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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이 술술 / 볼테르는 누구인가?

수로보니게 여인 2009. 4. 11. 23:57
고전 읽으면 논술이 술술 <9> 볼테르 '깡디드'(1)

고전 속에 논술의 해법이 있다. 논술의 기술보다는 근본적인 배경지식을 쌓는 게 우선이다. 국제신문은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와 함께 고전 강좌를 연재한다. 중·고생들이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며 논술시험에 나올 만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해답을 고민해 보는 자리다.

 
 

# 주요 의제

① 볼테르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주요 테마인 종교적 편견이나 비관용, 광신, 미신에 맞서 행동으로 투쟁한 사상가이다.

② 볼테르의 관용 정신은 여론의 힘과 대중 정신을 성했다.


# 생각해볼 문제

① 우리 사회에서 파렴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② 비관용이 만연한 오늘날 우리는 관용을 지향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③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살아있는 정신은 무엇이며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 핵심용어

▶관용(la tolerance)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미덕이다. 또한 허용할 수 없는 것이나 비관용에 대해서 조심하는 태도를 취하게 하는 미덕이다. 바꿔 말하면, 도덕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특수한 물리적 규범에 반대되는 요소에 대해 허용정도를 정의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관용은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태도, 즉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개인의 태도이다.

▶파렴치(l'infame)

볼테르는 파렴치를 광신에 관계되는 모든 괴물의 머리에 비유했다. 이 악몽 같은 발명물이 볼테르의 머리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고, 그는 이 괴물의 발톱을 깎고, 이빨을 다듬기 위해서 괴물의 자취를 끊임없이 추적한다. 파렴치는 모든 지적·도덕적 형태와 확신에 찬 모든 압제와 동일시될 뿐 아니라 '낭트 칙령'(16세기에 프랑스의 왕 앙리4세가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의 철회(17세기 루이14세) 이후 프랑스의 국교인 구교를 지칭한다.


1. 볼테르는 누구인가

"그는 무신론자들, 광신자들과 싸웠다. 그는 관용을 고취했고, 봉건제도의 예속에 대항하여 인간의 권리를 요구했다. 시인, 역사가, 철학자로서 인간정신을 위대하게 하고 그 정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르쳤다."
 
  '볼테르의 승리, 1791년 7월 11일' 프랑스 시민 대혁명이 일어난 지 2년째 되는 해에 국민의회에서 한 결정에 따라 죽은 지 13년 만에 볼테르의 유해가 팡테옹으로 이송되고 있다.


이것은 파리에 위치한 프랑스 위인들의 무덤인 팡테옹에 안장되어 있는 볼테르(16941778)의 묘비명이다. 그의 삶의 궤적과 사상,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 묘비명을 통해 볼테르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설명을 좀 더 덧붙이면, 볼테르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프랑스의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앙리4세의 관용을 예찬한 시인이고, 더 이상 군주나 군대의 역사가 아니라 처음으로 국가와 국민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역사가이며, 계몽주의의 주요 테마인 종교적 편견이나 비관용, 광기, 미신과 맹신에 맞서 평생을 싸운 반기독교 철학자이다.

22세에 섭정을 하는 필립 오를레앙공의 연애행각을 글로 풍자하는 무례를 서슴지 않은 탓에 바스티유 감옥행에 처해지고, 그 당시 막강한 귀족 가문인 로앙 기사를 모욕한 죄로 영국으로 추방당한다. 영국에 머물면서 뉴턴의 자연관과 로크의 경험론을 깊이 연구하고, 정치적으로 영국 의회 정치에서 베풀어지는 관용에 자극을 받아 '철학 서한'(1734)을 쓰게 된다.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영국 정치관습에 대한 찬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전제주의 왕정의 악습, 그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군림하던 억압과 비관용에 대한 스캔들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 돌아오는 즉시 추방령을 받는다. 프랑스의 시레를 거쳐 스위스의 레 델리스에서 체류하는 동안 '풍속 시론'(1756)으로 역사연구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64세에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 접한 페르네에서 추방자로서 여생을 보내는 동안 걸작으로 꼽히는 철학 콩트 '깡디드'(1759)를 탄생시킨다. 또한 영국에서의 체류 이래 그가 끊임없이 폭로하려 했던 종교적 광신을 척결하는데 끈질기게 몰두한다. 즉 종교적 비관용과 종교 재판소의 오판에 희생된 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글로써 그 부당함을 고발하며, 심지어 그들의 변호인 역할까지 자처해 판결을 번복하게 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계몽화된 유럽을 열광케 하는 이러한 투쟁의 결실인 '관용론'(1763)이 탄생된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직접 확인한 프랑스 사회의 체제적 모순과 광신에 대한 항의서라고 하겠다. '철학 사전'(1764)에서는 계몽사상가로서 신·구약성서에 대한 합리적 반박과 진보에 대한 사상들을 옹호하며 정의와 관용에 대한 소신을 언급한다.

