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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설문학 / 고소설의 발달과정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12. 19:39

 

조선의 소설문학 1 / 고소설의 발달과정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으로 가자     

 

 

조선의 소설문학


                                                                                                                       국문학과 교수   박태상



I. 고소설의 흐름


 도입 

 1)소설의 근원은 이야기이다. 설화는 신화계이야기, 전설계이야기, 민담계이야기로 개성을 지니면서 성장해왔다.

 2)고급 이야기형식인 소설은 귀족문학과 서민문학간의 대립이 약화되면서 이루어진 장르이다. 발전과정에서 金時習, 許筠, 金萬重, 朴趾源의 4대가의 활약이 컸다. 물론 중국문학이란 외래문화의 영향도 컸다고 할 수 있다.

 3)고소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한다. 하나는 패관문학(더 올라가면 사마천의 ?史記? 열전의 영향을 들 수 있음)이 假傳의 형태로 변모되고, 이것이 짜임새있게 형태를 갖추어 한문단편이 된다. 그리고 한문단편이 허구와 삶의 진실성을 용해하여 미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었을 때 한문소설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또 한 부류는 패관문학(패관적 모티프)이 설화로 분화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국문소설이 된 것이다.


 전개

 1)고소설의 흐름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본격적인 고소설을 마련하는 생성시기로 단순 서사체인 설화적 이야기를 초기의 소설적 이야기로 올려 놓은 가전체, 전기체 소설시대이다. --麴醇傳, 孔方傳, 麴先生傳, 淸江使者玄夫傳, 竹夫人傳, 楮生傳 등 假傳體小說의 형성기 / 김시습의 단편소설집 ?金鰲新話?가 나와서 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과 같은 수준높은 한문 전기계 단편소설이 창작된 시기


 2)성숙기는 국문소설이 등장하고 가전체, 전기체를 벗어난 전기적 서사체가 중심을 이루던 시기이다. 허균, 김만중 등의 대가들이 소설의 흐름을 크게 발전시켜 놓고, 다수의 작가들이 창작에 참여하여 군담계 영웅소설이 독서계의 대유행을 가져온 시기이다. --허균은 이시기에 홍길동전이외에 蓀谷山人傳, 張山人傳, 嚴處士傳, 南宮先生傳, 蔣生傳 등을 창작했다. 또 김만중은 이 시기에 九雲夢과 謝氏南征記를 창작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군담소설,애정소설, 가정소설 등이 크게 융성하였다.


 3)결실기에 해당하는 영정조대 이후의 소설들로서 형태적으로 세련된 한문, 국문의 단편소설과 대장편인 대하소설이 창작되는 시기이다. 이와 함께 판소리의 성행의 여파로 판소리계 소설이 풀현하여 창작계 소설과 새로운 각축을 벌리며 공존하는 시기이다. 이시기의 작가로는 實學派의 대가인 燕巖 朴趾源과 판소리의 개작자인 申在孝가 있다. --연암의 許生傳, 虎叱, 兩班傳, 穢德先生傳, 閔翁傳, 廣文者傳, 虞裳傳, 金神仙傳, 馬駔傳의 9전과 작품이 전하지 않는 易學大盜傳, 鳳山學者傳 그리고 실전으로 간주되는 烈女咸陽朴氏傳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고 판소리는 12마당에서 신재효에 의해 6마당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외 대하소설인 가문소설 玩月會盟宴, 林花鄭延, 尹河鄭三門聚錄, 明珠寶月聘, 華山仙界錄, 劉李兩門錄 등이 창작되어 유통되었다. 

 

II.?금오신화?


 1. 작가


 梅月堂 金時習(1435 - 1493)은 東峰, 淸寒子, 贅世翁, 碧山淸隱, 雪岑 등 실로 다양한 호를 가졌는데, 그것은 그의 삶의 파란만장함과 자유분방한 사유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지조를 지키어 39년간이나 방랑생활을 하는 소외적 삶속에서도 16권이나 되는 방대한 불교적 사상서와 ?四遊錄?이라는 기행적 창작시, 그리고 ?金鰲新話?라는 독특한 형식과 아름다운 문체의 전기소설을 창조했다. 그의 삶과 철학을 정리해 보면, 그의 삶속에는 ㄱ)어머니를 잃은 후의 고독감과 애상감으로 상징되는 ‘고아의식’, ㄴ)불의에 대한 저항과 방외인적 삶, ㄷ)자유분방한 사고와 기행, ㄹ)儒, 佛, 仙의 변증법적 인식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2. 매월당의 세계관


 그의 세계관은 ‘一氣槖籥論’과 ‘精氣已散說’과 ‘圓而無物論’으로 요약할 수 있다. 김시습은 원래 ‘일이론’에서 ‘일기론’으로 생각을 바꾼다. 애초에 주리론에 정통했던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행위 이후에 그의 세계관을 바꾼다. 그의 ‘일기탁약론’이란 천지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기가 풀무질할 따름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물론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 노장사상에 바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정기이산설’이란 “사람이 죽으면 정신과 기운이 흩어지고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몸뚱이는 땅으로 내려가 근본으로 돌아간다”라는 주기론에 입각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원이무물론’이란 기사상에 바탕한 그의 우주관인데, 하늘은 그 형태가 둥글되 물체는 없다는 것이다.


 3. ?금오신화?의 소설사적 위상


 최근의 ?최치원전?을 소설의 효시로 보자는 학설의 제기로 인해 금오신화설은 많이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다음의 다섯 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은 그 문학사적  위상이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1)최초의 소설이라는 소설장르를 개척한 공적, 2)전기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한 업적, 3) 사회현실을 우의적으로 묘사하여 ‘사실성’이라는 문학 본래의 기능을 강화시킨 공로, 4)?전등신화?, ?태평광기? 등의 중국문화를 유입하여 독창적인 새로운 문학을 창조해낸 점, 5)작품에 나타난 민족주체성과 역사의식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통해 단순한 미적 형상화의 부산물로서가 아니라 역사속에서 숨쉬고 있는 생명력을 지니는 텍스트를 창조해낸 점 등이 평가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태상 등에 의해 제시된 최치원전설은 「최치원전?이 1)세계의 파편화현상을 반영함, 2)‘문사형’의 전형적 인물이 등장함, 3)운명을 개척하는 ‘자기 실현 요구형’의 인물이 부각됨, 4)자기 비판능력을 갗춘 패로디의 성격을 지님, 5)서사시적 예언이 아닌 소설적 예측을 보여줌 등의 특성을 나타냄에 따라 최초의 소설로 평가하고 있다.


 4. 작품의 의미구조 분석


 ?금오신화?에 들어있는 작품들은 傳奇小說로 평가받고 있다. ‘奇異를 傳述한다’는 뜻의 전기는 본래 志怪와 구분하기 위한 唐代 소설의 범칭이었다. 한마디로 傳奇는 비인간적이며 비논리적인 몽환의 세계, 천상의 세계, 명부의세계, 용궁의 세계 등 시공의 제한을 두지 않고 주인공이 활약하는 기이한 사건을 다룬 소설을 말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들 수 있다. ?金鰲新話?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다섯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萬福寺樗蒲記」는 주인공 양생이 만복사에서 부처님에게 가우를 점지해 달라고 발원하여 이미 3년전에 죽었으나 환생된 낭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이다. 「李生窺墻傳」은 서생인 이생과 권문세가 집안의 규수인 최낭자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홍건적의 난에 희생된 최낭자가 환생하여 부부지정을 이어가는 내용의 전기적 모티프를 지닌 작품이다.

 「醉遊浮碧亭記」는 개성에 사는 선비 홍생이 평양 부벽정에서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 천년전에 죽어 하늘에 올라가 신선이 되어 있다가 인간계에 내려와 부왕의 묘소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기자왕의 딸과 고금사를 나누고 시로 호답하여 하룻밤의 사랑을 속삭이는 일종의 몽유록이다. 「南炎浮州志」는 유학자인 박생이 평소 불교의 지옥설에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바다 속의 한 섬에 닿아 남염부주라는 염라대왕이 사는 곳으로 나아가 염왕과 오랜 시간 동안 불교와 유학에 관한 문답을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이다. 「龍宮赴宴錄」은 한생이 꿈에 용왕의 초청을 받아 수중국인 용궁을 구경하고 선물을 얻어 나온 이야기인데, 어족들을 해학적으로 의인화하고 용궁의 문물을 표현하면서, 작가가 5세때 궁중에 들어가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았던 것에 비의한 寓意에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금오신화?의 다섯 작품중 「이생규장전」, 「만복사저포기」, 「취유부벽정기」의 세 작품은 애정소설에 해당된다.


III. 연암의 한문소설


1.작가


 燕巖 朴趾源(1737 - 1805, 영조 13년 - 순조 5년)은 18세기 말에 북학의 거두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 후한학사대가들과 더불어 선진적인 외국문화의 섭취를 주장하던 북학파의 한 사람이자, 정약용과 더불어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던 선구자적인 학자이다.그의 자는 仲美이고 호는 연암, 烟湘, 열상외사 등을 사용하였다. 연암은 44세때(정조 14년) 그의 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연경에 가서 그곳의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중국의 명유 석학들과 접촉하고 돌아와서 ?열하일기?(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를 발표함으로써 당시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그는 ?열하일기?에서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노력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 때는 明에 대한 의리와 결부된 청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북학사상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적대적 감정이 쌓여있는 처지이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 그의 관심은 西學에도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그곳에 있는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 또 그는 「호질?, ?허생전?, ?양반전? 등 12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으나, 그에 반해 관운은 그를 따르지 않았던 것 같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34세때에는 小科初試에서 수석을 했으나, 會試에는 우인들의 강권으로 시험장에 들어가긴 했으면서도 試紙를 고의로 제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이 50세가 되어 겨우 膳工監 監役이라는 하찮은 관직에 발을 등여놓게 된다. 그 이후 司僕寺主簿, 義禁府都事, 한성부판관, 安義縣監 등을 거쳐 면천군수가 되어 정조에게 ?課農小抄?를 써 바쳐 크게 신임을 얻게 된다. 그러나 襄陽府使를 끝으로 정조가 승하하게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2. 연암의 세계관과 문학관


