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 ı Łονё 文學

고구려와 백제의 노래, 신라 노래와 향가

수로보니게 여인 2009. 2. 14. 15:07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으로 가자        

 

고구려와 백제의 노래, 신라 노래와 향가   

 

내원성가                                                   

  

내원성가

 

지은이 : 미상
연대 : 미상(고구려로 추정)
갈래 : 고대 가요로 추정
특징 : 내원성의 유래를 읊은 노래로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변방인 정주(靜州) 섬에 있던 성

          (城)에 오랑캐의 투항자들을 정착시켰는데, 그 성의 이름이 내원성이며, 이를 다시 노래로 지어서 '내원성가'라 하였다고 되

          어 있다. 또, '고려사' <악지(樂志)>에도 그 곡명과 유래가 적혀 있다.

1055년(문종 9) 이 성의 군사가 고려의 성 근처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정사(亭舍)를 지으려 하자, 고려에서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 : 遼陽)에게 국서를 보내 항의하였다. 이러한 것을 볼 때, 당시 내원성은 군사상 뿐만 아니라 외교상으로도 요지가 되었던 것이다.
1116년(예종 11) 내원성이 포주성(抱州城 : 의주)과 함께 금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 3월 요나라 장군이 고려에게 내원성과 포주성을 접수하라는 공문을 보내고 해로로 철수하자, 고려는 두 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포주를 고쳐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를 고, 압록강으로서 경계를 았다.
금나라가 요나라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공격한 것은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가 두 성을 접수, 점령하는 것을 금나라가 쉽게 승인한 것은 고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산성터
그 뒤 내원성은 금나라가 점유해, 1183년(명종 13) 이 성을 내원군(來遠軍)으로 고쳤음을 고려에 통보해 왔고, 1217년(고종 4) 내원성이 고려의 영덕성(寧德城 : 의주)에 첩(牒)을 보내어 동진국(東眞國)의 포선만노(蒲鮮萬奴)와 거란의 군대를 서로 방어할 것을 약속해 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내원성은 고려와 금나라 사이에서도 국방상·외교상의 요지가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원성은 고구려 정주(靜州, 지금의 平安北道 養州 부근)의 물 가운데 있는 땅이다. 오랑캐들이 투항해오면 여기에 두었는데, 이에 따라 성의 이름을 내원성이라 하였고, 노래도 이에 따라 〈내원성〉이라고 했다고 한다. 내용과 형식을 전혀 알 수 없는 작품이다. 희귀한 고구려가요 중에서 이름 정도만을 제공하여주는 자료이다.≪참고문헌≫ 高麗史, 增補文獻備考.(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그림이 많이 나온다. 왕산악이 진나라의 칠현금을 개조하여 거문고를 만들었고, 고구려 율령(律令)에는 낙령(樂令)이 포함되어 있어서 악제를 정비하고 악기 편성을 제도화 했다. 당나라와 수나라, 그리고 일본에 전해진 ‘고려악’은 오랫동안 그 나라들의 중요한 음악이었다. 이런 점들을 보면 고구려 음악은 대단한 규모와 수중을 자랑하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단 한 곡의 노래도 남아있지 않다. 문화의 전통이 이렇게까지 끊긴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용이나 형식은 알 수 없지만, 고구려가 정치를 그만큼 잘해 오랑캐가 귀순해 온다는 내용이거나, 투항한 사람들이 새 삶에 대한 기대나 기쁨을 말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연양가(延陽歌)  

연양현에 한 충실한 사람이 죽을 힘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였다. 자기 몸을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나무가 자신을 불태워 재가 되도록 직분을 다하듯이 나도 비록 재가 되어 버리더라도 열심히 일을 사양하지 않겠다."라고 읊었다.

 

주제 : 직분에 대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


내용 :
고려시대의 작자, 연대 미상의 가요로 가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사'권71 국속악 고구려조에 그 내력만이 전하고, 내용은

           연양(延陽) 땅에 남의 집 사는 사람이 있어 자신의 몸을 나무에 비유하여 “나무가 쓰일 대로 쓰이다가 불타서 없어지듯이 자

           기도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여 죽음을 사양하지 않겠다”는 심정을 읊은 노래라 한다. 가사는 전하지 않고, 그 유래만 《고려

           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전한다.


