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시가문학
이조년 [고려문신]/ 1269(원종 10)1343(충혜왕 복위 4).
고려 후기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한 문신.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아버지는 경산부(京山府) 이속(吏屬)인 장경(長庚)이다. 장인은 정윤의로 경산부에 부임해서 그의 사람됨을 보고 사위로 았다. 1294년(충렬왕 20)에 향공진사로 급제한 후 안남서기(安南書記)·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협주지주사(陝州知州事) 등을 거쳐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1306년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의 이간으로 충렬왕·충선왕 부자간 다툼이 치열했는데 이조년은 진퇴(進退)를 가하고,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를 당했다. 유배 후 13년간은 고향에서 은거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심왕(瀋王) 고(暠)가 왕위를 넘보자 발분(發憤)하여 홀로 원나라에 가 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충숙왕이 환국한 후 감찰장령·군부판서 등을 역임했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숙위(宿衛)시 방탕하게 생활하므로 경계의 말을 간곡히 올리자 왕이 담을 뛰어넘어 달아났다고 한다. 충혜왕이 왕위에 올라 정당문학예문대제학직을 내리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했다. 충혜왕의 방탕을 보고 충정으로 간했으나 듣지 않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죽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로 시작되는 시조 1수를 남겼다. 오늘날 전하는 고시조 가운데 자주 애송되는 것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의 심정을 자연을 통해 표현한 절구(絶句)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 출처: 브리태니커
길재 (고려·조선 학자) [吉再]1353(공민왕 2)1419(세종 1)/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은(三隱)이라 한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이며, 어머니는 토산(兎山)의 사족(士族)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11세에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8세에는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에게서 〈논어〉·〈맹자〉 등을 배웠다. 그 뒤 박분과 함께 송도에서 당대의 석학이던 이색·정몽주·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배웠다. 1374년(공민왕 23)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에는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했다. 이후 학문에 정진하여 권근이 "내게 와서 글을 배우는 사람은 많지만 길재가 독보(獨步)이다"라고 하여 큰 기대를 걸었다 한다. 1386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청주목사록(淸州牧司錄)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고, 다음해에는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올랐다. 이때 태학의 여러 학생들과 귀족의 일반 자제들까지도 그에게 배우기를 청하여 이들을 가르쳤다. 이무렵 이방원(李芳遠:太宗)과 같은 마을에 살았으며, 성균관에서도 같이 공부하여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에는 "몸은 비록 남다를 바 없다마는 뜻은 백이(伯夷)·숙제(叔齊)처럼 마치고 싶구나"라는 내용의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는 시를 읊기도 했다. 1389년(창왕 1) 종사랑(從事郞)·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이성계(李成桂)·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듬해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선산(善山) 봉계(鳳溪)로 돌아왔다. 1391년(공양왕 3)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경사교수(經史敎授)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우왕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강릉으로 옮긴 후 살해되자, 전에 모시던 왕을 위하여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등을 먹지 않고 3년 상을 지냈다.
강호사시가 [사시한정가]
맹사성 (孟思誠 : 13601438)이 지은 연시조 4수.
〈강호가 江湖歌〉·〈사시한정가 四時閑情歌〉라고도 한다. 작품의 배경은 지은이의 고향인 충남 온양의 새실마을인 듯하다. 봄·여름·가을·겨울을 한 수씩 노래했는데, 75수에 담긴 경험의 양상과 전개방식에 일정한 틀이 있고 이것이 겹치면서 자연의 변화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중 첫수는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밋친 흥(興)이 절로 난다/탁료(濁醪) 계변(溪邊)에 금린어(錦麟魚) 안주(安酒)ㅣ 로다/이 몸이 한가
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이다. 초장은 '강호에'로 시작하여 풍성하고 너그러운 강호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도취하게 한다. 중장에는 자연에 묻혀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그렸다. 종장은 주어진 자연 질서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모습을 노래했다. 특히 75수의 끝에 반복되는 '역군은이샷다'라는 감탄적 종결은 강호에서 만족한 생활이 군주의 은혜로운 통치의 영역 안에 있다는 지은이의 인식을 보여준다. 〈악학습령 樂學拾零〉·〈청구영언〉·〈해동가요〉 등에 실려 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꼽힌다.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謹甫)· 성삼문
출신 및 관직생활
아버지는 도총관 승(勝)이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신죽주·하위지·이석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 禮記大文諺讀〉을 편찬했다.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신숙주·최항·박팽년·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453년 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사설시조 (조선 문학) [辭說時調]
평시조보다 긴 사설을 지닌 시조.
