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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문학/ 제망매가, 처용가, 화왕계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8. 14:56

제망매가(祭亡妹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제망매가(祭亡妹歌)

 

생사의 길은 여기에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갑니다 하는 말도
다 못하고 가버렸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에 낳아 가지고
가는 것 모르누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양주동 해독)

삶과 죽음의 길은
이(이승)에 있음에 두려워하여
나는(죽은 누이를 이름) 간다고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나뭇가지(한 어버이)에 나고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으 극락세계(저승)에서 만나 볼 나는
불도(佛道)를 닦아서 기다리겠다
(김완진해독)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여기에 있는데 두려워 하면서
'나는 갑니다'라는 말도
미처 다하지 못하고 (저승으로)갔느냐
오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가지에서 나고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미타찰에서 (너를)만나 보게 될 나
도를 닦아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노라.

요점 정리
작자 : 월명사
갈래 : 향가
연대 : 신라 경덕왕 19년 (760) 이전
형식 : 10구체 향가
구성 : 3단구성(1-4행, 5-8행, 9-10행)

1-4행

비극적 상황의 제시

죽은 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

5-8행

혈육의 정 구체화

이른 바람 : 누이의 요절

떨어질 잎 : 죽은 누이

한 가지 : 같은 부모

인생의 무상감, 한탄

9, 10행

슬픔의 종교적 승화

불교적 믿음을 통한 재회의 다짐

표기 : 향찰
성격 : 서정적, 애상적, 추모적, 종교적, 주술적(배경설화), 비유적
표현 : 비유법, 상징법
제재 : 죽은 누이
주제 :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고 추모함.
내용 :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면서 극락 세계에서 왕생(往生)하기를 염원함.
사상적 배경 : 불교적 윤회 사상
의의 :
1. 숭고한 불교적 신앙심이 나타나 있는 노래이다.
2. 찬기파랑가와 함께 향가 중에서 표현기교와 서정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3. 뛰어난 문학적 비유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킴
기타 : 이 노래는 일명 ‘위망매영재가(爲亡妹營齋歌’)라고 한다.
출전 : <국유사(三國遺事)>권 5

내용 연구
삶과 죽음의 길은
이(이승)에 있음에 두려워하여
나는(죽은 누이를 이름) 간다고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 죽은 누이에 대한 안타까움(기 - 현재)

14행 : 죽음의 허무함과 망매에 대한 혈육의 정(생사란 우리 곁에 있다는 것과 누이가 죽음의 길로 떠난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3구에서는 죽은 누이인 망매에 대한 아쉬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다)

어느 가을 이른(누이의 요절을 가져 오는) 바람[운명, 초자연적 존재]에
여기 저기에 떨어지는(죽음) 나뭇잎처럼(누이의 죽음을 비유함)
같은 나뭇가지(한 어버이)에 나고서도
(네가) 가는 곳(저 세상)을 모르겠구나 -- 인생의 무상감(서 - 과거)

58행 : 혈육의 죽음에서 느끼는 인생의 무상함(한 가지에 났다가 가을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누이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허망감이 모든 생명의 무상감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문학적 비유가 돋보이고, 문학적 묘미가 뛰어나다.)

아으[10구체 향가에서 낙구는 형태상 대체적으로 감탄사로 시작하며, 내용상 작품의 주제가 집약되어 있는데, 이 노래에서도 역시 '아야'라는 감탄사로 시작하는 낙구에서 앞서 보인 고뇌와 슬픔이 종교적으로 승화되는 시상의 전환을 이루고 있다.] 극락세계(극락 세상, 저승)에서 만나 볼 나는
불도(佛道)를 닦아서[회자 정리의 불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죽음에 직면한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만남을 기약함, 종교적 극복] 기다리겠다[불교적 사생관이 담겨 있음] -- 불교에의 귀의를 통한 극복(결 - 미래)

