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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小考 -「廣場」을 중심으로

수로보니게 여인 2008. 4. 19. 02:29

 


  

    최인훈 小考                                                                                                                         

                                     -「廣場」을 중심으로


        <차례>

       1.들어가는 말

       2.문학적 연대기

       3. 「광장」 혹은 「밀실」의 원형성

           1) 줄거리

           2) ‘광장’과 '밀실‘의 이중성

           3) 요나 콤플렉스

       4. 나오는 말

         ※참고문헌

                                                                 김 린 주     

 

 1 . 들어가는 말

    지난 9월 최인훈의 「광장」 이 영어 , 불어 , 러시아어에 이어 독일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독일어 판이 세상에 선보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7년. 통상적으로 번역에 I~2년 정도 소요  된 뒤 출판사가 결정되는 대로 현지에서 바로 출판되는 관행에 비춰볼 때 꽤 긴 시간이 걸린 셈이다. 「광장」은 1995년에 대산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한국문학번역지원사업(독일어 부문)의 대상 작품으로 선정됐다. 제주대 김희열 교수와 독일인 랄프 도이치가 2년에 걸쳐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1997년 출판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문제가 생겼다 독일 저작권법 중 ' 타이틀 보호법 ' 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 타이틀 보호법 ' 은 같은 제목을 가진 저작물이 둘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법이다. '광장' 이라는 뜻의 독일어 '데어 플라츠(Der Platz)' 라는 제목의 책이 이미 나와 있었다. 번역 작업과 관련된 실무자들은 내용에 왔(맞)게 제목을 바러(로)(오타?) 출판하자며 작가에게 <남쪽에는 광장이 없다>라는 제목을 제안했다. 당시 작가는 " 독일에 그런 법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 독일 저작권법이 바뀌어야 한다. 나는 제목을 바꿀 수 없다" 고 잘라 말했다. 또 그는 " 혹 한국에 그런 법제가 있어, 괴테의 「파우스트」가 「고민하는 이성」과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광장」 이라는 작품의 동일성을 유지해야한다. 절대로 제목을 바꿀 수 없다" 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역자와 실무자들이 고민 끝에 , “‘ 데어 플라츠' 라는 제목 뒤에 한글이나 한자 또는 로마자로 괄호 안에 ' 광장' 이라고  쓰자” 고 작가에게 제안했으나 그는 이 역시 '자존심 상하는 일' 이라며 거절했다 이 문제를 3년이 넘게 끌어오다 처음 계약했던 출판사는 끝내 책을 포기했고 새로운 출판사가 나타났다 「광장」 이 사장(死藏)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출판사는 같은 제목의 책을 펴낸 출판사에 여러 차례 양해를 구한 끝에 최인훈의 '데어 플라츠' 가 독일에서 탄생하게 됐다. 그는 " 작품의 제목이란 곧 작품의 내용이기도 하다. 번역 작업을 할 때도 한국인과 한국 예술의 품위, 상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야 그 의미가 있다. 제목을 바꿔서 출판하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고 말했다. 그의 결벽에 가까운 자존심과 꼼꼼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최인훈이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라는 사실은 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로 거론되는 것만 보아도 더 이상 증명의 여지가 필요 없다. 또한 지난 96년 봄에 「광장」이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더불어 우리 출판 사상 처음으로 100쇄 돌파라는 대기록을 작성한 사실은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아닌 여러 세대에 걸쳐 읽히는 소위 스테디셀러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4.19 직후에 발표되었을 때 읽었던 세대들과 그 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 민주화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비교적 젊은 독자들 사이에는 분명 그 '충격 '과 '감동'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분명 이 작품은 우리 戰後文學 아니 , 현대 소설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획을 그은 白眉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4.19라는 '빛나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 소설은 탄생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 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새벽』, 1960년 10월 서문에서)


    비록 이 공화국마저 불과 몇 개월 못 갔지만 이 말은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이 그만큼 작가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소재나 주제를 다루도록 허용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당시에는 '革命'에 버금가는 충격이었고 아울러 감동이었다. 물론 오늘날 다시 읽어도 새삼 놀랍고 새로운 감동을 받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가 이 작품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갖고 있는지는 무려 6차례나 개작을 거듭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 해 4월13일 소설 「廣場」발간 40주년을 기념하는 문학 심포지엄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축하인사에서 “1960년은 정치사적으로는 학생의 해였지만 소설사적 측면에서는 「廣場」의 해였다”는 김현의 말을 인용하면서 "최씨는 전 방위적인 수법과 장르로 오늘의 한국 문학을 풍요롭게 했다 ", “「廣場」은 억압의 70년대, 변혁의 80년대, 해체의 90년대를 넘어 2000년대 사이버문명의 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살아 숨쉬는 고전" 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작가는

     "글 쓰기는 많은 사람과 진지한 인연을 맺는 행위로, 그동안 만난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면서

    “후대에 제대로 된 작품을 남겨야 된다는 생각에서 그간 여러 번 개작했다.