'장시조', '장형시조'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만횡청(蔓橫淸)이라 하여 창법의 명칭으로 쓰이다가 문학양식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정철(鄭澈:1536~93)의 〈장진주사 將進酒辭〉에서 처음 시작되어 조선 중기까지 드문드문 나타나다가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17세기말부터 19세기말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종장은 비교적 평시조의 율격과 비슷하나 초·중장은 평시조의 율격에서 크게 벗어나 길어진 형태이다. 작품에 따라서 중장이 가사(歌辭)처럼 길어진 것도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중장이 2음보 정도 길어지는 경우를 엇시조라 하여 중형시조와 장형시조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크게 나누어 평시조와의 대비를 중요하게 여기고, 최근에는 모두 '사설시조'로 통용하고 있다. 발생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사회변동과 음악의 발달에 힘입어 평시조가 변형·파격을 이루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경우에 따라 조선 중기부터 민간가요가 시조창에 얹혀 불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내용은 평시조가 사대부의 사상을 담았던 것과 달리, 익살·풍자와 분방한 체험을 표현한 평민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내용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가장 작품성이 뛰어나며 당대 민중적 삶과 진솔한 정감을 역동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바람도 쉬여 넘는 고개……〉·〈서방님 병들여 놓고……〉·〈귓도리 져 귓도리……〉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② 성적 충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당대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작품들이 있다. 〈반(半)여든에 첫 계집을 하니……〉·〈간밤의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이져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사설시조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서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즉 중세적 도덕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긍정적 역할을 한 반면, 때때로 삶의 가치를 성적 쾌락만으로 보는 퇴폐적·허무적 사고를 유포한 부정적인 점도 있다. 그릇된 가치규범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으로서 의의가 있으나 그것이 곧 근대적 삶을 그려낸 것은 아니다. 이밖에도 조선 후기 도시의 발달이나 현세적 삶에 대한 긍정, 사대부적 삶에 대한 동경 등 다양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내용 때문에 지은이도 여러 부류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① 사설시조의 탈중세적 속성에 주목해 지은이를 사대부와 대립하는 서민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② 사설시조가 평시조와 병행해 발전한 평시조의 부속 장르라고 하여 지은이를 평시조와 마찬가지로 사대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 2가지 견해를 모두 받아들이고 다양한 계층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지은이를 조선 후기의 여러 계층 가운데 새로이 등장한 중간 계층으로 본다. 여기에는 경아전(京衙前)과 같은 중인들을 중심으로 해 당시 새로이 부상된 여항의 부호들이 포함된다. 이들은 중세기 해체를 배경으로 축적한 부를 통해 당시 여항의 유흥과 예술을 장악하여 주도한 집단으로서, 이들이 사설시조의 전승·향유·창작에 직접·간접으로 참여했다는 점이 여러 측면에서 입증되고 있다. 이는 사설시조의 전승과 창작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김천택·김수장이 바로 경아전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양반가사
이 몸이 태어날 때에 임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생 함께 살아갈 인연이며 이 또한 하늘이 어찌 모를 일이던가
나는 오직 젊어 있고, 임은 오직 나를 사랑하시니, 이 마음과 이 사랑을 비교할 곳이 다시 없다. - 임과의 인연
평생에 원하되 임과 함께 살아가려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워하는고
엊그제에는 임을 모시고 광한전에 올라 있었더니, 그 동안에 어찌하여 속세에 내려 왔느냐
내려올 때에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지 3년일세. 연지와 분이 있네마는 누구를 위하여 곱게 단장할꼬
마음에 맺힌 근심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서 짓는 것이 한숨이요,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 인생은 한정이 있는데 근심은 한이 없다.