이해와 감상: 어느 시대나 사회에는 항상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작품들의 내용이 전해지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하면 문학은 그 사회의 일면을 반영한다는 말은 진리이다.

 

명주가 (溟州歌)

무월랑과 연화 이야기

신라 중엽 강원도 명주(강릉) 남대천 남쪽 연화봉 밑에 서출지라는 연못이 있고, 그 못가에 박연화라는 예쁜 아가씨가 살고 있어 날마다 못가에 나와 고기에게 밥을 던져 주었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내자 고기떼들은 연화의 발걸음 소리만 나도 물 위로 떠올라 모여 들었다. 어느 봄날 하루는 연화가 못가에 나와 있으려니까 웬 서생이 자기를 보면서 못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여러 날이 지나 그 서생이 한 장의 편지를 떨어뜨리고 가므로 이상히 여겨 주워보니 그것은 자기에게 사랑을 고백한 내용이었다. 서생의 이름은 무월랑이었다.

다음날 답장을 썼는데, "부모가 계시기 때문에 여자로서는 아무렇게나 경거망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디 당신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더욱 글공부에 힘써서 입신양명을 하시면 그때 부모의 승낙을 받아서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 말에 감동된 무월랑은 서울(경주)로 가 열심히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다. 한편 연화의 집에서는 나이가 과년하므로 혼처를 정하고 오래지 않아 날을 받아 성례를 시키려 했다. 그를 안 연화는 편지를 써가지고 못가에 나와, "너희들은 오랫동안 내 손에 밥을 먹고 자라 왔으니 내 간절한 사정을 서울로 간 뒤 한 장의 편지조차 없는 낭군에게 전해다오."라고 사람에게 말하듯 하면서 그 편지를 물 위에 던졌다. 그러자 그 중에 가장 큰 잉어가 편지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 가 버렸다.

한편 서울에 온 무월랑은 어느날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큰 물고기를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와 배를 가르니 이상스럽게도 그 속에 편지 한 장이 있으므로 펼쳐보니 그 편지는 분명 연화가 자기에게 보낸 급한 사연이었다. 이를 보고 무월랑은 자기 부모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그 길로 명주로 말을 달려가니 마침 새신랑이 문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급히 가로막고 연화의 부모를 불러 그들의 진실한 사랑 관계를 이야기하니 그 부모가 이르기를, " 이 지극한 정성이야말로 진정 하늘까지 뜻이 통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새신랑을 보내고 무월랑을 사위로 았다.(출처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요점
주제 : 잉어의 보은으로 인한 사랑의 결실

이 작품은 명주(溟州:지금의 江陵)에서 공부하던 서생(書生)과 양가의 규수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을 읊은 노래이다. 처녀가 연못에 던진 편지를 잉어가 물고 갔는데, 서울에서 과거에 급제한 서생이 부모에게 드리려고 사온 물고기 뱃속에서 발견되어 마침내 가연을 맺는다는 내용