비관용을 쓰러뜨리는 볼테르.

이상의 주요 프로필을 통해, 우리는 볼테르가 자신의 사상을 피력한 철학자로서 그리고 글을 무기 아 투쟁하는 행동가로서, 반항적이고 투쟁적인 작가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 참여 철학자로서의 삶은 그 당시 프랑스 사회 분위기에 기인한다. 볼테르가 살았던 시기는 프랑스에서는 계몽주의 시대로 '백과전서'로 표시되고 이성과 진보의 이름으로 권력과 광신을 거부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이다. 정치적으로는 루이14세가 죽고 오르레앙공의 섭정이 시작되는 1715년부터 섭정이 끝남과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는 1789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볼테르는 구체제 아래 저변에 깔려있는 정치 체제의 모순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에 민감했고, 그 시대 상황에 아주 밝은 사람이었기에 권력행사가 불가능해진 왕정의 쇠퇴를 열망하는 대중의 시위를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볼테르는 그 시대의 철학자들과 사상가들 진영에서 단순히 백과전서파 운동을 지지하고 편찬에 협력하는 이상의 역할을 했다. 열정적이고 확신에 가득 찬 이성의 신봉자, 즉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고 모든 독단론, 특히 종교적 독단을 거부하고 자유를 요구하는 능동적 역할을 해냈다. 그의 사명은 영감을 주고 주동자가 되는 것인데, 이는 곧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연극, 시, 역사서, 철학 작품 등의 다양한 쟝르로 50년 이상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장수한 작가인 볼테르는 그 시대의 상징이며, 시대 정신을 완벽하게 대표한 위인이다. "그의 심장은 여기 있지만 그의 정신은 도처에 있다"는 볼테르의 추종자들 중 한 사람인 빌레트 후작이 그가 죽을 당시 관에 새긴 시의 한 소절이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정신이란 무엇일까

2. 볼테르의 정신은 어떤 것인가

1760년, 66세인 볼테르는 경제적 부유함과 작가로서 거둔 성공을 평화로이 길 수 있는 노년기를 맞는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시인과 극작가로서 획득한 영광에 만족하지 않고 정신의 혁신을 장려하는 데 몰두한다. "나는 행동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단언한 바 있듯이 노년의 볼테르에게 글 쓰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파렴치를 분쇄하기 위해서이고, 파렴치에 대한 투쟁에 그는 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그 계기를 찾는다면, 1762년에 있었던 칼라스 사건이다. 그 사건의 을 파악하고 있었던 볼테르가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에 썼던 표현이 바로 "파렴치를 분쇄하시오"이다. 그 때부터 이 말은 볼테르의 슬로건이 된다. 그렇다면 볼테르가 규정하는 파렴치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파렴치란 인간성을 굴복시키고 그것의 진보를 방해하는 것, 즉 신화·신비·인종과 혈연 의식·지식과 권력의 신성화, 의식 속에 감추어지고 전체주의적인 성향으로 법제화된 모든 이데올로기, 왕권과 교권의 전제적 동맹, 사회를 공포와 위협에 떨게 하는 미신과 야만성의 결합, 편견 등이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 파렴치는 "나는 신을 찬미하며, 친구들을 사랑하며, 적들을 미워하지 않으며 그리고 미신을 증오하면서 죽는다"고 볼테르가 말했듯이 미신, 맹신, 교의의 절대성에 기반을 둔 비관용, 신학적 논쟁이다.