연암 박지원의 세계관은 자연 내지 우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기초 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의 과학적 인식은 地轉說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이는 金錫文의 지구‧해‧달이 球體로서 허공에 떠있다는 이론인 三丸浮空說에서 발전한 홍대용의 지전설에서 도움 받은 것이다. 이 지전설의 내용은 태서인들은 땅이 둥글다는 것만을 알았지 땅이 구체로서 회전운동을 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하고,지구가 일전하면 一日이 되고,달이 지구를 한 바퀴를 돌면 一朔이 되고,해가 지구를 한 바퀴 돌면 一歲가 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또 연암은 종래의 ‘오행설’에 대한 신해석을 하였다. 즉 종래의 오행설은 사생론을 그 주축으로 하고 상극론을 곁들여 종종의 미신적 사고를 부연해 오면서 근2천년 동안 동양인의 사고를 지배해 왔다. 상생론의 골자는 주지하듯이 <목생화,화생토,토생금,금생수,수생목>라는 단순한 다섯가지 무기물질에 부여한 자모적 연쇄관이 그것이다. 이 소박한 발상은 마침내 유생관을 부여하고 사변적으로 추상화시켜 방위(오방-동.남.중.서.북),색채(오색-청.적.황.백.흑),맛(오미-신.고.감.산.함),성음(오음-각.치.궁.상.우),그리고 인간의 품성(덕-인.예.신.의.지)에 이르기까지에 연결시켜 우주를 오행이라는 연쇄망으로 결박시킨,그리하여 구속적이며 규격적인 우주관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점복,참휘 등 갖가지 미신적 사고가 산출되어 온 것은 주지하는 바이지만,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우주관이 은연중 구속성,폐쇄성,규격성에로 지향된 봉건적 윤리의식의 배경적 사고로 기능해왔다는 점이다.

 연암의 세계관의 대체적인 면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우주에 대해 자연과학적인 접근태도를 갖고 있었다.

 둘째,사물을 발전적인 동태로 파악하려 했다.

 세째,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해 있었다.

 네째,사물에 대해 개체주의적인 접근태도를 가짐으로써,개방성을 띠고 있었다.

  연암의 사상은 실학사상과 북학사상으로 요약된다. 연암의 학문은 실용성이 없는 논쟁위주의 성리학이나 사장학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는 또 <北學議序>에서 만일 학문을 하려 한다면 중국을 버리고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연암의 문학관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그는 ‘法古창신’을 강조하고 있다.우선 법고에서 변할 줄 알고 창신에서 전아할 수 있는 ‘법고창신’의 고귀함을 밝히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 문장은 寫意에서 그쳐야지,妄想이나 假飾이 스며들어서는 안된다는 ‘寫實爲主’의 문장론을 전개하였다.그의 <孔雀館文稿 自序>에 나오는 귀울림(耳鳴)과 코골기(鼻간)의 비유가 이러한 그의 생각을 반영해 주는 글이다. 이 글은 뒤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세째 연암은 사실적인 표현과 더불어 상스러운 일상어와 예사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나 아이들의 노래 및 마을의 상말까지도 市井의 생활상을 그대로 묘사하기 위해 적극 수용해야 함을 주장한다.


 

 3. 「양반전」의 의미구조 분석


 「양반전」의 작품구조는 매우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은 ‘기 - 승 - 전 - 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첫 부분에서는 글읽는 것만 알고 끼니를 이어가는 방도를 전혀 모르는 정선고을의 한 양반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환곡을 타다 먹은 것이 천석에 이르러 갚을 방도가 없어 쩔쩔매는 이야기와 이 말을 들은 고을의 천부가 양반을 사는 조건으로 환곡을 관청에 가져 다 갚는 이야기가 나온다. 둘째 부분은 군수가 개입하여 고을의 사, 농, 공, 상의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양반의 조건을 명시한 공문서를 작성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承에 해당한다. 轉의 부분은 형식과 구속에 얽매이는 양반의 규율을 전해들은 천부가 좀 더 좋은 조건을 삽입해 달라는 말을 하는데, 군수가 새로 집어넣은 내용인즉 상민들에게서 물건과 노역을 탈취하고 무단을 행하는 전횡적인 양반의 모습임을 발견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장면이다. 結은 천부가 양반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길을 떠나 다시는 양반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는 짧은 대목이다.

 「양반전」의 줄거리의 핵심모티프만을 추출하면 다음과 같다.


 1)양반이 관곡을 빌려 먹음(가난때문)

 2)양반의 위기(관찰사 순행시 발견)

 3)천부가 위기에서 구해줌(양반 매매조건으로 관곡을 대신 갚아줌)

 4)조정자 출현(군수가 개입, 증명서 작성)

 5)제 1문권 작성

 6)제 2문권 작성

 7)천부의 깨달음 - 길 떠남


 1)은 무능하고 생활능력이 없이 무위도식하는 양반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2)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양반이 관곡만 축내는 현실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다. 3)에서는 賤富의 말을 통해 당대의 사회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4)에서는 군수가 조정자를 자처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된다. 군수가 천부의 행위를 “재물이 넉넉하면서 인색하지 않은 것이 義요, 사람이 어려운 것을 도와주는 것은 仁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 하고, 존귀한 것을 사모하는 것은 智이니, 이것은 참 양반이니라”라고 선언하는 것은 당대 현실을 상징하는 풍자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5)에서 증명서를 작성하기 위해 관청의 뜰에 고을의 선비와 농업 하는 사람, 공업 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들까지 불러 모은다. 이것은 농업과 상공업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푬 것이자, 작가 연암의 이용후생에 바탕을 둔 실학사상을 반영하는 표현인 것이다. 

IV. ‘雲英傳’에 나타난 사랑과 죽음의 의미

                                                       박 태 상


1. 긴장과 풀림의 반복구조


<雲英傳>은 宮女인 운영과 宮外野人인 金進士가 조선의 봉건적 사회제도의 모순된 현실을 뛰어넘어 인간본능의 자유스러운 표출을 모색하여 에로스를 추구하다가 결국 한계에 부딪쳐 자살한 내용을 담은 일종의 비극소설이다.

여기에서는 李在秀 교수 소장본인 한글 필사본을 텍스트로 하여 작품구를 분석하고, 작품의 미적 가치를 규명해 보기로 한다.



이러한 전체 줄거리를 통해 작품의 내적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 柳泳이 壽聖宮에 가서 술에 취하여 잠을 잠-깨어남.

㉡ 金進士와 雲英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함.

③ 柳泳이 술에 취하여 잠을 잠-깨어남.


이와 같이 이 소설은 ㉠㉢의 외부구조 속에 ㉡의 내부구조를 품고 있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柳泳의 이야기 안에 金進士, 雲英의 로맨스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소설을 우리는 흔히 額子小說이라고 한다. 액자소설이란 “이야기 속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비교적 짧은 내부 이야기를 내포하는 소설의 구성형식”1)을 말하며, ‘나’와 ‘그’ 또는 ‘그’와 ‘나’라는 이중의 인물시점의 서술방법을 택하는 소설을 의미한다.


작품의 의미파악에 앞서 작품의 구조분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핵심모티프를 중심으로 기본 줄거리를 좀더 요약, 압축하기로 한다.


(1) 선비 柳泳이 壽聖宮에 놀러 간다.

(2) 유영이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깬다.(夢--覺)

(3) 유영이 金進士와 雲英을 만나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다.

(4) 安平大君이 私宮에 운영 등 10명의 궁녀를 둔다. (雲英은 특수한 신분의 여성임)

(5) 文士인 김진사가 안평대군과 詩를 화답하다가 雲英을 만난다.

(6) 안평대군이 궁 밖 출입을 금하는 엄명을 내린다. (장애 요소 등장)

(7) 김진사와 운영이 로맨스에 빠져 戀書를 주고 받는다.

(8) 김진사가 西宮 담을 넘어들어 운영과 密愛를 나눈다. (1차 모험)

(9) 雲英이 탈출을 위해 의복과 중보를 궁 밖으로 옮긴다. (2차 모험)

(10) 김진사의 奴僕인 特이 흉심을 품는다.

(11) 特의 발설로 인해 宮中 財寶의 반출이 大君에게 알려진다.

(12) 안평대군이 西宮의 궁녀들을 문초하여 운영을 別堂에 가둔다.

(13) 운영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자결한다. (모험의 실패-죽음)

(14) 김진사가 운영의 齋를 지낸 후 죽는다. (남성이 뒤따라 죽음)

(15) 유영이 두 사람에게 天上의 사람이 되었느냐고 묻는다.

(16) 두 사람이 자신들의 기록을 후세에 전할 것을 부탁한다.

(17) 유영이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책자만 놓여 있었다.


위의 핵심모티프를 살펴보면, <운영전>은 ‘평범한 남자와 특수한 신분의 여자와의 로맨스-장애 요소 등장-모험시도-죽음-사랑의 성취’의 패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운영전>의 기본구조는 <螺中美婦說話> 또는 그 변이설화의 구조와 유사한 것이다. 또 콩쥐팥쥐형이나 신데렐라형 그리고 로망스 문학의 모험을 통한 사랑 성취형 이야기와도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단지 이야기마다 모험이 실패로 끝나느냐, 성공하느냐에 따라 죽음이 등장하느냐, 사랑의 성취가 이루어지느냐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螺中美婦說話>를 핵심모티프 중심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평범한 총각이 늦도록 장가를 못간다.

(2) 농사를 지으며, “이 농사를 지어 누구랑 목을꼬”라고 혼자 탄식한다.

(3) 논고동속의 美女를 발견하고 같이 산다. (로맨스․결혼)

(4) 하루는 몸이 아파 美女가 대신 일하러 나가는데, 그 고을 縣官이 그녀를 보고 흑심을 품는다. ---그녀를 官家에 데려감.

(5) 총각이 官家에 찾아가 美女(아내)를 돌려 달라고 하나 縣官은 듣지 않는다.

