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국어 바루기

햅쌀과 누룽지의 비밀

수로보니게 여인 2017. 7. 12. 15:30
 

놀라운우리말

맛의 말, 말의 맛

햅쌀과 누룽지의 비밀




누구나 경험해 본 가장 쉽고도 어려운 시험이 있으니 바로 받아쓰기이다.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접하게 되는 시험인데 이 시험은 ‘밑져야 본전’이 아니라 잘해야 본전이다.

그저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글자로는 어떻게 쓰였는가를 확인해 그대로 써야지만 세 자리 숫자 밑에 두 줄이 그어진 점수를 받는다. 그렇지 않고 잘못 써서 두 자릿수의 점수를 받으면 구박을 받기 십상이다. 어쩌면 이 시험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선생님의 머릿속에 있는 단어를 그대로 그려 내는 시험이지 받아쓰기는 아니다.

햅쌀? 햇쌀이 아니고? 햇사과, 햇곡식인데 왜 쌀만 햅쌀?
누룽지가 맞나? 눌은밥을 생각해 보면 ‘눌은지’라고 써야 할 것도 같은데?

여기 받아쓰기 문제 둘이 있다. 하나는 ‘쌀은 쌀이되 그 해에 수확한 쌀’을 뜻하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바닥에 눌러 붙은 밥’을 뜻하는 단어이다. 선생님께서 불러 주신 대로 ‘햅쌀’이라고 쓰면 될 텐데 뭔가 의심을 품은 아이 하나가 고민을 한다. “햅쌀? 햇쌀이 아니고? 햇사과, 햇곡식인데 왜 쌀만 햅쌀?” 그다음 문제도 역시 의심스럽다. “누룽지가 맞나? 눌은밥을 생각해 보면 ‘눌은지’라고 써야 할 것도 같은데?” 그저 눈에 익힌 대로 그려 내면 될 것을 공연히 깊게 생각하다 혼란에 빠진다.


 
 
말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쌀’은 방언 간의 변이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전국 어디를 가나 ‘쌀’일 뿐 쌀을 가리키는 다른 말은 없다. 역사적으로도 쌀을 지시하는 다른 말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옛 문헌을 보면 ‘쌀’은 ‘쌀’로 표기되어 있다. 오늘날 된소리를 나타내기 위해 같은 자음을 겹쳐 쓰기도 하고, 받침에는 서로 다른 자음을 겹쳐 쓰기도 하지만 글자의 첫머리에는 자음을 겹쳐 쓰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 ’과 같은 표기를 보면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일단 표기 그대로 읽어 보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ㅂ’은 입술을 붙였다가 떼면서 내는 소리이니 ‘ㅄ’는 입술을 붙였다 떼면서 ‘ㅅ’ 소리를 내면 된다. ‘브스’를 발음하면서 앞의 모음 ‘ㅡ’가 없이 연속적으로 나는 소리라 생각하면 된다. 오늘날에는 없는 소리이지만 굳이 못 낼 소리도 아니다. 표기도 이렇게 돼 있고, 발음도 가능하니 ‘쌀’의 ‘ㅂ’과 ‘ㅅ’은 모두 발음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말소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ㅄ’는 모두 소리가 났을 것이라고 본다. 비록 오늘날에는 된소리로 바뀌었지만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ㅄ, ㅲ, ㅳ’ 등 ‘ㅂ’이 앞에 붙은 이러한 겹자음들은 각각의 소리가 모두 발음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를 입증할 다른 방법도 있다. 11세기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손목(孫穆)은 고려 말에 관심이 많아 353개의 단어를 《계림유사 鷄林類事》란 책에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 쌀도 포함이 되어 있는데 묘하게도 ‘쌀’을 ‘菩薩(보살)’로 적어 놓았다. 당시에는 글자가 한자밖에 없으니 한자로 기록하는 것은 당연한데 한 글자가 아닌 두 글자로 적은 것이 이상하다. ‘쌀’은 예나 지금이나 한 글자로 적을 수 있는 소리인데 두 글자로 적은 것은 ‘쌀’의 당시 발음에 대해 알려 준다. ‘ㅂ’과 ‘ㅅ’의 소리를 모두 들은 손목이 어쩔 수 없이 한자 두 글자로 적어 놓은 것이다.