   실무적인 글과 달리 예술적인 글은 마감시간이 없는 작문이어서 개작을 여러 번 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광장」의 완성도 제고를 위해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어휘와 문장을 다듬고 내용도 일부 손질하는 등 각별한 애정  을 쏟아 왔다

 

  2.문학적 연대기-1936

    4월13일 , 두만강 변의 국경도시 함북 회령에서 목재상인의 아들(아버지 최국성 , 어머니 김경숙 사이의 장남)로 태어나다. (아래로는 두 여동생과 세 남동생, 모두 4남2녀의 동기간이 있다) 아버지는 원목을 공급할 수 있는 산판과 이를 상품으로 가공하는 제재소를 함께 운영하는 자영상인으로서, 이 시절은 가족들에게 가장 단란하고 풍요하던 평화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43(7세 )

    국민학교에 입학하다. 당시 회령 읍에는 동서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네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회령북국민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회령에는 중학교도 있었는데, 국민학생으로서 주로 중학생들과 책을 바꿔볼 정도로 조숙한 독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국민학교 저학년까지 받은 식민지 교육의 체험이 나중에 1960년대 후반부터 쓰기 시작한 「총독의 소리」 같은 작품을 가능하게 한 계기가 된다. 1947년 11살이 되도록 이곳에서 국민학교(5학년 1학기까지)를 다니다가 원산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회령과 회령의 두만강은 두고두고 그를 따라다니는 소중한 유년의 )1억으로 자리 잡는다. 그의 소설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H읍은 곧 회령 읍이다 장편「두만강」은, 그러므로 그의 삶 초입에 서려 있는 순정한 서정성과 퇴색하지 않는 향수의 다른 이름이다

1945(9세)

    해방-고향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부르던 광경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국경지역이어서 소련군이 곧바로 진주해 왔고 읍내곳곳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며 시의 일부와 군사시설이 불탔다. 그의 가족들은 읍내의 집을 비우고 목재상의 산판이 있는 시골로 열흘 정도 소개해 간다. 되돌아왔을 때는 이미 세상이 바뀌어 있었고, 공산정권에 의해 중상류층 부르주아지로 분류된 아버지는 더 이상 고향 땅에 발붙이고 살 수가 없어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된다.

1947(11세)

    마침내 함남 원산으로 이사하다. 경영하던 사업장을 모두 두고 왔으므로, 아버지는 가족들의 호구를 위해 원산제재공장에 취직, 자수성가형 경영자에서 월급생활자로 신분을 바꾼다. 회령에서 살 때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했으나 그런 대로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학제로는 9월에 모든 학교들이 개학을 했는데, 최인훈은 학년을 뛰어넘어 원산중학교 2학년에 입학한다. 중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원산고등학교에 들어가 1950년 월남할 때까지 고등학교 1학년을 수료하고 2학년을 2개월 간 다니게 된다. 원산 시절에도 그의 독서열은 변함이 없었다.

1950(14세)

  6 ․25동란이 발발하다. 10월에 국군이 철수하고, 12월에 원산항에서 해군함정 LST 편으로 전 가족이 솔가하여 월남하다. 이때 원산에 연고지를 둔 사람들이 밀고 밀리는 전쟁 통에서 고향을 떠나는 것이 잠깐일 것으로 생각하고,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남겨둔 채 원산을 떠나옴으로써, 천추에 한을 남긴 이산가족이 되고 만 경우가 대다수였다. 최인훈의 가족은 원산이 본래의 생활터전이 아니었고 또 가족 일부가 잔류하여 기댈 만한 언덕도 없었으므로 전원이 월남했는데, 40년 세월을 두고 눈물과 한숨으로 가족이산의 통한을 겪고 있는 이들에 비할 때, 다행이라면 참으로 다행한 일 이었다.

  남북이 서로 <문화적으로 상당한 편차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는 표현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겠으나, 원산탈출이 그의 심상에 강렬한 각인으로 남았으리라는 점은 확고한 사실일 터이다.「회색인」「하늘의 다리」「우상의 집」같은 작품에 단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W시의 얘기는 곧 그의 원산 체험을 반영하고 있으며,「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도 고1의 학생이 맞부딪치는 전쟁의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같은 산문에도 이날 이후 그의 온 생애를 따라다니는 실향민의 비애가 자조적인 어투로 표현되어 있다.

  LST가 부산에 도착하여 낯선 남방의 항구도시에 이들을 부려놓았다. 한 달 정도를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다. 그리고 외가쪽 친척이 있는 목포로 이주하게 되는데, 작가의 기억에도 분명치 않으나 12월에 배를 탔고 부산에 머물던 한 달을 계산하면 그것은 아마도1951년 1월이 맞을 터이다.

 1951 (15세)

    목포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다니다. 남한에서는 고교학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어, 첫 고교 입학생이 되는 셈이다. 원산에 있을 때는 제1외국어로 러시아어를 배웠는데 여기에서는 영어를 배워야 하는 힘든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1년 후에는 그 학급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영어를 잘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때 영어와 맺은 인연은 군에서의 통역관 생활이나 나중에 그의 희곡작품이 미국에서 공연되는 등 영어문화권과의 접촉에 밑받침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52(16세)

    다시 피난 수도 부산으로 돌아와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다.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의 직장이 있었던 강원도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영월의 중석광산에서 역시 제재소 일을 보고 있었다. 최인훈은 혼자 완월동 산 언덕배기에 아버지가 지어준 단독 (바라크)에서 살았다. 창문으로는 자갈치시장 너머로 영도를 중심한 부산 항구가 내려다보였다. 이 집에서 첫 학기가 끝난 초여름부터 그 이듬해 여름 사이에 멀리 두고 온 고향의 이야기「두만강」을 썼다. 그때 주택 사정을 생각하면 호화집필실의 자격이 있었다고 그는 술회했다.「두만강」은 1970년에 발표되었고 현재 통용되고 있는 연보 상으로는 1959년의 「GREY 구락부 전말기」가 데뷔작이지만, 작가로서의 처녀작은 「두만강」임에 틀림없다.

