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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활동에의 참여와 태도/ 만세전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14. 09:02

문학 활동에의 참여와 태도/ 만세전 

 

 문학작품 속에는 다양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문학작품을 읽는 우리들은 직접 경험의 시간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어떤 작품을 읽고 그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문학 활동을 통한 간접경험이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문학 활동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세계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기름으로써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간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보다 넓고 깊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염상섭 (한국 소설가)  [廉想涉]

                     제목 : 염상섭 동상
                     출처 :  경향포토뱅크

             설명 : 염상섭 동상

             관련항목 : 염상섭     

 

만세전(萬歲前)

원제: <묘지(墓地)>

                                                        염상섭

줄거리

 조선에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 겨울, 동경 W대학 문과에 재학하며 학기말 고사를 준비하던 나는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다. 늘 앓던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으므로, 단골 카페로 정자(靜子, 시즈꼬)를 찾았다. 나는 그녀를 앉혀 놓고 술을 마시고 목도리를 선물한다. 나는 아내가 죽어 간다는 소식을 받고도 이렇단 충격도 없었다. 그럭저럭 시간이 되어 하숙집을 들러 정거장에 나갔더니 시즈꼬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 속에서 그녀에게 선사 받은 보자기를 끌러 보니, 술병과 먹을 것에 편지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영리한 계집애이므로 동정할 만하며, 카페의 접대부로서는 아깝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으나, 한 번도 그 이상 어떻게 해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정자는 나의 이러한 생각에 불만을 토로했었다. 시모노세끼까지 별일 없이 왔다. 시모노세끼에 내리자 그저 조선 사람이란 트집으로 귀찮게 구는 형사들에게 크게 시달렸다. 나는 여기서부터 조선 사람이란 것을 유별나게 느끼게 되었다. 연락선에 탔을 때 사방에서, 특히 일본인들에게 식인종(食人種)이라고 조롱하는 소리와 경멸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고, 배 떠나기 전에 심문에서 협박까지 받게 되었다. 부산에 내려서도 또 형사에게 시달렸다. 나는 기진맥진되었다. 이윽고 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조선 사람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런 집은 없었다. 기차가 김천역에 도착했을 때, 서울 집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김천 형이 금테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역에 나와 있었다. 역에 내린 나는 국민학교의 훈도인 형의 덕택으로 여기서는 형사의 수작을 받지 않게  되었다.  

 형 댁에는 새 형수가 한 사람 와 있었다. 형수가 아들을 못 낳아서 새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어떻든 한 번은 내 의견을 꺼내 놓고 마는 나는 기어코 못마땅한 어조로 한바탕 불만을 터뜨렸다. 정말 딱한 일이다. 이윽고 형은 산소 걱정을 시작했다. 총독부 법에 의해서 지금부터 무덤은 공동묘지밖에 쓸 수 없다고 해서이다. 얼마나 할 일이 없기에 산 사람 묻을 구멍부터 염려를 하고 있나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기차를 탔다. 차 속에서 나는 옛날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던 협잡군 김의관과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 나는 한동안 그의 생각을 했다. 영동역에서 어떤 젊은 갓 장수가 탔다. 그 역시 공동묘지 일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차가 심천에 대자, 헌병이 타더니, 차 속을 수색하였다. 그는 갓 장수를 데리고 내려갔다.  "세상은 구데기가 끓는 무덤이다!" 나는 탄식했다.  

 서울역에 내렸다. 나는 인력거로 곧 집으로 갔다. 인력거 속에서는 가죽만 남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가엾은 생각은 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니,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병든 아내는 슬며시 눈을 뜨고 생그레 웃는듯하더니 눈물을 흘렸다. 삼사일 집에 들어박혀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침만 끝나면 술모임에 나가신다. 아내에게 양약을 쓰라고 권하면 펄쩍 뛰시는 아버지다. 때문에 나는 술이나 마시며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사이 시즈꼬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여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얼마 후 돈 백 원을 넣어서 답을 보내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관계도 끊기로 했다. 그것으로 시즈꼬와의 지난적의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서였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나는 급히 장례를 치르고 집을 떠나기로 했다. 서울역에 나오니, 친구 병화와 을라가 나와 주었다. 차가 떠나려 할 때 큰집 형이 내게 다가서며 "내년에 속현(재혼)을 해야지."했다. 나는 "겨우 무덤에서 빠져 나왔는데요."하고 웃었다.

 

등장인물

* 나(이인화): 당대의 현실을  무덤으로 인식하는 인물. 도쿄 유학생으로 아내의 위독한 전보를 받고 귀국함.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이

                     해와 애착이 없는 당대의 지식인의 전형. 허무주의적 성격도 보임.

* 김천 형님: 국민학교 교사. 보수적인 성격

* 아버지: 구시대의 보수적 성격.

* 형: 구시대의 보수적 성격.

* 아내: 보수적이며 순종적인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지닌 인물. 나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가는 시대의 희생양

* 정자: 아내와 대비되는 인물로, 이지적이고 진취적인 카페의 여급

* 김의관: 사기꾼. 일본인 앞잡이로 변신하여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물

 

소설읽기 

승객들은 북적거리며 배에 걸쳐 놓은 층층다리 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나도 틈을 비집고 그 속에 끼었다.  

