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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20. 19:02

세계의 역사/ 문 봉 수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개요

1) 사상만이 아니라 <문화>라는 관점으로 관찰

2) 18세기 프랑스 인들의 지성 및 감성활동

3) 당시 사람들이 감성과 지성의 성취에 기반하여 현실에 가한 끊임없는 작용과 반작용 의 과정에서 검토

4) 프랑스 혁명의 전개와 성취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가?

5) 계몽주의 : 구체제 사회의 기본적인 가설과 일반적인 철학 및 지성에 대한 맹렬한 공격(17~18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지적 운동)

6) 이성 : 계몽주의 사유에서 가장 중심적

7) 프랑스만 국한해서 연구

 

1. 18세기 계몽주의의 발전 : 비판적 사고의 전개


1) 문화적 동향의 변화

(1) 루이 14세 치세 이후 궁정의 문화적 통제 축소 이후 문학과 예술은 궁정이 아니 라 대 귀족과 대부호의 살롱 중심으로 전개(18세기의 문화적 해체 과정 예고)

(2) 로코코 : ․ 와토(Watteau)로 대표되는 감각적이면서도 경쾌한 양식과 현란한 색체 는 당시 사교계의 특성을 상징

․ 보다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며 은밀한 예술관을 지향하며 부유한 귀족 과 대 부르주아들을 위한 향락적인 양식

․ 부르주아는 점차 자연주의적 경향에 기울어가면서 실천적,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표현해가는 문화적 문화 현상을 보임.

(3) 신고전주의 :

․ 1750년경 로코코에 대한 새로운 반동

․ 예술이 대중교화 및 문명화 과정의 주체라는 관점을 가진 계몽주의자들은 체계 적으로 신고전주의를 탐구하면서 독자적인 ‘미학’등장시킴

․ 디드로 :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 미술 : 중간층 시민을 위한 교훈적인 풍속화 발표

․ 소설 : 일반적인 주제와 자연스러운 문체를 통해 사실적인 인간 묘사

2) 계몽주의의 사유, 종교, 과학, 국가, 사회

가. 종교적 사유 - 세속화와 이신론

(1) 세속화 :

․ 종교적인 제도와 해석이 점차 사람들 삶의 주변으로 밀려남.

(18세기에 절대 왕정이 약화되어 가면서 종교적인 태도에서도 변화)

․ 세속화 양상은 자연과학의 발전과 밀접히 연관되어 신앙이 아니라 과학적 관찰과 연구에 입각한 지식을 더 중요시

(2) 이신론(理神論 : deist) :

․ 종교를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구

․ 기독교 자체의 신성함은 인정하면서 이성과 계시의 결합

․ 건축가 혹은 기계공으로서의 신의 존재

․ 프랑스의 이신론

- 몽테스키외 : 상대주의적 입장 견지

- 볼테르 : ․ 뉴턴의 사상은 수용하되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는 과격한 이 신론 입장

․ 기독교를 공격

․ ‘시계 제작자’로서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 했으나 내면적으로 는 철저한 무신론자.

나. 인간과학의 성립

(1) 인간과학 :

- 18세기 중반의 계몽 사상가들은 세속화 된 뉴턴 주의의 이름으로 ‘개별’로 부터 ‘전형’을 탐색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인간관에 적용시킴.

(17세기 주류였던 데카르트의 관념론적인 합리주의에 도전)

- 이들은 ‘본질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고 인간 을 만물의 중심으로 보려는 입장

-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구체제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올바른 지식의 습득 과 교육 및 과학의 증진을 통하여 교회의 교조적인 권위와 미신 철폐, 각 종의 무지 및 그로 인한 오류로부터의 해방 등을 모색

(2) 사회과학 :

- 사회개혁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계몽주의자들은 가짐

- 지적 추구 방식은 보편법칙을 다양한 상황에 적용시키고 비합리적으로 보 이는 현실 속에서 이성의 존재를 확인해 통일성을 찾으려는 노력

(몽테스키외의 실증적인 상대주의 입장)

- 계몽주의자들의 사회과학적 시도는 역설 : 로크적 경험주의보다 데카르트 적인 합리주의에 기우는 경향이 강함

다. 계몽주의적인 개혁 프로그램

(1) 루소 :

- 사회계약론(1762년)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억압하는 문명을 총체적 으로 공격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그 도덕적 능력을 함양 할 수 있는 사회를 모색

- 개인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힘을 공동체의 일반 의지에 양도하는 계약을 통하여 자연 상태에서의 마찬가지로 자유로울 뿐 아니라 도덕적인 존재로 까지 상승 할 수 있다는 것.

- 인민주권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민주주의 전망을 제시

(2) 정치 경제학 :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산층은 권력보다 부를 중시함

- 케네(중농주의이론) : 중농주의 학파를 계몽주의 집단으로 분류하기는 다 소 어렵지만, 사유의 측면에서 상호 영향력이 보인 다. 중농주의자들 역시 자연적 조화와 합리적 체계 라는 관점으로 경제를 파악 했다.

- 18세기 후반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이론에 영향을 줌

- 재산권 측면 : 18세기 후반 평등한 공동체라는 루소의 개념까지도 넘어서 는 급진적인 사상가 출현, 이들은 소위 공산주의적 계몽주 의 입장을 수립시킴.

