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덕일& 정민

혼란기의 경제 정책

수로보니게 여인 2008. 10. 28. 20:05

 

 

 

                                                                                                    

            

        


혼란기의 경제 정책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7년(1594) 1월 사헌부(司憲府)는 "기근이 극심해 심지어 사람 고기를 먹으면서도 편안히 여기고 괴이함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같은 해 3월의 어전회의에서는 더 심각한 상황이 거론됐다. 판중추부사 최흥원(崔興源)은 "굶주린 백성들이 근래 더욱 많이 사망해 그 고기를 나누어 먹고 백골을 성 밖에 쌓으니 성의 높이와 같다"고 보고했고,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은 "부자(父子) 형제까지 서로 잡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의병장이었던 조경남(趙慶男)은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 "백성 생활이 곤궁하여 큰 소가 쌀 3두(斗)에 불과하고, 세목(細木·올이 가는 무명) 값도 곡식 몇 되(升)가 채 되지 못하고, 의복과 여러 물건들이 팔리지 않으니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여자와 고아는 바깥출입을 못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국왕 선조(宣祖)는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해도 내가 듣지 못하고 하늘이 위에서 분노해도 내가 알지 못했다…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라고 신민(臣民)에게 공개 사과하는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반포해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애통교서'보다 필요한 것은 "반드시 조치를 취해 삶의 길을 열어 준 후에야 서로 죽이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금지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병조판서 이덕형의 말대로 백성을 살리는 정책이었다.

다수 관료들은 전쟁으로 농사를 못 지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남의 탓'을 했지만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무역시장인 중강개시(中江開市)를 열었다.
과거 사형(死刑)에 처했던 국제 사무역(私貿易)을 허용하는 과감한 정책 전환이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중강개시'조는 "당시 조선의 면포(綿布:무명) 1필은 겉곡식 한 말도 되지 않았으나 중강개시에서 팔면 쌀 20말이 넘었다"면서 은·구리·무쇠도 교역해 "요동(遼東)의 미곡이 많이 들어와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고 적고 있다.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경제정책을 대책이라고 쏟아내는 현재의 경제 관료들이 되돌아보아야 할 사례가 아니겠는가?


입력 : 2008.10.27 23:22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³οο덕일& 정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조(宣祖)가 만난 흑인   (0) 2008.11.11
독서의 효용   (0) 2008.11.04
상속 재산 반환소송   (0) 2008.10.25
법률용어   (0) 2008.10.23
따오기   (0) 2008.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