(6) 총각은 靑鳥가 된다. (죽음)

(7) 美女도 음식을 전폐한지 수일만에 죽어 참빗이 된다.2)

 


<운영전>의 내부구조에 나오는 운영과 김진사의 로맨스는 이와 같은 ‘童話的 모티프’를 가지고 있음에 따라 흥미도를 더하기 위해 극적 긴장으로 치닫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운영전>에서 장애요소의 등장과 그것을 극복․초월하기 위한 모험의 시도는 치열할 수밖에 없고, 그것의 실패에 따른 죽음으로의 급전직하는 긴장된 구조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운영전>에는 이러한 긴장의 구조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세밀한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는 주로 詩의 和答을 통한 풀림의 완화된 구조가 등장하게 된다.


포의혁 뵈옷닙고 가죽온 션븨가

옥모여신션 옥튼 얼골이 신션갓도다

향렴간망 양 발이로 여허보나

하무월하연 엇지여 달아 인연이 업고

셰안누작슈 낫씨시 눈물노 물을 지엇고

탄금한명현 거문고 타 줄이 울믈 한도다

무한흉듕원 한업 흉듕에 힌 원을

두독소텬3) 머리 드러 홀노 하늘게 을리라.


安平大君과 金進士의 詩和答 장면을 문틈으로 엿보던 雲英이 자신의 마음이 담긴 이와 같은 詩를 지으나, 건네줄 인편이 없어 안타까와 한다. 이 시에는 이러한 운영의 간절한 사연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렇게 <운영전>에서 로맨스의 진전 또는 사건의 전개에 중요한 매듭역할을 하는 것은 ‘漢詩의 和答’이다. 그런데 이러한 漢詩의 화답을 통한 스토리 전개는 ?金鰲新話?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2. 現實의 논리와 超越의 논리


<雲英傳>에는 당대 규범을 준수하여 순리대로 살아가려는 입장과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여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입장이 상충되면서 공존하고 있다. 전자는 현실의 논리라고 말할 수 있으며, 후자는 초월의 논리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운영의 입장에서 보면 두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안평대군 私宮의 한 궁녀로서 그 나름대로의 규범과 질서에 쫓아 살아가는 자세는 현실안주의 자세로서 자아가 세계와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할방법에는 인간적인 본능과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모순이 자리하게 된다. 반면에 현실모순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기 동일성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게 된다. 결국 운영은 안평대군의 자애로움과 김진사의 사랑의 틈바구니에서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속적 사랑(어느 정도 충의 개념임)에서 벗어나려고 하니, 안평대군의 자애로움이 마음에 걸리고, 개체적 사랑을 취하려고 하니 궁녀라는 신분적 제약이 장애요소로 등장하여 심적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운영은 남자로 태어나서 자신의 능력과 기개를 떨쳐볼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됨을 한탄하며, 深宮에 들어와 인간적인 욕정을 펴보지도 못하고 古木과 같이 썩게 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로 파악한 것이 바로 김진사와의 사랑의 성취인 것이다. 마음은 초월의 논리로 이끌리고 있으나, 현실의 논리의 견제로 인하여 그녀는 쉽게 결단을 못 내리게 된다.


3. 世界觀의 확대와 축소


<운영전>은 여타 고소설과는 다른 세계관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천상계의 인물이 실제로 謫

降하여 地上界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특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흔히 다른 고소설에서는 남녀주인공이 천상계에서 得罪하였기 때문에 그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의미에서 지상계로 축출되게 된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끝나면 그 징벌의 원인이 소멸하여 다시 천상계로 올라가게 된다는 줄거리가 대종을 이룬다. <운영전>도 지상계로의 축출과 천상계로의 복귀까지는 일치하고 있으나, 천상계의 인물이 다시 하강하여 지상계 인물인 유영과 私談을 나눈다는 것이 변이된 모습인 것이다.

<운영전>의 대체적인 골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柳泳; 醉-夢-覺-> ㉡柳泳․ 金進士․ 雲英의 만남-> ㉢金進士와 雲英의 과

 거지사 -> ㉣ 취-몽-각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운영전>은 지하계가 잠재되어 있는 三元的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에서 지상계 인물인 유영은 醉-夢의 상태에서 ㉡의 김진사, 운영을 만난다. 이러한 꿈처리는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보여줄 때 흔히 쓰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처리는 현실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宮女와 宮外野人과의 로맨스를 승화시켜 보여주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에서 천상계인물인 金進士와 雲英이 다시 현세에 나타나 지상계 인물인 유영을 만난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다른 소설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죽어 지하계에 갔던 인물이 소생하는 경우는 있어도 천상계로 승천했던 인물이 지상계로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두 인물이 지상계에서 사랑을 성취하지 못하고 천상계에 복귀해서 소원을 성취하는 이야기는 <운영전>의 작품 말미에 유영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언급되어 있다.


<운영전>은 다른 고소설과 마찬가지로 세계관의 확대가 나타나 있다. 단순한 일원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삼원적인 세계관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의 확대는 운명론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사상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天思想에 바탕을 둔 유토피아적 생각의 반영인 것이다. 두 인물이 만나 로맨스를 나누고 결국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실패하여 좌절을 맛보고 죽는다는 줄거리는 두 사람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조절과 죽음의 선행적 과정을 두 인물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과정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가) 본래 天上界의 仙官, 仙女-得罪(蟠桃瓊實을 많이 따먹고 사사로이 雲

    英에게 줌)-地上界로 축출(징벌)-天上界로 복귀                   

                   (나)                                            

 (나)남녀주인공의 로맨스-장애요소등장-세계와의 갈등에서 패배-죽음   


위의 (나)는 지상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이것은 (가)에 있어서 징벌로 지상계로 축출되는 부분에 해당된다. <운영전>은 이러한 구조를 지니고 있음에 따라 운명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죽음은 순환적인 세계관과 관련맺는 신화적인 차원에서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죽음은 인생의 종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운영전>에는 이와 같은 운명적인 세계관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적인 본능, 욕구에 따라 행동하려는 자기확인의 논리도 등장하며 그에 따라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여 인간의 본질성을 되찾으려는 實存的인 세계관도 나오고 있다.


4. 갈등과 화해의 변주곡


<雲英傳>에는 인물간의 세 가지 갈등양상이 나오고 있다. 우선 雲英이 안평대군과 김진사 사이에서 忠과 愛情의 갈림길에 서서 방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러한 심리적 갈등양상은 이 소설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부분으로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나머지 부수적인 두 가지 갈등양상은 안평대군과 궁녀 사이와 金進士와 그 하인인 特 사이에서 빚어진다. 전자는 인간의 본능과 욕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억압하는 사회규범 및 유교적 윤리(私宮 속의 궁녀들은 大君에게 일종의 忠을 바쳐야 하므로)에 대한 반항적 언행에서 나타나고, 후자는 하인인 特이 상전인 김진사를 능동적으로 이끄는 행동도 하고, 모해할 흉계를 꾸미는 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즉 후자는 양반과 종 사이의 갈등양상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잘 반영하는 일면이다. 두 갈등 양상의 공통점은 모두가 양반․귀족 중심의 사회에서 비롯되는 모순에 기인한다는 데에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전자보다 후자가 좀더 갈등양상이 심각하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보면 두 대립 인물간의 갈등은 파국으로까지 치다지 않고 지배자의 아량 내지 선심으로 인해 화해국면을 맞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운영전>의 원본이 한문본일 가능성이 높고, 그 독자층이 주로 양반층이었을 것임에 기인하는 것이다.

안평대군의 私宮의 궁녀들이 인간적인 애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깊은 궁궐 속에서 젊음을 억누른 채 썩어가고 있는 것을 한탄하며, 자유로운 애정표출을 기대하는 동시에 신분에 따른 구속상태를 벗어나고 싶은 감정을 표현하는 대목은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임란 이후의 당대현실의 모순 속에서 여성계층이 어느 정도 자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하며, 유교윤리에 입각한 남성 위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여성계층의 자각 내지는 사회의식의 변화를 반영해 주는 현상이다.

한편 김진사와 특과의 갈등양상은 좀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하인 특의 언행에 의해 여주인공의 죽음까지 야기하게 되는 소설의 스토리 전개와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특히 하인 특은 수동적인 金進士에게 월장할 계획을 알려주고, 사다리 등을 만들어주는 동시에 雲英을 궁 밖으로 이끌어 탈출시킬 방도까지 마련해 줌으로써 사건의 전개를 긴박하게 하고, 클라이막스를 향해 스토리 전개가 상승국면으로 치닫게끔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또한 특은 결국 순진한 文人才士인 상전을 배신하여 함정에 빠뜨릴 흉계까지 꾸미는 흉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의 양반중심의 유교사회에서 빚어지는 모순된 신분계급간의 갈등이 노정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증세를 반영하는 작품이란 점이 분명한 것은 서민계층의 신분상승욕구를 반영하는 조선후기 판소리계 소설 등과는 달리, 양반은 ‘착하고 인품있고 자애로운 인물’인 데 비해 하인인 천민계층은 ‘흉악하고 잔인하며 잔꾀나 부리고 악행을 도모하는 못된 인물’이란 도식을 도출하고 있는 점에서이다. 이는 중세에 위치한 조선조를 무리없이 이끌어나가기 위한 양반들의 지배자적인 논리인 것이다. 결국 소설에서 하인 特을 하늘의 노여움을 사 함정에 빠져 죽는 것으로 플롯을 짠 것에서도 이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에 앞서 오히려 김진사는 특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고 雲英의 齋를 위해 다시 한번 노력해 줄 수 있겠는가 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보임으로써 양반의 인격 및 존재위치를 고양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소설은 葛藤과 和解의 變奏曲의 양상을 지니지만, 결국 이것은 <운영전>을 소수의 양반독자에게만 인기있는 소설로 굳히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하인 特의 인물성격은 다음과 같이 상전에게 좋은 꾀를 알려주는 謀事家 및 智略者 역할도 하면서 동시에 상전인 양반을 흉악한 꾀로써 몰락시키려고 하는 이중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V. 최척전


 「최척전」은 중종에서 인조때까지 활동했던 조위한이 지은 애정소설이다. 「최척전」의 창작은 1621년(광해군)에 창작되었고, 이 시기가 허균이나 권필의 사망 뒤이므로 「최척전」은 「주생전」이나 「홍길동전」보다는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최척전」의 이본에 대해서는 그간 학계에 알려졌던 일사본<최척전>과 최근에 발견된 고대본 그리고 정명기교수가 새로 소개한 천리대본이 알려져 있다.