 

2. 구체제의 현실과 계몽주의의 전망

 

1) 절대왕정의 문예정책

(1) 문예정책을 통해 전 사회적인 통제 추구

(2) 지식인과 문인들에게 지위와 수입을 제공

(문인들이 권력에 대한 감각과 욕구를 드러냄)

(3) 계몽주의자들의 타협 : 동유럽의 절대군주(프리드리히 2세, 요셉2세, 예카테리나 2세 등)들은 계몽주의자들의 사유를 받아들여 정부 조직 의 합리화, 세금 감면, 무역에 대한 부담제거, 법률의 합 리화 등을 시도 하였으나, 계몽 사상가들이 계몽전제군 주의 힘과 권위를 정당화 시키면서 절대주의적 사고 방 식을 조장하고 거기에 덧붙여 전쟁과 농노제와 같은 잔 인한 사회 정책을 용인한 측면 또한 없지 않다.

2) 자본주의적인 문필사업의 전개

(1) 18세기 후반의 계몽주의 활동에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상당할 정도로 침투되었음.

(2) 절대주의적인 문예정책과 자본주의적인 문필사업은 공적인 후원속에 정착했던 고 급의 지식인과 제도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기반을 갖추지 못했던 작가들 사 이에 적대와 경멸의 감정을 축적시킴.

(3) 백과전서파 후예 : 아카데미를 장악하여 계몽주의를 전파시키고, 지식인들에게 여 러 가지 특혜를 분배시킴. 허나 문인들은 진출은 다분히 후원 자들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음.

(4) 당시 문인들의 생계유지에 보다 중요한 비중은 직업적 활동(profession)이라기보 다는 후원제도로부터 비롯하는 특권(benefice)

(5) 계몽주의자들은 절대주의 체제를 침식시키는 이데올로기들을 창출하지만, 제도적 인 측면에서 그들의 문화적인 주도권을 보장해 주는 기존의 체제에 어느 정도 집 착했던 집단과 일반 공중을 절대주의 체제로부터 이완시켰던 집단이 있었다.(계 몽주의 지식인의 양분현상)

3) 고급의 계몽주의와 저급의 계몽주의

(1) 볼테르

- 지식인의 원형으로 축성 받음

- 문인으로서의 품위 확보를 위한 두 가지 조건

․ 문학적 재능, ․ 경제적인 독립

- 추구했던 세계 : 국가의 문예 후원을 통하여 특권을 부여 받고 연금을 지급 받으면서 문인 집단의 주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체제

(2) 달랑베르

- 스스로의 존립과 독립에 큰 자부심

- 문인에 대한 이데올로기 형성

- 사회적인 엘리트와 문화적인 엘리트 사이의 평등성 확보 노력

(3) 디드로

- 절대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정확히 꿰뚫고 저술과 출판 활동을 통한 경제적 독 립 추구

- 부유한 특권 집단의 후원보다는 광범위한 대중의 호응. 특히, 후세의 평가에 기대를 걸고 『백과전서』를 기획.

- 계몽전제군주(예카테리나 2세)의 후원을 다소 받음

(4) 루소

- 기존체제를 반박하면서 그로부터 인정받고자 했으며,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 면서도 세간의 관심에 예민

- 1762년 “사회계약론” “에밀”의 출판으로 조국에서 추방

- 기존의 제도에서 자유로운체 자신에게 충실했던 예언자 혹은 순교자적인 면 모로서 당시 젊은 지식인들의 우상으로 부각 됨.

(5) 저급문인집단

- 일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로 출판인이나 서적상들의 여러 기획에 협조하면 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존재들

- 여러 가지 이유로 엘리트 문인들에게 경멸과 개탄의 대상이 됨.

- 허나 일반 대중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과 파급효과는 큰 것임.

- 구체제를 침식시키는 작업에 동참

․ 구체제로부터 많은 특권을 부여 받고 있던 엘리트 지식인에 대한 불만을 바탕으로 프랑스 혁명을 위한 인적인 자원 형성

․ 군소 문인들에게 혁명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 일수는 있으나 이들의 움직임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것으로 보 는 것도 합당치 않다.

4) 작가의 권리

- 1760년경부터 문학 소유권에 대한 요구가 나타남

- 디드로는 기존의 조합적인 특권을 방어하고자 했던 서적상들의 주문에 따라 문헌 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저술가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전개 함.

5) 이념의 유포와 확산 : 서적판매와 독서 양태

- 계몽사상이 독자들에게 내면화 되면서 공공의 문화 영역을 이루는 과정

․ 서적 판매 양상 : 사유와 지식은 상층부에서 하층부로 유포, 지역적인 면에서는 중앙 및 수도 곧 파리로부터 지역 및 변두리로 확산

- 사유의 대중화 과정에서 종교 서적이 감소하고 철학 서적과 정치 서적이 증가하 는 양상

- 전반적으로 볼 때 독서 수준은 미흡하나 독자층의 양적인 성장은 부정할 수 없는 양상

6) 절대주의와 자본주의

- 이시대의 작가 혹은 지식인들의 사회구성이 결코 부르주아적인 것이 아니라 하더 라도 이들의 움직임이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와 무관치는 않다.

- 절대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방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암묵 적이지만 스스로 무장해제를 했던 것은 그 체제의 유연성으로 볼 수 있다.

7) 계몽주의와 여성

- 당시 프랑스는 여성들에게 호의적

- 살롱 제공(남성들과 지적인 교류 영역)

- 계몽주의 지식도 여성의 지적 활동 옹호(허나 여성 사상가 부재)

- 루소의 반 여권론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수립된 “루소적”인 공화체제는 점차 여성 들을 정치적 참여 및 공공의 영역으로부터 배제시킴.