 
 
쌀’에서 ‘ㅂ’과 ‘ㅅ’이 모두 소리가 난 증거는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알갱이가 작고 노란색을 띠는 곡식의 이름인 ‘조’는 뒤에 쌀을 붙여서 부르기도 하는데 이때는 ‘조쌀’이 아닌 ‘좁쌀’이 된다. ‘조’와 ‘쌀’이 합쳐질 때 난데없이 ‘ㅂ’이 끼어들 수는 없다. 이는 결국 ‘쌀’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쌀’의 ‘ㅂ’과 ‘ㅅ’이 모두 발음되던 시기에 ‘조’와 결합되면 ‘쌀’의 ‘ㅂ’ 소리가 ‘조’의 끝소리로 발음된다. ‘쌀’의 ‘ㅂ’이 사라지고 ‘쌀’로 바뀐 뒤에도 이전에 만들어진 ‘좁쌀’은 그대로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찹쌀, 맵쌀, 입쌀’ 등도 ‘쌀’이던 시절에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쌀’의 발음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햅쌀’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햅쌀’ 역시 ‘쌀’이 ‘쌀’이던 시기에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단어를 다시 만든다면 ‘햇쌀’이 되어야 하겠지만 과거의 말이 화석처럼 오늘날의 말 속에 남아 있어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쌀과 관련된 단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볍씨’의 ‘씨’, ‘입때, 접때’의 ‘때’ 등도 다 마찬가지다. 새로운 단어가 수없이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몇백 년 전에 만들어진 단어가 그대로 쓰이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누룽지’는 ‘눌은밥’ 때문에 좀 헷갈린다. 가마솥에 눌어붙은 밥이 누룽지이고, 그것에 물을 부어 더 끓여 낸 것이 눌은밥이니 두 단어의 기원은 같음을 알 수 있다. ‘눋다’가 ‘눌어, 눌으니’와 같이 바뀌니 ‘눌은밥’은 말 그대로 ‘눌은 밥’이다. 이를 감안하면 ‘누룽지’는 ‘눌은 지’일 텐데 ‘ㄹ’도 내려 쓰고, 두 번째 모음도 ‘ㅡ’가 아닌 ‘ㅜ’이고, 마지막의 ‘지’는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옛 문헌이든 방언이든 뒤져서 답을 찾아야 한다.

‘누룽지’의 충청도 사투리 ‘누룽갱이’가 이 문제를 풀 열쇠를 제공한다. ‘누룽갱이’는 ‘누룽기’와 ‘앙이’로 분해될 수 있다. ‘누룽기’는 본래 ‘눌은 기’였을 것이다. ‘눌은 기’가 ‘누룬기’가 ‘누룽기’가 되는 이유는 발음을 해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기’의 정체인데 안타깝게도 다른 예를 찾기 어렵다. 그래도 바닥에 달라붙은 무엇 정도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누룽기’에서 ‘기’는 나중에 ‘지’로 바뀌어 최종적으로 ‘누룽지’가 된다. ‘기름’이 ‘지름’이 되는 것과 같은 변화다.


 

‘누룽지’는 ‘깜밥’, ‘소꼴기’, ‘바깡’, ‘밥구잘’, ‘까마 티’ 등으로 매우 다양한 방언형이 발견된다. ‘깜밥’은 ‘까만 밥’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고, ‘소꼴기’는 ‘솥 긁이’ 정도로 풀이된다. 술을 빚고 남은 지게미를 ‘술강’이라고도 했으니 ‘바깡’은 아마도 ‘밥강’이었을 것이다. ‘밥구잘’은 ‘밥 과줄’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과줄’은 밀가루를 기름과 꿀에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일종의 과자이니 ‘밥 과줄’이란 말이 나올 수 있다. ‘까마티’는 ‘가마티’, ‘가마치’로도 나타나는데 ‘가마’는 말 그대로 ‘가마솥’이다. 결국 ‘누룽지’의 ‘지’와 함께 ‘티’가 무엇일까는 숙제로 남는다.

‘햅쌀’과 ‘누룽지’는 말 그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100점을 받을 수 있다. 오히려 뜻을 생각하고 주변의 다른 단어를 생각하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금 헷갈리더라도 그 세계에 빠져들어 가는 것도 괜찮다. “그냥 외워!”가 아니라 “아하, 그렇구나.”라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면 다시는 헷갈리지 않는다. 그저 무심히 쓰는 단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볍씨를 뿌려 모를 키우고, 모를 심어 벼를 수확하고, 벼를 찧어 쌀을 얻고, 쌀을 안쳐 밥을 짓고, 밥을 푸고 난 뒤 누룽지를 긁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영어로는 그저 ‘라이스(rice)’라고 한 단어로 일컫는 것을 우리는 왜 이리도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이 말들의 기원과 쓰임을 낱낱이 파헤치면 햅쌀로 지은 밥맛은 더 깊어지고, 누룽지 맛은 더 고소해질 것이다.



글_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 글은 필자가 2016년에 펴낸 우리 ≪음식의 언어≫(어크로스)에서 일부를 추려 내어 다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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