 최인훈은 「GREY 구락부 시절」이라는 다른 산문에서 <아마 대학에 들어가서 겪게 된 대학 공부가 그 무렵의 나의 정신적 요구와 잘 맞물리지 못한 데서 온 자기치료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고 피력하였는데, 실상 법과의 공부는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촉발하지 못한 것 같다. 목포에서 고등학교 졸업 무렵이 되어 친하게 지내던 패들이 법대를 많이 지원하는 데 묻혀서 따라왔다고 하는 것이 진학의 동기였다면, 그가 (못난 오리새끼)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미운 오리새끼는 결국 한국문학의 1960년대에 하나의 분수령을 넘어서는 백조의 날개를 갖게 되는데 , 그 날개가 작가의 겨드랑이에서 돋아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1947년 회령에서 원산으로 이사한 이래 새 도시와 만나는 데 경황이 없어 그야말로 <지리적 통과의례>를 치르기에 바빴던 그는, 「두만강」을 통해 <정신적 통과의례>를 마친 셈이다. 환도하는 대학을 따라 서울에 정착하면서, 1951년 입대할 때까지 1년 휴학을 포함하여 4학년 1학기까지 서울대 법대를 다닌다.

1955(19세)

   『새벽』이라는 잡지에 시 「수정」이 추천된다. 추천인은 따로 없고 잡지 책임추천의 형식이었다.

1956(20세)

    마지막 학기를 등록하지 않고 대학을 중퇴하다. 법학과 문학이라는 방향이 완전히 다른 대상을 두고, 마음은 잿밥에 있으면서도 꽤 오래 염불을 한 듯하다

1957(21세 )

     군에 입대하다. 전방, 서울 근교, 육군보도국 등지에서 통역장교로 근무하다. 나중에는 정훈, 보도 등의 일도 맡아보게 되다. 계급은 중위 . 1963년까지 7년 간 군에 있으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통역장교라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신분이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으로 보인다. 「GREY 구락부 전말기」「광장」「구운몽」「라울전」「회색인」「가면고」같은 최인훈 문학의 초반을 장식하는 작품들이 모두 군에 있을 때 집필되었고, 「무서움」「국도의 끝」「정오」「전사연구」등 군 생활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이 시기의 생각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금오신화」같은 당대 시대사의 한 풍경을 보여주는 단편도 그의 군 체험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1959(23세 )

    발표된 순서에 있어서 첫 작품인 「GREY 구락부 전말기」(『자유문학』10월호)로, 회령국민학교 시절의 초보적인 독서로부터 시작된 오랜 문학적 잠복기를 끝내고 문단에 나오다. 이 작품과 「라울전」(『자유문학』12월호)이 안수길 선생에 의해 추천됨으로써 작가 면허증을 획득하다.

 1960(24세)

   「9월의 다알리아」(『새벽』1월호), 「우상의 집」(『자유문학』 2월호), 「가면고」( 『자유문학』7월호), 그리고 문제의 작품 「광장」(『새벽』10월호)을 발표하다. 이같은 작품들이 발표되는 도중 4 ․19가 일어나다. 「우상의 집」은, 대학 재학 중 명동 여기저기 있던 음악실과 다방 같은 데를 드나들던 때, 청동다방에서 오상순 선생을 자주 뵈었고, 이때의 경험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물론 그 내용은 픽션이다.「우상의집」에 나오는 화재 장면이나 「9월의 다알리아」에 나오는 살상 장면은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모습으로 그의 의식 속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4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있는 역작 「광장」 은 4 ․19 이후 잠깐 동안 개방된 지적 토론의 분위기 아래에서 발표가 가능했던 작품이다. 군사정권이 강고한 힘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한껏 자랑한, 제3공화국 이후의 시대상 가운데 「광장」이 던져질 수 있었을까?  

  1961(25세)

   「광장」을 정향사에서 단행본으로 상재하다. 단편 「수(囚)」(『사상계』7월호) 발표하다. 「광장」의 서문에서, 인간의 삶을 대립구조로 치환한 저 이름 있는 레토릭을 구사하다.

  1962(26세)

   「구운몽」(『자유문학』4월호), 「열하일기」(『자유문학』1 ․8월호), 「1월의 아이들」 (『사상계』7윌호) 발표하다.

 1963(27세)

    4월에 육군 중위로 제대하다. 그 이후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전념하다.

  「크리스마스 캐럴 1) (『자유문학』5월호), 「금오신화」(『사상계』 문예 중간호), 「회색인」(『세대』6월호~64년 6월호 연재) 발표하다. 작가에 의하면 , 「크리스마스 캐럴」은 기독교를 측심추로 사용한 우리시대의 지적 풍속의 탐사라는 생각에서 씌어졌다.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그의 당대에 환상적이고 기이한 세계라 지칭할 수 있는 스토리들을 포괄하고 있다면, 최인훈의「금오신화」는 6․25를 배경으로 한 숱한 사람들의 운명과 죽음이 이성적인 판단으로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납득불능의 집적임을 강렬하게 주장한다.

6 ․25전쟁에서 공산의용군으로 징발되었던 남한 출신 대학생 A가 간첩교육을 받고 남파되는 길에 임진강에서 죽는 이야기인데, 이때의 A는 그 많은 비극적 죽음의 주인공들을 등 뒤에 숨기고 있는 아이러니컬한 시대사의 대명사이다.