 

3. 계몽주의의 위기와 붕괴 : 낭만주의의 등장

 

1) 계몽주의가 와해된 시기는 정확치는 않지만 프랑스 혁명의 전후로 추정

-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냉정한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구조와 위안, 그리고 감각과 정서의 세계를 추구 함.

2) 계몽주의자들이 스스로 기반을 파괴

- 흄 : 추론 방식의 사변성을 비판하여 자연법이론을 공격

- 엘베시우스 : 이성으로 인식되는 자연법을 거부하고, 쾌락과 고통의 교의에 입각 한 공리주의 주창

- 이에 따라 계몽주의 전반부는 자연법사상, 후반부는 공리주의와 낭만주의가 지배 하는 괴리의 양상

3) 낭만주의

- 감정의 표출을 중심으로 전개

-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반발 및 산업화된 사회의 지나친 합리주의적 성향에 대한 저항

-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 : 루소

․ 격정이라는 모티브를 통하여 구체제의 기계적인 형식주의를 폭로했고 타산적 인 이성으로부터 비롯한 문명이란 하나의 퇴화 현상이고, 진보라는 계몽주의 의 근본교의는 미신에 불과하다는 비관주의 역사 철학을 제시함

- 볼테르 : 루소의 주장에 반작용 태도

․ 루소에게서 계몽주의 혹은 서구 문명의 합리적인 기반전체를 무너뜨리려는 비 합리주의의 위험성 지적

- 계몽사상의 진보주의는 바로 세속성에 있다.

․ 기독교적인 사고 틀로부터 분리되어, 사회와 자연이라는 틀 안에서, 경험적 근 거에 입각하는 자연주의적 태도로서 인간 행위를 일반적으로 조망코자 함.

․ 기독교적 가치의 비판을 위하여 고대적인 사유를 받아들임.

 

4.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

 

1) 프랑스 혁명이 계몽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계몽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 라는 주장

- 계몽 사상가의 마지막 세대는 궁정과 아카데미, 고위층으로부터 연금후원

- 계몽 사상가들은 필요에 따라서 계몽주의 사유를 선택하고 변용

(혁명가들은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의 저술에 많은 영향을 받음)

2) 혁명과 관련된 계몽주의적인 요소

(1) 법 앞에서 평등(1789년 10월 26일, <인간과 시민을 위한 권리선언>에 명기> : 상징적인 법적 평등

(2) 사회, 경제적 평등 : <인권선언>에서 재산의 신성 불가침성의 이념을 천명하였 으나 혁명 중 재분배 과정에서 수혜를 누렸던 것은 부르 주아 집단일 뿐임

(3) 자유 : 프랑스 혁명으로 제반의 자유의 권리 중 특히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가 능성이 보장 되었다.

5. 결론

1) 계몽주의

- 기존의 모든 가치와 신조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모색

2) 의의

-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유라는 성과를 종합과 대중적 확산

- 낙관론 : 계몽주의 사유의 하나로써 인간의 오랜 유산으로 정착

- 계몽주의적 역사의식 : 인간 역사는 일반적인 진보의 기록

-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당시나 지금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 으나 인류에게 어떻게 하면 자유를 상실함이 없이 평등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까 하는 과제 제공


 

2008학년도 1학기 세계의 역사 중간시험 요약

 

문제1. 계몽주의의란 무엇이며, 계몽주의가 문화적 측면에 대해 설명 하시오.

 

계몽주의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서 일어났던 유럽의 지적 운동이었으며, 거기서 사람들은 신, 이성, 자연, 그리고 인간 등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여 종합적인 세계관을 이루어 내려 했다. 또한 이 비판적인 작업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을 몽테스키외, 볼테르, 달랑베르, 디드로, 루소 등과 같은 이른바 계몽사상가라는 사람들과 일치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 사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이성의 축성이다. 즉 인간은 이성의 힘에 의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조건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적인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지식, 자유, 그리고 행복으로 간주되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계몽주의의 움직임에는 프랑스 사람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유럽 전반적인 지적 움직임이었고, 프랑스 이외의 지적인 전통과 업적에도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는 여러 국면에서 위기가 표출되었던 시기이다. 문화적인 국면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루이 14세 치세가 종식되면서 종래에 신성시되었던 군주제의 표상체계는 철학서적의 유통 및 종교 관행의 변화와 함께 약화 문학과 예술은 궁정이 아니라 대 귀족과 대부호의 살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리하여 궁정 중심적인 문예활동이 귀족의 도전을 받은 후에 다시 부르주아적 주관주의에 의해 문화적 해체과정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18세기 초에 새로운 예술사조로 나타난 로코코 양식이다. 와토(Watteau)로 대표되는 감각적이면서도 경쾌한 양식과 현란한 색채는 당시 사교계의 특성을 상징하고 있다. 아카데미가 주도했던 인습적이고 궁정적인 경향에 반발하여 보다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며 은밀한 예술관을 지향했던 이 양식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부유한 귀족과 대부르주아들을 위한 향락적인 양식이었다.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지의 문화적 융해의 양상을 띠기도 했지만 동시에 경직된 사회적 위계 속에서 심화된 양 집단의 문화적 경쟁을 반영하기도 한다. 여기서 부르주아는 점차 자연주의적 경향에 기울어가면서 실천적,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표현해가는 문화적 분화현상을 보인다.