내용 연구
실제로 주인공 무월랑은 족보에 명시된 대로 신라 때 시중벼슬까지 지냈고 사후에 왕으로까지 추존된 사람으로, 그 시대와 인물이 밝혀졌고 강릉 남대천에는 당시 서출지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그곳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월랑의 '월(月)'자와 연화의 '화(花)'를 딴 '월화정'이 있어 이 설화가 사실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설화는 잉어가 자기를 길러준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주인의 편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은 설화의 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설화는 고전소설 '춘향전'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곧 서생이 유학하러 명주에 갔다가 한 양가녀를 만난 부분은 이도령이 부친을 따라 남원에 가서 광한루의 결연으로 춘향과 통정하는 장면과 흡사하고, 또 서생이 경사로 돌아와 거업을 익히는 부분은 이도령이 한양으로 돌아와 시서·백가어를 익혀 등과하는 장면과 흡사하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점에서 '춘향전'의 근원설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해와 감상
신라 가요의 하나로 원가는 전하지 않고 작품명과 전승 설화가 '고려사'악지, '증보문헌비고'권106 악고 17 속악부, '강릉김씨파보','강릉김씨세계' 등에 전한다. 문헌에 따라 제작 연대와 작자가 다르게 추정된다. '고려사'에 의하면, 작자는 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서생이며, 시대는 고구려조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가요라고 보았다. 이와 달리 '증헌문헌비고'에서는 명주는 고구려시대의 지명이 아니고 신라 때 개칭한 지명이므로 신라의 가요로 볼 수 있는 한편, 설화의 내용에 나오는 과거제도가 고구려에는 없었기 때문에 고려악이 아닌가도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강릉김씨파보≫나 ≪강릉김씨세계≫의 설화내용으로 판단해볼 때 작자는 설화의 주인공인 신라 진평왕 때 사람 김무월랑(金無月郎 : 惟靖公의 別號로 爲靖·惟正·惟端이라고도 하며, 강릉김씨의 시조인 金周元의 아버지)이 되며, 이에 따라 작품의 시대도 신라가 된다.
≪고려사≫의 기록인, “드디어 이 노래를 불렀다(遂歌此曲).”는 기록을 믿는다면 노래를 지은이도 무월랑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간 학계에서는 ≪고려사≫에 기록된 ‘탁제거업(擢第擧業 : 과거를 보아 합격함.)’이라는 어구에 얽매어 고려의 가악이라고도 보았고, 고구려의 가요로도 보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과거제도가 신라의 독서품과(讀書三品科)라는 것과 대치, 설명된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통일신라 때 발생하여 궁중악으로 채택된 것이 고려로 전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읍사
井邑詞 

 

백제의 가요의 대표주자는 「정읍」이다.

행상을 나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심정을 노래한 것, 가사가 전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려사』 「악지」에는 이 노래의 유례가 실려 있고, 가사는 『악학궤범』에 전한다.

 

정읍사 고문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달님이시여, 좀더 높이 돋으시어
멀리 비추어 주십시오
시장에 가 계십니까
진 데를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 것이나 다 부려놓고 오십시오
나의 가는 데가 저물까 두렵습니다. - 朴 晟 義

달이여, 높이 높이 돋우시어,
멀리 멀리 비치십시오.
시장에 가 계십니까
혹시 진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디에든지 놓고 계십시오(어느 사람에다 마음을 두고 계십니까)
나의 임(나의)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 全 光 鏞

요점
작자 : 어느 행상인의 처, 미상
갈래 : 고대 가요, 서정시
연대 : 미상(백제로 추정)

형식 : 내용상 3장 6구, 여음을 뺀 본사설은 6행으로 2줄씩 합해보면 3장 6구(각 장에 후렴구가 있음)의 시가 형식이어서 시조의 근

          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성격 : 서정적, 기원적, 망부가
표현 : 직서법, 비유법을 사용
주제 : 행상 나간 남편의 안전을 기원,
의의 : 현재 가사가 전해지는 유일한 백제 가요. 국문으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노래. 시조 형식의 원형을 가진 노래
관련 : <고려사> '악지'에는 백제 시대의 가요와 그 배경 설화가 기록되어 있고, '정읍사' '선운산가' '지리산가' '방등산가' '무등산가'의 다섯 편이 그것이다.

회소곡[會蘇曲, 회악] :  신라노래, 음악형식 / 신라 유리왕 때 지어진 작자·연대 미상의 노래.
〈회악 會樂〉이라고도 한다. 가사는 전하지 않으며 〈국사기〉에 그 유래만이 전할 뿐이다. 유리왕이 6부(六部)를 편성한 뒤 6부의 여자들을 2패로 나누고 왕녀 둘을 각 패의 우두머리로 아 7월 보름부터 8월 까지 길쌈 경쟁을 하게 했다. 그래서 진 쪽이 가무백희를 갖추어서 이긴 쪽을 대접했다. 이 자리에서 진 편의 여자 하나가 "회소, 회소"라는 감탄구를 가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는데 그 소리로 인해 노래 이름을 〈회소곡〉이라 했다고 한다

