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익상, 「첫여름」 중에서
안개가 지쳐들면서 집을 둘러싼 풍경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새벽녘, 산 능선을 넘어 온 뿌연 기운은 이웃한 박 씨네 집마저 삼켜버렸다. 담장가로 조팝꽃이 한창이었던 박 씨네 양철지붕이 어느덧 사라지는 모습은, 호수를 여럿 낀 소도시에 살고 있는 내가 보기에도 꿈꾸는 현상처럼 보였다. 이 집에 사는 이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머물러 있던 키 큰 소나무도, 그 무렵 뿌연 안개가 내는 촉촉함에 제 스스로 젖어갔다.
조팝나무가 안개에 묻힐 때 얼핏 든 생각이지만, 6학년 상급 과정에 접어든 계집아이는 여러 차례 묻곤 했다.
“얘가 무슨 꽃이어요?”
계집아이와 머슴애를 실은 교육청 통학 버스가 산모롱이를 돌 무렵 안개는 사위어 갔다. 박 씨 집 조팝꽃이 다시 세상에 드러났고 소나무도 제 모습을 뚜렷이 하며 하루는 그렇게 열렸다. 아이들을 보낸 할미는 이웃한 박 씨 논으로 품을 내러 갈 준비를 서둘렀다. 하루 삯이 이만 팔천 원이 채 안 되었는데도 대체로 만족한 낯을 지은 산골 할미였다.
5학년 아이와 6학년 아이는 품삯 이만 팔천 원에 행복해했던 할미를 두고 이종사촌 간이었다. 어미가 일찍 개가하여 남긴 자식을 외할미가 거두다가, 올봄 도회 아들이 맡긴 친손녀를 또 품에 안은 것이었다.
계집아이에게 산골 생활은 낯선 것이었지만 그럭저럭 모내기철을 넘기고 있었다.
할미는 감자를 쪄내왔다.
지금, 밥알이 듬성듬성 붙은 감자가 양푼에 담겨 있다. 음식 냄새를 맡고 파리 서너 마리가 달려드는 것도 용납할 만큼 밤공기가 상쾌하다. 파리채를 든 머슴애가 정지에 잇댄 누런 회벽을 향해 내리쳤다. 깜짝 놀라는 여자아이 뒤 마당가로 날타리가 날고 있다. 저녁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이슬이 내리고 있다. 안개와는 또 다른 촉촉함이다. 계집아이의 첫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