 「회색인」은 최인훈의 소설 속에서 <사건>이 점차적으로 퇴조하고 에세이 스타일의 지적 독백이 강화되는 경향의 서두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통과의례 규정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야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 어떤 원시인 젊은이의 공방(고혈)의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1964(28세)

   「크리스마스 캐럴 2」(『현대문학』12월호), 「전사연구」(여성지) 발표하다. 「전사연구」는 1989년 대표작품선집 「웃음소리」를 간행할 때 제목을 「전사에서」로 개칭한다. 희곡작품의 생산 이후에 우리말의 사용에 중점을 두기 시작한 의식적 변모의 반영으로 보인다.

  1965(29세)

    평론 「문학 활동은 현실비판이다」 (『사상계』10월호) 발표하다. 이때부터 1960년대 후반에 쓰여진 평론을 묶어서 1970년도에 평론집 『문학을 찾아서』를 내놓게 된다.

  1966(30세)

   「놀부던」(『한국문학』봄호), 「웃음소리」(『신동아』1월호), 「크리스마스 캐럴 3」(『세대』2월호), 「크리스마스 캐럴 4」(『현대문학』1월호), 「국도의 끝」(『세대』 5월호), 「크리스마스 캐럴 5」(『한국문학』여름호), 「정오」(『현대문학』10월호) 발표하다. 「서유기」를 『문학』5월호부터 연재 시작하다. 「웃음소리」로 제11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다. 「서유기」는 「회색인」의 후속 편에 해당하며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단테를 인용하여 <나의 지옥 편>이라 부르고 있다.

  1967(31세)

   「총독의 소리I」(『신동아』2월호), 「총독의 소리2」(『월간중앙』8월호) 발표하다. 단편집 『총독의 소리』를 홍익출판사에서 간행하다. 「총독의 소리」 연작은 1965년의 한일헙정 조안과 그 여파로 인한 혼란을 바라보면서 당대 사회에 편만한 위기의식을 풍자소설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

   1968(32세)

   「총독의 소리3」(『창작과 비평』), 「주석의 소리」(『월간중앙』4월호),「공명」 (『월간중앙』4윌호) 발표하다. 최인훈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상황의 질곡 속에서 고통 받고 또 방황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데 비하여 , 방황을 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 아주 긍정적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공명」이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이 플로렌스 국방국 총사령관이 됐다면 그런 식의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그는 반문했는데, 이 비교는 매우 거칠기는 하지만 제갈공명이라는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에 대한 심정적 경사가 거의 무제한적임을 짐작하게 한다. 말하자면 「공명」은 최인훈 문학세계에서 돌출하여 그의 문학적 관행과 하나의 대극점을 형성하는 작품이다.

 1969(33세)

  「옹고집던」(『월간문학』6월호),「온달」(『현대문학』1월호), 「열반의 배」(『현대문학』g월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I」(『월간중앙』12월호)발표하다. 70년대 초반까지 계속해서 연작으로 써나간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박태원의 소설에서 그 제목을 가져왔으며, 작가는 <구보라고 하는 소설가의 마음의 레이더에 들어오는 생활의 파편들을 미분하고 적분하면서 그의 이성과 정서의 장세를 각각으로 추적>한, 그래서 이 소설을 지극히 소시민적으로 당의정을 입힌 <나의 율리시즈>라 부를 작품이라고 언명한 바 있다.

1970(34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2」(『창작과 비평』), 「하늘의 다리」(『주간한국』연재) 발표하다.

평론집 『문학을 찾아서』를 현암사에서 간행하다. 70년대 최인훈 희곡문학의 화려한 개화를 예고하는 희곡작품 「어디서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현대문학』에 발표하다. 11월 17일 신문회관 3층에서 이헌구 선생의 주례로 원춘삼씨의 장녀 원영희씨와 결혼식을 올리다. 「하늘의 다리」는, 고향에서 수유놀이를 하던 형제들을 그리워한 왕유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한 실향민의 삶에 얽힌 애수와, 형이상학적인 채색으로 점철된 현대인의 뿌리 뽑힌 실존을 결합시킨 작품이다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이다.

1)설화에서 그 소재를 가져온 점 2)설화나 전설의 스토리를 현대적으로 변형하여 개체의 자율적 자아발견이라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 3)그러한 내용이 희곡으로 씌어짐에 있어서 행복한 결말을 가진 설화일지라도 본격적인 비극의 형태로 재구성된다는 점 4)회의적이고 사색적인 인물이 주인공이던 소설과는 다르게 자신의 사고를 선택적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인물이 극의 진행을 끌고 나아간다는 점 등을 뚜렷한 성격적 특성으로 추려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봄이 오면 산에 들에」「둥둥낙랑둥」「달아달아 밝은  달아」와 같은 그의 후속 희곡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확고한 모티프가 된다. 아울러 이러한 면모들이 소설에 이어 그의 희곡을 동시대 한국문학의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받침대가 되고 있음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1971 (35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갈대의 사계」란 제목으로 『월간중앙』에 연재 시작하다. 『서유기』를 을유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다.

 1973(36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하다.