향가의 기본 성격

鄕歌,(사뇌가, ‘우리 고유의 시가', '시골노래')는 향찰로 표기된, 신라에서 고려전까지의 정형시가이다. 향가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경덕왕 때 월명사에 의해서이다. 경덕왕이 하늘에 해가 둘 나타나는 변괴가 생기자, 인연 있는 중으로 하여금 산화공덕을 지어 하나의 해를 없애고자 했다. 이 때 마침 월명사가 지나갔으므로 노래를 지으라하니, 자신은 국선지도에 속해있어 인도의 불교노래인 범성은 모르고 향가만 안다고 하며 「도솔가」를 짓자 변괴가 사라졌다. 이를 통해보면 향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노래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과 관련해 자기비하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향가가 주술적인 힘을 가졌다는 믿음은 고려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헌화가獻花歌

 

 

heon-hwa.gif

 

   

요점   
         작자 : 어느 소 끄는 노인(牽牛老翁, 견우노옹)
         시대 : 신라 성덕왕 때
         갈래 : 4구체 민요적 향가
         성격 : 연가적, 찬미적, 서정적
         표현 : 상징법, 도치법
         제재 : 꽃을 바침
         주제 : 꽃을 꺾어 바치는 사랑의 노래 (헌화),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연정, 꽃을 바침, 아름다움 찬양
         의의 : 적극적 애정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작품으로 신라인의 소박하고 보편적인 미의식을 보여준다. 

내용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천 길 벼랑 위의 바위 가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고 공의 아내인 수로 부인은 크게 감탄하여, 누가 그 꽃을 자기에게 꺾어다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엉뚱하고 다분히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젊은 그녀의 종자(從子)들 중에는 아무도 들어준 사람이 없었다. 그때 소를 이끌고 가던 어떤 노인이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다고 말한다. 

  노옹이 꽃을 꺾어 부인에게 바치면서 '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 이라는 표현에서 유의할 것은 아름답고 젊은 상류층의 부인이 꽃을 갖고 싶어하는 것과 초라하고 늙은 노인이 암소를 끌고 간다는 것이 서로 대조를 이루기에 이 상황을 '부끄러움'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정법과 도치법을 사용하여 노인의 심정을 드러낸 시구로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으려는 그 당시 신라인의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로 여기서 노인은 초라한 '노인'이 아니라 불교의 선승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암소를 끌고 가던 노옹은 오랫동안 잃어던 자기 마음의 소를 붙들고 가는 선승을 가리킨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노옹을 농경 의례에 등장하는 농신으로 보기도 하며 또 도교적 측면에서는 신선으로 보기도 한다. 도교에서는 신선을 현빈(玄牝)이라 하고 검정 암소는 불멸영생의 상징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로 부인은 단순히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무당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무당이 정치적 목적과 관련하여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굿을 하게 되었는데 '헌화가'는 이 굿에서 부른 굿노래라는 것이다.

배경 설화
제 33대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할 적에, 가다가 바닷가에 머물러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로 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에 다가서 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이것을 보고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말하였다. "꽃을 꺾어다 바칠 사람이 그 누구인고" 종자(從者)들이 말하였다. "사람의 발자취가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물러섰는데, 그 곁으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옹이 수로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오고 또한 노래를 지어서 바치었다. 그 노옹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국유사」 권2 '기이 제이(紀異 第二)' '수로 부인' 편의 배경 설화에서

'헌화가'에 대한 문학적 해석상의 다른 견해


인간적 욕망과 관련된 노래로 다음과 같이 대별된다.
소박한 구애(求)의 노래로 본다.
육욕적인 성애(性)의 알레고리로 본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상징 형식의 노래로 보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노인은 단순한 노인이 아니고, 노인이라는 어원이 장자라는 뜻과 웃어른이라는 뜻이 있다는 점에 주목을 하고, 다른 권세가 일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노래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수로 부인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한 노인이 생명을 걸고 천 길 벼랑을 기어올라갔고, 용(龍)이 나와 수로 부인을 납치해 갔으며, 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온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에 모여 거세게 항의했다.