 「최척전」은 특히 임진왜란의 참상을 고발한 포로문학이라는 데에 그 문학적 가치를 둘 수 있다. 아울러 「최척전」은 전쟁이라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강한 가족애를 다룬 애정소설이라는 데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최척전」의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옥영전’이라고 할 정도로 여주인공의 전쟁에 따른 수난과 가족의 헤어짐의 고통, 그리고 남편과의 재회를 통한 사랑의 성취모색 등을 다룬 애정소설이라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임진왜란 관련실기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임란 종군실기, 임란 피란실기, 임란포로 실기가 그것이다. 임란 포로실기는 포로체험 당사자의 직접 체험이 담겨 있어 수난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실기는 「최척전」의 포로이야기와 많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실기로 강희맹의 5세손인 강항의 「간양록」이 있다.

 한편 임진왜란 관련 서사물로는 「홍도이야기」의 야담, 「간양록」으로 대표되는 임란실기, 「난중잡록」으로 대표되는 야사, 「최척전」이라는 역사소설 내지는 사실주의 소설 등 실로 다양한 장르가 모색 실험되었다.

 끝으로 「최척전」은 16 -7세기의 동아시아의 변혁의 시대의 변화양상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접이 특징이다. 특히 전쟁과 국제무역과 전쟁에 의해 훼손된 인간실존의 당위성 문제를 심도있게 다룬 수작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다섯 차례의 만남과 네 차례의 헤어짐을 통해 사랑의 성취를 위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것은 ‘헤어짐’의 과정에 당대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모두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투철한 역사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V. 박씨전


 「박씨전」은 여호걸계소설의 범주에 들어가는 역사소설이다. 따라서 ‘상위적 여성’과 ‘하위적 남성’이 등장하여 스토리가 전개된다. 「박씨전」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준 설화에는 이와 같은 천상계 여자와 지상계 남자와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온달, 서동설화와 나무꾼과 선녀이야기, 천상선녀로서 우렁이로 변신한 여자와 어부가 등장하는 욕신금기 설화를 비롯하여 백조소녀 설화, 고려 태조의 조부인 의조와 그 왕비인 용녀의 설화, 중강진 운림지 설화, 지하국대적퇴치설화 등이 있다. 또 불경에 나오는 파사닉왕의 추녀 금강공주의 고사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소설은 우선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소설의 구조는 크게 이시백의 집안을 배경으로 하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전반부를 차지하고 국가적 이야기인 전쟁담이 후반부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전반적인 구조는 ‘혼인 - 박해․시련 -시련극복-도술적인 무영담 -행복한 결말’로 되어 있다. 또 이 소설은 여주인공 박씨부인이 추에서 미로 변하는 변신모티프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박씨전」의 창작동기는 조상 대대로 지켜온 아름다운 국토를 무자비하게 유린한 호적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의 감정을 불어넣으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이 소설의 배경에 병자호란이 자리잡고 있고, 이시백이라는 당대의 명신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IV. 구운몽


 1.작가


 서포(1637 - 1692 숙종 18)의 자는 重叔,호는 西浦였다. 서포의 소설이 등장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서포의 생애와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서포 김만중이 소설창작에 몰두하게 된 이유는 그가 현실정치에서 어려운 시련기를 맞이하였을 때이기 때문이다. 서포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그의 어머니 윤씨부인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행으로 인하여 그는 죽은후 숙종 32년 1706년에 국가로부터 정표가 내려졌다. 그의 어머니가 항상 서포와 더불어 거론되는 이유는 그가 유복자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정축년 정월 22일 강화도가 함몰되자 그의 선고 김익겸은 세자와 비빈의 몽진을 옹위하는 중임중에 순절하니 이 때에 만중의 백형 만기는 5세였고 만중은 태중에 있었다. 이 때부터 집안은 가난하여 윤씨부인은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홍부인(서포의 외조모)을 도와 가사를 보살피며 밖으로는 참판공(서포의 외조부)을 받들어 옛 효자같이 섬겼고 틈이 나면 書史를 읽어 심사를 달래며 오직 두 아들의 훈육에 모정을 쏟았다.

 이러한 모정은 서포집 권 10 先娥貞敬夫人 行狀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로부터 집안이 더욱 가난하야 몸소 다희 짜고 수놓아 조석을 니우되 常해 태연하야 일직 근심하는 빛이 없고, 또한 불초 형제로 하야곰 알게 아니하니,대개 일작이 가사에 골몰하야 서적 공부에 방해로울까 염려함이러라 불초 형제 아해쩍에 밧스생이 없으니 소학 史略 당시 같은 류는 대부인이 다 손소 가라치시니 비록 사랑하시기를 과히 하나 그 글 전하시기는 심히 엄히 하사 常해 닐오되,너해 무리 다른 사람에 비길배 하니라 반다시 재조 ㅣ 남에서 한 층이 지나야 겨우 남에게 참여하나니,사람이 행실없는 자를 꾸지자매 반다시 갈오되 과부의 자식이로다 하는지라.


 위에 나타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윤 씨 부인은 자녀교육에는 엄격하였으며, 특히 애비 없는 자식이란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욱 무섭게 자식들을 재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윤 씨 부인은 조선조의 여성의 부도와 열녀상의 한 표본이 될 만하다. 이러한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어머니상이 정립된 배경에는 윤 씨 부인의 혈통을 빼놓을 수 없다. 윤 씨 부인은 참판공과 홍 씨 부인 사이에 무 남 독녀로, 애지중지하는 할머니 정혜옹주의 사랑과 훈육에서 여성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본다. 물론 윤 부인의 고조부인 문정공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문익공 또한 영의정을 지냈으며, 조부는 선조대왕의 부마인 문목공이요,선고는 인조조의 명신이며, 이조참판을 지낸데서 나타나있듯이 그녀의 집안은 누대에 명환들을 배출한 해평 윤 씨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남부럽지 않게 배우고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윤 씨 부인 가문만이 아니라 김만중의 부친 가문도 광산 김씨로 화려한 집안이다. 윤 씨 부인의 시고조부는 사계 김장생이요, 신독재 김집이 그녀의 시종조였다.

 서포 김만중의 집안은 사실상 정축년(1637)에 이미 몰락했고, 외가는 참판공에 이어 홍부인의 하세 이후부터 몰락하였으니 서포 나이 아홉 살에 소학을 배웠고 열세 살에 사서, 시경언해를 홍문관에서 빌렸음을 보아 정확히는 기축년(1649)이니 약 10년간에 양가가 몰락하여 “몸소 다회(양말) 짜고 수놓아 조석을 니우되 常해 태연하야”에서 알 수 있다.

 이런 가난 속에 오직 두 형제를 위하여 모든 생명을 바쳐 키운 보람은 만기가 스 한 살에 급제한 갑오년(1654년)이었으니 그때 윤 씨 부인의 나이 37세이었다. 서포는 만기보다 한해 앞인 임진년에 진사에 합격했지만 만기처럼 21세에 문과에 오르지 못했다. 서포는 21세에는 낙방했다가 29세에 장원급제했으니, 윤씨부인의 나이 49세였다. 윤 씨 부인이 14세에 시집와서 17세에 만기를 낳았고,21세에 과부가 되었던 것이다. 21세의 청상으로 약 20년간 서포 형제를 키우기 위하여 피나는 고생을 했다. 그러니 만기가 21세에 급제하고 부터 생활이 다소 윤택해 지기 시작했다고 보면 서포는 17세가 되니 서포의 수학은 어머니에게서 뿐이었다고 봐야 되겠고,또 서포 형제의 감수기는 말할 수 없는 빈궁 기였기 때문에 서포의 성격형성은 자연 공명심과 효행심이 그의 생애를 통하여 강하게 발동되었을 것이다.

 서포 김만중은 29세에 정시갑과에 장원급제하여 첫 출사가 성균관 전적이었다. 30세에 정언,司書를 지냈고 31세에 持平을 거쳐 修撰에 올랐다. 32세되는 3월(현종 9년)에 낙향한 대신을 입조케 할 때 특별히 中使를 보내지 말고 승지나 史書를 보내자고 주장하다가 승지 이정과 함께 현종의 꾸중 ‘萬重之言 甚奸惡也’을 듣고 파직을 당했다. 실로 이때부터 서포의 파란만장한 정치활동은 막을 올렸다. 끝없는 色目의 갈등 속에서 자연 서인에 가담했고 드디어는 서인의 居孼이 되기까지의 그의 생활은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한마디로 서포 김만중은 정치인이 지니는 포용과 술수가 만년에는 출중했지만 초기에는 御前 직언으로 강직성탓으로 시대의 풍운아로 일생을 마쳤을 뿐이다.

 서포 김만중은 35세 때 암행어사로 賑政을 살피는 중임을 맡기 전까지 31세 8월에 성균관 교정 관으로 발탁되어 당대의 소장 문사들로 앞날이 촉망되는 신진들 속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현종의 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서를 강론하고 부터 현종의 재신임을 받았다. 이로부터 누진하여 경기, 삼남지방의 암행어사로 떠난 것이 서포가 생후 처음 어머니 슬하를 떠나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직언으로 인해 37세때 첫 유배생활을 떠나게 된다. 현종 14년 9월에 어전에서 遷陵의 일로부터 민업의 가사에 대한 喪禮문제와 許積을 논박한 소운길의 상소를 두둔하다가 현종이 당파에 치우친 언사라고 꾸짖자 ‘신은 그릇된 말을 그르다고 하였을 뿐 어찌 색목으로 혐의로운 말씀을 사뢰겠습니까’ 라고 대담하게 어전에서 허적의 파직을 주장하여 현종의 진노를 사 금성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나 다음해인 38세때 校理를 거쳐 숙종 원년에 부승지가 되었으나 남인의 대거 발탁으로 그의 강직한 성품과 과격한 언사로 그해 5월 27일 다시 관작을 삭탈당하고 ‘김’자 성을 못쓰게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러다가 삭작당한 지 5년 만에 즉 서포 나이 43세에 예조참의로 복작되어 46세까지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47세에 부제학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50세까지 공조판서,대사헌,우참찬,예조판서,의좌참찬,의금부판사로 전보되었다가 숙종 12년에 다시 대제학을 지냈다. 이  시기의 7년 동안이 서포 김만중의 전성시대인 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조의 당쟁의 원인과 발전양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쟁은 조선조 연산군 때부터 말기까지 약 360년간에 걸친 정권 탈취를 위한 당파싸움으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4가지 당파로 분파되어 사색당파라고 불리었다. 당쟁의 근본원인은 3가지인데 첫째로 유학파의 대립이었고, 둘째로 왕실외척의 내홍이었으며, 세째로 정치제도의 결함이었다. 당쟁의 기원은 선조때의 김효원과 심의겸의 사류들에 의한 동, 서 양파의 대립항쟁에 두고 있으나 그 원인을 살펴보면 고래로부터 한국의 유학은 주자학이 조종이었으며, 고려 후반기에 충청도 남포의 백이정이 원나라로 부터 주자학을 도입한 후 고려말기에는 정몽주가 계승하였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점필재 김종직이 정통을 이어 받았다.그리하여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조광조 등 석학이 배출되어 자연적으로 유종을 이루게 되었으므로 은연중 정계도 이들이 좌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 내에서는 이들을 대표로 한 유학파와 비유학파 간에 알력과 대립이 생기게 되었고 그 여파는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라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비유학파에 의해 유학파가 몰락된 후에는 외척 사이에 정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또 하나 후세 당쟁의 소인이 되었다.