1750년경 로코코 양식에 대한 새로운 반동으로 신고전주의가 나타난다. 맑스주의자들은 신고전주의가 사회의 가장 진보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부르주아의 이념과 정열을 대변하고 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디드로(Diderot, 17131784년)는 로코코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으며, 화가인 그뢰즈와 샤르댕은 교양 있는 중간층 시민들을 위한 교훈적인 풍속화들을 발표하면서 디드로의 이론적인 입장을 예술적으로 형상화시켰다.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삶은 신고전주의에서 보다 진보적인 사상을 전달하는 기능을 부여받았다. 권위주의적 왕실의 영향과 후원제는 여전히 완강하여, 예술가 개인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 당시의 문화적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볼테르(Voltaire, 1694~1778년)식의 냉소적 태도와 온건한 반발을 동반한 문화적 비관주의였다.

 

문제2. 계몽주의의 사상적 사유(종교, 과학, 국가,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하시오.

 

1756년 달랑베르(d’Alembert, 1717~1783년)는『백과전서』의 “제네바” 항목에서 세속화가 기독교를 잠식해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일종의 전환의 기회를 마련코자 했다. 여기서 세속화란 종교적인 제도와 해석이 점차 사람들 삶의 주변으로 밀려남을 의미한다. 17세기 말에는 종교의식의 규칙성과 보편성이 확보되었다. 반면 대조적으로 18세기에 들어서는 절대왕정이 약화되어 가면서 사람들의 종교적인 태도에서도 근본적인 변화 곧 세속화의 양상이 나타난다.

지성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세속화양상은 자연과학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8세기 중반에 자연과학자들은 객관성이라는 기준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과학적 관찰과 연구에 입각한 지식을 더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세속화양상이 두드러지는 것과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이신론의 영향력이 커져갔다. 이신론은 종교를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로서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자체의 신성함은 인정하면서 이성과 계시의 결합이 가능했던 초기 기독교를 지향했던 이신론은 결코 하나의 조직된 종파나 움직임이 될 수는 없었지만, 두 세기에 걸쳐서 기존의 기독교와 대면하고 충돌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이신론의 영향이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으며 또한 그 급진성의 강도도 강했다. 이 중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년)는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지만, 볼테르는 뉴턴의 사상을 수용하되, 그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는 과격한 이신론의 입장을 보였다. 볼테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사회적 유용성에 따라 ‘시계 제작자’로서의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종교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 계몽 사상가들은 절대왕정의 제반 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과학혁명의 지적 성과를 본격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학을 제창한 것이다. 18세기 중반의 계몽 사상가들은 세속화된 뉴턴주의의 이름으로 ‘개별’로부터 ‘전형’을 탐색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인간관에 적용시켜 나갔다. 이는 뉴턴과 로크의 경험주의에 입각하여 17세기의 지적 주류였던 데카르트의 관념론적인 합리주의에 가하는 도전을 의미했다. 또한 이것은 원죄설에 입각한 기독교의 비관주의적인 인간관에 대한 반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은 ‘본질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고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보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사회과학자로서의 특성은 사회 개혁에 대한 강렬한 욕구이다. 몽테스키외의 실증적인 상대주의의 입장으로 표출 신앙, 전통, 체제, 풍속의 다양성이 여행자들에 의해 입증되면서 이러한 다양성을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원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19세기 콩트에 앞서서 계몽주의자들은 사회과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로크적 경험주의보다 다시 데카르트적인 합리주의에 기우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따라 사회과학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개념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특히 그들이 독자적인 방법론과 새로운 학문적 발견을 제공했던 전문학자들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사회개선을 추구했던 박식가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지식과 실천 간의 조화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계몽 사상가들의 요망사항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론을 포기할 수도 없었지만 현실에 안주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문제3.계몽주의자들의 계몽주의적인 개혁프로그램이 각각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설명하시오.

 

계몽주의의 실천과 원칙 사이의 관계는 복잡한 문제이지만, 그 개혁 프로그램에 따라 다양한 정치, 사회 및 경제 사상이 출현했다. 정치적인 국면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절대주의체제를 극복했던 영국과 네덜란드를 모델로 보다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통치형태에 꾸준한 관심을 할애했다. 그렇지만 절대주의체제의 완강함 앞에서 어떠한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몽테스키외는 입헌군주정의 수립을 추구했는데, 그 체제에서 왕권은 고등법원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었다. 또한 중산층 출신이었던 볼테르는 특권층의 보루인 고등법원의 대표성을 부인하고 왕권을 지지했으나, 일관된 입장을 보였다기보다는 경험 혹은 상황에 따랐고, 디드로는 왕과 귀족 사이에서 벌어졌던 분쟁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수시로 입장을 바꾸어 갔다.

무력한 분위기 속에서도 탁월한 정치이론을 제시한 사람은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1762년)을 집필루소(Rousseau, 1712~1778년)는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억압하는 문명을 총체적으로 공격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그 도덕적 능력을 함양할 수 있는 사회를 모색했다. 자신의 사회계약론으로 그 미비점을 극복하고 보다 혁명적인 전망을 제시한 것이다.