미(美)라는 것은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순수하고 절대적인 인격만이 참된 미를 알고, 그 미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종자(從子)들은 참된 미(美)를 알지 못했으나, 그 노인은 참된 미를 알았다. 여기서 우리는 신라인의 뛰어난 미의식(美意識)의 일면을 역력히 엿볼 수 있다.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향가의 원문에 붙은 한자음은 편의상 붙인 것임 -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간 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고 하는구나
눈 깜박할 사이에
만나 뵈올 기회를 지으리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이까. - 양주동 해독

지나간 봄 돌아오지 못하니
살아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
전각(殿閣)을 밝히오신
모습이 해가 갈수록 어 가도다.
눈의 돌음 없이 저를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낭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다복 굴헝(다북쑥이 우거진 무덤)에서 잘 밤 있으리. - 김완진 해독

요점
작자 : 득오곡(得烏谷, 득오라고도 함). 신라 효소왕 때 화랑.
형식 : 8구체 향가
연대 : 효소왕(692-702) 때
성격 : 찬양적. 모적
내용 : 화랑 죽지랑에 대한 사모의 정을 개인 서정을 빌려 노래한 것
주제 : 죽지랑에 대한 모의 정. 화랑 죽지랑에 대한 추모의 정
의의 : 주술성이나 종교적 색채가 전혀 없는 순수한 서정시로, 낭도(郎徒)의 세계를 보여 준 작품이다.


관련 설화 및 내용

국유사 ≫ 에는 이 노래를 짓게 된 동기를 설명해 주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죽지랑의 무리에 득오곡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일 죽지랑을 모시다가 갑자기 열흘 가까이 나오지 않으므로 죽지랑이 그의 어미를 불러 연유를 물었다. 이에 그의 어미가 모량리(牟梁里)의 익선 아간(益宣阿干)이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급히 임명하여, 미처 인사도 못 여쭙고 떠나게 되었음을 고하였다.

죽지랑이 낭도 137인을 거느리고 떡과 술을 가지고 득오곡을 위로하러 가서는 밭에서 일하고 있는 득오곡을 불러 떡과 술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주어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익선은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사리(使吏) 간진 ( 侃珍 )이 세금으로 곡식 30석을 거두어 성중으로 돌아가다가 낭의 선비를 아끼는 인품을 아름답게 보고, 익선의 융통성 없음을 못마땅하게 여겨 곡식 30석을 주면서 낭의 청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였지만, 그래도 듣지 않으므로 다시 말과 안장까지 주자 그때서야 득오곡을 놓아 주었다.

이러한 후의를 입은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모해서 이 노래를 지었다는 것이다. ≪ 국유사 ≫ 는 이러한 산문 기록의 아래 〈 모죽지랑가 〉 의 가사를 수록하고 있다. 양주동의 해독에 따라 가사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간봄 그리매/모든 것 坮 우리 시름/아 譴 나토샤온 즈 萄 /살 ○ 디니져/눈 돌칠 嗜 이예/맞보 督 디지 圖 리/郎이야 그릴 絅 撞 鏡 녀올 길/다 珖 絅 當 羸 잘 밤 이시리(간 봄 그리매/모든것사 설이 시름하는데/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내다/눈 돌이킬 사이에나마/만나뵙도록(기회를)지으리이다. /郎이여, 그릴 마음의 녀올 길이/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

작품 의의

 

해독상의 성과를 보면 양주동의 해독은 15세기의 음가를 중심으로 해석하였는데, 신라 시대의 음가가 과연 15세기의 음가와 동일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이 제시된 바 있다. 이러한 견해를 대변하는 해독으로는 홍기문과 정열모의 연구를 들 수 있다. 홍기문은 신라어의 음가에 최대한으로 접근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특이하게 해독한 바 있다.

그리고 김완진은 네 가지 원칙을 세워서 작품을 해독한 특징이 있다. 일자 일음의 원리, 훈수종음의 원리, 맥락 일치의 기준, 율조의 기준 등을 중심으로 작품을 해독하였다.