  1973(37세)

    장편소설 「태풍」을 『중앙일보』에 연재형식으로 발표하다.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세계작가 프로그램 IWP)의 초청으로 9뭘 도미하다. 이후 4년 간 미국에 체재하다. 「광장」 의 일문판을 김소운역으로 동수사(冬樹社)에서 출간하다. 「태풍」은 식민지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노정하는 운명적인 궤적을 그린 작품으로, 그 가상의 상황설정이나 인류문명 전반을 통할해 보려는 범칭적 시각이 매우 독특하여 한국문학사에서는 유례가 드문 작품이다. 80년대 후반에 발표된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나 이문열의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에서 볼 수 있는 조작된 역사와 지적 현란함이 이 작품과 비교될 수 있을 터인데, 그 중에서도 태풍」이 소설로서 갖는 변별적 미덕이 있다면, 자유분방한 역사적 상상력을 구사하면서도 가급적 역사적 사실의 범주를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한 점과 작품의 배경을 한반도라는 친숙한 무대에 비끄러매지 않고 세계무대로 확산시키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한반도의 문제들을 환기시키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

    아이오와 대학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4년 간 체류한 것은 최인훈에게 있어 새로운 지적 충전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광장」 을 우리말을 살려 개작한 일과 희곡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집필하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 활동 행보를 고려해 보면 외견상으로는 휴식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은 대단히 무거운 의미를 갖는다. 우리말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이 이국땅에서 더욱 가열한 갈망으로 확립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거니와, 귀국 이후 고대설화가 가지고 있는 한국적 정서를 현대적 문맥으로 재해석하는 희곡작품의 생산에 정열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미국에서의 문화적 충격이 가져다준 긍정적 결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을, 북간도라는 어의에 대비하여 <양간도>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1976(40세)

   미국 체재를 마치고 5월 귀국하다.「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세계의 문학』창간호), 「총독의 소리 4」( 한국문학』8월호) 발표하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최인훈 전집』간행 시작하다. 극단 <산하>에서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처음으로 공연하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최인훈이 본격적으로 희곡작품을 쓰기 시작한 그의 문학 제2기를 열었다. 물론 1970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발표한 바 있지만, 소설에서 희곡으로 장르를 바꾸게 된 의식의 변모와 그 강도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 터이다. 미국에서의 문화충격과 소설형식에 대한 회의 , 이 두 가지 항목이 그를 희곡으로 인도한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

1977(41세)

  「봄이 오면 산에 들에」(『세계의 문학』봄호) 발표하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로 한국 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을 수상하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취임하다

                                     

1978(43세)

  「둥둥 낙랑둥」(『세계의 문학』 여름호), 「달아달아 밝은 달아」(『세계의 문학』가을호) 발표하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로 제4회 중앙문화대상 예술부문 장려상을 수상하다.「둥둥 낙랑둥」은 그 제목이 암시하듯이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를, 그 본래의 줄거리를 무시하고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1979(43세)

    2월 미국 뉴욕주에 있는 브록포드 대학의 초청으로 동 대학 연극부에서 공연하는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참관 차 도미하다. 7월 문학과 지성사에서 『최인훈 전집』 완간하다. 작가 자신의 삶의 행적과 작품에 대한 생각을 일관성 있게 기술한 유일한 산문 「원시인이 되기 위한 문명한 의식」(『문예중앙』겨울호) 발표하다. 서울시 문화상 문학 부문 수상하다.「달아달아 밝은 달아」로 서울 극평가 그룹상 수상하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의 첫 미국 공연은, 17년 여름에 이 대학의 연극과장 (궤네드 존스) 씨와 공연이 합의된 후 이 대학에서 연극사와 작품분석을 가르치는 조오곤 박사의 번역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79년 3월에 막을 올리면서 원작자를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1980(44세)

   『왕자와 탈』을 문장사에서, 『하늘의 다리』를 고려원에서 각각 간행하다. 산문 「상황의 원점」(『문학과 지성』봄호) 발표하다

 1981 (45세)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을 민음사에서 간행하다. 자신의 삶과 작품에 관해 깊이 있게 논의된  김현과의 대담 「변동하는 시대의 예술가의 탐구」(『신동아』9월호) 발표되다.

1982(46세)

    희곡『한스와 그레텔』을 문학예술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산문 「광장의 이명준」 (『정경문화』6월호) 발표하다

 1984(48세)

    소설로서 발표된 마지막 작품인 「달과 소년병」(『한국문학』5월호)발표하다

1987(51세)

    4윌 미국 뉴욕에서 (범아시아 레파토리) 극단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공연 참관차 도미하다. 이 미국 공연은 1979년도에 이어 두 번째가 되는 셈이다. 공연 극단은 뉴욕 지역의 아시아계 미국 연극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창립 1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미국 내의 아시아계 극작가와 아시아 여러 나라의 희곡을 공연하는 일을 전문으로 해오는 중이었다. 브록포드 대학의 공연 때와는 달리 전문 극단에 의한 본격 공연이라는 점에 더욱 의의가 있었다.

 1988(52세)

  산문「길에 관한 명상」(한진그룹 사보『길』),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에 대한 생각」( 『월간중앙』 5월호), 「도버의 흰 절벽」(『씨네마』10월호)발표하다.

1989(53세)

 창작선집 『달과 소년병』을 세계사에서 간행하다. 산문집『길에 관한명상』을 청하에서 간행하다. 창작선집 『웃음소리』를 책 세상에서 간행하다. 80년대에는 창작보다는 주로 예술론이나 삶의 여러 가지 진실에 관한 단상들을 노트 메모 형식으로 써왔는데, 분량으로 따지자면 책 몇 권에 해당될 정도이다. 이와 같은 메모도 작가의 정신적 궤적이나 시대상에 한 지적 반응을 압축하고 있다고 본다.

 1994(58세)

오랜 침묵을 깨고 1,000매에 이르는 장편소설 「話頭」를 민음사에서 간행하다

 2001년 (65세)

4윌13일 「廣場」발간 40주년 기념 문학 심포지움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열리다. 25년 간 재직했던 서울예술대학에서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로 출강하다.