 한편 당쟁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1575년(선조 8)에 사류가 동서로 분당됨에 따라 당시의 부제학 율곡 이이는 서인이면서도 1584년(선조 17)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후 약 10년간에 걸쳐 조정에 있으면서 양파의 대립을 완화하기에 노력 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는 이 산해, 노수신, 유성룡 등 동인의 쟁쟁한 인물들이 등용됨으로써 서인의 세력은 점차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이 세력을 잡게 됨에 있어서 내부분열이 생기어 1591년(선조 24)에 동인은 남인과 북인의 두 갈래로 분파되었다.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 등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 이산해 등이 영수가 되었다. 남인, 북인의 명칭의 유래는 우성전은 집이 남산 밑에 있었으므로 남인이라 하였고 이발은 북악산 밑에 살았으므로 북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그로부터 7년간은 국가와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였던 관계로 파쟁을 일삼을 겨를이 없었으나 전란이 끝나자 곧 남인인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구실로 실각되었고 북인의 남이공이 정권을 쥐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남인은 갑자기 몰락되었고, 북인이 세력을 잡게 되었다. 북인의 득세와 더불어 동인의 명칭은 없어지고 북인의 세상으로 변하였으나 곧 내분이 일어 대소 양북으로 나뉘어 진다. 광해군의 즉위로 이이첨 등의 대북이 세력을 잡았고 소북을 숙청하여 광해군의 재위 15년간은 대북인의 천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아 대북은 여지없이 몰락된다.1649년 인조가 사망한 후 병자호란에 패하여 심양으로 잡혀가 오랫동안 볼모생활을 하게 되었던 까닭에 한층 북벌사상을 굳게 품게 된 효종이 즉위하자,이제까지 서인의 집권자였던 김자점은 역모사실이 탄로되어 실각하고 송시열파가 등장하였다.그리하여 서인 내부에는 형세의 변동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나 다음 현종 초에 이륵까지에는 서인의 집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서인이 집권하고 있던 동안에도 남인은 이원익의 등용으로 명맥을 이어왔고 북인 중 대북은 전멸되었다고 하나 소북은 남아있어서 서,남,소북의 3파 대립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3색이라 일컬었고 후에 서인이 노소 양론으로 분파되니 남인,소북,노론,소론을 4색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1650년에 효종이 붕어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예절문제로 인하여 송시열이 밀려나게 되자 곧 서인이 세력을 잃고 윤휴,허적 등의 남인 일파가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나 청탁 양파로 다시 분열되었다. 1675년에 현종의 뒤를 이어 숙종이 등극하자 정권은 다시 김석주,김익훈,송시열,윤증 등을 중심으로 한 서인파로 넘어갔다. 이 기간에 왕자저사 문제로 송시열의 유배賜死를 비롯하여 서인일파가 숙청되었고 남인이 한때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6년의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았고,정권은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노,소 양론의 대항속에서 노론의 집권으로 숙종일대를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김만중은 다시 당쟁의 소용돌이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51세되던 해에 인조의 계비 복제문제의 주인공 조사석과 장씨 희빈의 문제를 들어 어전에서 왕의 모든 실책과 정국의 불안정은 오로지 女寵이 근원이 된다고 따지다가 숙종의 격분을 사 당장 투옥되었다가 숙종 13년 51세의 나이로 다시 선천에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나 영의정 김수흥의 건의로 다음해에 겨우 풀려나왔다가 숙종 15년(1689)에 인현왕후 민비를 폐출하고 장희빈의 책봉을 반대하다가 다시 남해 絶島에 유배를 가게 되고 그화는 아들과 손자에게 까지 미치어 제주도,거제도로 유배가게 된다.

 이러한 정치현실속에서의 서포는 두 가지 성격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하나는 야망의 실현을 추구하는 정통 유교관료로서의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강직한 성품에서 비롯되는 당대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로 미학적으로 형상화된다고 할 수 있다. 


 2.서포의 학문세계와 세계관


 당대는 유교사회였으므로 역시 서포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성리학을 비롯한 그의 학문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포는 동방의 예가인 김사계의 후예로 태어 났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 외가에서 자라났다. 그의 어머니가 쓴 尹氏行狀에는 “집안이 더욱 가난하야 몸소 다회(布)짜고 수놓고 가사에 골몰하야 서적공부에 방해로울까 염려함이러라 불초 형제 아해쩍에 밧스생이 업으니 소학,사략,당시 같은 류는 대부인이 다 손소 가라치시니 비록 사랑하시길 과히 하나 그 글 전하시기는 심히 엄히 하사”라고 하여 그의 어머니 윤씨부인이 스승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다음의 스승은 외조부였고,세번째가 백형 서석과 숙부 김익희였다. 성리학과 역학은 숙부에게서 배웠고,한시와 패간지설은 백형에게서 배웠다. 서포는 천재요 다재였다.그는 고명한 스승도 없었는데 16세에 진사에 합격했다. 문과만은 21세에 낙방했다가 29세에 庭試 甲科에 장원급제하였다. 30세부터 출사하였는데 그때부터 그의 학문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선학들에게 배우기도 했고 또 영향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백형 瑞石의 사우관계를 보면 沙溪 김장생의 고제 송시열,송준길을 위시하여 김수항,이광직,이민서,민유중,이단하 등의 인사들과 교유하였음을 볼 때 상대 선학이 모두 서인의 거벽이고 보면 서포 또한 다분히 학문과 정치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서포의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평자는 없다. 그러나 그가 대학자가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대제학을 두번이나 한 것을 보면 그의 학문의 수준을 짐작하게 된다. 이제 그의 문집과 만필을 통해 그의 학문적인 내면을 살펴 보기로 한다. 첫째 서포는 한시의 대가였다. 그도 말했듯이 시를 잘 읊기는하나 이론을 세워 논평하지는 못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남의 시를 평하기는 잘하나 읊지는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서포는 양자를 겸한 시인이다. 그의 문집에 수록된 한시는 양적으로나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더욱 그의 만필은 당대에 나온 문학평론집으로 자랑해야 할 최고의 문헌이 아닌가한다. 그의 시를 보면 五言古詩 34수,칠언고시 26수,오언율시 58수 칠언율시 56수 오언절구 8수 칠어절구 42수나 되는 분량으로 도합 224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서포는 절행과 만가와 신변시를 많이 읊었다. 다시 말하면 서포는 서경 보다는 자연을 자연보다는 인생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어에 주로 구름과 꿈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둘째는 疏文이 많다. 소문은 원칙적으로 모든 민중의 것이다. 백성이 왕에게 올리는 글이다. 곧 백성의 의견을 듣고 국정에 반영하는 민주적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심눈고와 같은 직소제가 아니고 문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올리기 때문에 관인과 사림들로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 백성의 상소를 깊이 이해하던 세종이나 숙종조때에는 그 폭이 넓었으나 폭정이 심하던 광해군 때에는 언로가 거의 차단되었다. 그 간접적인 전달방법에 있어 승정원에 직정제와 지관을 통한 종현도 상류가 있고 그 처리는 승정원에 접수되면 국왕은 반드시 회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상소 형식은 上疏,답자,봉사,서계,장계 등이 있는데 서포의 경우는 소문이 가장 많았고 다음이 어전 직언이 둘째로 많았다.