양주동과 김완진의 해독상 차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 皆林米 ’ 에 대한 해독에서 양주동은 ‘ 그리워함에 ’ 로 하였고, 김완진은 오지 못하다로 하여 음역(音譯)과 훈역(訓譯)의 차이점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3행 ‘ 毛冬居叱哭屋尸以憂音 ’ 에 대해서는 양주동이 ‘ 아름다움 나타내신 ’ 으로 풀이한 반면, 김완진은 ‘ 殿閣을 밝히오신 ’ 으로 풀이해서 큰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 逢 烏支惡知作乎下是 ’ 에 대해서도 양주동은 ‘ 만날 수 있도록 만들겠다 ’ 고 해석한 반면, 김완진은 ‘ 만나보기를 어찌 이룰 것인가 ’ 로 해석하여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래를 보면 지나간 봄을 그리며 시름에 젖고, 또 죽지랑의 아름답던 모습이 쇠함을 바라보는 득오곡의 낭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작품의 주된 정조를 형성하고 있다. 한때 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그 후 여러 대에 걸쳐 대신으로서 존경과 찬미를 한몸에 받았던 노화랑(老花郎)의 쇠잔한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득오곡의 심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변하지 않는 존경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작품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죽지랑의 생존시에 지어진 작품이라는 설과, 그의 사후에 그를 추모하여 지은 노래라는 설이 학계에 제기되어 있다. 전자에 따를 때 이 노래는 득오가 앞서 익선에게 끌려 가서이거나 그 일이 있은 뒤 낭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가 되고, 후자의 경우 죽지랑이 죽은 뒤 그의 덕을 사모하여 추모 찬송한 추모가의 성격을 지닌다.

어떻든지 이 작품은 지난 날 위대하였던 노화랑 죽지랑이 일개 아간 벼슬의 익선에게 수모를 당할 정도로 그 위엄과 위의를 상실해 간 화랑도의 세력을 잃은 모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망매가 祭亡妹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김완진해독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여기에 있는데 두려워 하면서
'나는 갑니다'라는 말도
미처 다하지 못하고 (저승으로)갔느냐
오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가지에서 나고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미타찰에서 (너를)만나 보게 될 나
도를 닦아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노라.

요점
작자 : 월명사
갈래 : 향가
연대 : 신라 경덕왕 19년 (760) 이전
형식 : 10구체 향가
구성 : 3단구성(1-4행, 5-8행, 9-10행)
표기 : 향찰
성격 : 서정적, 애상적, 추모적, 종교적, 주술적(배경설화), 비유적
표현 : 비유법, 상징법
제재 : 죽은 누이
주제 :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고 추모함.
내용 :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면서 극락 세계에서 왕생(往生)하기를 염원함.
사상적 배경 : 불교적 윤회 사상
의의 : - 숭고한 불교적 신앙심이 나타나 있는 노래이다.

         -  찬기파랑가와 함께 향가 중에서 표현기교와 서정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 뛰어난 문학적 비유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킴
기타 : 이 노래는 일명 ‘위망매영재가(爲亡妹營齋歌’)라고 한다.     -출전 : <국유사(三國遺事)>권 5


이 노래는 10구체 향가의 전형적인 모습인 3단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1행에서 4행까지의 제1단락은 누이의 죽음에 마주 선 괴로운 심경을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체념과 넘쳐 흐르는 골육의 정으로 노해했다.제2단락인 5∼8행에서는 개인적 아픔을, 모든 생명체의 무상성(無常性)에 대한 고뇌로 나타내고 있다. 이는 모든 유한한 생명들을 지배하는 힘인 ‘바람’과 보잘 것 없는 개체로서의 ‘잎’의 대조에서, 그리고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 모르는 것이라는 의문에서 무상에 대한 고뇌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 단락인 9,10행에서는 이승에서의 슬픔과 고뇌를 불교적 믿음에 의해 초극하고 재회의 기약을 다짐하고 있다. 9행 첫머리의 감탄사는 10구체 향가의 형식적 특징이며, 앞 단락에서 보인 심화된 고뇌의 극한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자 종교적 초극이 이루어지는 전환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작품의 주술성(초자연적이고 신비한 힘을 빌려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배경 설화에 담겨 있는데,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를 올리며 이 노래를 불렀더니 광풍이 불어 제상에 놓인 지전을 서쪽으로 날려 보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향가가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주술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배경설화