- 이별 후의 그리움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구나. 더웠다 서늘해졌다 하는 계절의 바뀜이 때를 알아 지나갔다가는 이내 다시 돌아오니, 듣거니 보거니 하는 가운데 느낄 일이 많기도 하구나. - 세월의 무상함
본사 - 임을 그리는 마음
봄바람이 문득 불어 쌓인 눈을 헤쳐 내니, 창밖에 심은 매화가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쌀쌀하고 담담한데, 그윽히 풍겨 오는 향기는 무슨 일인고 황혼에 달이 따라와 베갯머리에 비치니, 느껴 우는 듯 반가워하는 듯하니,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를 꺾어 내어 임 계신 곳에 보내고 싶다. 그러면 임이 너를 보고 어떻다 생각하실꼬
- 춘원(春怨) - 매화를 꺾어 임에게 보내 드리고 싶음
꽃잎이 지고 새 잎 나니 녹음이 우거져 나무 그늘이 깔렸는데 비단 포장은 쓸쓸히 결렸고, 수 놓은 장막만이 드리워져 텅 비어 있다. 연꽃 무늬가 있는 방장을 걷어 놓고, 공작을 수 놓은 병풍을 둘러 두니, 가뜩이나 근심 걱정이 많은데, 날은 어찌 길던고 원앙새 무늬가 든 비단을 베어 놓고 오색실을 풀어 내어 금으로 만든 자로 재어서 임의 옷을 만들어 내니, 솜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격식도 갖추었구나. 산호수로 만든 지게 위에 백옥으로 만든 함에 담아 앉혀 두고, 임에게 보내려고 임 계신 곳을 바라보니, 산인지 구름인지 험하기도 험하구나. 천 리 만 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누가 찾아갈꼬 가거든 열어 두고 나를 보신 듯이 반가워하실까
- 하원(夏怨) - 임에 대한 알뜰한 정성
하룻밤 사이의 서리 내릴 무렵에 기러기 울며 날아갈 때, 높다란 누각에 혼자 올라서 수정알로 만든 발을 걷으니, 동산에 달이 떠오르고 북극성이 보이므로, 임이신가 하여 반가워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저 맑은 달빛을 일으켜 내어 임이 계신 궁궐에 부쳐 보내고 싶다. 누각 위에 걸어 두고 온 세상을 비추어, 깊은 산골짜기에도 대낮같이 환하게 만드소서. - 추원(秋怨) - 선정을 갈망함
천지가 겨울의 추위에 얼어 생기가 막혀, 흰 눈이 일색으로 덮여 있을 때에,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짐승의 날아감도 끊어져 있다. 소상강 남쪽 둔덕도 추위가 이와 같거늘, 하물며 북쪽 임 계신 곳이야 더욱 말해 무엇하랴 따뜻한 봄기운을 부치어 내어 임 계신 곳에 쐬게 하고 싶다. 초가집 처마에 비친 따뜻한 햇볕을 임 계신 궁궐에 올리고 싶다. 붉은 치마를 여미어 입고 푸른 소매를 반쯤 걷어 올려 해는 저물었는데 밋밋하고 길게 자란 대나무에 기대어서 이것저것 생각함이 많기도 많구나. 짧은 겨울 해가 이내 넘어가고 긴 밤을 꼿꼿이 앉아, 청사초롱을 걸어둔 옆에 자개로 수 놓은 공후라는 악기를 놓아 두고, 꿈에서나 임을 보려고 턱을 바치고 기대어 있으니, 원앙새를 수 놓은 이불이 차기도 차구나. 이 밤은 언제나 샐꼬 - 동원(冬怨) - 임에 대한 염려
결사 - 변함없는 충성심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말아 가지고 이 시름을 잊으려 하여도 마음속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 범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고 다니다가 향기가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께서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따르려 하노라. - 임에 대한 충성심
요점 정리
작가 : 정철(鄭澈;15361593)
연대 : 선조 18년22년(15851589)
갈래 : 서정 가사(抒情歌辭)[3·4조 내지 4·4조]
성격 :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
주제 : 연군의 정, 임금을 그리는 마음
율격 : 3(4).4조의 4음보
문체 : 운문체. 가사체
구성 : 서사, 본사<춘원(春怨) ·하원(夏怨) ·추원(秋怨) ·동원(冬怨)>, 결사의 3단 구성.