아스팔트 칠(漆)을 담았던 통에 썩은 생선을 담고 석탄산수를 뿌려서 저리는 듯한 고약한 악취에 구역질이 날 듯한 것을 참으며 제각기 앞을 서려고 우당퉁탕 대는 틈을 빠져서 겨우 삼등실로 들어갔다. 참외 원두막으로서는 너무도 몰풍경하고 더러운 침대 위에다가 짐을 얹어 놓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나는 우선 목욕탕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내가 제일착이려니 하였더니 벌써 사오 인의 욕객이 목욕탕 속에 들어앉아서 떠들어댄다.  

"오늘은 제법 까불릴걸!" 

"뭘, 이게 해변가이니까 그렇지, 그리 세찬 바람은 아니야."  

시골서 갓 잡아 올려오는 농군인 듯한 자가 온유하여 보이는 커다란 눈이 쉴 새 없이 디굴디굴하는 검고 우악한 상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돌리면서 말을 꺼내니까 상인인지 회사원 같은 앞의 사람이 이렇게 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지금쯤 꽤 추울걸?" 

"그렇지만 온돌이 있으니까, 방안에만 들어 엎데었으면 십상이지." 

조선 사정에 익은 듯한 상인 비슷한 위인이 받는다. 

"응, 참 온돌이란 게 있다지." 

촌뜨기가 이렇게 말을 하니까, 나하고 마주 앉았는 자가 암상스러운 눈으로 그자를 말끄러미 쳐다보더니,  

"당신 처음이슈?"  

하며 말 참여를 하기 시작한다. 남을 멸시하고 위압하려는 듯한 어투며 뾰족한 조동아리가 물어보지 않아도 빚놀이장이의 거간이거나 그 따위 종류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 추위에 어째 나섰소? 어딜 가슈?" 

"대구에 형님이 계신데 어머님이 편치 않으셔서 가는 길이죠."  

"마침 잘 되었소그려. 나도 대구까지 가는 길인데, 그래 백씨께서는 무얼하슈?" 

"헌병대에 계시죠." 

"네? 바루 대구 분대(大邱分隊)에 계신가요? 네, ……그러면 실례입니다만, 백씨께서는 누구신지? 뭘로 계셔요?" 

시골자의 형이 헌병대에 있다는 말에 나하고 마주 앉은 자는 반색을 하면서 금시로 말씨가 달라진다. 나는 그자의 대추씨 같은 얼굴을 또 한 번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우리 형님은 아직 군조(軍曹)예요. 니시무라 군조(西村軍曺), 혹 형공도 아시는지? 그런데 형공은 조선에 오래 계신가요?" 

"네, 난 십여 년래로 그저 내 집같이 드나드니까요." 

하고 궐자는 시골자를 한참 말뚱말뚱 쳐다보다가, 

"암, 대구 헌병대의 그 양반이야 알구 말구요. 그 양반은 나를 모르실지 모르지만……" 

어째 그 말 눈치가 안다는 것보다도 모른다는 말 같다.  

 

"어쨌든 십 년이라면 한밑천 잡으셨겠구려." 

이번에는 상인 비슷한 자가 입을 벌렸다. 

"웬 걸요. 이젠 조선도 밝아져서 좀처럼 한밑천 잡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 

" '요보' 말씀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 인제 가서 보슈……. 하하하." 

'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그 욕탕 속에 들어앉았던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는 모두 껄껄 웃었다. 그러나 나는 기가 막혀 입술을 악물고 쳐다보았으나 더운 김이 서리어서, 궐자들에게는 분명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욕객은 차차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憂國志士)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亡國)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학교나 하숙에서 지내는 데는 일본 사람과 오히려 서로 통사정을 하느니 만큼 좀 나았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 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 년 동안, 이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周圍)가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 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을 하여 퇴학을 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한다는 둥, 솔직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마는, 차차 지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 년에 한 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에서나 부산, 경성에서 조사를 당하고 성이 가시게 할 때에는 귀찮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마는, 그 때 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적개심이나 반항심이란 것은 압박과 학대에 정비례하는 것이나, 기실 그것은 민족적으로 활로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칠 년이나 가까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경찰관 이외에는 나에게 그다지 민족 관념을 굳게 의식케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정치 문제에 흥미가 없는 나는,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여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여도 가할 만큼 정신이 마비되었었다. 그러나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誘發)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게 말 한 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 

지금도 목욕탕 속에서 듣는 말마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지마는, 그것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조선 사람이 듣고, 오랜 몽유병(夢遊病)에서 깨어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아낼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래 촌에 들어가면 위험하진 않은가요?" 

조선에 처음 간다는 시골자가 또다시 입을 벌렸다. 

"뭘요. 어델 가든지 조금도 염려 없외다. 생번(生蕃)이라 하여도 요보는 온순한 데다가, 가는 곳마다 순사요 헌병인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있나요. 그걸 보면 데라우찌〔寺內〕상이 참 손아귀 힘도 세지만 인물은 인물이야!" 

매우 감격한 모양이다. 

"그래 촌에 들어가서 할 게 뭐예요?" 

"할 것이야 많지요. 어델 가기로 굶어 죽을 염려는 없지만, 요새 돈 몰 것이 똑 하나 있지요. 자본 없이 힘 안 들고……. 하하하." 

표독한 위인이 충동이는 수작이다. 

"그런 벌이가 어디 있어요?" 

촌뜨기 선생은 그 큰 눈을 더 둥그렇게 뜨고, 큰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마주 쳐다보는 모양이다. 

"왜요? 한번 해 보시려우?" 