910행: 슬픔의 종교적 승화와 불교에의 귀의(종교적 믿음으로 죽음에 대한 허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 노래는 10구체 향가의 전형적인 모습인 3단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1행에서 4행까지의 제1단락은 누이의 죽음에 마주 선 괴로운 심경을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체념과 넘쳐 흐르는 골육의 정으로 노해했다.제2단락인 5∼8행에서는 개인적 아픔을, 모든 생명체의 무상성(無常性)에 대한 고뇌로 나타내고 있다. 이는 모든 유한한 생명들을 지배하는 힘인 ‘바람’과 보잘 것 없는 개체로서의 ‘잎’의 대조에서, 그리고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 모르는 것이라는 의문에서 무상에 대한 고뇌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 단락인 9,10행에서는 이승에서의 슬픔과 고뇌를 불교적 믿음에 의해 초극하고 재회의 기약을 다짐하고 있다. 9행 첫머리의 감탄사는 10구체 향가의 형식적 특징이며, 앞 단락에서 보인 심화된 고뇌의 극한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자 종교적 초극이 이루어지는 전환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작품의 주술성(초자연적이고 신비한 힘을 빌려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배경 설화에 담겨 있는데,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를 올리며 이 노래를 불렀더니 광풍이 불어 제상에 놓인 지전을 서쪽으로 날려 보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향가가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주술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이해와 감상

신라 경덕왕 때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10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7 ‘월명사 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 실려 있다.
〔배경설화〕

  기록에 따르면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비는 노래로, 작가가 재(齋)를 올리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홀연히 바람이 불어 지전(紙錢)을 날려 서쪽(서방 극락세계 방향)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 지전은 죽은 자에게 주는 노자(路資)로 지금도 장송(葬送) 때 볼 수 있는 것으로 꼭 불교 의식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죽은 뒤의 세계라고 하여 현세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의식이다.

〔해 석〕

 이 노래는 죽음에 부닥쳐서 죽은 자의, 그것도 골육인 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다. 그 명복은 막연한 것이 아니고, 월명이 승려이기 때문에 사후의 세계를 불교적으로 관상한 것으로, 서방극락정토, 무량수(無量壽)를 누릴 수 있는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의 세계로 가기를 빈다.
즉, 그곳만이 가야 할 사후의 세계이고, 현세의 삶이란 그곳에 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막상 죽음에 다다랐을 때, 그것도 골육과의 사별에 임했을 때, 월명은 죽음의 현장성(現場性)을 느낀다.
인간세상이란 죽음과 삶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혼융(混融)되어 있는 것으로, 살아 있는 월명이 죽어가는 누이를 보는 것이다. 그 때 살아 있는 자신의 죽음을 누이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과 같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하여, 죽음에 대한 서정을 비유로써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죽음을 절감한다.
그러한 형상화는 누이의 죽음으로 더 한층 짙게 인식된다. ‘어느’란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있는 시간으로, 시시로 닥쳐 오는 죽음을 인식하게 해 준다.
죽음 앞에 서 있는 동류의식(同類意識)의 표현인 ‘한가지에 나고’는 현상적으로 인식되지만, 죽음에서는 그것은 미지이다(가는 곳 모르누나). 이것은 불교의 윤회사상에 바탕을 둔 무상인간의 변하여 달라짐을 말하는 것 같으나, 오히려 원고적(原古的)인 사후의 관념이다. 그래서 가는 곳을 비유하여 ‘이에 저에’라 표현하였다.
육도환생(六道還生)이라는 교훈적인 종교의 내세관에서보다는 삶 자체가 하나의 나뭇잎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생의 허무감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감은 결국 종교적으로 귀의하게 한다. 그래서 “미타찰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하여 인생의 허무감을 아미타불에 귀의함으로써 종교적으로 승화시킨다.
무량수를 누릴 수 있는 미타찰, 서방극락정토에는 인간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가서 누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도를 닦으며 기다려야 한다.
즉, 누이는 이미 그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원으로, 기원하는 바를 이루어진 결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초월적인 대상에게 기원하는 의식 노래로서의 특성이 나타나 있다.
한편, 이 작품은 제전이라는 의식적 배경을 도외시한다면 순수한 서정시의 자질을 갖게 된다. 죽음과 삶이 혼융된 인간세계에서 죽음과 삶의 갈등을 항상 겪어야만 하는 인간, 그가 느끼고 있는 삶에 대한 허무감 등은 인간이 넘지 못할 하나의 불가피한 상황으로, 이것의 인식과 생각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 노래는 재의식(齋儀式)에서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극락왕생을 천도한 노래로 일종의 축(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식적 형태에만 얽매이지 않고, 누이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죽음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서 느끼는 정서를 표현한 개성적인 서정시이기도 하다.
적절한 시어의 선택과 표현법으로 죽음에 대한 서정을 담고 있다. 집단 감정의 표현이나 어떤 목적의식에 의한 공리적인 노래가 아닌, 순수한 서정시로서의 지평을 열어 주는 노래이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新羅詩歌의 硏究(尹榮玉, 螢雪出版社, 1980), 祭亡妹歌의 意味와 形象(楊熙喆, 國語國文學 102, 국어국문학회, 1989), 祭亡妹歌硏究(黃浿江, 國語國文學論叢, 驪江出版社, 1990), 祭亡妹歌의 詩的 哭成과 意味(具本機, 한국고전시가작품론, 集文堂, 199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월명사

