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4.22 03:08
들꽃
이름을 가진 것이
이름 없는 것이 되어
이름 없어야 할 것이
이름을 가진 것이 되어
길가에 나와 앉았다.
꼭 살아야 할 까닭도
목숨에 딸린 애련 같은 거 하나 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물들이다가
바람에 살을 부비다가
외롭다가
잠시 이승에 댕겼다가 꺼진
반딧불처럼
고개를 떨군다.
뉘엿뉘엿 지는 세월 속으로만.
―이근배(1940~ )
날로 풀이 무성합니다. 을씨년스럽던 공터, 길가에 싹 내민 것들이 차차 제 각각의 이름대로 자라 나갑니다. 새들이 제 이름을 부르면서 운다더니 풀들도 그러합니다. 애초에 이름 붙이기를 그런 궁리로써 한 것이겠지만 별로 불러볼 일도 없는 한해살이 풀들입니다. 사람에게는 쓸모가 덜하여 가꾸지 않는 것들을 모잡아 '잡풀'이라고 합니다만 그것들의 생명력은 거의 불가사의 수준입니다. 바람에 몰려 쓰러지는 그것들, 다시 일어서는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네 살림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는 그 풀들과 다름없습니다. 어울려 삽니다. 힘겨우면 '하늘을 바라보다가 물들이다가 바람에 살을
부비면서 하루하루 살아나갑니다. 평시에는 이름이 없습니다만 나라에 궂은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호명(呼名)되어 맨 앞에 서야 하는 신세입니다.
민들레꽃들이 한창입니다. 돌단풍꽃이 한창입니다. 이름 모를 꽃도 한창입니다.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꽃 시절은 있습니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힘도 있습니다. 내년에도 또 '길가에 나와 앉아' 꽃 필 겁니다.
민들레꽃들이 한창입니다. 돌단풍꽃이 한창입니다. 이름 모를 꽃도 한창입니다.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꽃 시절은 있습니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힘도 있습니다. 내년에도 또 '길가에 나와 앉아' 꽃 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