그는 이렇게 한마디 충동이며, 무슨 의미나 있는 듯이 그 악독하여 보이는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고 한참 마주 보다가, 

"시골서 죽도록 땅이나 파먹다가 거꾸러지는 것보다는 편하고 재미있습네다. 게다가 돈을 쓰고 싶은 대루 쓸 수 있고……" 

여전히 뱅글뱅글 웃으면서 이 순실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그대로 있는 듯한 촌뜨기를 꾄다. 

"그런 선반에서 떨어지는 떡 같은 장사가 있으면 하나뿐이겠나요." 

촌뜨기는 차차 침이 고여 오는 수작이다. 

"그러나 밑천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지요. 우선 얼마 안 되지만 보증금을 들여 놓아야 하고, 양복이나 한 벌 장만하여야 할 터이니까……. 그러나 당신이야 형님이 헌병대에 계시다니까, 신분은 염려 없을 테니 보증금은 없어도 좋겠지."  

제딴은 누구를 큰 직업이나 얻어 주는 듯싶이, 더구나 보증금은 특별히 면제하여 주겠다는 듯이 오만한 태도로 어깨를 뒤틀며 호기만장이다. 일편 촌뜨기는 양복신사가 돼야 하는 직업이라는 데에 속으로 헤헤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정작 그 직업의 종류가 무엇인가는 좀처럼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실상 곁에서 엿듣고 앉았는 나 역시 궁금하지만 이러한 소리를 듣는 시골 궐자는 더 한층 호기의 눈을 번쩍이며 앉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을 토설치 않는 것은 나와 그 외의 두세 사람이 들을까 꺼리어서 그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그 시골뜨기가 좀 더 몸이 달아 덤비며 자기의 부하가 되겠다는 다짐까지 받고서야 이야기하려는 수단 같기도 한다.  

"그래 그런 훌륭한 직업이 무엇인데, 어데 있단 말요?"  

이번에는 그 시골자의 동행인 듯한 사람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욕탕에서 시뻘겋게 달은 몸둥아리를 무거운 듯이 끌어내며 물었다. 그자도 물속에서 불쑥 일어서서 수건을 등 뒤로 넘겨서 가로잡고 문지르며 한 번 목욕탕 속을 휘돌아다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의 이야기에는 무심히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멱을 감는 것을 살펴본 뒤에 안심한 듯이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벌린다.

"실상은 누워 떡 먹기지. 나두 이번에 가서 해 오면 세 번째나 되우마는 내지의 각 회사와 연락해 가지고, 요보들을 붙들어 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쿨리〔苦力〕말씀요. 농촌 노동자를 빼내 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대개 경상남북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 강원 그 다음에는 평안도에서 모집을 해 오는 것인데 그 중에도 경상남도가 제일 쉽습네다. 하하하."  

그자는 여기 와서 말을 끊고 교활한 웃음을 웃어 버렸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불쌍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鑛山)으로 몸이 팔리어 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속아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 번 그 자의 상판대기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옳지! 그래서 이자의 형이 헌병 군조라는 것을 듣고, 이용할 작정으로 반색을 한 게로군! 

나는 이런 생각도 하여 보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앉았었다. 

궐자는 벙벙히 듣고 앉았는 그 두 사람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고 빙긋 웃으며, 또다시 말을 잇는다. 

"왜 남선 지방에 응모자(應募者)가 많고 북으로 갈수록 적은고 하니, 이 남쪽은 내지인이 제일 많이 들어가서 모든 세력을 잡았기 때문에, 북으로 쫓겨서 만주로 기어들어가거나 남으로 현해탄(玄海灘)을 건너서거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길밖에 없는데 누구나 그늘보다는 양지가 좋으니까, 요보들 생각에도 일 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주린배를 채우기는 고사하고 보릿고개에는 시래기죽으로 부증이 나서 뒈질 지경인 바에야 번화한 동경 대판에 가서 흥청망청 살아보겠다는 요량이거든. 그러니 촌의 젊은 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계집애들까지 나두 나두 하고 나서거던. 뭐 모집이야 쉽지!"  

"흥, ……그럴거야!"  

"아직 북선 지방은, 우리 내지인이 덜 들어갔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히 사니까 응모자가 적지만, 그것도 미구불원에 쪽박을 차고 나설거라. 허허허……" 

이자는 자기 설명에 만족한 듯이 대단히 득의만면이다. 

"그래 그렇게 모집을 해 가면 얼마나 생기나요?" 

촌뜨기는 구수하다는 듯이 침을 흘리며 듣는다. 

"얼마가 뭐요. 여비가 있지, 일당(一堂)이 또 있지, 게다가 한 사람 모집하는 데에 일 원서부터 이 원이니까― 그건 회사와 일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가령 방적 회사의 여직공 같은 것은 임금도 싼데다가, 모집원의 수수료도 헐하고, 광부 같은 것은 지금 시세로도 일 원 오십 전으로 이 원 오십 전까지라우. 가령 천 명만 맡아 가지고 와서 보구려. 이삼 삭 동안에 여비나 일당에서 남는 것은, 그까짓건 다 그만두고라도 일천 오륙백 원, 근 이천 원은 간데없는 것일 게니 그런 벌이가 이판에 어디 있소? 하하하, 나도 맨 처음에―그건 제주도에서 모집하여 갔지만 그 때에 오백 명 모아다 주고, 실살고로 남긴 것이 천 원이었고, 둘째 번에는 올 가을 팔백 명이나 북해도 족미탄광(足尾炭鑛)에 보내고, 이천 원 돈이 들어왔다우." 