 그의 문집 권 7,8은 모두 상소문이었다. 사소가 28회,답문이 1회,상계가 2회,기타가 3회,모두 34회인데 서포가 병조판서때 무려 7회나 辭疏를 내었고  또 대제학 때도 7회나 사소를 상정했으나 不允의 비답이었다. 이는 서포가 숙종 5년 때 예조참의로부터 누진하여 숙종 12년에 두번째 대제학으로 있을 때까지 그의 나이 43세 부터 50세인 7년간은 전생애의 황금기였고 이때 상소를 많이 하였다. 그가 32세때 하향한 대신의 환소에 특히 중사를 보낼 필요가 없이 승지나 사관으로도 족하다는 직언에 현종은 만중을 간악한 사람이라 대노하고 선파후추하라는 명을 받을 때가 그의 첫번째의 설화였고,두번째가 현종 14년 9월에 허적은 종실의 정담(인조의 왕손)와 또 남인이었던 외가 오씨들과 합세하여 당시 영상 송시열을 물리치고 허목이 영상이 되었다. 이때 서포는 어전에서 뒤에는 불미스러운 세간의 말들을 이야기하면서 허목의 인품을 공박하고 허목을 하야케하는 직언을 했다. 현종은 서포의 말을 받아 당파에 치우친 언사라고 꾸짖으니 서포는 굽히지 않고 신은 그릇된 일을 그르다고 하였을 뿐 어찌 색목으로 혐의로운 말씀을 사뢰겠읍니까 하면서 대들었다. 이에 현종이 진노하여 당장 서포를 파직시켜 금성으로 정배하엿다. 이것이 두번째 설화였고,세번째 설화가 바로 기이환국의 불씨다. 그때 귀인 장씨(희빈)를 숙종이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총권에 편승한 조사적의 문제를 들고 완에게 또 대들었다. 왕은 금시초문인듯 모른채 하려 하였고 또 김수환(서인의 원로)의 직위문제도 회피하였다. 그러나 서포는 왕의 모든 실책과 정국의 불안정이 오로지 여총이 그 근원이 된다고 하니 숙종은 노기충천하여 서포를 선천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남해로 위리정치케 한 것이 그의 마지막 설화였다. 그의 특징은 주로 상소와 직언에 의한 충간인데 그것의 내용은 독직사건이 아니라 오로지 서인과 국정을 위한 직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세째로 그의 악장,문학,시화를 거론할 수 있는 데 그것보다 여기에서는 성리학과 道佛사상에 대해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서포는 육곡을 그 연원으로 한 예학이 사계,신독재로 거쳐 누대에 이름높은 예가의 후에이다. 그러므로 말할 것 없이 서포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음은 사실이다. 그의 백형의 瑞石集에 보면 서포는 간반에 가득한 많은 고서책을 탐독하는데 낙을 삼고 세속에 눈을 팔지 않고 고요히 심회에 잠겨 한거하기를 좋아하고,형제가 切磋琢磨하며,세상일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고훈의 이치와 도의를 탐구하고 천년에 바탕한 유학을 닦으며 영리를 생각치 않고 소식도 배부르게 여기고 베옷도 따뜻하게 여기며 시를 창주한다 했으니 서석은 아우를 두고 안빈낙도하는 유자였음을 말한다. 또 서석의 아들이 쓴 글에 보면 서포가 성리학을 위시한 國廟古實에 관천하는 박식이라 했음은 곧 서포가 그의 백형 瑞石集 발문에 ‘萬重自童年 學於先生’이라 함은 마땅히 서포는 서석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는 말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예학의 가문에서 가학의 풍토에 젖어 자란 서포는 예학에 해박한 식자였음은 또한 말할 나위도 없다.

 서포의  主氣論的인 세계관은 사실상 순환론적인 우주관을 바탕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가 불교의 ‘천지수화’의 우주관을 가미한 것에서 윤회설에 입각한 불교의 三界六道說을 추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 서포는 명나라를 통해서 들어 온 서양의 地球說을 이미 섭렵하고 있었는데, “明 萬曆 연간에 서양의 지구설이 나타나서 혼천, 개천설이 비로소 하나로 통일되었으니 역시 한 쾌사이다. 대저 고금의 천문을 말한 사람들은 코끼리를 만지는데 각각 한 부분만 만진 격이라면, 서양역법은 비로소 그 전체를 만졌다 하겠다”고 한데에서 확인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서포는 동양의 순환론적 운명론과 서양의 과학적 우주관을 절충한 세계관을 가진 셈이 된다.

 

 3.서포의 문학관


 서포는 다른 조선조의 사대부들과 달리 훈민정음의 우리 글에 대한 의식이 투철한 작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래서 천태산인 김태준은 그를 가리켜 국민문학적 견해를 가진 소설가로 칭하였다. 그는 한시 뿐만이 아니라 악부,가곡,잡영 등도 즐긴 것으로 보아 문필력이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포집>>의 서문을 쓴 삼연옹은 다음과 같이 서포의 사상의 폭넓음과 문필력의 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공은 글을 잘 쓰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좋은 글이 나왔다.....비록 餘事末藝라하더라도 이처럼 淸通한 가슴속에서 흘러나오지 않음이 없었다.....精하게는 불교와 도가의 사이에서 유무에 출입하였으며 粗하게는 패관소설의 굉박,허탄함에 이르기까지 역력히 꿰뚫지 못한 것이 없었다.            (西浦集 序)


 또 북헌 김춘택은 諺詩를 탐음한 문인이었다. 북헌은 그 종조부인 서포에게 학을 배우고 그의 <<잡설>>을 보더라도 그는 서포를 배운 한 사람이다.  素性이 탕달하여 낙척불우로 일생을 시종하였으니 그는 무관의 명사로서 벌써 십여 성상을 적소에서 보내게 되어 북헌으로서는 한 消閒之策으로 문예방면에 나서서 제1보로 착수한 것이 <사씨남정기>의 한역이다. 문예에 정곡한 견해를 가진 북헌이 “<서유기>,<수호전>은 기변굉박하다”라고 하면서 서포의 <남정기>는 “백성의 착한 본성을 돈독히하고 세상을 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라고 논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소설에 대하여 탁월한 견해를 가진 서포와 북헌은 서포의 <<서포만필>>에서 당대의 사대부들이 인격도야의 큰일에 쓸 수 없다라고 하면서 소설창작을 꺼려한 데대해 오히려 소설의 존재가치를 두둔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파지림>>에 말하였으되,“여항에서는 자기집 어린애가 용렬해 집에서 귀찮게 굴면 문득 돈을 주어 내보내 모여앉아 옛날 이야기를 듣게 하는데 삼국사 대목에 이르러 유비가 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찡그리며 눈물을 흘렸고,조조가 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하며 쾌재를 불렀다”라고 하였는데,이것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始源인지 모르겠다. 이제 진수의 <<삼국지>>와 사마온공의 <<資治通鑑>> 같은 것으로 사람을 모아놓고 이야기해 보았자 눈물을 흘릴 자 없으리니 이래서 통속소설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소설의 존재가치를 높이 평가한 서포는 조선 사람이 한문,한시를 앵무새처럼 흉내낼 것이 아니라 조선말로 쓴 문학을 왜 갖지 못하느냐라고 <<서포만필>>에서 논하고 있다. <<북헌잡설>>에 나와있듯이 그가 한글로 쓴 시조를 즐기기도 한 것에서 그의 우리 말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여러 詞 중에서도 정송강의 전 후 사미인사는 가장 뛰어나다. 일찍이 들으니,김청음이 이 사 듣기를 대단히 좋아하여 집안의 비복으로 하여금 모두 외우게 하였다. ....이 사는 속언으로 지었는데, 정송강이 유배가 울울할 새,군신의 이합을 남녀의 애증에 비유한 것이다. 그 심지는 충결하며 그 절개는 곧고, 그 말은 정아하고 곡진하며,그 곡조는 슬프되 단정하여, 거의 굴원의 離騷에 짝할 만하였다. 우리 집안의 서포옹께서 일찍이 이 사를 한 책에 베껴 써두고 서명을 언소라 하시었다.  



4. 「구운몽」의 창작동기


서포 김만중은 숙종초 그의 나이 43세부터 50세까지는 관직생활이 비교적 순탄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이후 당쟁의 와중에 서인으로 가담한 연고로 세 차례의 유배생활을 해야만 한다. 특히 51세때인 숙종 13년 趙師錫이 장희빈과 결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파격적으로 승진하는 것을 보고,이를 직접 왕에게 공박하다가 선천에 유배되었고,다시 방송되었다가 숙종 15년 다시 이 문제로 남해 絶島에 안치되었다가 숙종 18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구운몽>은 남해 유배시절인 숙종 15년 전후하여 창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한편 <구운몽>의 창작동기에 대해서는 1)서포가 유배되었을 때 대부인의 破閑을 위해 하룻밤만에 지었다“는 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오는 기록과 서포가 玄妙하고 深度있는 三敎의 이상화를 실제로 정치에,생활에 방영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너무 없었으므로 2)三敎의 이상적 실천화를 위하여 창작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5. <구운몽>의 배경사상


 <구운몽>의 배경사상으로는 동양의 三敎思想 즉 儒,佛,道 사상의 교묘한 융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삼교사상혼합설과 <구운몽>은 삼교사상의 융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순수한 불교사상으로 이루어진 불교소설이며,그중에서도 迷에서 幻을 통하여 覺에 도달하는 과정을 다룬 金剛經의 空思想이 바탕이 되었다는 학설로 나뉘어 진다. 또 최근에는 般若사상의 空이 지닌 구조와 대응되는 것,또 금강경의 空사상설에 대한 반박으로 불교사상 일반의 초보적 단계를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중 통설적인 견해인 정규복교수의 ‘空’사상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그는 <구운몽>을 유,불,선 삼교사상의 융합으로 보지 않고 순수한 불교소설로 파악한다. 금강경은 공사상이 중심으로 된 諸般若經 중 중심경이거니와 구운몽이 금강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함은 구운몽 작품의 전 스토리의 전개가 금강경의 풀이라고 할 만큼 금강경과 부합될 뿐만 아니라,또한 구운몽 가운데 금강경에 대한 언급이 누누히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구운몽 초두에 육관대사가 전도차 서역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와 남악형산 연화봉 위에 암자를 짓고 전도할 때에 오직 금강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空사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원래 불교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공사상은 불교의 정통적인 사상이다. 왜 그러냐 하면,無師獨悟하였다는 소위 법이라는 것이 즉 緣起요,이 연기의 법이 佛陀의 근본사상인 이상 이것이 즉 불교의 정통사상인바 이 緣起의 바탕이 즉 空인 것이다. 空사상은 迷에서 幻을 통하여 覺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한다. 각의 세계가 말하자면 眞空妙有인 것이다. 그런데 본시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진 각체이며 만물은 실상을 나타내고 있는 如如다. 이것은 見思惑에서 생기는 편집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覺과 迷의 차이는 0도는 360도라는 이론과 같다. 즉 불과 범부의 차는 가장 멀면서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모두 佛이다. 다만 一念의 迷로 覺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覺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심성의 본자리에 있는 것이다.