기록에 따르면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비는 노래로, 작가가 재(齋)를 올리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홀연히 바람이 불어 지전(紙錢)을 날려 서쪽(서방 극락세계 방향)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 지전은 죽은 자에게 주는 노자(路資)로 지금도 장송(葬送) 때 볼 수 있는 것으로 꼭 불교 의식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죽은 뒤의 세계라고 하여 현세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의식이다.

'제망매가'에 나타난 주술성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하여 이 노래를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광풍(狂風)이 불어 지전(紙錢)을 서쪽으로 날려 없애지게 했다는 배경 설화와 함께 전해지는데, 이는 향가가 하늘과 땅을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주술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처용가處容歌

 

img1.gif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긴 것을 어찌하리.

요점
작자 : 처용(處容)
연대 : 신라 헌강왕(875-885)
갈래 : 8구체 향가(4·4조의 민요조로 됨)
표현 : 향찰로 표기, 직서적(直敍的 : 상상이나 감상 따위를 덧붙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인 표현.

          체념적인 농사(弄詞), 풍자, 제유법
성격 : 축사(逐邪)의 노래
구성 : 1-4행 역신의 침범, 5-6행 대상에 대한 의문 7-8행 처용의 관용, 또는 체념으로 역신과 화자의 대화가 있음(5. 6행)
주제 : 아내를 범한 귀신을 쫓아냄, 혹은 아내의 부정을 체념함, 축신(逐神-귀신을 쫓음)
내용 : 아내를 빼은 역신에게 관용의 정신을 베푸는 이야기.
의의 : -  벽사 진경(僻邪進慶 : 간사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의 소박한 민속에서 형성된 무가(巫歌 : 무속의 노래)이다. 
             무격 신앙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처용은 제웅(역신을 쫓기 위하여 음력 정월에 동구밖에 내던져 액을 면하게 한다는 볏짚 
             인형. 처용과 제웅은 발음 및 축사의 기능이 같으므로 처용을 곧 제웅이라고도 한다.)과 연결시킬 수 있다. 
          - 의식무, 또는 연희의 성격을 띠고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계속 전승되었다.

          - 고려 속요에도 '처용가'가 있어 향가 해독(解讀)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출전 : 국유사(三國遺事) >


 
아내와 역신의 동침 장면을 '다리 넷'으로 표현한 것은 신체의 일부분으로 사람을 나타내는 제유적 표현 방식이라는 말이고, 풍자는 어리석음의 폭로, 사악함에 대한 징벌을 주축으로 하는 기지(機智, wit)·조롱(嘲弄, ridicule)·반어(反語, irony)·비꼼(sarcasm)·냉소(冷笑, cynicism)·조소(嘲笑, sardonic)·욕설(辱說, invective) 등의 어조를 포괄한다. 그런 점에서 역신에 대한 처용의 태도에서 풍자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 행에서 처용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아내나 그 사내를 비난하지 않고 관용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때 처용의 심리는 슬픔과 체념, 그것을 극복하는 달관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설화에 따르면 처용은 아내의 간음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대상에 대한 부정과 공격을 통한 해결 방식이 아니라, 자기 절제와 초극을 통한 갈등 해결 방식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러한 절제와 초극은 아내와 역신에 대한 처용의 윤리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역신이 처용에게 감복한 이유도 이러한 윤리적 우월성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고려 속요 '처용가'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고려 속요 '처용가'에 향가 '처용가' 중 6구가 다음과 같이 한글로 옮겨 있어 향찰 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었다.