노동자 모집원이라는 자는 입의 침이 없이 천 원, 이천 원을 신이 나서 뇌며 목욕탕 속에서 나왔다. 

"예에, 예에, 그럴거예요!" 

하며, 일평생에 들어 보지도 못하던, 천(千)자가 붙은 돈 액수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귀를 기울이고 앉았던 시골자는, 때를 다 밀었는지, 그 장대한 구리빛 나는 유착한 몸집을 벌떡 일으키어, 다시 욕탕 속에 출렁 집어넣으면서, 만족한 듯이 또다시 말을 붙이었다. 

"그래 조선 농군들이 가서, 그런 공사 일을 잘들 하나요?" 

"잘하구 못하는 것은 내가 아랑곳 있겠소마는, 하여간 요보는 말을 잘 듣고 쿨리만은 못해도 힘드는 일을 잘하는데다가 삯전이 헐하니까, 안성맞춤이지……. 그야 처음 데려갈 때에는 품삯도 많고 일은 드러누워서 떡먹기라고 푹 삶아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갈 노자며 처자까지 데리고 가게 하고 게다가 빚까지 갚아 주는데야 제아무런 놈이기로 아니 따라 나설 놈이 있겠소. 한번 따라 나서기만 하면야, 전차(前借)가 있는데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지. 일이 고되거나 품이 헐하긴 고사하고 굶어 뒈진다기루 하는 수 있나, 하하하." 

벌써 부하가 되었다는 듯이 득의만면하야 모집 방법의 비책까지 도도히 설명을 하여 주고 앉았다.

나는 좀 더 들으려고, 일부러 머뭇머뭇하며 앉았으려니까 승객이 다 올라탔는지, 별안간에 욕객의 한 떼가 또 왁자하고 들이 밀려오기에 나는 그만 듣고 몸을 훔치기 시작하였다.  

스물 두셋쯤 된 책상도련님인 나로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 어떠하니, 인간성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하여야 다만 심심파적으로 하는 탁상의 공론에 불과한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나 조상의 덕택으로 글자나 얻어 배웠거나 소설권이나 들춰 보았다고, 인생이니 자연이니 시(詩)니 소설이니 한대야 결국은 배가 불러서 투정질하는 수작이요, 실인생, 실사회의 이면의 이면, 진상의 진상과는 얼마만한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보면 내가 지금 하는 것, 이로부터 하려는 일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 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반 년 짝은 시래기로 목숨을 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까.... 하는 말을 들을 제,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날 만치, 나의 귀가 번쩍하리만치 조선의 현실을 몰랐다. 나도 열 살 전까지는 부모의 고향인 충청도 촌속에서 자라났고 그 후에도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촌락에 발을 들여놓아 보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소작인의 생활이 참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시(詩)를 짓는 것보다는 밭을 갈라고 한다. 그러나 밭을 가는〔耕〕그것이 벌써 시(詩)가 아니냐……. 사람은 흙에서 나와서 흙에 돌아간다. 흙의 향기로운 냄새에 취할 수 있는 자의 행복이여! 흙의 북돋아 오르는 생기야말로, 너 인간의 끊임없는 새 생명이니라……"  

언젠가 이따위의 산문시 줄이나 쓰던, 자기의 공상과 값싼 로맨티시즘이 도리어 부끄러웠다. 흙의 냄새가 향기롭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그 향기에 취할 수 있는 자가 행복스럽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조반 후의 낮잠은 위약(胃弱)이라는 고등유민(高等遊民)의 유행병에나 걸릴까 보아서 대팻밥 모자에 연경이나 쓰고, 아침저녁으로 호미자루를 잡는 것이 행복스럽지 않고 시적(詩的)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러나, 일 년 열두 달, 소나 말보다도 죽을 고역을 다 하고도, 시래기죽에 얼굴이 붓는 것도 시(詩)일까? 그들이 삼복의 끓는 햇볕에 손등을 데면서 호미자루를 놀릴 때, 그들은 행복을 느끼는가? 그들은 흙의 노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의 노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다만 땀과 피뿐이다. 그리고 주림뿐이다. 그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뛰어나오기 전에, 벌써 확정된 단 하나의 사실은, 그들의 모공이 막히고 혈청이 마르기까지, 흙에 그 땀과 피를 쏟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 방울의 땀과 백 방울의 피는 한톨〔一粒〕의 나락을 기른다. 그러나 그 한 톨의 나락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 가는가? 그에게 지불되는 보수는 무엇인가. ……주림만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그의 받을 품삯이다……. 

나는 몸을 다 훔치고 옷 입는 터전으로 나왔다. 

나는 사람, 드는 사람, 한참 복작대는 틈에서 부리나케 양복바지를 꿰며 섰으려니까, 어떤 보지 못하던 친구가 문을 반쯤 열고 중절모자를 쓴 대가리를 불쑥 디밀며, 황당한 안색으로 방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실례올시다만, 여기 이인화란 이가 계십니까? 하고 묻는다." 

"네에, 나요. 왜 그러우?"  