수량에 관심이 많았던 계몽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 분야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유럽의 지배적 경제이념이었던 중상주의는 권력을 부에 우선 시켰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산층은 권력보다 부를 중시하는, 요컨대 덜 호전적이고 보다 역동적인 경제이념을 열망하게 된다. 이미 루이 14세 치세에서 케네(Quesnay, 1694~1774년) 등은 중농주의 이론을 통하여 토지 소유자들에게 농업경영에 투신할 것을 촉구했다. 중농주의자들 역시 자연적 조화와 합리적 체계라는 관점으로 경제를 파악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스코틀랜드인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이론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물론 스미스는 이들 중농주의자들의 이론에서 그 농업중심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그것을 산업화를 위한 경제이론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디드로 등의 계몽주의자들도 농업만이 아니라 각 경제부문의 목소리를 존중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의 개입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경제적 논의는 재산권의 측면에서도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계몽 사상가들은 ‘신성한 재산권’이라는 로크의 생각에 동의하여, 기존하는 부의 분배구조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반면 루소는 경제적 평등이 동반되지 않으면 정치적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18세기 후반의 비등(飛騰)하는 분위기는 평등한 공동체라는 루소의 개념까지도 넘어서는 급진적인 사상가들을 출현시켰다. 모렐리(Morelly)와 마블리(Mably, 1709~1785년)는 ‘평등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사유재산이 사회적 불행의 원천임을 설파함으로써 소위 공산주의적 계몽주의의 입장을 수립시킨다. 프랑스 혁명 중 바뵈프(Babeuf, 1760~1797년)는 진정한 평등이야말로 자연의 규범이라 생각하여 그 규범을 확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혁명을 모색하다가 처형당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19세기의 사회주의를 예비했던 셈이다.

 

문제4. 당시의 구체제의 현실과 계몽주의의 전망에 대해 설명하시오.

 

절대왕정은 문예정책을 시도하여 이데올로기적인 국가기구를 창출코자 했다. 새로운 문화집단 및 문화적 기준의 창출을 통하여 일종의 전(全) 사회적인 통제를 추구한 것이다.

절대주의의 문예정책은 지식인과 문인들에게 지위와 수입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그들 사이에 위계와 차별을 산출해내기도 했다. 즉 절대주의적인 후원제도 안에 들어와 있는 문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구분, 그리고 그 틀 안에서의 위치에 따른 서열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결과로 17, 8세기의 문인들은 권력에 대한 감각과 욕구를 드러내기도 했으며, 독특한 집단의식을 표명하기도 했다. 17세기의 피에르 베일은 학식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폐쇄적 성격의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는가 하면, 18세기에 들어와서 몽테스키외는 귀족 엘리트들에 의한 권력의 재장악을 원하였다. 이런 점에서 “문단정치”, 요컨대 “지성의 지배”가 정치적인 장과 문학적인 장 사이의 관계를 변모시켰다는 토크빌의 분석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사회 안에서의 명확한 지위와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바램과는 달리 지식인들은 여전히 상당한 딜레마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영국의 성장, 즉 정치적 자유, 종교적 관용, 경제적 성공, 문화적 근대성, 과학의 발전 등에 자극받아서 새로운 언론지, 클럽, 도서관들을 무대로 한 논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교회의 통제는 완강했고, 여기에 의회와 정당 등 정치적 토론을 위한 공적인 공간의 부재, 자유 언론의 미흡함, 특히 문맹 대중의 존재 등 현실적인 제약을 뛰어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사회구성 면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당시 시민과 귀족, 왕권은 각기 대립하고 있었고, 시민 역시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문화적 복잡성을 노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지적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야심으로 가득 찼던 계몽주의 지식인, 그리고 신분상승 및 정계 진출이 순조롭지 못하여 불만에 가득 차있던 제3신분, 이 양자 사이의 연대가능성도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난처함 속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일종의 타협을 택하기도 했다. 즉 개혁은 활발하고 개명된 주권자인 계몽 전제군주에 의해서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다는 계몽 전제주의의 입장을 시도해 본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던 군주들은 서유럽에 비해서 여러 모로 낙후되어 있었던 동 유럽의 절대군주들이었다. 즉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등이었다. 이들은 계몽주의자들의 사유를 받아들여 주로 정부조직의 합리화, 세금감면, 무역에 대한 부담 제거, 법률의 합리화 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프랑스 재정 위기를 해결하려는 루이 16세의 시도에서도 계몽사상의 영향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계몽 전제 군주들의 개혁은 계몽주의의 이론보다는 16, 17세기부터 비롯되었던 관료제적 합리주의의 전통에 의존한 바가 더 크다. 오히려 계몽 사상가들이 계몽 전제군주의 힘과 권위를 정당화시키면서 절대주의적 사고방식을 조장하고 거기에 덧붙여 전쟁과 농노제와 같은 잔인한 사회정책을 용인한 측면 또한 없지 않다.

결과적으로 계몽 사상가들은 기존의 문명과 타협하는 동시에 또한 전쟁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스스로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때로 인식의 왜곡과 판단의 천박성을 보이기도 했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비생산적인 현학을 비판하면서도 무지를 규탄하고, 사변을 경계하면서도 지적 유희를 즐기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문제5. 계몽주의가 당시 여성의 성역할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시오.

 

계몽주의 문화 영역은 당시 여성의 활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당시 가장 ‘사교적’이고 ‘개화’되었음을 자랑하던 프랑스는 여성들에 대해서도 가장 호의적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여성들에게는 남성들과의 지적인 교류 영역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살롱을 제공되었으며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여성의 지적 활동을 옹호했다.