 생몰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향가작가. 그가 지은 향가 작품 제망매가 祭亡妹歌도솔가 兜率歌삼국유사에 전한다.
제망매가는 죽은 누이를 위하여 지은 것으로, 누이의 재(齋)를 올릴 때 이 향가를 지어 불렀더니, 돌연 바람이 일어 누이의 저승길 노자로 바친 지전(紙錢)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지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760년(경덕왕 19) 4월에 두개의 해가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는 괴변이 일어났는데 왕은 그를 불러 산화공덕(散花功德)으로 그 변괴를 없애도록 청하였다.
이에 그가
도솔가를 지어 불렀더니 그 괴변은 곧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능준대사(能俊大師)의 문인이며, 국선(國仙)의 도(徒)에 속하였다. 피리를 잘 불어 달의 운행을 멈추게 하였다고도 한다.(출처 : 三國遺事)

 

circle01_red.gif '제망매가'에 나타난 주술성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하여 이 노래를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광풍(狂風)이 불어 지전(紙錢)을 서쪽으로 날려 없애지게 했다는 배경 설화와 함께 전해지는데, 이는 향가가 하늘과 땅을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주술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circle01_red.gif  '제망매가'의 표현상 특징

 '제망매가'가 현존하는 향가 중에서 가장 빼어난 서정성을 보이는 것은 이 작품에서 눈물보다 더 슬프고 절실한 사랑의 상처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무상한 인생, 그리고 핏줄로 얽혀진 동기 간의 우애가 숭고한 종교 의식에 덮인 채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표현상 특징의 묘미는 제 5행과 8행 사이의 비유에 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남매 사이에 있어서의 죽음을 한 가지에 났다가 떨어져 흩어지는 낙엽에,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덧없이 부는 이른 바람에 떨어진 잎으로 비유하여 요절의 슬픔과 허무를 절묘하게 감각적으로 구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듯이 인간의 죽음도 필연적이라는 불교적 생사관(生死觀)이 높은 서정적 경지에 이르는 것은 '이른'이라는 표현 때문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해진 죽음이되 '그 때[時]의 이름'이로 말미암아 시적 화자의 슬픔은 극대화된다. 그러나 그 슬픔은 드러나지 않고. 내세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극복된다.

circle01_red.gif 배경 설화

 760년(경덕왕 19),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올리는 재식(齋式)에 나아가 '도솔가(兜率歌)'와 '산화가(散花歌)'를 지어 불렀더니 미륵보살이 동자(童子)로 하림하고, 해가 둘이 나타나서 열흘이나 계속되는 변괴가 없어졌으며, 죽은 누이를 위하여는 '제 망매가'를 지어 불렀더니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 지전(紙錢)을 서쪽으로 날려 보냈다 한다.

circle01_red.gif 전통적 정서

 우리의 문학 작품에서 죽음을 다룬 것은 상고 시대의 ‘공무도하가’에서부터 오늘날에도 저능되는 ‘향두가(香頭歌)’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노래들은 죽음을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다는 인식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다. 그것은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순응해야 할 질서의 원리로 파악하고, 조화와 화합을 추구했던 우리 민족의 정신적 동향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관경십육경변상도 .202.8 × 129.8cm、 관경십육경변상도 .202.8 × 129.8cm、 비단에 채색、 고려 시대、 일본 서복사 소장.
정토 삼부경 가운데 하나인『 관무량수경』의「정종분」 을 도해한 장면이다. 불교의 극락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열여섯 가지 관상법과 그 이후 나투는 아미타 정토의 장엄한 모습을 경전의 내용과 한 치의 다름이 없이 자세하게 풀어 그렸다. 가운데가 삼단으로 나뉘 어 있 는데 상품, 중품,하품의 중생들이 연못에 연꽃으로 태어나고 있다.

 삼국유사 -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삼국유사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66∼89)이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로 활자본. 5권 2책.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으로 가자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처용가(處容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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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문학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긴 것을 어찌하리.