나는 궐자의 앞으로 두어 발자국 나서며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궐자는 한참 찾아다니다가, 겨우 만난 것이 반갑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서서 이리 좀 나오라고 명령하듯이 소리를 친다. 학생복에 망토를 두른 체격이며 제딴은 유창하게 한답시는 일어의 어조가 묻지 않아도 조선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도 짓궂이 일어를 사용하고 도리어 자기의 본색이 탄로될까 보아 염려하는 듯한 침착치 못한 행색이 나의 눈에는 더욱 수상쩍기도 하고, 마음이 근질근질하기도 하였다. 나의 성명과 그 사람의 어조를 듣고, 우리가 조선 사람인 것을 짐작한 여러 일인의 시선은 나에게서 그자에게, 그자에게서 나에게로 올지 갈지 하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두 사람은, 일본 사람 앞에서 희극을 연작하는 앵무새 모양이었다. 

"무슨 이야긴지. 할 말 있건 예서 하구려." 

그래도 나는 기연(其然)가 미연(未然)가 하여, 역시 일어로 대답하였다. 

"하여간 이리 좀 나오슈." 

말씨가 벌써 그러한 종류의 위인인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 언사의 교만한 것이 첫째 귀에 거슬리어서, 다소 불쾌한 어조로, 

"그럼 문을 닫고 나가서 기다류." 

하며 소리를 지르고, 다시 내 자리로 와서 주섬주섬 옷을 마저 입기 시작하였다. 여러 사람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에 어리우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아까 노동자를 모집할 의논을 하던 세 사람은 힐끗힐끗 곁눈질을 하는 것이 분명하였으나, 나는 도리어 그 시선을 피하였다. 불쾌한 생각이 목구멍 밑까지 치밀어오는 것 같을 뿐 아니라, 어쩐지 기운이 줄고 어깨가 처지는 것 같았다.   

 

<저작권 보호와 관련하여 출판사측의 요청에 의해 중략합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사랑으로 나왔다. 책상머리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물고 앉았으려니까, 큰집 형님이 데리고 온 양의(洋醫)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마침 아는 의사이기에 들어와서 녹여 가라고 하였더니,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부정이나 타는 듯이 뺑소니를 쳐 가 버린다. 사망 진단서니 뭐니 성가신 일이나 맡을까 보아서 그런지, 의사도 주검이란 싫어서 그런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튿날 어둔 뒤에 김천 형님 내외가 딸까지 데리고 올라온 뒤에는 나도 모든 것을 쓸어 맡기고 사랑에 나와서 담배만 피우며 가만히 누웠었다. 미음 한 술 떠 넣어 주려 나왔던가 생각하면 공연히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시체를 청주까지 끌고 내려간다는 데에는 절대로 반대하였다. 오일장(五日葬)이니 어쩌니 떠벌리는 것도 극력 반대를 하여 삼일만에 공동 묘지에 파묻게 하였다. 처가 편에서 온 사람들은 실쭉해하기도 하고 내가 죽은 것을 시원히나 아는 줄 알고 야속해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내 고집대로 하였다.  

그러나 조상 중에 또 한 가지 나의 고통은 눈물이 아니 나오는 울음을 울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처가붙이끼리라든지 집안 식구들까지 뒷공론을 하는 모양이나, 파붇고 들어올 때까지 나는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가 없었다. 

"팔자가 사납거던 계집으로 태어날 거야. 어쩌면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누?……" 

하며, 과부댁 누이가 마루에서 나더러 들어 보라는 듯이 한 마디 하니까, 김천 형수가, 

"남편네란 다 그렇지. 두구 보시구려. 달이 가시기도 전에 여학생을 끌어들이실 거니." 

하며, 소곤거리는 것을 나는 안방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들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너도 내년 봄이면 졸업이지? 인젠 어떻게 할 셈이냐? 곧 나와서 무어라도 붙들 모양이냐? ……더 연구를 하련?" 

장사 지낸 지 이틀 만에 사랑에서 아침을 같이 먹다가, 조용한 틈을 타서 형님은 불쑥 이런 소리를 꺼냈다. 

"글쎄, 되어 가는 대로 하죠. 하지만 무어든지 내 일은 내게 맡겨 두시는 게 좋겠죠?" 

나는 이렇게 우선 한마디 해 놓고 나의 계획을 대강 말하였다. 그리하여 자식은 요행히 잘 자라면 김천 형님이 데려가거나, 만일 김천 형님이 아들을 낳게 되면 큰집 형님이 데려가는 대신에, 내 앞으로 오는 것이 다소간 있을 것이니, 그 반분(半分)은 양육비와 교육비로 제공하되 장성할 때가지 김천 형님이 보관하기로, 김천 형님과만 내약(內約)을 하여 두었다. 간단한 일이지마는 이렇게 수편(隨便)하게 끝이 나니까, 한시름 잊은 것 같고 새삼스럽게 자유로운 천지에 뛰어나온 것 같았다. 

그 동안 청명한 겨울날이 계속하더니 오늘은 또 무에 좀 오려는지, 암상스런 계집이 눈살을 잔뜩 찌푸린 것처럼 잿빛 구름이 축 처지고, 하얗게 얼어붙은 땅이 오후가 되어도 대그락거리었다. 사랑은 무거운 침묵과 깊은 잠에 잠긴 것 같이 무서운 증이 날 만큼 잠잠하다. 김의관은 자기가 칭원(稱寃)이나 들을까 보아서 제풀에 미안하여 그러는지, 그저께 발인(發靷) 때 잠깐 눈에 띈 뒤로는 보이지를 않는다. 

