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ЙaрруÐaуο/´˝˚³οοㅎЙㅍЙ 文學

백호(白湖) 임제(林悌)

수로보니게 여인 2009. 5. 23. 00:52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명종 4)~1587(선조 20).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사대부 문학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6세기 말의 선조 시대에 주로 활약하며, 천재적인 재능과 개성적인 시풍으로 당대의 시단을 풍미한 시인이다.

동시에 그는 날카로운 비판정신을 담은 여러 편의 우언소설로 당대의 독서계와 후대 소설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김시습의 『금오신화』 이래 소설사의 계맥을 잇는 선구적인 소설가로 꼽힌다. 또한 탁월한 문재(文才)와 함께 호방한 기개와 풍류의 정신을 아울러 지니고, 시속을 조롱하는 희학(戱謔)적 언행을 마다 않던 그의 개성적인 인물과 사상은 흥미롭게 윤색한 수많은 일화로 유전되면서 그의 시문들과 함께 조선 사대부들의 지성사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여기서는 그의 생애와 독특한 성품이 시와 소설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살펴보며, 임제 문학의 문학사적 가치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백호[白湖]林悌]선생은 조선조 명종ㅡ선조 때의 문인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이며. 아버지는 충청도 병마절도사 전라도 수군절도사 등 5도절도사를 지낸 진(晉)이다. 백호 임제 선생의 아버지가 평안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 재임 중(1580년) 지은 시

활 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옹성변에 통개 베고 누었으니

보완다 보괴라 소리에 잠못들어 하노라

이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한산섬 달 밝은 밤에”를 연상케 하거니와 그보다 한 시대를 앞서 쓰여 졌다. 김종서 장군의 “삭풍은 나무 끝에서 불고”와 더불어 조선조 무장 삼절에 오른 유명한 시로써 해동가요에 수록되어 있으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무장의 애국충정이 깊게 새겨져 있다.

백호 선생은, 당시 문과 급제 후 승문원 정자를 제수 받았으나 문정황후의 비평으로 소윤파의 미움을 받아 삭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후 복직을 단념하고 회진에서 은거한 중백부 풍암공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6세에서 16세 까지 외가에서 김흠 이라는 스승에게서 수학했다.

1577년(선조 10년) 알성문과 급제 후 인사차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11월에 풍랑이 거친 바다를 사공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건너가 4개월 동안 제주에 머무르며 기행문 ‘남명소승(지리, 풍속, 언어, 소산물, 국방 등 제주의 작은 역사)’을 써서 남겼다.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탓에 벼슬은 평안도사 북도평사 등 변방 외직을 돌다가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대곡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항상 퉁소와 보검을 차고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백두에서 한라 까지 명산대천을 주유하며 나라 사랑의 드높은 기상을 시로 풀어냈다.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어느 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구나.

라고 읊은 그는 개인적인 정서에만 매달리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나라의 자주성 회복에 뿌리내리고 있었고 활활 타오르는 시혼은 옛 고구려 땅을 되찾고 강대한 자주국가로의 비원 앞에서 더욱 불꽃을 튀겼다. 당시의 학자·문인인 이이·허균·양사언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文才)를 높게 평하였으며 이항복, 신흠 등은 그를 시단의 맹주로 받들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백호는 호방한 기상으로 얽매이는 데가 없었다고 평했다.

대곡 성운은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시와 학문과 거문고를 함께하며 각처에서 학문을 배우러온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등 많은 선비 학자들에게 성리학과 학문을 가르친 큰 선비였다. 임제는 20세에 속리산으로 대곡 성운 선생을 찾아가 중용을 800독 하는 등, 학문을 배우며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속리산을 하산하며 ‘도불원인인원도 산비리속속리산(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理山) -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는데 속세가 산을 떠나더라’ 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유언에서 ‘사해제국(四海諸國)오랑캐들이 다 스스로를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 조선만 자립하지 못하여 제국이 못 되었다. 이런 나라에서 살다 가는데 그 죽음이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느냐, 곡하지 말라’ 는 유명한 임종시 ‘물곡사(勿哭詞)’를 남겼다 ‘물곡사(勿哭詞)’는 성호이익 선생의 성호사설과 대동소학 선행 편에 수록되어 후학들에 교재가 되었다.

백호 임제 선생은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 받으면서 전국을 누비다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하는 이들에게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 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기생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700여수가 넘는 한시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가 제일 많다. 묘향산에서 서산대사 휴정을 만나 지은 시 등,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 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 등 한문 소설도 남겼다.

백호 임제 선생은 5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5형제 모두가 당대의 이름난 시인이며 학자였다. 특히 어려서 어머니를 여윈 막내 동생 탁(㤞)을 - 호는 창랑정(滄浪亭), 영산포에 있었던 정자 창랑정 과 죽오당의 주인 - 몹시 사랑 하여 동생을 그리는 여러 편에 시를 남겼는데 그중 한편을 소개 한다.


창랑곡(滄浪曲)

창랑의 어옹 창랑의 노래

창강의 연월 속에 낚시대 하나

어옹 혼자 기러기와 모래사장에 잠이 드니

갈대 잎 소소히 밤서리만 하얗더라

새벽바람에 저자로 나가 고기팔고 돌아와서

술집에 취했어라 강 하늘 벌써 석양일래

부자 생활의 꿈 나는 원치 않고

그대 따라 창랑곡 을 함께 부르고 싶어라.