작자 : 처용(處容)
연대 : 신라 헌강왕(875-885)
갈래 : 8구체 향가(4·4조의 민요조로 됨)
표현 : 향찰로 표기, 직서적(直敍的 : 상상이나

         감상 따위를 덧붙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인 표현. 체념적인 농사

          (弄詞), 풍자, 제유법
성격 : 축사(逐邪)의 노래
구성 : 1-4행 역신의 침범, 5-6행 대상에 대한

         의문 7-8행 처용의 관용, 또는 체념으로

         역신과 화자의 대화가 있음(5. 6행)
주제 : 아내를 범한 귀신을 쫓아냄, 혹은 아내의 부정을 체념함, 축신(逐神-귀신을 쫓음)
내용 : 아내를 빼은 역신에게 관용의 정신을 베푸는 이야기.
의의 :
1. 벽사 진경(僻邪進慶 : 간사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의 소박한 민속에서 형성된 무
가(巫歌 : 무속의 노래)이다.

                                   무격 신앙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처용은 제웅(역신을 쫓기 위하여 음력 정월에 동구밖에 내던져 액을 면하

                                   게 한다는 볏짚 인형. 처용과 제웅은 발음 및 축의 기능이 같으므로 처용을 곧 제웅이라고도 한다.)과 연

                                   결시킬 수 있다.
2. 의식무, 또는 연희의 성격을 띠고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계속 전승되었다.
3. 고려 속요에도 '처용가'가 있어 향가 해독(解讀)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출전 : 국유사(三國遺事)

내용 연구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1-4행 : 역신의 침범)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긴 것을 어찌하리. (5-8행 : 처용의 관용)

 

 아내와 역신의 동침 장면을 '다리 넷'으로 표현한 것은 신체의 일부분으로 사람을 나타내는 제유적 표현 방식이라는 말이고, 풍자는 어리석음의 폭로, 사악함에 대한 징벌을 주축으로 하는 기지(機智, wit)·조롱(嘲弄, ridicule)·반어(反語, irony)·비꼼(sarcasm)·냉소(冷笑, cynicism)·조소(嘲笑, sardonic)·욕설(辱說, invective) 등의 어조를 포괄한다. 그런 점에서 역신에 대한 처용의 태도에서 풍자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 행에서 처용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아내나 그 사내를 비난하지 않고 관용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때 처용의 심리는 슬픔과 체념, 그것을 극복하는 달관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설화에 따르면 처용은 아내의 간음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대상에 대한 부정과 공격을 통한 해결 방식이 아니라, 자기 절제와 초극을 통한 갈등 해결 방식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러한 절제와 초극은 아내와 역신에 대한 처용의 윤리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역신이 처용에게 감복한 이유도 이러한 윤리적 우월성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circle01_red.gif 고려 속요 '처용가'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고려 속요 '처용가'에 향가 '처용가' 중 6구가 다음과 같이 한글로 옮겨 있어 향찰 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었다.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헌강왕이 개운포를 지나는데, 깜깜해지는 변괴가 일자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주기로 하니 어둠이 가셨다. 이 자리에 절을 지으니 망해사이다. 동해 용왕이 이에 감사하고 자신의 아들인 처용을 헌강왕에게 바쳐 서라벌에서 살게 되었다. 처용이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여 이 노래를 부르니 역신이 감읍하여 처용의 상이 있으면 범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벽사(僻邪)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이나 지붕에 처용상을 붙이게 된 기원, 즉 문신의 좌정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배경 설화와 관련지어 작품을 살펴 보면, 이 노래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신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어느 날, 그가 늦게까지 놀고 있는 사이에, 역신이 매우 아름다운 그의 아내를 모하여 몰래 동침했다. 집에 돌아와 상황을 안 처용은 이 노래를 부르자 역신은 크게 감복하여 용서를 빌고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막았다. 이런 배경 설화를 가진 이 노래에 대한 해석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축사(逐邪) 및 벽사진경( 邪進慶)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신(惡神)이라도 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 한다. 이 노래는 신라 49대 헌강왕 때 처용랑이 역신(疫神)을 쫓기 위해 지어 부른 8구체 향가이다. 이 노래의 변형이 고려시대 `처용가'로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에 실려 있으므로 향찰로 표기된 어려운 향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것이다.