우중충한 사랑방에 온종일 혼자 가만히 드러누었으려니까 무슨 무거운 돌멩이나 납덩어리로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상처(喪妻)를 하였다 해서 별안간 섭섭하거나 서러운 생각이 나서 그런 것도 아니요, 아이들이 없어서 조용한 집안이 초상(初喪)을 치른 뒤에 한층 더 쓸쓸하여진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혹시는 세계 대전이 끝나고 세상은 떠들썩하며 무슨 새로운 희망에 타 오르는 것 같건마는, 조선만은 잠잠히 쥐죽은 듯이 들어엎디어서 그저 파먹기나 하며 버둥버둥 자빠져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무거운 뚜껑이 꽉 덮여 있는 것 같아서 답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하면 아내가 죽어가는 꼴을 마주 앉아 보았으니만치, 어느 때까지 그것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고 지난 일이 곰곰 생각이 나서, 가엾은 추회(追懷)가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라서 기분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거나 말거나 될대로 되라고 냉담하였지마는, 파묻고 들어와 보니 역시 한구석이 허전한 것 같고, 지난 일이 뉘우쳐지는 것도 있는 것이었다. 아내가 살이 있을 때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가엾은 생각이, 동정하는 마음이 유연히 마음속에 괴어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에잇, 하여튼 한시 바삐 빠져 달아나자!" 

나는 부친과 형님이 들어오시면 오늘 저녁차로라도 떠나 버릴 작정으로, 건넌방으로 건너가서 가방 속을 정리하고 앉았으려니까, 어느 틈에 왔던지 안에서 병화댁과 을라가 인사를 나왔다. 

"얼마나 섭섭하시구 언짢으십니까?" 

을라는 위문이라기보다도 젊은 남편의 상처란 그저 그런 거라는 듯이 생긋 웃으며 다시 장가갈 치하를 하는 듯한 어조다. 

"죽은 사람이야 가엾지만,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니 하는 수 없지요." 

나는 금방 비로소 죽은 아내가 가엾다는 생각을 하고 난 끝이라 도리어 정중히 이렇게 대거리를 하며, 사랑에 올라올 리는 없지마는 인사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래도 섭섭하시겠죠?" 

을라는 이런 소리를 하며 말똥히 나의 기색을 살피려는 눈치다. '그래두 섭섭'이란, 인사답지 않은 인사지마는 나는 웃고 말았다. 

"언제 떠나십니까? 이번엔 꼭 같이 가세요." 

인사를 온 것이 아니라 동행하자고 맞추러 온 것 같은 수작이다. 

"오늘 저녁이라도 떠날까 하는데 함께 나서시겠나요? 동행을 해 주시면 심심치도 않고 매우 좋기야 하겠지만……" 

나는 실없이 웃어 보였다. 

"아, 그렇게 서두르실 게 뭐예요?" 

을라가 놀라는 소리를 하려니까 한 걸음 뒤처져 안에서 나온 병화가 다가오며, 

"뭐, 오늘 떠나?" 

하고 알은 체를 하다가, 오늘 떠나든 말든 자기 집으로 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발론(發論)을 한다. 

"아무려면 오늘 떠나시게 되겠에요? 아무것도 없지만 잠깐 가시죠." 

병화댁도 옆에서 권한다. 자기네끼리 오늘 나를 찾아 인사도 하고 위로삼아 저녁 대접을 하려고 의논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한가로운 기분이 나지를 않았다. 또 그것이 병화 내외로서는 을라에 대한 자기네끼리의 입장을 명백히 하려는 기회를 만들려는 뜻인지도 모르겠고, 을라는 을라대로 딴 생각이 있는지 모르나, 나는 그런 것이 도리어 성가신 생각이 났다. 하여간 이 사람들의 이러한 눈치로만도 나는 작년 이래로 지나치게 오해였던 것이 풀린 것은 기쁘고 마음이 거뜬하여진 것 같았다. 

마루 끝에서 실랑이를 하다가 이 사람들을 돌려보낸 뒤에 나는 짐을 다시 싸기 시작하였다. 서류를 정리하다가 가방 속에서 나온 정자의 편지를 다시 한 번 펴 보았다. 이것은 초상 중에 온 것을 대강 보고 집어넣어 두었던 것이다.  

"……과장(誇張) 없는 말씀으로, 저는 이제야 겨우 악몽(惡夢)에서 깨어나서 흐리터분하고 어리둥절하던 제 정신이 반짝 든 듯싶습니다. 오랜 방황에서 이제야 제 길을 찾아든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신앙(信仰)을 붙든 것도 아니요, 생활의 도표(道標)를 별안간 잡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언젠가 말씀처럼 고민(苦悶)은 역시 제 길, 저 살 길을 열어 주고야 말았는가 합니다. 반 년 동안 레스토랑의 경험은 컴컴하고 끈죽끈죽한 생활이었습니다마는 그래도 저는 그 생활 속에서 새 길을 찾았는가 싶습니다. 인간 수양, 세간 수양이 조금은 되었는가 합니다. 만일 내가 지금 지향(志向)하는 길로 나갈 수 있다면 M헌(軒)에서의 반 년 동안 얻은 문견(聞見)이 무슨 보토(補土)가 될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그보다도 그 동안에 당신을 만나 뵈었다는 것은 저의 일생에 잊지 못할 새로운 기록 이었겠지요……"  

