례대로 그 가운데 섞어 넣었다. 그 밖에 章․表․奏․疏 같은 것들은 별도의 갈래로 열거한다.


3. 記


?金石例?에 이르기를 “記란 일을 기록한 글이다.”라고 하였다. 「禹貢」과 「顧命」은 바로 記의 祖宗인데, 記라는 명칭은 「戴記」와 「學記」 등 여러 편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에 揚雄이 「蜀記」를 지었으나 ?文選?에 그 갈래를 두지 않았고, 劉勰도 그에 대한 설명을 쓰지 않았으니, 漢․魏 이전에는 작자가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의 盛行은 唐나라 때부터 비롯되었다. 그 문장은 敍事를 위주로 하는데, 후인들이 그 체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議論을 섞어 넣었다. 그래서 陳師道가 이르기를 “韓退之가 記를 지을 때는 그 일을 기록할 따름이었는데, 오늘날의 記는 論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여기에 유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燕喜亭記」를 보면 이미 의론에 관련되어 있고, 歐陽修․蘇軾 이후로는 의론이 점차 많아졌으니, 記의 체가 변한 것이 어찌 일조일석에 된 것이겠는가? 그래서 이제 여러 記를 가려 적으면서 碑文의 예와 같이 三品으로 나누어, 학자들로 하여금 상고하여 取捨할 수 있게 하고자 하니, 그 본뜻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또 사물에 假託하여 뜻을 부친 것도 있고,(예컨대 王績의 「醉鄕記」가 그것이다. -原註) 첫머리는 序를 쓰고, 韻語로 기를 쓴 것도 있고,(예컨대 韓愈의 「汴州東西水門記」가 그것이다. -原註) 작품 끝에 詩歌를 붙여 넣은 것도 있는데,(예컨대 范仲淹의 「桐盧嚴先生祠堂記」가 그것이다. -原註) 모두 別體이다. 이제 三品 끝에 아울러 열거하고, 인하여 三體로 나누니, 그 변화를 모두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제목도 어떤 것은 「○○記」라 하고, 어떤 것은 「記○○」라 하였는데,(?昌黎集?에 실려 있는 「記宜城驛」이 그것이다. -原註) 다만 작자가 명명한 대로 따랐을 뿐이다.

이 밖에 또 墓磚記․墳記․塔記가 있는데, 모두 「墓誌」條에 붙이고 여기에서는 다시 열거하지 않는다.


4. 祭文


祭文이란 親友에게 祭를 올릴 때 쓰는 글이다. 옛날에는 제사를 지낼 때 歆饗하라는 말을 하는 정도였다. 중세 이후로는 언행을 찬양하기도 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부치기도 하였으니, 祝文이 변한 것이다. 그 글은 散文도 있고, 韻文도 있고, 騈儷文도 있으며, 韻語를 쓰는 것 가운데에도 散文․四言․六言․雜言․騷體․騈儷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제 각각 갈래에 따라 열거한다. 劉勰이 이르기를 “모범적인 祭奠은 공경스러우면서도 슬퍼야 한다. 만약 文辭는 화려한데 알맹이가 없거나, 감정이 막혀서 드러나지 않는 것은 모두 제문으로서는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2) 작자들은 의당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宋人은 또 말[馬]을 제사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것도 하나의 체이므로 취하여 덧붙인다.


5. 奏疏(奏․奏疏․奏對․奏啓․奏狀․奏箚․封事․彈事)(주석은 본래 없었는데, 茅健本에 의거하여 보충한다.-原註)

  奏疏란 여러 신하들이 論諫하는 것의 총칭이다. 임금에게 아뢰는 글은 그 명칭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奏疏하는 말로 싸잡아 말한다. 戰國時代 이전에는 모두 上書하고 불렀었다. 秦의 초기에는 書를 奏라고 고쳐 불렀다. 漢나라가 禮儀를 정하여 四品이 있었다. 첫째는 章이니 謝恩할 때 썼고, 둘째는 奏니 按劾할 때 썼고, 셋째는 表니 요청을 진술할 때 썼고, 넷째는 議니 다른 의견을 주장할 때 썼다. 그러나 당시에 章을 아뢰어 더러는 災異를 보고하기도 하였으니 謝恩에만 썼던 것은 아니다. 일에 대해 奏를 올리는 것도 상소라고 하였으니, 按劾할 때만 奏를 쓴 것도 아니다. 또 按劾을 하는 奏는 따로 彈事라고 하였으니, 탄핵은 奏의 한 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八儀를 두어 음양의 변화를 은밀히 아뢸 때 검은 자루에 문서를 봉하여3) 내용이 새나가는 것을 막았으니, 그것을 封事라 하였다. 그리고 朝廷의 신하가 외직에 보임 되어 나가면, 천자가 사람을 시켜 하고자 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아래 사람과 의논할 일이 있으면 모두 글로 써서 대답하였다. 그것이 곧 漢의 제도이니, 어찌 四品만 있었겠는가? 그러나 秦이 천하를 차지하고부터 漢 孝惠帝에 이르기까지 글로 써서 일을 이야기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孝文帝가 言路를 열어 넓히자, 賈山이 治亂의 道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이름하여 「至言」이라 하였으니, 四品의 명칭은 叔孫通이 정한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魏晉 이후로는 啓만이 성행하다가, 唐나라 때는 表狀을 사용하였는데, 역시 書疏라고 불렀다. 宋人은 이전의 제도를 거울삼아 가감하여, 箚子도 있고, 狀도 있고, 書도 있고, 表도 있고, 封事도 있는데, 箚子가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唐나라 사람의 牓子․錄子의 제도에 근본하여 그 이름을 고쳤는데, 그게 바로 한 시대의 새로운 양식이었다.