 

  3. 「廣場」, 또는 「密室」의 原型性

 

   1)줄거리 

 

    소설 「廣場」은 外勢의 도움으로 해방이 된 무렵부터 남북이 각자 단독 정부를 수립하던 시점까지의 政勢 속에서의

 한 청년의 행동을 다루고 있다. 그는 그 시대 정치세력의 주요 인물도 아니고, 따라서 어느 분파에도 소속되어있지 않다.  형식적으로는 국내파 좌익의 계열이지만, 그것도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가족 관계에 의한 결과적 소속이다.

 무엇보다 그는 20대 초반의 청년이다. 그것도 인간으로서의 인격형성을 전후한 인생의 시점에 있는 청년이다.

 그에게 닥친 과제로서의 현실은 아마도 한국 역사상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문제다.

 그것을 그는 1950년이라는 시점에서 아무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에 해당되는 해방 이후 1950년에

 이르기까지의 5년간은 일제에서 미군정, 소군정으로 이어지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였다.

 해방 전까지 활동했던 '臨政'이 당연히 해방 조국의 '정식 정부'의 근간이 되리라 믿었던 믿음이 헛되이 사라지면서

 그 혼란은 비롯되었고, 이 틈을 타고 남과 북의 기회주의자들이 각각 미국과 소련의 등을 업고 정권을 잡음으로써

 정통성 없는 단독 정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 이명준은 南과 北의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철저히 희생된 젊은이다.

 그는 '여자도 남자하고 자고 싶어 할까?'가 제일 궁금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월북한 부친 때문에 형사에게 불려가기

 전까지는 대학신문에 글도 투고하고 연애도 하며 사상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데올로기로 옥죄는 남을 피해 인천에서 윤애와 헤어지고 좌익의

 거물인 아버지가 있는 북으로 밀항한다. 사회개조의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보람을 걸고서 월북 직후의 나날을 보내지만,

 명준은 곧 깨닫게 된다. 북한의 '평등'은 다 같이 노예가 되는 평등일 뿐이라고…. 순회강연에 동원되어 돌아다니면서

 북쪽의 모든 것이 허구라는 사실과 함께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붉은 심장의 광장이 아닌 잿빛 공화국이었다.

 명준은 자신이 선전 도구로 이용당하는 것을 깨닫고 호랑이 굴에 스스로 들어온 것을 저주하게 된다.

 명준의 아버지는 명준 나이 또래의 순박한 '조선의 딸'과 재혼하여 살고 있었다.

 가정 분위기는 혁명가의 그것이 아니었으며, 구역질이 나는 부르주아 집안의 분위기였다. 북한사회에서 느꼈던 메스꺼움

 때문에 아버지와 심한 충돌을 빚고, 명준은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그곳의 생활 방식, 즉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그곳에서 기자 생활하며 또 다른 여인 은혜를 만나 사랑하나 역시 이데올로기의 질긴 끈은 그를 속박하고 만다.

 전쟁이 터지고 서울에서 은인의 아들이자 친구인 태식과 재회하나 그는 옛 애인 윤애와 이미 결혼한 사이였고

 명준은 애써 악마가 되는 僞惡으로 자신을 속임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낙동강 전투에서 부상당한 명준은 우연히 모스크바

 로 훌쩍 떠났던 은혜와 만나게 되고 좁은 동굴 속에서 그녀의 간호를 받으며 생의 마지막 사랑을 나누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거제에서 포로생활을 한 명준은 마침내 1953년 휴전헙정과 더불어 석방되는데 남과 북의 집요한 설득에

 도 불구하고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다. 그리고 인도로 가는 타고르 호에서 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들면서 비극적

 생을 스스로 마감한다.

 

    2) ‘廣場'과 ’密室‘의 이중성

 

   「광장」의 기본구조는 '이데올로기 '와 '사랑'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루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랑'보다는 '이데올로기 '를 택해서 월북하게 된다. 그런데 주인공 이명준은 대학시절 당시 사회주의자로 취급되기 싫어서인지 정치적인 것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을 일부러 하지 않고 있다. 월북하기 전 대학생이었던 이명준이 얼마나 남한사회의 '자유'에 부딪쳐 보았고 또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위해 노력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친구분(변선생) 댁에 몇 해 보내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현이 초판해설에서 문제 제기한 바 있다) 명준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삶을 보내고, 변선생의 자녀 태식과 영미와 함께 '자본주의'의 병폐를 조금은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 부족하지 않은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 얼마나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해 보았을까? 물론 당시의 상황에서는 두 이념의  와중에서 그것도 철학과 학생으로서 하나의 선택을 하지 못하고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일견 있을 법한 현상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전혀 행동화하지 못하는 이명준의 행위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 이념의 갈등이란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검증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모색으로 나타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명준의 월북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비록 그 앞에 S서에서의 구타사건이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명준은 평소 아버지에게 관심을 가진 적도 없고, 마르크스의 철학을 탐독한 바도 아니며 , 무산대중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 일도 전무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찰의 감시라는 것도, 당장에 그의 삶을 뿌리부터 파괴할 만큼 절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명준이 모든 것을 버리고 북행길을 택한 참된 동기는 무엇인가? 그 답은 북쪽에 대한 유치하고 막연한 환상 때문이다. 그래서 명준은 충동적으로 월북하게 된다. 유치하고 막연한 환상만을 안고 월북한 이명준이 북쪽 땅에서 정작 부딪친 것은 냉혹한 정치의 현실이었다. 그가 꿈꾸던 몽상의 낙원과는 정반대되는 동토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명준은 실망하고 좌절한다. 이명준은 보람 있게 청춘을 불태우고, 정말 삶다운 삶을 살기 위해 북한으로 갔지만 북한 사회도 그가 열망하던 사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간판만 다를 뿐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광장'은 아닌 것이다. 당만이 존재하고,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 협박과 명령만 존재하는 사회였다. 명준은 이런 사회의 허구성에서 깨어나 인간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된다. 북한이 그렇게 강조하던 '평등'은 다 같이 노예가 되는 '평등'일 따름이었다. 여기에서도 명준은 사회주의의 모순을 깨닫고 결국 최종적으로 조국을 버릴 것을 다짐한다. 명준이 그리도 바라던 보람된 삶은 남북한의 체제를 동시에 체험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체제에서도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명준은 지식인으로서 그 불화의 내용을 논리화 과정을 통해 인식하면서도 그 해소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그 시대의 희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명준이 죽음까지 불사하면서도 찾아 헤매던 '광장'은 어떤 곳일까?