이런 점에서 루소의 반 여권론은 흥미롭다. 그는 당시의 살롱 여성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공연히 자신들에게 맞지도 않는 남성들의 영역에 끼어들어 쓸데없는 독서나 말장난을 일삼으면서 가정적인 불충실과 풍습의 타락, 도덕적인 해이를 초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여성들은 그 본연의 영역인 가정에 충실하면서 그 안에서 스스로의 권한을 신장시켜야 합당하다는 것이다. 루소의 주장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상류층 여성들은 그 표면적인 화려함과 발랄함에도 불구하고 부친 혹은 남편의 지위가 절대적이었던 가정의 틀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데 심한 장애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혁명 후 베르사유에 있던 루이 16세 일가를 파리로 데려오는 시민들의 행진에서 서민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데에서도 확인된다.

이상의 상황은 이후의 역사전개를 통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수립된 “루소적”인 공화체제는 점차 여성들을 정치적 참여 및 공공의 영역으로부터 배제시켜 갔다. 이와 함께 ‘사교적’이고 ‘개화’된 국가로서 프랑스의 위상은 깨어졌다. 화려하게 치장된 살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계몽주의기의 페미니즘은 불행히도 안정된 유산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이후 19세기의 가부장적인 부르주아의 사회의 지속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문제6. 계몽사상이 프랑스혁명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하시오.

 

계몽주의는 신분제에 기반한 특권집단에 맞서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민중을 제외한 모든 계층, 특히 절대왕정이 육성해 낸 특권집단에 의해서 주조되었고 또한 공유되었던 이념으로도 볼 수 있다.

분명히 혁명 이전의 프랑스 사회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시민사회 혹은 부르주아 사회는 아니었다. 소위 『백과전서』와 같은 서적의 독서 대중을 이루는 사람들도 상인과 실업가 집단이라기보다는 행정, 사법 분야에 종사하는 엘리트들이었다. 이는 기존 체제의 가치관이 그와 양립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와 병행하고 또한 잠식되어가는 동시에 그것을 포섭해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혁명과 관련되는 몇 가지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지적해 볼 수 있다. 우선 평등의 이념이다. 평등에는 세 가지 개념 정도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법 앞에서 평등이다. 이 개념은 1789년 10월 26일에 제정된 <인간과 시민을 위한 권리선언>에 명기되어 있다.

두 번째로 정치적인 평등의 조건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 경제적 평등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재산에 관한 문제와 결부시켜 볼 수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 사회ㆍ경제적 불평등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우선 앞서 언급한 <인권선언>은 재산의 신성불가침성의 이념을 천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유의 개념이다. 여기에도 인신 상의 자유, 사회활동의 자유 및 경제활동의 자유 등이 내포된다. 전반적으로 혁명은 제반 자유의 권리를 확립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주목할 것이 프랑스혁명으로 보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가능성이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계몽주의는 절대주의체제의 위기를 현실적 배경으로 하여 서양 문명사에 존재했던 모든 가치와 신조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반을 확립하려는 의도이다.

기타 출제가능 문제

1. 계몽주의 사상이 유럽인들의 타자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시오.

2. 역사적 진보에 대한 계몽 사상가들의 입장을 정리해 보시오.

3. 고급의 계몽주의와 저급의 계몽주의를 비교 설명하시오.

 

2007년도 중간고사 시험 기출문제~

 

※ 다음의 두 문제 중 한 문제를 선택하여700-1000자 정도의 분량(구두점, 띄어쓰기 포함)으로 서술하되, 가능한 한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을 갖추고 내용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시오.

1) 아래와 같은 계몽주의 명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유롭게 피력하시오.


계몽주의 사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이성이다. 즉 인간은 이성의 힘에 의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조건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적인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지식, 자유, 그리고 행복으로 간주되었다.

2) 다음은 18세기 프랑스 상류층 여성들의 상황에 대한 서술이다. 자신이 18세기 프랑스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고 가정할 경우, 자신의 인생행로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하여 자신의 지식과 상상력을 자유롭게 동원하여 서술하시오.


18세기 프랑스 상류층 여성들은 남성들과의 지적인 교류의 장으로서의 살롱을 제공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남성 지식인들에게 종속되어 지적 흐름을 주도할 수 없었다. 실제로 당시 상류층 여성들은 표면적인 화려함과 발랄함에도 불구하고 부친 혹은 남편의 지위가 절대적이었던 가정의 틀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고달픈 서민층 여성들이 보다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고 주변의 일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역사의 진보

 

계몽시대에는 역사관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물론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은 역사를 도덕교육이나, 정치에서의 교훈을 위한 지침 정도로 생각했으므로 과거 자체에 큰 가치를 두지는 않았다.

또 역사는 주로 우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볼테르 같은 사람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그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우연적인 것이므로 그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역사가 반드시 아름답다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믿지도 않았다. 역사 속에서 전쟁이나 기근, 전염병, 화재 같은 참화나 범죄, 불운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어떤 일정한 변화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계절의 변화와 같은 순환이었다. 한 왕조가 탄생, 성장, 멸망하고 뒤를 이어 다른 왕조가 같은 길을 밟는 것은 그런 순환의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18세기 말에 와서 이런 태도가 달라졌다. 유럽사회에서 갑자기 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며 인간의 삶이 이전 시기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영국의 애덤 퍼거슨, 프랑스의 튀르고나 콩도르세 같은 사람들이 그 선구자이다.