上書와 章․表는 이미 앞에서 열거하였고, 그 밖의 편목은 다시 八品이 있는데, 이제 여기에 모아서 열거한다. 첫째는 奏이다. 奏는 올린다는 것이다. 둘째는 疏이다. 소는 펼친다는 것이다. 漢나라 때 諸王과 官屬이 그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疏라고 했으므로 여기에 덧붙인다. 셋째는 對이다. 넷째는 啓이다. 啓는 연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狀이다. 狀이란 진술한다는 것이다. 狀에 두 가지 체가 있으니, 산문체와 변려체가 그것이다. 여섯째는 箚子이다. 箚란 찌르는 것이다. 일곱째는 封事이다. 여덟째는 彈事이다. 각각 갈래끼리 모으고, 「至言」을 편의 첫머리에 올렸으니, 덧붙일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疏․對․啓․狀․箚 다섯 가지는 모두 '奏'자를 앞에 붙여, 신하들이 私的으로 서로 대답하고 왕래하는 것의 호칭과 구별하였다. 독자들이 잘 살펴 주기 바란다.

그 글투를 논하자면 모두 분명하고 진실 되며 독실하고 정성스러운 것을 근본으로 삼고, 변별하여 분석하고 터서 통하게 하는 것을 요체로 삼으며, 옛 일을 참작하여4) 요즘 일을 처리하며, 번잡한 것을 손질하고 요점을 모으니, 이것이 그 대체이다. 奏啓는 規의 영역에 드는 것이어서 호사스러운 것을 꺼리고, 彈事는 법을 밝혀 잘 꾸짖는 데에 조심해야 하는데, 世人들이 지은 것은 절충을 잘 못한 것이 많다. 이것 또한 학자들이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제도에는 政事를 논한 것은 題라 하고, 개인적인 사정을 진술한 것은 奏라 하는데, 모두 本이라 일컫는다. 벼슬을 사양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등의 것은 모두 산문으로 쓰지만 간혹 변려문으로도 쓰는데, 奏의 격식과 같다. 慶賀를 하는 경우는 表의 글투를 모방하는데, 첫머리와 끝 부분은 역시 奏와 같다. 오직 史館에서 글을 올리는 경우에만 온전히 表의 형식을 쓴다. 그러나 오늘날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 제목은 모두 本과 表 두 가지 뿐이다. 모든 왕들이 쓰던 명칭들을 혁파하고, 中世의 변려문을 줄인 것은 우리 시대가 前代보다 뛰어난 점이다.

 

 

19강 한문 한시의 실제


교과서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 가운데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고려의 산문을 소개한다.


                             백결선생전 百結先生傳

                                                      김부식

   

  백결 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낭산(狼山) 밑에서 살았다. 집이 아주 가난하여, 옷을 백 군데나 기워서 마치 메추리를 매단 것 같았으므로, 그 때 사람들은 그를 ‘동리(東里) 백결 선생’이라 불렀다. 일찌기 영계기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몸소 가지고 다니면서, 무릇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겁고, 불평스러운 일을 모두 거문고로 풀어냈다.

세모가 다 되어 이웃 마을에서 곡식을 찧으니, 아내가 절구질하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절구를 찧는데, 우리만 홀로 없으니 어떻게 해서 세밑을 지내려오?" 하니, 선생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생은 명(命)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매였으니, 오는 것은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을 좇을 수 없거늘, 그대는 어찌해서 상심하는가? 내가 그대를 위하여 절구 찧는 소리를 내어 위로하리라" 하고 거문고를 타서 절구 찧는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서 이것을 선하여 ‘대악’(碓樂)이라고 부른다.



                               김후직전金后稷傳

                                                    김부식


  김후직은 지증왕(智證王)의 증손이다. 진명대왕을 섬겨 이찬벼슬이 되었다가 병부령(兵部令)으로 옮겨졌다. 대왕이 자못 사냥을 좋아하므로 후직이 간하기를, “옛날의 임금은, 하루에도 만 가지 기미를 살피고, 깊이 생각하며 멀리 염려하고, 좌우에 바른 사람을 두고서 곧은 간언을 받아들이며, 부지런히 힘쓰고, 감히 편안히 즐겁지 않았으므로, 덕치(德治)는 아름다웠고, 나라는 보전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광부(狂夫)와 사냥꾼을 데리고, 매나 개를 놓아 꿩과 토끼를 쫓아 산야를 뛰어다녀 스스로 그치지 않습니다. 노자(老子)는 ‘말을 달려 사냥을 하면 사랑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말했고. 서경(書經)에서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에 빠지거나, 이 중에서 한 가지라도 하게 되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안으로는 마음을 방탕케 하고 밖으로는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이 그 말을 좇지 않았다. 또 간절히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후직이 병들어 죽게 되자, 그 세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신하가 되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대왕이 놀기를 그치지 않다가 망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되는데,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바이다. 비록 죽더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치려고 생각할 것이니, 꼭 내 뼈는 대왕이 사냥을 다녀는 길가에 묻어라" 하니, 아들들은 모두 그 말을 따랐다.