보통명사로서의 '廣場'은 너른 마당, 여러 갈림길이 모이는 곳에 만드는 너른 마당이란 뜻으로 '密室'과 대응되는 개념이다. '밀실 '이 남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비밀의 방이라면 '광장'이란 공동체를 표상한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인간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場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를 또 다른 추상명사로 바꾸면 '自由 '와 平等'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이 둘을 동시에 갖고자 하였다. 하나는 남쪽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북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밀실 '은 남쪽에도 없었고 북쪽의 '광장'엔 기관총이 걸려 있었다. 6․ 25라는, 거대한 두 이념의 충돌에서 그 점이 여지없이 분명해졌다.

 명준이 남한에서 그나마 뜻이 통하던 정선생과의 대화에서 그의 시각에 비춰진 남한의 '광장'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저희 집 꽃병에 꽃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 놓구, 페이브먼트를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길 가던 사람이 그걸 알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갱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칼에 그를 해치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도둑놈한테서 몫을 타는 것이지요…. "(전집판 p.55)

 "…경제의 광장에는 도둑물건이 넘치고 있습니다. 모조리 도둑질한 물건. 안 놓겠다고 앙탈하는 말라빠진 손목을 도끼로 쳐 떼어버리고, 빼앗아온 감자 한 자루가 거기에 있습니다…. 문화의 광장 말입니까? 헛소리의 꽃이 만발합니다. 또 그곳에서는 아편 꽃 기르기가 한창입니다. 개처럼 욕정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주는 개인지도와 좀 대중적인 강습소와 이 두 가지 층이 있습니다. "(같은 책 p.56)

     "…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 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 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같은 책 p.57)

    한편 윌 북 후 남로당 거물 출신인 아버지 앞에서 명준은 남북한 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도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본놈들 밑에서 벼슬을 지내고 아버지 같은 애국자를 잡아 죽이던 놈들이 무슨 국장, 무슨 처장, 무슨 청장 자리에 앉아서 인민들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남조선 사회는 백귀야행 하는 도시 알 수 없는 난장판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섹스와 재즈와 그림 속의 미국 여배우의 젖가슴에서 허덕이지 않으면 , 재빨리 외국인을 친지로 삼아서 외국으로 내빼고 있습니다. […〕 남조선이라는 이상한, 참으로 이상한 풍토 속에서는 움직일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이런 풍토 속에서 성격적인 약점이 점점 커지더군요. 저는 새로운 풍토로 탈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월북했습니다.”(같은 책 p.116)

    “… 제가 월북해서 본건 대체 뭡니까? 이 무거운 공기. 어디서 이 공기가 이토록 무겁게 짓눌려 나옵니까? 인민군이라구요?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정권을 세운 기쁨으로 넘치는 웃음을 얼굴에 지닌 그런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바스티유를 부수던 날의 프랑스 인민처럼 셔츠를 찢어서 공화국 만세를 부르던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같은 책 p.115)

  "저는 월북한 이래 일반 소시민이나 노동자 농인들까지도 어떤 생활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무관심할 뿐입니다. 그들은 굿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끌려 다닙니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구호를 외칠 뿐입니다 . 북조선의 공산당원들은, 치사하고 비굴하고 게으른 개들입니다. "(같은 책 p.117~l18)


   '自由'와 '平等'은 각각별개가 아니고 동전의 앞 뒤 관계이지만,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 많은 갈등과 오해의 어려움이 뒤따랐음은 우리 현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자유'없이는 사람답게 살 수 없고, '평등'의 실현 없이 사람답게 살수는 없다. 남한에서는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빈부의 격차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평등'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북한에서는 '평등'을 강조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평등'의 의미가 올바로 적용될 수 있을까? 생산수단을 공유로 하는 사회제도를 실현하려는 사회주의 이념은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생산능률의 저하 등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북한사회에서는 '평등'이라는 단어로 무마시켜 버리려고 한다. '자유'와 '평등'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갈등을 주인공 이명준은 극복하고자 하지 않고 포기함으로써 문제제기에 멈추고 말았다. 아니,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한창 꿈 많은 20대의 젊은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저 유명한 1961년도 판 서문을 인용한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던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그는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가. 그는 어떻게 광장에서 패하고 밀실로 물러났는가. 나는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며 다만 그가 '열심히 살고 싶어 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가 풍문에 만족치 않고 늘 현장에 있으려고 한 태도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진 것이다 '(1961년도 정향사 판 서문에서)

 

   3)요나 콤플렉스

 

  가스통 바슬라르(Gaston Bachelard)는『공간의 시학』(空間의 詩學)에서 다락방이나 서재, 동굴과 같은 작고 어두운 공간, 즉 密室에 있을 때 인간이 편안함을 느끼는 본능을 '요나 콤플렉스'라 명명하였다. 우리가 식당이나 카페 같은 곳에 들어가서 입구 쪽 보다는 구석진 자리를 선호하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다. 요나가 누군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로서 신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풍랑을 만나 제비뽑기에 걸려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로 던져진 인물이다. 다행히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 3일간 갇혀 있다가 '회개'하고 뭍으로 살아 나온다.

