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조용헌 살롱

누에를 치지 마라

수로보니게 여인 2009. 7. 28. 00:43

 

[조용헌 살롱] 누에를 치지 마라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9.07.26 21:57 / 수정 : 2009.07.26 23:30


충남 논산의 노성면에 있는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의 고택은 6·25 때에 북한 인민군의 중대본부로 사용되었다. 고택이 넓었기 때문이다. 미군 쪽에서는 인민군의 중대본부인 명재 고택을 폭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폭격기의 조종사는 미국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인 박씨는 마침 그 미국인 조종사와 친분이 있었는데, '명재 고택을 절대 폭격하면 안 된다. 그 집안은 한국의 유명한 양반 집안이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집안의 고택이다. 그런 집을 폭격하면 당신이 죄를 짓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박씨의 강력한 설득에 밀려서 그 조종사는 명재 고택을 피해서, 다른 곳에 폭탄을 투하하고 말았다.

박씨는 논산의 노성면에 살던 사람으로서,
선대부터 명재 집안의 덕을 보고 살았던 집안의 후손이었다고 전해진다. 누대의 적선이 6·25라는 전쟁 통에도 그 빛을 발했던 것이다. 만약 평소에 악감정이 있었더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곧바로 보복을 하게 된다. 난리가 나면 대부분 평소에 쌓여 있던 개인감정을 정리하기 마련이다.

명재 고택은 사랑채에도 담장이 없는 집으로 유명하다. 외부인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곧바로 사랑채 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이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심중하다. 담장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명재 후손들은 감출 것이 없는 공적(公的)인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명재는 살아생전에도 노성면 일대의 윤씨 집안사람들에게
"윤씨들은 절대로 누에를 치지 마라!"고 엄명을 내린 적이 있다. 누에를 치는 양잠업은 당시 고소득 업종이었는데, 부자 양반인 윤씨들이 양잠에 진출하게 되면,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살 것이 없어진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서민들 먹을 것을 빼앗는 것은 양반이 해서는 아니 될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18세기 이래로 명재 후손들은 양잠을 일절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요즘에 문제가 되는 것이 지방
소도시까지 진출하고 있는 '기업형 수퍼'이다. 한국의 구멍가게 주인들 전체가 생존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이 인심을 잃게 된다. 기업도 인심을 잃으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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