  훗날 왕이 사냥 나가는 도중에 멀리서 소리가 났는데, “가지 마시오" 하는 듯했다. 왕이 돌아보며, “소리가 어디서 나느냐?"라고 물었다. 종자(從者)가 고하기를, “저것은 후직 이찬의 무덤입니다" 하고는, 드디어 후직이 죽을 때 한 말을 아뢰니, 대왕은 눈물을 줄줄 흘리 면서 말하기를, “그는 죽어서도 충간(忠諫)을 잊지 않으니, 나를 사랑함이 지극하구나. 만약 끝내 고치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유명(幽明)의 사이에 서리오?"하고, 드디어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

                                                            김부식


  신 김부식(金富軾)이 아룁니다. 옛날의 열국(列國)도 또한 각기 사관(史官)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진(晉)의 승(乘)과 초(楚)의 도올(檮杌)과 노(魯)의 춘추(春秋)는 한가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해동(海東) 삼국은 지나온 햇수가 오래되었으나, 마땅히 그 사실이 역사책에 나타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에 노신(老臣)으로 하여금 변정케 하신 것인데, 스스로 돌아보건대 지식이 부족하여 할 바를 모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요임금의 문사(文思)를 타고 나시고, 하우(夏禹)의 근검 (勤險)을 체득하시어, 골몰한 정무의 여가에 전고(前古)를 널리 보시고, “지금의 학사(學土)  대부(大夫)는 오경(五經) 제자(諸子)의 서적과 진(奏) 한(漢)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간혹 두루 통하고 자세히 설명하는 자가 있으나, 우리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시말(始末)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다"라고 하신 줄 아옵니다. 하물며 생각컨대, 신라·고구려·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정립(鼎立)하여서는 예로써 중국과 상통하였으므로, 범엽의 『한서』(漢書)나 송기의 『당서』(唐書)에는 모두 열전(列傳)을 두었는데, 중국의 일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일은 소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고, 또 그 고기 (古記)라는 것도 글이 거칠고 졸렬하여 사적이 누락되어 있어서, 임금의 선악과 신하의 충사(忠邪)와 방업(邦業)의 안위(安危)와 인민의 치란(治亂)을 모두 드러내어 권계로 남기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재주, 학문, 식견의) 세 가지에 빼어난 인재를 얻어, 일가의 역사를 이루어 만세에 끼쳐, 해나 별처럼 빛나게 해야 합니다.

  신 같은 자는 본시 재주 있는 인재가 아니고, 또 깊은 학식이 없으며, 늘그막에 이르러는 날로 더욱 정신이 어두워, 글 읽기는 비록 부지런하나 책을 덮으면 곧 잊어버리고 붓을 잡으면 힘이 없어 종이에 임하여는 써 내려가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학술이 둔하고 얇음이 이와 같고, 예전 말과 지나간 일에 어두운 것이 저와 같으니, 이러므로 정력을 기울여 겨우 성펀(成編)하였으나, 마침내 보잘 것이 없어 다만 스스로 부끄러워할 따름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광간(狂簡)의 재단(裁斷)을 살피시고 망작(妄作)의 죄를 용서하시어, 비록 영산(名山)에 수장할 것은 못되지만, 간장 단지를 바르는 데나 쓰이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구구한 망의(妄意)를 하늘의 해가 굽어 살핍니다. 삼가 본기(本紀) 28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을 찬술(撰述)하여, 표(表)와 함께 아뢰어, 위로 천람(天覽)을 더럽히나이다. 



                                  운금루기 雲錦樓記

                                                           이제현


산천을 찾아 구경할 만한 명승지가 반드시 긍벽하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도읍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도 진실로 구경할 만한 산천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예를 다투는 자는 조정에 모이고, 이익을 다투는 자는 시장에 모이나니, 비록 형산(衡山) .여산(廬山). 동정호(洞庭湖). 소상강(瀟湘江)이 반 발짝만 나서면 내려다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해도 그런 것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가? 사슴을 쫓아가면 산이 보이지 않고 금을 움킬 때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가을의 털끝은 살피면서 수레에 실운 나뭇짐은 보지 못한다. 이것들은 마음이 쏠리어 다른 데를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면서 재력이 있는 자는 나루를 지나 시골 마을을 골라 자리 잡고 산천을 고루고루 유람하면서 스스로 고상하다고 여긴다. 사강락(謝康樂)이 개척한 길은 백성들이 놀라는 바이고, 허범(許氾)이 집을 묻는 것은 호걸스러운 선비가 꺼리는 바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지 않는 쪽이 고상하게 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경성 남쪽에 한 연못이 있는데 백묘는 된다. 그 연못가로 빙 둘러 있는 것들은 여염집들로서 비늘 같고 머릿빗 같이 나란한데, 짊어지거나 머리에 이거나 말을 타고 걷는 사람들이 그 곁을 왕래하며 줄지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그윽하면서 넓은 경내가 그 사이에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 후 지원(至元)연간 정축년(1337년) 여름에 연꽃이 한창 피었을 때 현복군(玄福君) 권후(權候)가 그 곳을 발견하고 매우 사랑하여 바로 그 연못 동쪽에다 땅을 사서 누각을 지었다. 그 누각은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넓이가 세 길이나 되게 만들었으며, 주춧돌은 받치지 않았지만, 기둥은 썩지 않게 하고, 기와는 이지 않았지만 이엉은 새지 않게 하였으며, 서까래는 다듬지도 않았는데 굵지도 않고 휘어지지도 않았으며, 흙만 바르고 단청은 하지 않았는데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다. 대개 이와 같은데, 그 연못에 가득한 연꽃을 다 포괄하여 앞에 두었다. 이에 그 아버지 길창공(吉昌公)과 형제와 동서들을 그 누 위로 청해다가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고 유쾌하게 노느라고, 날이 저물어도 돌아가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그때 아들 중에 큰 글씨를 잘 쓰는 자가 있어 운금(雲錦)이라는 두 글자를 써 달아 누각의 이름으로 삼았다. 내가 시험 삼아 가서 보니 붉은 꽃향기와 푸른 잎 그림자가 넓게 연못 속에 끝없이 비치는데, 어지러이 흩어지는 바람과 이슬이 연파(煙波)에 움직이니,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할 만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용산(龍山)의 여러 봉우리가 청색을 모으고 녹색을 바르며 처마 맡으로 몰려들어, 컴컴할 때와 밝을 때와 아침과 저녁에 따라 늘 각각 다른 모양을 나타낸다. 또 건너편 여염집들이 나타내는 자세한 모습을 누각에 앉아서 하나하나 셀 수도 있으며, 지고 이고 타고 걸어서 왕래하는 사람, 달리는 사람, 쉬는 사람, 돌아다보는 사람, 부르는 사람, 친구를 만나 서서 말하는 사람, 어른을 만나 절하는 사람들이 모두 형태를 숨길 수 없으니, 바라보며 즐길 만하다. 그러나 저 편의 그 사람들은 연못만 있는 것을 보고 누각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어찌 또 누각 안에 사람이 있는 줄을 알겠는가? 구경할 만한 명승지는 반드시 궁벽하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조정과 시장 사람들이 언제나 보면서도 그것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 마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두어 사람들에게 경솔하게 보이지 않았음인가?