   이명준은 '요나'와 비슷한 성격의 인물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각종 모임이나 파티 보다는 자기 '房', 혹은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사변에 잠기는 걸 좋아했다. 월북 후 이북에서의 생활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가 인민군으로 출전하여 낙동강 전투에서 발견한 동굴은 얼마나 절묘한가? 그 작은 공간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 은혜와 생의 마지막 사랑을 나눈다. 어쩌면 이명준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일는지 모른다.

'…누워서 보면, 일부러 가리기나한 듯, 동굴 아가리를 덮고 있는 여름풀이, 푸른 하늘을 바탕 삼아 바다풀처럼 너울너울 떠 있다. 접은 지름 3미터의 반달꼴 광장. 이명준과 은혜가 서로 가슴과 다리를 더듬고 얽으면서 살아 있음을 다짐하는 마지막 광장.'(전집판 p.164)

   그렇다 동굴은 그들에게 '密室'이면서 동시에 '廣場'인 것이다. 그 작고 내밀한 공간에서 그들은 '몸의 길 '을 통한 순수한 사랑을 한다. 명준이 중립국으로 가는 배에서 투신한 곳은 바다이다. 바다. 푸른 바다는 이명준에게 있어서 단순한 바다가 아니다. 그것은 원형상징으로서의 어머니의 자궁이며 그를 포근히 감싸주면서 자유로이 헤엄치게 하는 양수이다. 그의 죽음은 태고의 고향, 어머니 뱃속으로의 回歸인 것이며 동시에 잃어버린 '사랑' 을 찾고 그를 속박하던 '이데올로기 '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요나 콤플렉스의 완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가가 여러 차례 개작을 하면서 이명준의 자살에 합리성과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한 것도 결국 어머니이자 바다인 은혜와 딸에 대한 사랑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이명준은 작가가 1973년도 판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상상의 공방에서 제작되어 삶의 바다 속으로 내려 보낸 잠수부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암초에 걸려 다시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연인이자 어머니이며 자연인 우주의 子宮 속으로 돌아간 것이다. (부디 그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기를…)

 

   4. 나오는 말

 

   소설의 도입 부분부터 줄곧 등장하는 두 마리 흰 갈매기는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짧은 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 사랑의 시간들, 그를 사랑했던, 그가 사랑했던 두 여인, 윤애와 은혜일 수도 있고, 작품의 말미에 가서는 은혜와 태어나지도 않은 그의 어린 딸일 수도 있다.

 "돌아서서 마스트를 올려다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제 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무덤을 이기고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전집판 p. 188)

 다소 감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한국 소설사에서 이보다 애틋한 결말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명준의 입장이 되면 배의 난간을 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어떻게 하겠는가.

   문학이라는 것은 현실의 행동과 이상적으로 설정된 기준과의 사이에 생기는 편차 위에 성립하는 예술이다. 1950년 전후라는 시점에서 주인공이 어떤 결정적 선택을 하는데 좌절하고 절망하였다는 설정은 그 시대가 안고 있던 일종의 한계 - 정치적이든, 이념적이든 간에 -였다고 여겨진다.「廣場」이 발표되고 나서 정확히 42년이 지난(1960년 10월 발표) 오늘에 와서도 당시 주인공 이명준이 처했던 남북의 상황이 그때와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내가「광장」의 구상을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해의 4.19혁명으로 형성된 사회적 분위기와 내가 1945년에서 1950년까지 북한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50년에 월남할 때 고교생이었던 내가 북한에서 겪을 수 있었던 생활은 그만한 것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나는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인 생활의 경험과 1960년까지 10년 동안의 생각이 어우러져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결과가 「광장」이다. “(산문『「廣場」의 주인공 이명준에 대한 생각』에서)

 이 분단의 상황은 우리들의 건강한 정치적 자산을 잠식하고 변형시키며 정치적 건강을 병들게 하였다. 또한 서로 다른 세대가 40여 년이라는 시간의 편차를 뛰어넘으면서도 이 소설을 읽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충격 '과 '감동'을 받고,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군림하고 있는 현실도 - 작가가 들으면 기분 나쁘시겠지만 - 이 상황이 한 몫 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예술성과 생명력, 그 놀라운 발상의 대담성, 선구자적 작가 정신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끝-

 

      ※참고문헌 

           1.광장/구운몽 (문학과 지성사 , 2001년 6월11일)

           2.길에 관한 명상(청하, 1989년 3월25일)

           3.작가세계(1990년 봄호, 1990년 2월25일)

           4.하늘의 다리(고려원, 1988년 7월30일) 

    에궁~, 울 선생님의 스무 살 시절의 모습…^^ 

               

                                    울 선생님 현재 모습~, 몇  년전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엄서요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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