이 노래의 내용에 대해서 학자들은

① 민속학의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
②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③ 신라시대에는 멀리 서역 지방과도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은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①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 하다. 그 까닭은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 부르며 춤추며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상식을 범주를 벗어난 무격 사회에만 있는 풍습이기 떄문이다. 또한 악신(惡神)이라도 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에서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절정은 7행과 8행이다. 이는 체념적인 주사(呪詞)로 볼 수 있으나 오히려 처용의 상황(초극적인 이미지)을 부각시킨 것으로 후대로 오면서 벽사( 邪)의 위력으로 발전한 것을 이해할 만 하다. 이를 무가(巫歌)의 일종으로 보아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하지 않고는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속에서는 악신이라도 겁게 하여 보내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해와 감상2
헌강왕이 개운포를 지나는데, 깜깜해지는 변괴가 일자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주기로 하니 어둠이 가셨다. 이 자리에 절을 지으니 망해사이다. 동해 용왕이 이에 감사하고 자신의 아들인 처용을 헌강왕에게 바쳐 서라벌에서 살게 되었다. 처용이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여 이 노래를 부르니 역신이 감읍하여 처용의 상이 있으면 범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벽사(僻邪)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이나 지붕에 처용상을 붙이게 된 기원, 즉 문신의 좌정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 설화와 관련지어 작품을 읽어 보자.

이 노래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신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어느 날, 그가 늦게까지 놀고 있는 사이에, 역신이 매우 아름다운 그의 아내를 모하여 몰래 동침했다. 집에 돌아와 상황을 안 처용은 이 노래를 부르자 역신은 크게 감복하여 용서를 빌고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막았다. 이런 배경 설화를 가진 이 노래에 대한 해석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축사(逐邪) 및 벽사진경( 邪進慶)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신(惡神)이라도 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해와 감상3
이 작품은 종교적, 역사적, 축사 및 벽사진경의 시각으로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운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밝히고 물러간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巫俗)에서는 아무리 악한 신이라도 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역신을 보내는 뒷풀이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노래의 절정 부분인 시의 마지막 두 구는 표면상은 체념의 태도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말에 해당하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일상인의 생각과 감정을 뛰어넘는 처용의 초극적인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4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관련설화와 더불어 원문이 실려 있다.

 

배경설화
신라 제49대 왕인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지금의 울산)에 나가 놀다가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이에 그곳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왕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아내로 주고, 그의 마음을 잡아 두려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그 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원문 및 해석〕
처용이 역신 앞에서 부른 노래는 ≪국유사≫에 무분절로 기재되어 있다. “東京明期月良夜入伊遊行如可入良沙寢矣見昆脚烏伊四是良羅李層隱吾下於叱古二層隱誰支下焉古本矣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
이 노래에 대한 양주동(梁柱東)의 해독은 다음과 같다. “棋巧串긔 愷래/밤드리 노니다가/드러坮 자리 보곤/가犬리 네히어라./둘흔 내해엇고/둘흔 뉘해언고/본倨 내해다마絹/아坮堪 엇디悧릿고.”
노래의 풀이는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가랑이가 넷이도다./둘은 나의 것이었고/둘은 누구의 것인가/본디 내 것이지마는/빼긴 것을 어찌하리오”이다.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는 ① 벽사가면의 인격화〔現人陽邪神〕설, ② 반중앙적 지방 호족의 아들로서의 질자(質子:아들을 인질로 보냄)설, ③ 이재술(理財術)을 지녔던 이슬람 상인설, ④ 호국호법룡의 불교 상관 인물설, ⑤ 무격(巫覡) 또는 무격의 몸주〔主神〕설, ⑥ 풍월도적 미륵신앙을 갖고 있는 화랑설 등이 있다.
이름에 대해서는 훈차로 본 ‘터알 바가지’설, ‘곧즛’(龍顔)설, ‘곶얼굴’(花容)설과 음차로 본 ‘무(巫)’의 뜻인 ‘자충’(次次雄→慈充)설, ‘용(龍)’의 뜻인 ‘칭’(稱)설, ‘청룡’(靑龍)의 이기(異記)설 등이 있다.
처용의 왕정 임무에 관해서는 ① 그의 본고장 울산의 사정에 관한 정부의 자문 임무설, ② 신라 말기 위기에 처한 경제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이재가(理財家)로서의 보좌설, ③ 역신(疫神)을 물리치는 굿으로서의 보좌설, ④ 의무(醫巫)로서의 보좌설, ⑤ 무격으로서 주술과 가무로써 기상의 변괴를 물리치는 직책설, ⑥ 왕권 강화와 국가 수호의 임무설 등이 제기되었다.
역신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열병신(熱病神=천연두·홍역·학질을 일으키는 질병신)으로 보고 있으나, ① 병든 도시의 유한공자(遊閑公子), 곧 타락한 화랑의 후예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② 탐락과 방탕 풍조에 빠져 있던 반도덕적인 패륜아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③ 나라를 병들게 하는 어두움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내용 및 형식〕처용가〉의 내용과 형식은 시적 화자가 역신의 화자 처 범접(犯接)을 보고서 그 현장 상황과 그에 대한 화자의 대응태도를 일인칭 독백체 형식으로 노래하되, 노래에는 주가(呪歌)의 성격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처용이 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니 역신이 처용의 노하지 않음에 감복하여 사죄하고 물러갔으므로 이 노래를 일반적으로 주가로 본다.
한편 이 〈처용가〉에 대해