  권후는 만호(萬戶)의 부절(符節)을 허리에 차고 외척의 세력을 깔고 앉아 나이는 옛사람의 강사(强仕)할 나이(마흔 살)도 되지 않았다. 으레 부귀와 이록(利綠)에 빠져서 취해 있을 때인데, 그는 인자(仁者)와 지자(智者)가 즐기는 바를 즐기되, 백성들을 놀라게 하지도 않으면서 시장과 조정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빼어나고 넓은 경내를 차지하여, 그 어버이를 비롯하여 손님까지도 즐겁게 하고,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남에게까지 즐겁게 하니 이는 가상할 만한 일이다.

 

20강 한문 한시의 실제


  조선의 명문장가가 많이 있지만 연암 박지원은 그 중에서 첫손 꼽히는 대 문장가이다. 이번 강좌에서는 교과서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 가운데 연암의 한민명전의의 전문을 소개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사회개혁을 위한 박지원의 뜨거운 열정과 풍부한 식견을 볼 수 있다.


                   백성 명의의 밭을 한정하자는 논의(限民名田議)

                                                                      박지원


  신(臣)지원은 황공하게도 농사에 관한 책(과농소초)를 바치는 기회에 이 건의를 드립니다. 신이 지금 맡고 있는 군(면천군)은 동쪽으로 홍주(洪州)와 접하고, 남쪽으로 덕산(德山)과 이웃하며, 서쪽으로 당진(唐津)을 바라보고, 북쪽으론 바다에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으로 오십 리, 동서로 삼십 리의 면적입니다.

  이 중에 원장(元帳)에 기입된 전결(田結)은 총 5천8백96결(結) 4부(負)3속(束)으로, 이것이 경내 농지의 양지(量地)한 도수(度數)입니다.

  호수는 4천1백39호, 인구는 1만3천5백8명인데, 이 중 남자가 6천8백5명, 여자가 6천7백3명으로 이것이 이 경내 호구(戶口)의 입적(入籍)한 도수입니다.

