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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 또 하나의 창작 >>

수로보니게 여인 2009. 7. 25. 14:49

 

 

제목 07/ 24(금) [성공 글쓰기]                                                            작성자 성공시대 관리자


<< 번역 - 또 하나의 창작 >>


"번역은 또 하나의 글쓰기"


먼저 번역의 역사를 추적해보니까요.

9세기 무렵. 번역가 계급이 존재했었답니다.

번역이란 직업이 1천년도 넘은 역사를 지닌 셈입니다.

당시 번역가는 일종의 특수계급이었고, 따라서 일체의 노역을 면제받았답니다.

특이한 건 머리를 빡빡 밀었다고 하고, 문신을 하고 다녔다고 해요.

왠지 글쟁이 같은 느낌은 전혀 없죠.


먼저 번역에 대한 제 경험 하나를 털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번역의 문제를 심각하게 느낀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최고의 책을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꼽습니다.

금각사는 일본 교토에 있는 절인데요. 연못 위에 지은 아름다운 3층 누각입니다.

1950년 한 어린 중이 불을 질러 온 일본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절은 전소됐습니다.

소설은 그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유는 열등의식이나 자기혐오 등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피의자 진술 중에 '아름다움에 대한 질투'라는 게 있었답니다.

작가는 그 말에 영감을 얻어, 절대 미의 추구와 파멸의 충동을 그린 소설을 쓴 거죠.

제가 읽은 번역본은 1983년도 판인데요. 김후란 선생이 번역한 것입니다.

지금 문학의 집 이사장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다섯 번 정도 완독했고, 부분적으로 읽은 것은 셀 수 없습니다.

그 책엔 이상한 마력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가끔 금각사가 저를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책을 친구가 빌려가더니 소식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후에 나온 번역본을 샀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옛날에 읽던 느낌이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대체 왜 그럴까 하고 의문을 갖던 참에, 도서관에 가서 원래 번역본을 봤습니다.

그랬더니 기묘하게도 또다시 옛날 느낌이 되살아나는 겁니다.

저도 놀랬습니다. 알고 보니 번역의 문제였던 거죠.

 

김후란 선생은 시인인데요, 한마디로 한편의 시처럼 번역을 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번역본은 그 맛을 살리지 못 한 거죠. 책의 인상적인 대목 두 개를 말씀드릴게요.
주인공, 즉 어린 중은 아름다운 옆집 처녀 우이코를 맘에 둡니다.
어느 이른 아침 출근길에 그녀를 엿보다 들켰고, 모멸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그 처녀가 그 일을 자기 부모한테 일렀어요. 참 수치스러웠죠.
이 때 저주를 합니다. [증인만 없어지면 내 수치도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내가 태양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있기 위해선 세계가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은 금각사의 최고 문장입니다. 어린 중이 방화를 정당화시키는 대목이죠.
[인간처럼 필멸한 것은 근절시킬 수 없지만, 금각사처럼 불멸한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인간은 언젠가 죽습니다. 즉 일회적이죠.
그런데 사실 인간은 자연의 일부고, 자연은 영원합니다.
사람 한 명이 죽는다고 해서 인간을 근절시킬 순 없습니다.
반면에 아름다운 건축물, 예컨대 금각사 같은 절은 영원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언젠가는 사라지죠.
따라서 [인간처럼 필멸한 것은 근절시킬 수 없지만 금각사처럼 불멸한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라는 명제가 가능합니다.
동자승은 마침내 [금각사를 불태움으로써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줄여버리겠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누구나 절대미를 추구하지만, 동시에 파멸의 충동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내면을 잘 드러낸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묘하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 김후란 선생의 번역본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좋은 번역은 딱 하나 뿐이다“ 번역은 외국어 실력만으로 안 됩니다.
 
"번역은 제2의 창작"

언어권의 문화나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본의 아니게 오류가 생깁니다.
제가 사례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In married life, three is company, and two is none] 이게 무슨 뜻일까요.
결혼생활에 있어, 세 명은 동료고, 두 명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한 번역가는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결혼생활은 셋, 즉 자식이 하나 생기면 그저 동료, 즉 한 솥 밥을 먹는 동반자일 뿐이고,
둘이면 갈라서게 된다]라고요. 그런데 그 뜻이 아니랍니다.
실제론 [결혼생활은 셋이면 잘 유지되는데, 둘이면 그 결혼이 깨진다.]이구요.
셋이라 함은, 자식이 아니라 애인을 말합니다.
즉 적당히 외도를 해야 결혼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랍니다.
이건, 지금 이야기가 아니고, 과거 빅토리아 시대의 세태를 꼬집은 글입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입니다. 번역을 하다보면 글쓰기 실력이 굉장히 늘죠.
번역의 대가인 이윤기나 안정효 선생은 소설가이기도 하구요.
젊은 소설가 중엔 김연수 작가가 그렇고요.
유명한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국 소설가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옮기면서
문장 수업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영어를 잘 하시는 분들은 번역에 취미를 붙이면서 글쓰기 실력을 닦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런 이유 때문에 번역 오류는 불가피하기도 합니다.


"세기의 번역 실수는"

1877년, 이탈리아 밀라노 천문대장 조바니 스키아파레리는 화성을
망원경으로 관측한 뒤 지도를 그렸답니다.
그런데 화성 표면에 있는 가느다란 직선을 보고, 수로, 물길이라고 썼답니다.
자연적인 물길, 즉 영어로는 channels인데요,
그걸 번역가가 canal 즉 인공수로라고 외국에 번역했답니다.
그 때문에 화성에 외계인이 살고 있다는 근거 없는 사실이 급속히 퍼졌답니다.
이 이야긴 이희재씨가 쓴 <번역의 탄생>에 나옵니다.
번역관련 책도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번역 메커니즘을 알게 됨으로써 독서를 하는데 참고가 됩니다. 글쓰기에도 도움 되고요.
책을 보니 번역의 기술 중에 부사를 적절히 쓰라는 내용이 있더군요.
이건 글쓰기에서도 필요한데요.
이를테면, [뱀이 혀를 내밀었다]란 문장이 있을 경우,
부사를 넣어 [날름날름 내밀었다]로 하면 좋다는 거죠.
제가 문장을 말해볼 테니 부사를 넣어보세요.
[눈물이 맺혔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뭘 잘했다고 눈물을 짜니] [뭘 잘했다고 눈물을 꼭꼭 짜니],
[냄새를 맡았다] [냄새를 벌름벌름 맡았다],
[햇볕아래서 졸았다] [[햇볕아래서 자울자울 졸았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기 때문에 글쓰기의 미덕과 악덕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번역은 읽는 이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지만,
나쁜 번역은 원작까지 훼손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거죠.
가끔 보면 무슨 말인지 아무리 읽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책은 번역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인문, 과학을 막론하고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1차적으로 번역의 수준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글쓰기 관점에도 이것은 큰 시사점을 던집니다. 즉, 쉽게, 맛깔스럽게 써야 한다는 거지요.


[첨삭지도]
영어는 단수와 복수를 민감하게 구분하는데, 우리는 굳이 안 밝혀줘도 됩니다.
즉, [요즘 손님이 너무 없다] 하면 되지 [손님들이 너무 없다]고 안 하죠.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네]라고 하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네]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 주 주제]
인터뷰를 통한 글쓰기

[숙제]
꿈이란 주제로 나와 인터뷰하기
예) 혹시 어릴적 꿈이 무엇이었나요



** 번역 참고 문헌
[번역의 탄생], [번역 오디세이], [번역은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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