 自他分別이 없던 如如의 세계에서 갑자기 대립의 세계로,무한에서 유한으로,覺자리에서 迷로,급변한 境我의 分,이보다 더 큰 전환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은 경악의 소리를 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보는 세계는 모두가 有이다. 그것은  자기의 존재가 무엇인가에 의해서 구별지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有도 假有요,無도 假無다. 그러므로 非有非無이며 또는 有는 無가 있기 때문에 이름지어지고 無도 有가 있는 것을 전제해서 불리어지는 것이므로 有를 부정하면 無自身이 긍정되는 게 아니라 역시 부정되는 것이므로 또한 非眞有 非眞無다. 즉 절대의 有나 無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無가 有를 긍정하게 되면 無 자체는 따라서 긍정되는 것도 또한 아니고,역시 無 자신이 無라야 하므로 有亦無 無亦有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구운몽>에 적용시켜 보면 구운몽의 주인공 性眞이 楊少游로 幻生하여 인간의 부귀공명을 마음껏 누렸으나 만년에 그의 晬日을 당하여 취미궁 고대에서 인생의 무상을 느낀 것은 금강경에 이른바 모두가 幻인 것이다. 그리고 양소유가 인생의 무상을 느껴,금강경에 이른바 幻夢을 통하여 覺한 후 양소유는 없어지고 다시 性眞으로 되돌아 가는데,이것은 금강경에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한 바와 같이 무릇 相있는 바 모두 허망한 것이니,諸相을 相아닌 것으로 본다면 如來를 본 것과 같다고 한 즉 성진이 과거에 양소유로 환생하여 인간의 부귀공명을 마음껏 누린 것은 實相이 아니요 일체가 환몽으로 보고 覺한 후에는 상 아닌 것으로 본 것이다. 즉 성진은 八仙女의 미모와 부귀공명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여기서 성진은 혼미한 현상 가운데 헤매는 것이다. 성진의 스승 六觀大師는 성진을 꿈을 통하여 양소유로 환생시켜 인간의 富貴功名을 마음껏 누리게 하고 나서 覺夢하여 인간의 모든 부귀영화가 일장의 환몽임을 깨닫게 한다. 이로 인하여 성진은 양소유 이전의 성진으로 환원하되 그것은 제 자리에서의 성진이 아니라 360도로 변한 성진인 것이다. 즉, 迷한 성진과 覺한 성진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迷의 성진은 有요,無요,양소유는 非有요,非無요,覺한 성진은 非非有요,非非無인 것이다.

 즉 구운몽은 迷에서 환몽을 통하여 覺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이것은 금강경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구운몽의 주제인 것이다. 구운몽이나 금강경은 모두 迷에서 幻을 통하여 覺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覺한 이후의 세계는 구운몽에도 언급되어 있지 ㅇ낳으려니와 금강경에도 언급이 없다. 이것이 구운몽과 금강경이 공통하는 空사상인 것이다. 覺한 이후의 세계는 眞空妙有인 것이다. 覺하면 眞空妙有이다. 즉 구운몽은 眞空妙有에서 스토리는 끝나는 것이다.


 6. 「구운몽」의 형성과정과 작품구조


 「구운몽」은 전통적인 요인과 외래적인 요인의 영향으로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이상적인 귀족소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우선 「구운몽」은 ?삼국유사? 낙성이대성 관음조에 나오는 調信說話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지하계의 염라대왕 방문이나 용궁출입 등이 등장하는 김시습 작 ?금오신화? 중 「남염부주지」와 「용궁부연록」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외래적인 요인으로는 ?太平廣記?소재 「玉枕記」와 三藏法師 일행이 流沙河를 건너 西域을 가는 도중에 일어난 일과 송림속에서의 꿈과 覺 등을 다룬 「西遊記」의 영향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근원적으로 몽환구조는 불경 雜寶藏經의 「娑羅那比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운몽>의 작품구조는 주인공 성진이 양소유로 바뀌면서 나타나는 <현실구조>와 <꿈의 구조>로 크게 쪼개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스토리의 95%이상은 <꿈의 구조>속에 담겨 있지만,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성진의 대각장면인 말미부분에 나온다.


 * 현실구조: 성진의 修道 - 夢 - 覺  : 성진의 삶

   꿈의 구조: <출생 - 결연 - 고행 - 시련극복 - 행복> : 양소유의 삶


 <꿈의 구조>의 삽입으로 인해 이 소설은 영웅소설,적강소설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대체적으로 <현실구조>,<꿈의 구조>의 전개과정을 종합해 볼때 <理想小說>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구운몽」의 사건 전개는 윤회사상을 축으로 주인공의 하룻동안의 체험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성진에게 일어난 하룻동안의 사건은 낮의 체험, 밤의 체험, 새벽의 체험이란 세 계기적 사건을 축으로 하고 있다. 이중에서 낮과 새벽의 체험은 외적 체험인 현실사건으로 된다. 그러나 낮의 체험은 성진이 선방에서 행하는 참선 속의 내면적 의식체험인 사유란 형식을 빌어서 전개되는 내적 체험이다.


 <낮의 체험>    ------>   <밤의 체험>    -------> <새벽의 체험>



   실제의 사건                심리적 사건               실제의 사건


   

VII. 배비장전


 「배비장전」은 남성의 훼절과 봉욕을 주로 다루고 있는 판소리계열의 풍자해학소설이다. 「배비장전」은 판소리 「배비장타령」에서 발전된 작품이다. 원래 「배비장타령」은 판소리 12마당에 속한다.

 「배비장전」은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에 나오는 발치설화와 이원명의 「동야휘집」에 나오는 미궤설화가 근간이 되고 그위에 비슷한 내용을 지닌 평양기생이야기, 「실사총담」중 「풍류진중일어사」 등의 실사와 설화가 덧보태어져서 한편의 소설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의 작품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의 정비장과 애랑의 이별답과 후반부의 배비장 봉욕담이 그것이다. 이러한 장면분화는 판소리의 특성과 관계가 있다. 이 소설에서는 특히 방자의 인물설정이 뛰어나다. 「춘향전」에서의 방자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의 방자는 김목사의 묵계 아래 배비장을 개, 거문고, 업궤신 등으로 비속화시키는데, 중개자의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이 특징이다.

 

 

 

분류:한국문학

◎ 2002/2/21(목) 22:14

조선 후기의 문학(1)

조선 후기의 문학(1)

1. 시대 개관

임진왜란(1592) 이후부터 갑오경장(1894)에 이르는 약 300년간의 문학으로, 근대 문학의 생명인 산문성과 서민 의식의 성장으로 그 특징을 규정지을 수 있다. 주자학의 완고한 학풍과 당쟁의 병폐, 그리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전란으로 사대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조선 왕조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계속된 정치적 혼란, 경제적 피폐와 서민 의식의 성장, 實事求是의 학풍과 서학의 도래 드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근대화의 싹이 텄다. 이러한 흐름은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제재와 주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런 바탕 위에서 민중의 문학이 왕성하게 대두되어 표현은 사실적으로, 내용은 생활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문학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시작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2. 특징 
⑴ 양란 이후, 사대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현실에 대한 비판과 평민 의식을 구가하는 새로운 내용이 작품 속에 투영되었다. 
⑵ 비현실적, 소극적인 유교 문학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실학 문학으로 발전되었다.
⑶ 작품의 제재 및 주제의 변화와 함께 작가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⑷ 운문 중심에서 산문 중심의 문학으로 이행하였다.
   ① 평민 의식 소설, 사설 시조의 발달
   ② 산문 정신
   ③ 실학 사상
   ④ 여류 문학 내간체 수필, 내방 가사의 등장


3. 소설 시대의 전개
⑴ 형성
   ① 평민의 자각, 산문 정신, 실학 사상 등이 소설 발생의 배경이 되었다.
   ② 최초의 국문 소설인 홍길동전의 출현으로 소설이 발달했으며, 평민 문학으로 본격화 되었다.

⑵ 특징
   ① 주제 대부분이 勸善懲惡, 因果應報
   ② 배경
       - 평민 소설 우리 나라 
       - 양반 소설, 궁중 소설 중국
   ③ 구성 일대기적, 행복한 결말, 순차적
   ④ 사건 비현실적(傳奇的), 우연성
   ⑤ 사상 유교, 도교, 불교, 무속 등
   ⑥ 인물 전형적, 평면적이며 작가가 직접 제시하는 방법을 사용
   ⑦ 문체 운문체, 문어체, 만연체

⑶ 소설의 종류
   ① 영웅 소설 영웅의 일대기를 근간으로 한 소설로 거의 천편일률적인 구성을 보인다. 그 유형 구조는 ㉠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태어났다. ㉡ 잉태나 출생이 비정상적(道仙的)이다. ㉢ 어려서부터 비범했다. ㉣ 일찍 버려진 아이가 되거나 죽을 고비에 이르렀다. ㉤ 구출 양육자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 자라서 다시 위기에 부딪혔다. ㉦ 위기를 투쟁적 으로 극복하고 승리자가 되었다. 와 같은 7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유형은 건국 신화(주몽, 탈해 등), 國祖 전설(궁예 등), 서사 무가(바리 공주 등), 고대 영웅 소설(유충렬전, 홍길동전 등), 신소설(혈의 누, 치악산 등)에 걸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창작 군담 소설 허구적인 주인공을 설정하여 군담과 그밖의 흥미소를 결합한 작품. [조웅전], [유충렬전] 등
㈏ 역사 군담 소설 역사상의 인물과 그의 사실적 행위를 대상을 한 작품. [임경업전], [임진록], [박씨전] 등 
        - 군담 소설 주인공이 전쟁을 통해 영웅적인 활약을 전개하는 소설
        - 몽자류(夢字類) 소설 귀족적 영웅 계열의 소설. [구운몽], [옥루몽] 등

   ② 가정 소설 가정 내의 문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소설.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콩쥐팥쥐전], [창선감의록] 등
   ③ 대하 소설(가문 소설) 흔히 여러 편이 연작 형태를 띠고 있으며 고소설의 모든 유 형이 융합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 주고 있으나 지배 계층 중심의 작품 세계를 보이고 있는 까닭에 고소설의 보수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궁중의 낙선재에 있어 낙선재본 소설이라고도 한다. [완월회맹연(180책)], [임화정연(139책)], [명주보월빙(100책)] 등
   ④ 애정 소설(염정 소설)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소설. [운영전], [영영전],[채봉감별곡] 등
   ⑤ 풍자 소설 동물을 의인화 한다든지 하는 수법을 사용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한 소설. [이춘풍전], [두껍전], [서대주전] 등
   ⑥ 판소리계 소설 판소리로 불려졌던 소설을 포함하여 판소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소설을 통칭하는 것으로 평민 계층의 발랄함과 진취성을 바탕에 깔고 전승되면서 끊임없이 재창작, 개작되었다. 현실적인 경험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으며 판소리가 지닌 개방적 면모와 향유층들의 다양한 관심사, 자유로운 수용 태도, 해학과 풍자를 기본으로 하는 평민 계층의 문화적 역동성 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토끼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

⑷ 소설의 유통 과정
   ① 필사본 개인이 베끼는 경우와 세책방에서 영업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모두 유통 과정인 동시에 개작 과정이 되었다.
   ② 방각본 필사본에 한계를 느낀 업자들이 인기 있는 작품들을 골라 주로 목판을 이용해 상업적인 출판을 하였는데 완판본과 경판본이 대표적이다.