  경내에는 명산이나 대천이 없고, 바닷가의 땅은 소금기에 절어 있으며, 원야(原野)는 건조하고, 시내는 항상 메말라 있으며 각처의 취락에는 샘이 드무니, 이것은 이곳의 토양이 취약하고 물기가 부족한 증거이며, 게다가 산록의 형세는 그 잘못된 ,형상으로 말미암아 바람을 받고 있어 벌거벗은 불모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수토(水土) 및 풍기(風氣)의 대략입니다. 농작으로는 오곡이 토의(土宜)에 맞으나, 그 중 특히 벼가 잘 되며, 재식(栽植)으로는 감나무·밤나무·소나무·옻나무는 토질에 맞으나, 모시·목화·뽕나무·닥나무는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경내의 농작과 재식의 토의(土宜)입니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숙종 경자년(1720)에 경내의 전결(田結)을 다시 양전(量田)한 바 있습니다. 산림·소택(沼澤)·구릉·계곡·성지(城池)·도로 등 농경이 불가능한 땅을 제외하고 시기전(時起田)의 실결(寶結)은 총 2천8百24결92부(負)였습니다. 이 중 한전(旱田)이 1천1백74결 영(零)으로 이것이 실제로 경작해 오고, 실제로 부세를 공납해 오는 토지입니다. 본군에 보관되어 있는 동척(銷尺)은 훈련원(訓練院) 사장(射場)에 있는 석표도식(石標圖式)을 표준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자로 5척이 1보(步)가 되는데 사방 l백 보가 1등1결의 땅으로 실적(實積)은 1만보이며, 자로 계산하연 실적(實積)이 만 척이 됩니다. 농경지의 등급이 멀어질수록 계산되는 면적은 더욱 넓어져서 6등에서 끝나는데, 6등천 l결은 사방 2백 보, 실적(實積)은 백만 척이며, 그 넓이는 1등전의 3배가 됩니다. 이는 그 토지에 일역전(一易田:일 년 휴경지). 재역원(再易田:이년 휴경지)의 땅이 있기 때문에 그 면적을 2배로 하기도 하고, 3배로 하기도 하며, 그 토지의 비척도(肥瘠度)에 따라 면적을 정하고 소출의 다과(多寡)에 따라 서로 맞아 떨어지도록 한 것인데, 이 방식은 본군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공통의 양전 방식입니다. 그러나 경내 l결의 상부(常賦)는 모두 6등전으로 되어 있지마는 대개 제 9등으로 내고 있는데, 이것이 본군에서 부세를 산출하는 방식입니다. 농경지의 등급에는 비록 6등전 이하가 없으나 6등전 내에는 척박한 땅이 많고, 비옥한 땅이 적기 때문에 상부(常賦)를 오직 하지하(下之下)의 것으로 내고 있습니다. 수전에는 간혹 제7등, 제8등으로 부세를 내는 경우가 있으나, ‘하지상등(下之上等)으로 내는 것은 겨우 15결이고, 하지중동(下之中等)으로 내는 것은 l백45결6부입니다. 이상이 경내 전부(田賦)의 대략입니다.  신이 경내 전결을 군내의 호구에 계산하여 배분해 보았습니다. 가령 군내 호구 전체가 농가이고, 농부 1인이 모두 위로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 처자를 거느리고 있다고 보아, 현재 남녀 1만3천5백8명의 인구를 4천1백39호의 가호에다 대비(對比)하되 1가호 당 5명의 식구를 단위로 설정해 보면 5명의 식구가 되는 가호 수는 불과 2천 7백 1호 밖에 안 됩니다. 대체로 1가호가 5명도 안 되는 식구로는 거름 내기도 어렵고, 역농(力農)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역농을 하지 못하면 식구를 먹여 살리며 생활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1가호가 최소한 5명의 식구는 되어야 비로소 농사를 지으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가호에 전결을 평분해 보면 계산상 l가호의 배당이 한전 43부4속, 수전61부2속이 됩니다. 따라서 농부 1인이 경작할 농토로는 한전과 수전을 합해서 고작 l결2부8속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신의 농토와 민구(民口)를 계산하여 고대의 균전임지(均田任地)에 맞추어 보려는 까닭입니다.

  신이 본군에 부임한 지 이미 2년이 지났는데, 그 중 한해는 풍년이었고 한 해는 흉년이었습니다. 비록 전토마다 현지를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양전(量田)하고 그 토의(土宜)를 조사해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그 경작하고 수확하는 공력과 실제의 소출량은 또한 대략 파악하고 있습니다.

  대개 1경내의 토지를 전체적으로 보아 최고와 최저의 등급을 절충하여 그 중간을 잡는다면 토질의 호부(好否)와 면적의 광협(廣狹)의 평균치를 알 수 있으며, 또 몇 해 간의 농형(農形)을 비교해서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 해를 평균치로 잡는다면, 씨뿌리기를 얼마나 해야 할지와 소출(所出)이 얼마나 될지의 평균치를 알 수 있습니다. 긴 것을 잘라다 짧은 것을 보충하고 이것과 저것을 맞추어 보면, 그 실제가 주먹구구에서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가령, 한전에 3천8백20석10두의 씨를 뿌리면, 소출은 2만7천3백12석이 되고, 수전에 2천9백37석16두의 씨를 뿌리면, 7만9천7백85석이 되어, 도합 6천7백58석6두의 씨를 뿌려서 10만7천97석의 소출을 냅니다.

  농부 한 사람이 한전은 28두2승을 파종해서 10석2두5승의 소출을 얻고, 수전은 21두 5승의 모를 내어 29석12두5승의 수확을 내어, 1가호 당 수확량의 도합은 39석12두5승이 됩니다. 이 중에 조세가 72두가 되고, 각종 곡식 종자 49두7승을 제외하고 나면, 실제로 남는 것은 33석10두8승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5명 식구의 1년간 식량입니다.