정자의 편지는 저번 내가 부친 엽서의 답장이나, 매우 희망과 감격에 찬 기분으로 씌었다. 동경 역에서 헤어질 때 경도로 갈 듯하다더니 역시 설〔正初〕 전으로 M헌을 하직하고, 경도 고모집으로 갈 작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모집에를 가면 소원대로 이번 신학년부터는 동지사 대학(同志社大學) 여자부에 입학할 예정이라 한다. 아마 저의 본집과도 양해가 되어 학비도 나오게 되고, 제자국에 다시 들어설 눈치인지 모르겠다. 저의 집이 경도·대판에서 뱃길〔船路〕로 대여섯 시간이면 건너서는, 사국(四國) 고송(高松)이라는 데에서 해물상을 한다는 말을 들었지마는, 경도에 가서 동지사 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할 터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나는 동경서 떠나올 제 목도리를 사다가 함부로 허리춤에 찔러 주고 온 것을 생각하고, 혼자 속으로 찔끔하는 생각이 들며 혼자 얼굴이 뜨뜻해 왔다. 물론 보통 카페 걸로 여긴 것은 아니지마는, 좀 너무 함부로 한 것 같아서 열쩍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의 집이 얼마나 잘 살거나 그거야 알 바 아니지마는, 대학까지 가려는 생각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인생은 오뇌(懊惱)로 쌓아 올라가는 것인가 봅니다. 아니 번민, 오뇌로 쌓아 올라가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인가 합니다. 왜 이 말씀을 하는고 하니, 당신이 너무나 인생 문제와 사회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불만 불평보다는 더 큰 것을 위하여 애쓰시는 것이 가엾어 그럽니다.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번민하시고 오뇌하시기 때문에, --또 저는 거기에 경의를 느끼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그런 속된 말로가 아니라 괴로움을 알아야 사람은 거듭나는가 합니다. 일본의 남자들은 너무나 괴로움을 모릅니다. 역시 대륙적(大陸的)이라 할지? 괴로움을 꾹 참고 딱 버티고 섰는 거기에 깊이 있는 생활이 있는가 싶습니다." 

이런 말도 씌어 있다. 다감(多感)하고 예민한 계집애가 연애에 실패하고 집안에서 쫓겨나고 하니까 보통 여자와는 다르겠지마는,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 나라 남성 -- 일본 남성에게 반기(叛旗)를 들고 내게로 오겠다는 사연인가도 싶다. 

끝에는 동경으로 가는 길에 부디 경도로 전보를 미리 치고 자기에게 들러 달라고 고모집 번지수까지 씌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면 전과는 달라서 퍽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것도 많을 것 같지마는, 한편으로는 어색도 하고 겁도 나는 것이었다. 

'이번에 만나면 어떤 얼굴로 만날꾸?' 

혼자 상상을 하여 보고는 큰 기대도 있고 큰 흥미도 있으리라고 궁리가 많았다. 갑갑하고 화가 나는 김에, 어서 가서 정자나 만나면 이 무거운 기분이 조금은 나을 것도 같다. 

가방을 꾸려 놓고 어머님께 오늘 밤차로 떠나겠다고 여쭈러 안으로 들어가니까, 출입하였던 큰형님이 뒤미처 들어왔다. 

"얘가 오늘 저녁으루 떠나겠다는구나! 내 이런 주착없는 애가 있니?"  

모친으로서 생각하면은 딸자식이 죽은 것과는 다르다 하여도 둘째 며느리를 열다섯부터 앞에서 키운 정이 있으니, 집이 한 구석 텅 빈 것 같은데 아들마저 초상을 치르자마자 훌쩍 가 버리겠다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별안간 이것은 무슨 소리냐? 가자면 나부터 가야지. 네가 왜 먼저 서두르느냐? 나는 아이들을 놀려 놓고 온 터 아니냐?" 

하고, 큰형님은 역정을 낸다. 나는 이 말에 찔끔하였다. 사실 경우가 틀렸다. 

"네가 너무 기분주의야. 어쨌든 나는 내일 떠나야 하겠지만, 방학 동안은 좀 들어앉었으렴. 어머니께서 섭섭해 안 하시니." 

나는 떠나는 것을 무기연기(無期延期)하기로 하였다. 

사람이 죽어 나간 건넌방에는 안에서들 들어가 자기를 싫어하는 모양이기에 내가 자기로 하였거니와, 형님이 떠난 뒤로는 더구나 혼자 드러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전전 반측(輾轉反側) 하며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곰곰 생각하면 날이 갈수록 죽은 사람에게 역시 미안한 생각이 간절하였다. 더 산대야 하나 날 자식을 두셋 더 낳았을 것밖에 별수야 없겠지마는, 좀 더 따뜻이 해 주었더면 하는 후회도 난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런 뉘우침도 결국에는 자기가 당장 고적하고 아쉬우니까 그런가 보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애인이라도 있다면, 이 생각 저 생각 없이 뛰어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어린것을 기를 걱정은 없다 하여도 조만간 -- 삼사 삭 후에 졸업하고 나오면 역시 혼자는 어려우니 장가는 들어야 할 것이나 '누구를 고를까?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기로 누가 선뜻 와 줄까? ....' 이런 걱정도 머리에 떠오른다. 

'을라?……'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정자? 더구나 안 될 말이다.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말 말고라도 인제 겨우 부모의 노염도 풀려가는 눈치인데, 또다시 나 같은 사람과 문제가 새판으로 생긴다면 피차에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다. 그것은 고사하고 정자 같은 사람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 수 없는 일이요, 장래를 생각하거나 민족적 감정으로나 문제도 아니 된다. 이것저것 실제 문제를 생각하면 그래도 아내가 더 살아 주었더면 내 몸 하나는 편하였던걸……. 하는 생각도 든다. 죽으면 죽으라지 또 계집이 없을까 하는 방자한 생각이 뉘우쳐지기도 하였다. 