① 의례의 한 부분이던 신화〔무가〕중의 일부로써 주적 정조인 창사 부분의 일부라는 견해,

② 처용이라는 법행룡(法行龍)이 창한 일종의 진언(眞言)이요 불교적인 주문이라는 견해,

③ 주술 기원의 재연(再演)인 서사 부분과 짝해서 역신 퇴치 주술의 핵을 이루게 된 주사라는 견해,

④ 처용신의 유래를 설명한 서사무가에 삽입된 주술 무가라는 견해,

④ 강자에 의한 아내의 정조 유린이라는 비애를 골계로 표현한 민요격 향가라는 견해,

⑤ 동해의 용신제의(龍神祭儀)에서 불리던 무가라는 견해 등이 제기되어 있다.
이 노래는 가사가 부연되어 고려·조선 시대의 나례(儺禮: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 공연 때 처용가무에서 불린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古歌硏究(梁柱東, 博文書館, 1957), 鄕歌解讀法硏究(金完鎭, 서울大學校 出版部, 1980), 新羅文學에 있어서의 鄕歌論(琴基昌, 太學社, 1993), 鄕歌批解(兪昌均, 螢雪出版社, 1994), 鄕歌新解讀硏究(姜吉云, 學文社, 1995), 鄕歌文學論과 作品硏究(羅景洙, 集文堂, 1995), 국유사 향가연구(양희철, 태학사, 1997), 處容說話의 綜合的 考察(大東文化硏究 別集 1,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1972), 한국고시가의 거시적 연구(김학성, 집문당, 1997), 處容歌硏究(金東旭, 東方學誌 5, 1961), 處容說話의 硏究(張籌根, 國語敎育 6, 1963), 處容說話攷(玄容駿, 國語國文學 39·40 합병호, 1968), 三國遺事所載 處容說話의 一分析(李佑成, 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處容說話의 一考察(李龍範, 震檀學報 32, 1969), 處容歌의 巫俗的 考察(徐大錫, 韓國學論叢 2, 1975), 處容歌舞의 演劇史的 理解(趙東一, 演劇評論 15, 1976), 處容說話와 그 歌謠의 硏究(金承璨, 韓國文學論叢 4,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처용가의 다양한 해석

1. 불교 신앙적 관점
종교적 의도를 문학 작품에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으로서, 처용을 호국(護國)호법(護法)의 용(龍)으로 보고, 그의 왕정 보좌와 가무(歌舞)는 중생(衆生) 교화(敎化)의 임무수행이자 불교적 교화 가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2. 역사적 관점
신라 말기의 역사적 현실과 처용 설화 전체 문맥을 결부시켜 해석하는 입장으로서, 처용을 중앙의 왕권에 순복(順服)하지 않는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의 개운포 출유는 지방 호족의 무마책이고, 동해 용왕의 조화는 지방 호족의 중앙 왕권에 대한 도전의 표시이며, 용의 아들 처용의 입경(入京)과 왕정 보좌는 고려(高麗)의 기인(其人) 제도(制度)와 같이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잡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중앙 귀족 자제의 타락한 모습으로 파악한다.

심화 자료
서역국과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처용가
류의 문명은 인류 공동의 창조물이며, 우리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공동의 소유물이다. 따라서 문명 간의 관계는 공존하고 교류하는 상생관계이지 결코 서로 충돌하고 배척하는 상극관계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상생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1천여 년 전 한국과 이슬람 세계의 만남이고 교류이다.  - 정수일 (딘국대 사학과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