  그러니 땔나무와 석탄, 소금 및 간장의 비용과 여름 옷, 겨울옷의 비용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또 혼인이나 상례에 쓰이는 물품들은 백성들에게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게다가 향촌계에서 추렴을 한다든가 마을신에게 치성을 들이는 비용이 있고, 포보(砲保)의 신역(身役)도 대곡(代穀)으로 물어야 합니다. 이 모두가 결국 1결의 수확 내에서 판출되어야 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33석의 곡식도 이미 거의 남지 않습니다. 또 밭가는 소 한 마리 키우는 데 사람 두 몫이 듭니다. 여기에다 윤년까지 만나면 애초 한 달 식량은 모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홍수나 가뭄 외에도 바람, 서리, 멸구, 우박 등 불의의 재해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농민들 속담에 ‘죽도록 한해 농사지어도 소금 값도 남지 않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민호(民戶)들 가운데 자기 소유의 전토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열에 한둘도 안 되고, 따라서 공부(公賦)는 10분의 1이지만, 사세(私稅)로 바치는 도조(賭租)는 절반을 떼입니다. 이러한 공사(公私)의 부세를 합치면 이미 전 수확의 10분의 6이나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농민들이 농사기술에 밝고 부지런하게 그의 1결4부의 전토를 잘 가꾼다 하더라도 실제로 자신의 몫으로 남는 것은 앞서 언급한 33석의 절반도 못 됩니다. 이 정도의 것을 가지고 어떻게 위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먹여 살리며, 끝내 유민(流民)으로 굶어 죽는 지경에 어떻게 이르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천고에 뜻있는 선비들이 한스럽게 여기는 것에 부호의 겸병만한 것이 없습니다. 물론 저 겸병하는 부호들이 강제로 빈민들의 전토를 팔게 하여 단번에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유함에 의지하여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사방에서 전토를 팔려는 사람들이 부호의 문전을 매일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대개 생활이란 것이 의식(衣食) 밖에도 길흉 간에 큰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빚 독촉에 몰리기도 하고, 돈을 벌려다가 도리에 손해를 보는 수도 있습니다. 이리하여 군색하여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되면, 여간한 농지야 그것이 있어도 넉넉하게 살 수 없고, 그것이 없어도 역시 지금보다 더 가난해 질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저 부호들이 재산을 가두는 일종의 소굴임을 깨닫지 못하고 다투어 돈을 받고 전토를 바치고 맙니다. 저들 부호는 일부러 값을 후하게 해주어 제게 땅을 팔러 오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게 할 뿐만 아니라, 이마 사들인 땅을 판매한 그 사람에게 그대로 소작(小作)을 주어 경작케 함으로써 당분간 그 마음을 위안시켜 줍니다. 땅을 판 빈민은 당장의 후한 땅값을 이득으로 알 뿐만 아니라, 또 오히려 이전대로 자기 토지에서 나는 수확의 반을 먹을 수 있음을 덕으로 여깁니다. 이리하여 땅값이 날로 높아져 부근의 한 자 한 치의 전토도 모조리 부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맙니다. 이는 진실로 관련 법제가 수립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온 나라가 겸병가에게 매달리고, 군읍은 다만 양전(量田)한 헛장부만 끌어안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겸병가가 어찌 빈민을 못살게 하고, 나라의 정치를 방해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근본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면 역시 겸병하는 부호들을 깊이 죄책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관련 법제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음을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신이 호구와 농경지를 가지고 평균 숫자를 계산해 본 것도 먼저 그 근본을 세워보려는 생각에서 선왕(先王)들의 극히 공경한 제도를 지금 이 시대에 실시할 수 있는가 여부를 따져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주(周)나라의 제도에서 1백 보(步)를 1묘(畝)라 하여 농부 한 사람에게 백 묘씩 주는 법에 비교한다면, 지금 농부 한 사람에 대한 1결의 전토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그 다음 세대에 2백40보를 1묘로 하고 농부 한 사람이 1경(頃)의 토지를 받았던 제도와 비교해보면, 그다지 많지가 못합니다.· 더군다나 l경내에는 사 대부(士大夫)가 없을 수 없고, 대대로 특권을 이어받은 집안이나 왕족, 공신의 자손 등, 후하게 대우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평민에게 또 l결도 차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맡고 있는 본군이 전국을 놓고 보아, 인구에 비해 전토가 많은 관향(寬鄕)인지, 인구보다 적은 협향(狹鄕)인지는 모르겠지만, 종국적으로 토지가 부족한 것은 오히려 근심이 아닙니다.

  한대(漢代)의 극성기에도 개간한 농토가 2백27만5백경인데, 원시(元始:한나라 평제 연호) 2년의 통계로는 1천2백23만3천 호였으니, 매호당 전토는 67묘46보 남짓한 것이었으니, 인구는 많고 전토는 적어서 극히 곤란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중서는 무제에게 건의하기를, 정전법(井田法)이야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겠지만 의당히 약간 고제(古 制)에 가깝게 백성들 명의의 전토를 제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건평(한나라 애제의 연호) 초년(A. D.6년)에는 사단이 토지소유 제한법을 건의하자, 공광과 하무가 이 건의를 반복 주장하여 여러 왕후, 공주 및 관리, 백성들 명의의 토지를 모두 30경이 넘지 못하도록 하되, 3년의 기한을 두어 이 기한이 다 되도록 기준을 초과하여  소유하고 있는 자의 토지를 관에서 몰수하자고 청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당시의 전토와 호구를 계산해서 그 배분 량을 산출했을 것이며, 애초부터 왕공(王公)과 귀족에게 후하게 하고, 일반 평민에게 박하게 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수(隨)나라 개황(수문제의 연호)의 통계로는 개간한 전토가 1천9백40만4천2백 67경이고, 호수가 총 8백 90만7천5백36호로서 매호당 전토는 2경 남짓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역사에서는 수문제가 사방에 사자를 파견하여 천하의 전호를 균분하게 했는데, 그 중 협향(狹鄕)의 경우 장정 한 사람당 겨우 20묘가 배당되었고, 노인이나 소년에게는 더욱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는 필시 부호들의 전토 소유가 실제로 제한되지 않고, 관리들이 일을 집행하는 과정에 사정(私情)이 개재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康)나라 천보(天寶: 당 현종의 연호) 연간에 이르러서는 호구수로 전토를 계산하면 매호당 1경60여 묘가 되는데, 무덕(武德:당고조의 연호)때 제정된 것은 ‘천하의 모든 장정에게 전토 1경씩을 분급하고 폐질자 및 과부에게는 구분전(口分田)을 분급하되 차등을 둔다’고 했으나, 귀족 대가들이 소유에 한도를 두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개 역대 이래로 사람은 많고 토지가 적을 우려는 없었고, 오직 법제가 미진하거냐 정해진 법제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까 걱정일 뿐입니다. 저 30경의 소유 한계는 사실 후하다고 할 만하고, 3년이라는 기한은 그렇게 급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정(丁)씨와 부(傳)씨와 동현(董賢)의 무리는 오히려 불편하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귀척(貴威), 총신(寵臣)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으며, 한량없는 욕심에 만족이란 게 어찌 있었겠습니까? 이를테면, 동경(東京:後漢) 이후로는 왕망이 시도하려했던 제도라는 이유만 가지고, 그 군주와 재상을 협박하여 그런 제도의 시행을 저지하는 자들이 매번 있었던 것입니다.