퍼거슨과 튀르고는 인류가 사냥과 채취사회에서, 목축, 농업, 상업사회로 단계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유럽은 그런 면에서 최고의 단계에 도달한 상업사회였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야 예술과 과학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아직 어떤 법칙에 따른 발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콩도르세에 오면 달라진다. 그는 <인간 정신 진보의 역사적 스케치를 위한 초안>이라는 글에서 인간 정신은 감각에서 오는 정보를 무한히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지식을 무한하게 축적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식에 관한 한 인간은 진보하며 개인과 함께 사회도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는 역사를 움직이는 자연법칙을 믿었고 그것은 자연계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엄격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제 역사는 설명되고 예측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진보의 관념이 보다 확실해지고 그것이 진보사관이라는 하나의 역사관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산업화에 따라 물질적인 진보가 뚜렷하게 눈에 보이고 이제 인간사회는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곳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의 이러한 진보는 비유럽사회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다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19세기에 들어와 아시아 정체성론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이유이다.

 

타자화

타자화(他者化, othering)란 다른사람의 인격이 ‘나’(우리)에 의하여 대상화(對象化)되고 물화(物化)되는 것을 말합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속성을 비난하고 그에 오명을 씌움으로써 그 혹은 그들을 무력화시키고, 반면 내(우리)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긍정적으로 천명함으로써, 즉 나(우리)와 그 혹은 그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에 근거하여(타자인식), 그 및 그들에 대한 통제와 탄압, 차별 혹은 배제 및 주변화를 정당화시키는 행위이지요. 어느 지역의 문화를 막론하고 발견되며, 이른바 비정상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존재를 사회로부터 추방하는데 흔히 사용되었던 방식입니다. 중세 및 종교개혁기의 마녀 사냥, 절대주의 시기의 걸인 및 광인에 대한 추방 작업, 산업화시기 빈민들의 구빈원 수용 등의 사례에서도 타자화의 방식이 확인됩니다. 근자에 들어서는 제국주의자들의 피 식민지인들에 대한, 그리고 남성들의 여성들에 대한 타자화 과정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계몽사상의 경우, 비유럽인들에 대한 타자인식과 여성들에 대한 타자인식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은 유럽인들이 새롭게 확인했던 비유럽 지역의 존재, 그 사람들 및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문화와 문명을 구별했으며, 더구나 문명을 이성의 진보과정 및 자유로 파악함으로써 진보를 유럽의 전유물로 간주했습니다.

일례로 몽테스키외는 유럽을 자유의 이념과 동일시했습니다. 1748년에 출간된 『법의 정신』에서 유럽의 문화는 온대라는 기후적 상황에서 기인하며, 그 결과 유럽은 전제적인 아시아 및 러시아와 구별되는 자유로운 대륙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유럽의 역동성과 윤리, 심지어 자본주의를 아시아의 타성, 평온함 및 영원한 부동성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볼테르 역시 『루이 14세의 시대』(1751)에서 유럽은 동일한 종교적 기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쟁포로를 노예로 삼지 않으며, 적대국의 사절을 존중하고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설파합니다. 물론 볼테르는 유럽을 종교적인 속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필공화국, 과학, 예술 등 그 문화적 속성에서 가장 세련되고 문명화된 곧 합리화된 대륙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계몽주의의 여성 인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요. 당시 몇몇 특권층 여성들은 살롱에서 남성들 사이의 대화를 중재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치안”의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본격적인 논쟁에 참여했다기보다는 단지 남성들의 논쟁을 정리하고 중재했을 뿐입니다. 요컨대 여성들은 논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계몽주의자들 역시 여성들의 지적 활동에 비교적 호의적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제한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모친 및 교사로서의 여성들의 교육에 중요성이 부여되었지만 현학과 박식은 경계되었습니다. 특히 루소와 디드로 등 일부 철학자들은 살롱이 도덕적 부패와 타락을 초래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는 여성들이 남성과는 다른 속성과 자질, 즉 루소가 강조하는대로 ‘여성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루소는 여성이 자연의 영역인 가정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정에서의 여성의 권리를 적극 신장시키고자 했지만 그 역시 가부장에 의해서 통제되는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여성들에게 공적으로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통적이고 규제적인 측면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여성성’에 대한 인식이 여성들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남성들이 편의와 이해관계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부과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루소적”인 공화주의 체제가 현실에 상당한 정도로 도입되었는데요, 이 체제는 점차 여성들을 정치적 참여와 공공의 영역으로부터 배제시켜 갔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19세기에 가부장적인 부르주아의 사회를 성 차별적인 측면에서 지속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세계의 역사>> 중간고사 문제 및 답안 사례    

 
다음 중 한 문제를 택하여 서술하되, 분명한 논지와 정확한 문장을 갖추어 주세요.    
문제 1) 아래와 같은 계몽주의 명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유롭게 피력하시오.
  
계몽주의 사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이성이다. 즉 인간은 이성의 힘에 의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조건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적인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지식, 자유, 그리고 행복으로 간주되었다.  
  
답안 1)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각과 그 실천을 강조한다. 인간의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 또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무한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근대 사유를 창출해 낸 계몽주의자들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다음에서는 당시의 현실 속에서 그들이 간과한 것들을 살펴보면서 계몽주의자들을 다시 이해해보고자 한다.
  