2006년 후손들이 친필과 유필 시문 등을 모아 ‘백호선생 필적집’과 시집 ‘백호임제선생 생애와 문학’ 을 출간하였다

□ 참고자료

백호 필적집, 백호세승 문집, 중앙일보 기획기사 ‘시가 있는 국토기행’, 백호문학 연구논문, 등 에서 발췌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의 친필시

元師臺 在摩天嶺

立馬摩天嶺 雲霞趁曉淸

臺存元師號 客償壯遊情

萬里碧波外 一輪紅日生

鯨鯢敢驕橫 長嘯氣難平

원수대(元帥臺)

마천령 고갯마루 말을 세우니

새벽노을 바야흐로 선명하구나

원수대(元帥臺) 이름 지금까지 남아 있고나그네 장한 유정을 감상하네

푸른 물결 수만리 밖에는

붉은 해가 바퀴같이 솟아오르네

고래들아 감히 설치지 마라

휘파람 길게 불어도 더욱 벅차네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의 친필시

高唐道中

大風大雪高唐路 一劍一琴千里人僮寒馬病却無賴 嘯志歌懷如有神鴉啼喬樹暮煙冷 犬哭孤村民戶貧悠悠忽起故園思 錦水梅花南國春

고당(高唐)길에서

고당으로 가는 길에 큰 바람에 많은 눈 몰아치는데

칼 한 자루 거문고 하나로 천리길을 나섰네.

종은 추워 떨고 말마저 병들어 의지할 데 없건만

휘파람으로 회포 노래하니 신명이 절로 나네.

높은 나무 위 까마귀울고 저녁연기 싸늘하게 오르고

개 짓는 외딴 마을에는 가난한 민가뿐이구나.

유유하는데 갑자기 고향이 생각나니

금강(錦江)가에 매화가 피어 남쪽에는 봄이겠지.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의 친필시

楚山曲 井邑

楚山何處朝陽臺 巫峽寒波日夜怨

曉月雲深篁竹叢 斜陽雨濕臙脂院

초산곡(楚山曲)

초산(楚山)이라 어느 곳에 양대(陽臺)가 있다더냐?

무협(巫峽)의 찬 물결은 밤낮으로 원한인가.

새벽달 대숲 속에 구름 잠기고

지는 해 연지원(臙脂院)은 비에 젖누나.


秋夜宿高亭

朔風吹怒覺亭高 倒海흔山氣勢豪

夢作片舟五胡客 浙江秋雨夜聞潮

****************************************************

가을밤 높은 정자에 자며...

삭풍이 노하여 부니 정자가 높음을 알겠도다

바다를 꺼꾸러 뜨리고 산을 흔드니 기세 호기롭구나

지난밤 편주를 타고 오호의 객이 되었는데

절강에 가을비 내리는 밤에 물소리 들리는구나.

金河詠秋虹

自笑雄心盖八垠 早수書劍學從軍

西風吹過天山雨 萬丈晴蛇裁暮雲

*********************************************

금하에서 가을무지개를 읊다.

스스로 웃으니 웅혼한 마음이 세상을 덮는다.

일찍이 책과 검으로 종군을 배웠지

서풍이 불어 지나가니 천산에 비내리고

만장의 맑은 뱀은 저녁 구름을 자른다.

月出下大虎

夜色蒼茫太白高 滿天寒露濕弓刀

催鞭不避當前虎 自笑書生膽氣豪

********************************************

밤 빛은 푸르고 아득하여 태백성은 높고

하늘에 가득찬 찬이슬은 활과 칼을 적시네

채찍을 재촉타 만난 호랑이를 피하지 않으니

서생의 담기에 스스로 웃는다.

舟中卽事

一曲歌橫北斗星 百年愁與酒兼醒

若爲更把桓伊笛 明月共登江上亭

*************************************

한곡조 노래는 북두성을 가로지르고

백년근심은 술을 깨우는 구나

어쩌자고 또다시 피리를 잡는고

밝은 달과 함께 강위 정자에 오른다. 

喜慶樓

樓鍾報淸曉 山雨送微凉

肺病猶耽酒 身閑不計程

*************************************

누각의 종은 새벽을 고하고

산 비는 서늘한 기운을 보내는는구나

폐병에 오히려 술을 탐하고

몸은 한가로와 갈길을 따지지 않네

轅門睡罷偶成

世間癡 天下拙

身不滿七尺 射不突一札

壯心直壓千熊罷 大笑高歌靑海月

***********************************************

세간이 어리석어 천하에 쓸모가 없구나

몸은 칠척이 못되고 활은 종이 한 장 못 뚫지만

담대한 마음은 몇 천의 곰을 짓누른다

푸른바다 위의 달을 향해 크게 웃고 노래하노라

莫 怪 隆 冬 贈 扇 杖(막괴융동증선장)

爾 今 年 少 豈 能 知(이금년소개능지)

相 思 半 夜 胸 生 火(상사반야흉생화)

獨 勝 炎 蒸 六 月 時 (독승염증유월시)

한겨울에 부채준다 하여 괴상하게 생각마라.

너는 나이 어려 아직 모르리라 마는,

상사병으로 한밤중에 가슴에서 불이 날때면,

유월 무더위에 비할 바 아니니라.

위의 시는 백호선생이 어린 기녀에게 한 겨울에 부채를 하나 선물하면서 그 부채에 적어준 한시라고 전해 온다. 기발한 시상과 표현이 시 한편에 도도히 넘쳐 흐르는 듯 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