  아아! 그러나 이것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왕망이 진심으로 그런 제도를 시행하려고 했겠습니까? 그야말로 귀척의 두목이자 겸병의 괴수였던 자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제 숙부뻘 되는 네 사람의 벗을 아울러 차지하여 그 전세를 겸병했으며, 중년에는 아형(阿兄)과 총재(冢宰)라는 두 직명을 합치어 그 칭호마저 겸병하였고, 말년에는 천하의 난신적자의 온갖 요소를 제 한 몸에다 아우르며 그 나라까지 겸병하였으니, 이이야말로 ‘모조리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때때로 선왕을 가탁하여 그 자신의 간사한 말을 수식한다 하더라도, 저 한 왕조의 유씨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어찌 기꺼이 그 전토에다 큰 도적인 왕망의 성씨를 붙이려 들겠습니까?

  장 횡거(張橫渠)가 일찍이 개연히 정전법에 뜻을 두면서도 오히려 부자들의 전토를 빼앗는 것을 꺼렸다하니 후세의 사람을 의혹하게 합니다. 대개 ‘빼앗는다’는 말은 제 소유가 아닌 것을 강제로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왕은 그 나라 전 국토의 주인입니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전 국토가 누구의 소유이며, 누구의 전권(專權)에 속하는 것입니까? 진실로 인민을 이롭게 하고, 만물에 혜택을 입힐 뜻이 없다면 모르겠거니와 뜻이 있다면 ‘나누어 준다’고 말할지언정 어찌 강제로 차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면 저 동중서 같은 대학자도 귀척들을 미리 우려하여, ‘정전법은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다.’고 말했겠읍니까?

  유자가 천하국가를 위한 계책을 낼 때, 그 계책이 옛 성왕과 비교해서 타당한가 아닌가를 마땅히 따질 것이요. 그것이 시행될 것인가 아닐까를 다시 보아가면서 그러한 구차한 견해를 내놓은 것은 아닙니다.

  대개 진나라가 정전법에 의한 1백 묘씩의 구획을 없애버린 이후로 정전을 구획 짓는 밭 사이의 도로나 수로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경계가 착란 되게 되었으니, 이것은 한 달이나 일 년 정도의 공력으로 복구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전법을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은 공역과 형편을 생각해서 한 말이지, 정전법을 시행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따라서 ‘의당히 옛 제도에 약간 가깝게’라는 말도 정전법보다 시행하기가 다소 용이하면서도 토지소유를 균등하게 하자는 목적은 잃지 않게 된다는 것이요, 그렇게 되면 비록 옛 정전의 제도의 급속히 회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려(比閭), 졸승(卒乘)의 제도와 학교, 선거의 법을 차례로 시행할 수 있어서 결국 선왕의 뜻에 멀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장차 무슨 방법을 써야 부호들로 하여금 그들 세전의 부유한 재산을 스스로 포기하고도 그들이 관청을 원망하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한(漢)나라에서 서자 세 사람을 봉하여 천하의 반을 나누어 주자, 가의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만, 주보 언(主父偃)의 추은책(推恩策)이 시행되자 제후들도 순순히 그들의 봉호를 떼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세(事勢)로 말하더라도 이른바 부호겸병자로서 조정이 두려워할 정도의 기세를 내보여 제어하기 어려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臣)의 변변치 않은 나이로도 벌써 남의 집의 일을 보아오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 부조의 전업을 능히 지켜 타인에게 팔아먹지 않는 사람이 열에 다섯이고, 매년 토지를 떼어 파는 사람은 열에 일고여덟입니다. 이로보아 남아도는 재산을 축적하여 더욱 토지 소유를 증대시키는 자의 수효라고 해봐야 알만한 수준입니다. 만약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법령을 다음과 같이 세워 보십시오.

 “모년(某年) 모월(某月) 이후 제한된 면적을 초과해 있는 자는 더 이상 토지를 추가 소유할 수 없다. 이 법이 시행되기 이전부터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광대한 면적이라 해도 불문에 붙인다. 자손으로서 지자와 서자에게 분급해 주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에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숨기거나, 법령을 공포한 이후에 제한을 넘어 추가 획득한 자의 경우 백성이 발견하면 그 백성에게 주고, 관에서 적발하면 관에서 몰수한다.” 이렇게 한다면, 수십 년이 못가서 전국의 토지는 균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순의 이른바 “조정에 조용히 앉아서 천하에 법령을 내리되 백성을 놀라게 하지도 않고, 대중을 동요시키지도 않고, 정전제를 실시하지 않으면서도 기실은 정전제 실시의 효과를 얻는 것이어서 비록 주대(周代)의 정전제라 하더라도 이보다 월등하게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아아! 천하의 온갖 폐단과 고질은 군대문제와 결부되어 있겠으나, 그 근본을 따져보면 병농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군대를 아낌은 백성들에 대해서 그보다 우위에 두었고, 그러면서도 또한 군대를 두려워함을 독사나 맹수에게보다 심하여, 거의 천하 물산의 절반으로 그들을 받들어 왔습니다.