⑸ 이야기꾼 이야기를 잘 지어서 재미있게 口演하는 사람과 소설책을 재미있게 읽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을 각각 講談師, 講讀師라고 했고 전기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⑹ 설화집의 편찬 유몽인의 [어유야담]을 비롯한 많은 설화집이 편찬되었다.


4. 시가 문학의 변이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전기의 시조는 유가의 이념 규범을 노래한 것과 자연 속에서 심성을 기르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그리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는 평민 가객들의 활동이 커지고 시조창이 보편화되었으며 사설시조가 활발하게 창작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⑴ 시조
   ① 평시조 시조 문학의 융성기에 태어나서 다음 시대의 새로운 문학이 꽃피기 직전에 시조 문학을 집대성하여 결산한 尹善道의 시조가 단연 두드러진다. 그는 시어로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였고 형상적인 시의 구조를 창조하였다는 점에서 시조문학사상 으뜸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으며 江湖歌道의 완성을 보았다고도 평가된다.
   ② 사설시조 윤선도 이후 평시조가 생경하고도 관습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차차 문학의 조류가 서민 계층으로 옮겨가면서 시조에 산문적인 시형이 첨가되었다. 교려말 변안열의 [불굴가]로 시작된 사대부들의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사설시조의 전통이 이 시기에 와서 산문 정신이 가미되면서 서민들의 진솔한 자기 표현을 담아내는 형식으로 차용되었다. 객관적인 사실성이 도입되었고 가사투와 민요 형식이 혼입되었으며 대화가 많고 설화식으로 길어진 것이 특징이다. 내용상으로는 구체적인 이야기와 비유가 대담하게 도입되었고 강렬한 애정을 노래하고 적나라한 자기 폭로를 꾀하였으며 語戱, 재담, 욕설 등이 시어로 채택되었다.
   ③ 시조창 전아한 전통적인 가곡창과는 다른, 쉬우면서 대중적인 친화력을 가진 창법으로 시조가 불리게 되어 전문적인 가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④ 전문 가객 18세기 무렵부터 성행하였고, 출신 성분은 중인보다 낮은 서리 정도의 사람들이 시조를 가곡의 곡조에 얹어 불렀다. 金天澤, 金壽長 등이 유명하다.
   ⑤ 평민 가단의 형성 조선 전기에는 吟詠을 위주로 하던 시조가 이 시기에 와서는 歌唱을 위주로 변하였는데 이는 활발한 평민 가단의 활동 때문이었다.
      ㈎ 경정산 가단 김천택을 중심으로 김수장 등이 참여한 가단. 강호가도를 고취하였다.
      ㈏ 노가재 가단 김수장이 만년에 조직한 가단. 시가의 연구와 기법을 연마하였다.
      ㈐ 승평계 박효관과 안민영을 중심으로 한 가단

⑵ 가사의 변모 가사는 이 시기에 와서 작자층이 다양화하면서 작품 계열도 여러 방향으로 분화하였다. 주로 현실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여성 및 평민 작가층이 성장했으며 주제와 표현 양식이 다채로워졌다.
   ① 朴仁老의 가사 전시대의 정철의 가사난 동시대의 윤선도의 시조에 비해 시어의 구사나 표현의 아름다움에서는 떨어지지만 중후한 문체로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는 길을 개척하여 조선 말기 개화기의 개화 가사, 의병 가사 등에 영향을 주었다. [선상탄], [누항사], [태평사] 등
   ② 내방 가사 주로 영남 지방의 부녀자들에 의해서 지어진 규방 가사로 섬세한 여성들의 희노애락과 接賓客, 奉祭祀하는 예의 범절, 현모양처의 도의 등 부녀의 심정과 생활을 노래하였다. [화전가], [계녀가], [규중행실가] 등
   ③ 기행 가사 국내 및 외국을 다녀온 견문을 가사로 기록하였다. 김인겸 [일동장유가(일본)], 홍순학 [연행가(중국)] 등
   ④ 유배 가사 유배의 체험을 기록한 가사. 안조환 [만언사], 김진형 [북천가] 등
   ⑤ 동학 가사 서양 세력이 동양을 침략하는 데에 대해 깊은 위기감을 느끼고 동학을 알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최제우 [용담유사] 등

5. 기록 문학의 발달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가 기록 문학(수필)이 많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의 수필들은 일기, 기행, 내간, 평론, 기타의 글들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운문의 투를 벗어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초기에는 한문으로 된 수필이 많았지만 후기로 오면서 차차 한글로 된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아졌으며 민간과 궁중에서 함께 쓰였다.
⑴ 전쟁 체험의 기록 이순신 [난중일기] , 유성룡 [징비록] 등
⑵ 국내외 여행의 견문 기록 홍대용 [을병연행록], [의유당 관북유람일기] 등
⑶ 궁중 기록 문학 [계축일기], 혜경궁 홍씨 [한중록], [인현왕후전] 등

6. 한문 문학의 변모와 실학파 문학 위항 문학
조선 전기 도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한문학은 예술과 철학이 결합된 형태인 醇正文學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 시기에 와서는 예술과 현실이 결합한 형태인 實學文學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또 실학파의 대두와 함께 상공업이 성장하고 그로 인해 富를 축적한 서울 근교의 중인들이 문학에 참여하게 되어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委巷(閭巷) 문학이다.

⑴ 한문학 4대가 양란 이후 조선 전기의 醇正文學을 이어받기 위한 사대부들의 노력이 실학의 거센 도전 속에서도 행해졌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이들이 한문학 4대가들이다. 월사 이정구, 상촌 신, 택당 이식, 계곡 장유가 그들이다.
⑵ 실학파 문학 
   ① 경세치용학파 중농주의를 취한 사람들로 이익, 이용휴, 이가원, 정약용 등이 대표적이다. 
   ② 이용후생학파 중상주의를 취한 사람들로 홍대용, 박제가, 빅지원, 유득공 등이 대표적이며 북학파로도 불린다.
          - 실학 4대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⑶ 위항 문학(閭巷文學)이라고도 하며 여항은 사대부와 서민의 중간 계층인 중인 신분 계층이 사는 곳을 말한다. 실학의 대두로 말미암아 생활에 여유가 생긴 의학 譯學 算學 律學 樂學 등 이른바 잡학에 종사했던 전문 지식인인 이들은 처음엔 관계 진출에 뜻을 두고 공부를 했다. 그러나 곧 신분상의 제약으로 인해 좌절을 겪게 되자, 문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① 詩社의 결성 거주지를 중심으로 문학적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풍류를 겼는데 송석원시사, 칠송정시사 등이 유명하다. ② 시선집 편찬 漢詩를 모은 시선집을 발간하기도 했는데 [소대풍요], [풍요속선],[풍요선] 등이 있다.

7. 판소리 민속극의 성장
이 시기에 들어와 민중의 문학 참여가 극대화되어 나타난 대표적 양식이 판소리와 민속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종합 예술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대본은 국문학의 한 양식이 된다.

⑴ 판소리 전문 예술가인 광대가 부르는 구비 서사시 
   ① 기원 어원은 '판(무대)'에서 부르는 소리라는 뜻으로 판소리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고 각 장마다 판을 짜서 부른다는 뜻으로 판 소리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그 기원에 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는데 현재까지는 전라도 중심의 세습무들 이 부르는 서사 무가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② 사설의 성격 서민들의 현실적인 생활을 주로 그리고 있으며 극적 내용이 많고 민속적이며 풍자와 해학이 풍부하다.
   ③ 가창 방식 창자인 광대와 반주자인 고수의 두 사람에 의해 진행된다. 광대는 고수의 장단에 맞춰 창과 아니리를 섞어가며 노래를 하면서 사설에 맞춰 너름새를 곁들이고 고수는 추임새로 광대의 흥을 돋우어 준다. 사건의 전개에 꼭 필요한 서사 부분은 주로 아니리로 하며, 서정이나 묘사 부분은창으로 한다.
   ④ 용어 
           - 광대 노래를 부르는 사람
           - 고수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는 사람
           - 아니리 노래 도중에 말로 하는 부분
           - 너름새(발림) 노래를 부르며 하는 몸 동작
           - 추임새 고수나 청중들이 창 도중에 흥에 겨워 내는 탄성
           - 장단 진양조 -- 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 -- 휘모리
   ⑤ 판소리 12마당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전, 옹고집전, 장끼타령, 왈자타령, 가짜신선타령(마지막 둘을 무숙이 타령, 숙영낭자전으로 하기도 함)
   ⑥ 판소리 여섯 마당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⑦ 신재효 고종 때의 전라도 고창 출신의 아전. 판소리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하였고 판소리 광대들에 대한 지원과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판소리 12마당 중 에술적 가치가 미약한 것을 없애고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다. 그밖에 판소리 단가도 여러 편 지었다.

⑵ 민속극
   ① 탈춤 고려의 팔관회로부터 시작된 민속극은 이 시기에 와서 도시 중심의 탈춤으로 정착되었다. 탈춤은 원래 농촌 중심의 마을 굿으로 시작되었는데 18세기 중엽 이후 새로운 상업 도시가 등장하면서 그 도시의 주민과 상인이 주동이 되어 도시 탈춤으로 변모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으로 양주 별산대, 송파 산대놀이, 봉산 탈춤, 고성 오광대, 동래 야유 등이 있다.
   ② 인형극 꼭두각시극으로 모두 박으로 만든 인형을 사용했기 때문에 박첨지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③ 의의 민속극은 서민 대중들의 생활 감정이 강렬히 반영되어 있는 대동 놀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등장 인물 사이의 갈등이 박진감 있게 구현되어 있으며 하층 민중의 생활 의지와 어긋나는 지배 체제와 허위 의식을 다각도로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18세기 이후에 대두한 혁신 운동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예술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내용출처 : 본인작성
원문출처 : [카페] "푸른 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