나는 하여간에 정자의 열심으로 써 보내 준 편지에 어느 때까지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기도 안 되어서, 이튿날 이런 답장을 써 부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해결되어 가고 학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하오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반 년 간의 쓰라린 체험이 오늘의 신생(新生)을 위한 커다란 준비 시기이셨던 것을 생각하면, 그 동안 나의 행동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한편으로는 내 생애에 있어서도, 다만 젊은 한 때의 유흥 기분만에 그치지 아니하였던 것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뒷날에 달콤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할 뿐이라면 이렇게 섭섭한 일도 없고, 당신은 또 자기를 모욕하였다고 노하실지도 모르나, 언제까지 그런 기쁨과 행복에 잠겨 있도록 이 몸을 안온하고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나도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책임을 느끼고, 또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할 의무를 깨달아야 할 때가 닥쳐오는가 싶습니다. ……지금 내 주위는 마치 공동묘지 같습니다. 생활력을 잃은 백의(白衣)의 백성과, 백주(白晝)에 횡행하는 이매망량( 魅輞 ) 같은 존재가 뒤덮은 이 무덤 속에 들어앉은 나로서 어찌 '꽃의 서울'에 호흡(呼吸)하고 춤추기를 바라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하나나 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용기와 희망을 돋우어 주는 것은 없으니, 이러다가는 이 약한 나에게 찾아올 것은 질식밖에 없을 것이외다. 그러나 그것은 장미꽃송이 속에 파묻히어 향기에 도취한 행복한 질식이 아니라, 대기(大氣)에서 절연된 무덤 속에서 화석(化石)되어 가는 구더기의 몸부림치는 질식입니다. 우선 이 질식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소학교 선생님이 '사벨(환도)'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그런 나라의 백성이외다. 고민하고 오뇌하는 사람을 존경하시고 편을 들어 주신다는 그 말씀은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내성(內省)하는 고민이요 오뇌가 아니라, 발길과 채찍 밑에 부대끼면서도 숨을 죽어 엎디어 있는 거세(去勢)된 존재에게도 존경과 동정을 느끼시나요? 하도 못생겼으면 가엾다가도 화가 나고 미운증이 나는 법입니다. 혹은 연민(憐憫)의 정이 있을지 모르나, 연민은 아무것도 구(救)하는 길은 못 됩니다. ……이제 구주(歐洲)의 천지는 그 참혹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걷히고 휴전 조약이 성립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부질없는 총칼을 거두고 제법 인류의 신생(新生)을 생각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소학교 교원의 허리에서 그 장난감 칼을 떼어놓을 날은 언제일지? 숨이 막힙니다. ……우리 문학의 도(徒)는 자유롭고 진실된 생활을 찾아가고, 이것을 세우는 것이 그 본령인가 합니다. 우리의 교유(交遊), 우리의 우정이 이것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입니다. 이 나라 백성의,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나가는 자각(自覺)과 발분(發憤)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信念)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 

나는 형님이 떠날 제 초상에 쓰고 남은 것이라고, 동경 갈 노자와 함께 책값이며 용돈으로 내놓고 간 삼백 원 속에서 백 원을 이 편지와 함께 부쳐 주었다. 혹시는 다른 의미나 있는 줄로 오해할 것이 성가시기도 하나, 동경에서 떠날 제 선사받은 것도 있으려니와, 정자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한마디 쓰고, 다소 부조(扶助)가 될까 하여 보낸 것이다. 실상은 동경 가는 길에 들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였기 때문에, 아주 이것으로 마감을 하여 버리고, 나도 이 기회에 가뜬한 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한 열흘 더 있다가 졸업 논문도 있고 아무래도 학교 일이 걱정이 되어서 떠나고 말았다. 정거장에는 큰집 형님, 병화 내외, 을라들이 나왔다. 을라는 입도 벌리지 않고 오도카니 섰고, 병화 내외도 플랫폼의 보꾹에 매달린 시계만 치어다보며 선하품을 하고 섰었다. 그러나 병화의 얼굴에는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모든 오해를 풀고, 인제는 안심하였다는 듯이 화평한 기색이 도는 것 같았다. 

차가 떠나려 할 제 큰집 형님은 승강대에 섰는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내년 봄에 나오면 어떻게 속현(續絃)할 도리를 차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난데없는 소리를 하기에 나는, 

"겨우 무덤 속에서 빠져나가는데요? 따뜻한 봄이나 만나서 별장이나 하나 장만하고 거드럭거릴 때가 되거든요……!" 

하며 웃어 버렸다.

  

핵심정리

* 갈래: 중(장)편 소설

* 배경: 3.1운동 전해인 1918년 겨울의 동경과 서울

* 시점: 1인칭 주인공시점

* 성격: 사실주의적, 현실 비판적, 소시민적

* 문체: 사실적이고 호흡이 긴 만연체

* 구성: 전체가 9장으로 이루어짐, 순차적 구성

* 어조: 자조적

* 주제: 지식인(知識人)의 눈으로 본 식민지 조선(朝鮮)의 암담한 현실 (식민지 현실의 고발)

* 출전: <신생활>(1922)에  <묘지(墓地)>라는 제목으로 연재.

* 의의: 일제 식민지 하의 민족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