  한대(漢代)에서부터 명대(明代)에 이르기까지 상하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는 군주와, 그러한 계획을 가진 신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이 주야로 묘책을 생각해 보아도 끝내 이렇다 할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하루도 군대를 망각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군대 문제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하면서, 토지를 상실하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은 방치함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대개 논두렁 밭두렁을 떠나게 됨은 대부분 일조일석의 연고 때문이 아닌데다 장부를 놓고 그 수효를 기록해 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는 듯 모르는 듯 하는 사이에 점진적으로 늘어나 어느덧 천하 인민의 반을 차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음에도 또 이렇게 많은 수효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장차 어디로 돌아가게 할 것입니까?  무엇으로 이들이 천하인민의 반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나라 시대의 황건, 적미와 당나라 시대의 방훈, 황소가 백성 모두 토착하여 농업에 전심한 상황이었다면, 하루아침에 어디에서 백만의 군중을 불러 모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겸병(兼倂)의 폐해는 반드시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하루에 두 사발씩의 밥을 더 먹었다고 하면 천하 사람이 하루에 먹을 밥에서 그 절반을 축내는 꼴이 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토지 소유를 십 배, 백배로 늘려가는 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진(秦)․한(漢) 이후 역대에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이 없는 것은 그 이유가 어찌 달리 있겠습니까? 대본(大本)이 붕괴됨에 따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 뜻에 일정한 정향(定向)을 갖게 하지 못하고 모두 요행만을 바라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위에서 정령을 내리는 사람들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나 끝내 고식적인 데에 귀착됨을 면치 못하고, 아래에서 정령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해 보지 못할 정도로 급박하여 또한 구차한 미봉에 그치고 말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의 일반적 병폐이며 역대 정치의 득실을 알 만합니다. 그렇다면 귀척(貴戚)․총신(寵臣)을 깊이 죄책 할 것도 없고, 부호 겸병자를 심히 혐오할 것도 없이 문제는 오직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는 의지와 통치의 근본이 되는 것이 확립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거룩하게도 우리나라는 강토가 수천

리로 처음부터 정전(井田)을 구획하는 데에 들어본 적도 없었고, 또한 정전을 구획한 경계를 파괴당한 해독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성대한 시대를 만나 우리 독자적으로 한 국가의 제도를 마련하였으니, 마음의 자세를 정밀․순일하게 가지고 불편부당한 탕평(蕩平)을 표방하는 정치나 토지의 경계를 정리하고 백성의 소유를 균등하게 하려는 정책은 옛 성왕(聖王)과 처음부터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토지 소유를 제한한 후에라야 겸병자가 없어지고, 겸병자가 없어진 후에라야 산업이 균등하게 될 것이고, 산업이 균등하게 된 후에라야 백성들이 모두 토착(土着)하여 각기 자기들의 토지를 경작하게 되고 근면한 사람과 나태한 사람의 구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근면한 사람과 나태한 사람의 구별이 드러나게 된 후에라야 농사를 권면할 수가 있고 백성들을 교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농업 정책에 대해 다시 군더더기 말을 붙이는 것은 아니오나 비유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비록 물감이 갖추어져 있고 그림 솜씨도 교묘하다 하더라도 종이나 비단 같은 바탕이 되는 것이 없으면 붓을 댈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분의(分義)에 넘침을 사피(辭避)하지 않고 이렇게 주장을 하는 바입니다.  

 

삼국사기(김부식 역사서) [三國史記]브리태니커

고려시대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인종 23)에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역사책.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꼽힌다. 총 50권으로 본기(本紀)가 28권(신라·통일신라 12권, 고구려 10권, 백제 6권), 연표 3권, 지(志) 9권,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이용될 뿐 아니라, 고려 중기의 역사의식과 문화수준을 아는 데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의 판본(版本)은 고려본과 조선본으로 나눌 수 있다.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의 〈옥해 玉海〉에 1174년(명종 4)에 〈해동삼국사기 海東三國史記〉의 헌서(獻書) 사실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책이 고려시대에 편찬된 직후부터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를 근거로 편찬 당시 책의 정식 명칭이 〈해동삼국사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본으로는 13세기말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잔존본(殘存本)인 성암본(誠庵本)이 있을 뿐이다. 이는 보물 제7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393(태조 2)~94년에 진의귀(陳義貴)·김거두(金居斗) 등이 경주부사(慶州府使)로 있을 때 간행한 적이 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고, 1512년(중종 7)에 목판으로 간행된 완질본으로 보물 제723호로 지정된 것이 있다. 또 동일한 판각으로 1573년(선조 6)에 찍어낸 완질본이 있는데, 일찍이 소개되어 보물 제525호로 지정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이 두 판본은 명나라 무종 정덕연간(正德年間)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정덕본으로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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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삼국사기

    출처 : 도서출판 예경

    설명 : 「삼국사기」목판본, 보물 제722호, 현존하는 최고의 판본으로 고려 후기의 번각본(飜刻本)이다. 조병순 소장

    관련항목 : 보물 삼국사기 목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