1. ‘감정’의 존재에 대한 망각
  
계몽주의자들은 중세부터 내려온 종교의 권위에 반(反)하는 입장을 취했다. 종교를 인간의 존재 자체를 무력화시킨 속박의 출발점으로 간주하고, 종교에 대한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영국의 이신론이 프랑스로 전파되면서 인간의 냉철한 판단과 사유로 신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고, 무한히 새로운 세계와 질서를 창조할 수 있다는 인식에까지 이른 것이다. 반면 계몽주의자들은 희노애락 등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과 감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인 성과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인간 본래의 성향을 파악하는데 장애를 초래했고, 그러한 태도가 오늘날에 이르러 인간 소외를 가져온 것이다.  
  
2. 문명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자들이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지니고 있었던 무한한 확신, 그리고 인간의 과학적 성취 및 문명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던 태도를 비판할 수 있다. 루소를 제외한 계몽주의자들은 문명예찬론자로서, 식민지 내지 낙후된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원시적인 인간들을 오직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즉 이성을 갖지 못한 자들로 파악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들이 인간이 아니라 말하는 짐승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당시 노예무역에 대해서도 찬성했다.

3. 지식, 자유, 행복 등을 합리적 인간의 목표로 은 점
 
 계몽주의자들은 인간 이성의 산물로서의 지식과 문명에서 비롯하는 혜택을 누리는 행복과 기존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제시하는 비합리적인 신앙으로부터의 자유를 목표로 았다. 하지만 인간 이성 즉 인간의 내면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이 외부 환경과 끊임없이 관계를 주고받으면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한쪽 측면인 이성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다른 측면들을 보지 못했다. 또한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그들의 논리를 완성하지도 못한 채 혼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자각을 넘어서 타인에게까지 이성의 인식을 촉구했다는 점은 오늘날의 지식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제 2) 다음은 18세기 프랑스 상류층 여성들의 상황에 대한 서술입니다. 자신이 18세기 프랑스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고 가정할 경우, 자신의 인생행로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하여 자신의 지식과 상상력을 자유롭게 동원하여 서술하시오. 
 
18세기 프랑스 상류층 여성들은 남성들과의 지적인 교류의 장으로서의 살롱을 제공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남성 지식인들에게 종속되어 지적 흐름을 주도할 수 없었다. 실제로 당시 상류층 여성들은 표면적인 화려함과 발랄함에도 불구하고 부친 혹은 남편의 지위가 절대적이었던 가정의 틀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고달픈 서민층 여성들이 보다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고 주변의 일들에 대해서 적극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답안 2)
  프랑스 귀족의 딸로 태어난 나의 위치를 점검하기 위해서 일단 현재 상황에 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현재 살롱은 상류층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계몽주의 지식인들과 여성들에게 활동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의 지적활동의 범위는 교육받은 상류층 여성에게만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여성은 살롱의 주인으로서 사상의 소개와 발표 및 그 교류를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계몽주의 지식인들도 대체로 여성의 지적활동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 사상가는 아직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 지식인들의 역할 은 출판 등을 통한 지적인 생산이라기보다는 계몽 사상가들의 토론을 조정하고 정돈하는 겅도에 제한되어 있다. 말하자면 극소수의 여성들이 공론의 장을 만들기는 하지만, 남성지식인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지적인 활동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귀족의 딸로서의 나의 처지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 부모는 귀족이지만 재산은 막대하지 않아서 정기적으로 살롱을 운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살롱에 출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살롱 여주인만이 남성 문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뿐, 여성들의 출입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가정교사들을 통해서 교육을 받고 있다. 외국어를 배우고, 고전 서적을 읽고 있으며, 악기 연주와 노래 부르기도 연습하고 있다. 우리 부모는 나에게 마땅한 혼처를 찾고 있으며, 내 몫의 지참금도 마련해 놓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차피 나의 미래의 남편에게 제공될 것일 뿐, 내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재산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독자적인 인생을 개척하기란 그다지 용이하지 않아 보인다.
  다행히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글쓰기를 통하여 나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고 경제적인 독립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더구나 글쓰기 작업은 살롱이라는 협소한 세계를 넘어서 보다 많은 여성들의 지적인 작업을 자극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물론 현재의 사회 정서에서 글 쓰는 여성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성들에 비하여 경제적 보상도 열등한 편이다. 나 역시 나에게 보장된 어느 정도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을 히 포기할 생각은 없다. 일단 나에게 주어진 여건을 발판으로 아 보다 개선된 상황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나는 부모가 제공하는 기회를 받아들여서 귀족 가문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작정이다. 만약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남편을 만나게 된다면, 나 역시 살롱을 운영하면서 남편의 사회 진출도 돕고 나 자신의 지적인 성장도 도모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교적 한가로운 여가를 통해서 글을 읽고 쓰면서 문인들의 세계에 진출해 보고자 한다. 나의 글을 통하여 문단에서 평가를 받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소득도 확보할 수 있다면 보다 넓고 자유로운 활동 영역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에 대해서도 희망해 본다.
  나는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모색하되, 모든 것의 중심이 나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지적인 활동을 통하여 나를 성장시키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동시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처지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과 연대하고자 한다. 나는 글을 통하여 여성은 남성과 가족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존재임을 역설하고자 한다. 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여성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여성을 위한 길을 공동으로 모색할 것이다. 특히 여성들을 위한 잡지를 발간하는 기회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이것이 보다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의 지위를 마련하기 위한 바람직한 방향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