이 노래의 내용에 대해서 학자들은

    ① 민속학의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
    ②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③ 신라시대에는 멀리 서역 지방과도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은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①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 하다. 그 까닭은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 부르며 춤추며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상식을 범주를 벗어난 무격 사회에만 있는 풍습이기 떄문이다. 또한 악신(惡神)이라도 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에서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절정은 7행과 8행이다. 이는 체념적인 주사(呪詞)로 볼 수 있으나 오히려 처용의 상황(초극적인 이미지)을 부각시킨 것으로 후대로 오면서 벽사( 邪)의 위력으로 발전한 것을 이해할 만 하다. 이를 무가(巫歌)의 일종으로 보아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하지 않고는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속에서는 악신이라도 겁게 하여 보내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고려 초 균여(均如)가 지은 11수의 십구체(十句體) 향가
창작 연대 : 963967 또는 여러 설이 있다.
이명 :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 또는 《원왕가(願往歌)》라고도 한다..
구성 : 전체 11수로 되어있다.
형식 : 각 수 모두가 11분절로 띄어져 있다. 10구체로 보는 것이 통설이나, 띄어쓰기를 존중하여 11구체라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형식상 정연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제1 구는 매우 짧으며, 제9 구 앞에는 감탄사를 수반하는 것이 특성이다. 각 작품 모

          두가 의미단위로는 세 단락이다. 이들 세 단락을 이루는 구수는 4구 또는 2구이며, 작품은 4·4·2의 구수로 되어있다.

          체제는 <화엄경〉보현행원품에 기초하여, 그 10행원의 순서를 그대로 하고, 제목은 '○ ○ ○ ○ 품'을'○ ○○○가'로 고치고

          그밖의 다른 글자는 거의 그대로 쓰면서 10수의 향가를 창작한 다음에 〈총결무진가〉를 더하여, 전체 11수로 짜고 있다.


내용

전체 내용 : 보현보살이 제시한 열가지 원을 작자 스스로 행하고자 다짐하는 것이다.
의의 : 불교가요로 사뇌가 형식의 정착에 기여하고 있으며, 향가의 전성기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작품 이다.
특징 : 작품의 표기상 한자어가 많이 보이는데, 언어의 표기에서 의미를 나타내는 어근과 어간에는 한문을 주로 쓰고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어미에는 향찰을 주로 쓰고 있다. 이 노래는 병든 자가 암송하여 병이 나았고 사람들의 입으로 전파되어 담벼락에

         종종 쓰였다는 〈균여전〉의 기록으로 보아 주력과 신이한 영험을 지녔던 작품으로 평가되기고 한다. 그러나 불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균여와 같은 시대 사람이며 그의 〈원왕가〉를 한문으로 번역한 최행귀는 균여의 향

         가를 중국의 사부를 능가하는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송나라의 군신들에게까지 전파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그들은 균여를 일

          컬어 "진실로 한 부처가 세상에 오신것"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창작 의도 : 이 향가는 균여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하여 《화엄경》의 보현십행원(普賢十行願)의 하나 하나에 향가 한 수씩을 짓고, 11장은 그 결론으로 된 사뇌가(詞腦歌)이다. 고려 제4대 광종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경남 합천(陜川) 해인사 장판(藏版)으로 전하는 《균여전》에 향찰(鄕札)로 기록되어 있다.


이해와 감상

〈균여전〉의 기록으로 보아 주력과 신이한 영험을 지녔던 작품으로 평가되기고 한다. 그러나 불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균여와 같은 시대 사람이며 그의 〈원왕가〉를 한문으로 번역한 최행귀는 균여의 향가를 중국의 사부를 능가하는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송나라의 군신들에게까지 전파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그들은 균여를 일컬어 "진실로 한 부처가 세상에 오신것"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대중에게 향가를 통해 부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되며, 또한 그 시대는 불교가 흥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심화 자료

보현십원가는 《국유사》에 수록된 14수와 함께 현재까지 발견된 향가의 전부이며, 고려시대 향가의 연구와 해독(解讀)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또 《균여전》에는 균여대사와 같은 시대 사람인 최행귀(崔行歸)가 《보현십원가》 11수를 번역한 한역시(漢譯詩)도 함께 실려 있다.

11수의 제목은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 <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 <청불주세가(請佛住世歌)> <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 <총결무진가(總結无盡歌)> 등이다.




                                                                                         영어사전홈     

                                           Write It Down Make It Hap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