게다가 볼테르에게는 그 당시 프랑스 자체가 파렴치이다. 18세기의 프랑스는 식민지 쟁취를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 호송한다. 이러한 만행을 보고 볼테르는 "왜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지배하는데 열중하는가"라고 비판하는데, 이처럼 인간의 지배에 대한 열광도 파렴치의 일면이다.

이같은 여러 행태의 파렴치에 대응해 볼테르는 자연의 소리, 이성에 대한 믿음, 관용을 내세운다. 이것은 다원론과 차이에 대한 권리, 생각하면서 사는 권리인 것이다. 그 중 특히 관용은 그가 죽을 때까지 수호하는 덕목이기도 하고, 사회 참여 철학자로서 가장 인정을 받게 했던 테마이다.

볼테르가 살았던 18세기의 프랑스는 잔혹하게 억압하는 체제를 따르고 있었기에 비관용이 만연해 있었다. 특히 국교인 구교, 즉 가톨릭교 외의 종교는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상황에서 관용에 대한 볼테르의 성찰이 행동에 옮겨지게 되는 계기가 앞서 언급한 칼라스 사건이다. 이 사건은 종교적 비관용 뿐 아니라 죄인에 대한 야만적 처벌과 나아가 프랑스 사회에서 정의의 부재를 보여준다. 종교 재판소는 신교도라는 이유만으로 칼라스가 구교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살해한 것으로 판결하고 잔혹하게 차형에 처한다. 신교의 범죄라는 선입관에 빠져 오로지 그쪽으로 몰고 간 사건이다. 그 시대는 입법기구가 비관용의 대명사로 통하기 때문에 재판 결과의 억울함과 정의를 호소하기 위해서는 법이 아니라 볼테르 같은 지성인을 찾는 풍토였다.

추방자의 신분으로 있던 볼테르는 이 사건을 바로 잡기 위해 편지나 소논문 같은 글로써 행동한다. 그는 전 유럽에 프랑스의 종교적 비관용을 알리고 그 희생자인 선량한 소시민 칼라스의 명예회복을 시도한다. 그 결과 3년 후에 칼라스의 결백이 인정되고, 이를 계기로 사람들은 볼테르를 '칼라스의 사람'이라 부른다.

또 다른 한 예로, 19세의 청년 라바르 기사는 신성모독과 불경이라는 흉악범의 죄명을 뒤집어쓴다. 혀와 머리가 잘리고, 그의 집에서 발견된 볼테르의 '철학사전'과 함께 몸이 절단되고 불태워진다. 이 사건에서는 "결백한 피가 외칩니다. 나도 외칩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외칠 것입니다"라는 강한 메시지로 맹신의 희생양이 된 청년의 명예회복에 혼신을 다한다. 구제도가 내세우는 정의에 반기를 든 이러한 일련의 격렬한 투쟁은 추방자의 신분인 그가 감수하기에는 위험하고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싸움은 나아가 체제의 변화에도 한 몫을 하는데,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루이 16세가 1787년에 '관용칙령'을 선포한다. 그 내용은 구교 신도가 아닌 사람이 구교로 개종하지 않아도 민적(호적)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신교도들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인권선언문'이 선포된 이후부터이다. 사실 이러한 칙령이나 인권선언문의 전신은 볼테르가 살아생전에 그런 사항들을 제시했던 '관용론'(1763)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볼테르의 이러한 행동은 현대적 정신의 출현을 유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다수의 여론이 비관용적인 권력에 등을 돌리고 관용에 동조하게 되어 여론의 힘과 대중정신이 형성된 것을 보면, 이것은 바로 볼테르의 행동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관용에 대한 감정을 생기게 하고, 전파되어 생겨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정신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여러 상황은 볼테르의 사고와 행동 간에 본질적인 구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착수했던 작품의 다양한 주제와 장르에서도 그러한 통일성이 드러난다. 볼테르의 작품은 인간운명과 인간 사회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인간, 자신의 사상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 다시 말해 철학자로서의 사고를 표명한 것이다. 볼테르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그가 변호하려는 일들을 위해 사용하는 무기이자, 항상 그의 생각을 전파하고 설득시키려는 욕망의 부산물이다. 그러면 볼테르에게는 무기이고 독자에게는 거운 콩트인 '깡디드'를 기대한다.

김영리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파리 소르본느대학 불문학박사 kyl7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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