의의 :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① '속미인곡'과 더불어 가사 문학의 절정을 이룬 작품이다.
② '정과정(鄭瓜亭)'을 원류(源流)로 하는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다.
③ 우리말 구사의 극치를 보여 준 작품이다.
출전 : 송강 가사(松江歌辭)성주본
배경 : 송강이 50세 되던 선조 18년(1585)에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의 논척(論斥 : 옳고 그름을 따져 물리침)을 받고 관직
에서 물러나 그의 고향 전남 창평(昌平)에 4년 간 우거(寓居)할 때 지은 작품이다.
평가 : 서포(西浦)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관동별곡', '속미인곡'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장은 이 세 편뿐이
다.'(左海眞文章只此三篇 : 좌해진문장지차편)'라고 극찬하였고, 초나라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비겨 '동방의
이소(東方之離騷)'라고 하였다.
사미인곡의 문학적 우수성 : 이 작품은 임금인 선조를 사모하는 연군의 정을, 한 여인이 남편을 잃고 연모하는 마음에 비겨서 노래하였다. 다양한 기법과 절묘한 언어가 구사되어, 가사 작품 중에서도 그 문학성이 두드러진다. 표현상의 기법으로는 비유법, 변화법을 비롯하여 연정을 심화시키는 점층적 표현이 쓰였다. 시상을 급격하게 발전시키고 있으며,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정서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송강 정철은 '미인'을 한글로 '임'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본래 '미인'은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 항상 사모하고 있는 군주, 재덕이 뛰어난 사람, 한나라 여관의 명칭, 무지개의 별명, 미남자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미인곡', '속미인곡'에서 작중 화자는 분명 임을 이별한 여인이므로, 여기서 '미인', 곧 '임'은 남성이거나 군주이다. 따라서 송강 가사에서는 '미인, 임'은 '사랑하는 임이자 미덕을 갖춘 임(군주)'이다. 한편, 송강 가사를 좀더 넓게 해석하면, 임을 꼭 군주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여자)로도 볼 수 있다. 절실한 사랑의 고백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송강가사에서 임금을 미인으로 설정한 것은 의 인간적인 정감의 교류를 군신 관계에 끌어들인 셈이고, 그래서 송강의 작품들이 보편적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서사의 이해와 감상
'사미인곡'의 서사로서 임과의 인연이 천생 연분임을 밝히고, 이별의 한과 그리움으로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심정을 나타낸 부분이다. 전편에 여성적인 감정과 어투와 행위로 가득 차 있다. 한 편의 연시(戀詩) 형식으로 작자의 심정과 처지를 말하고, 끝 부분에서 본사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으며, 충신 연군의 정을 남편과 생이별한 한 여인의 심정에 의탁하여 표현하였고, 임과 이별한 지 3년, 한과 그리움으로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데, 무심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 계절 따라 온갖 회포를 자아낸다고 여성 특유의 애절한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다. 여기서 '3년'이란 작자가 전남 창평에서 은거해 있는 동안을 말한다.
'송강가사' 는 가사사(歌辭史)의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다음 시대를 예비하는 작품일 뿐더러 문학성의 측면에서도 우뚝 솟은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그 까닭은, 거듭 말하거니와,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의식의 단초를 그에 걸맞는 언어로써 드러내고자 한 송강가사의 문체에 있다고 볼 것이다.
송강은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에 따라서 다양하게 대화의 전개 방식을 변경한 것으로 평가할수 있다. 이것은 '훈민가'에서 송강이 강원도 백성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백성 A가 백성 B에게 전언하는 형식을 취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볼 때 송강가사의 미적 원천은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서 대화의 다양한 층위를 적절히 이용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송강가사의 문제는 문어체 소설과 대비하여 보면, '판소리 서사체에서는, 흔히 서술자의 시점에서 진술되는 언어(내적 분석)로부터 인물의 시점에서 진술되는 내적 언어(독백)로의 전치(轉置)를 유도하는 예의 인용투어를 생략하거나 탈락시켜 버림으로써, 서술과 독백의 경계 없이 양자가 공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같은 양상은 초기의 가사에서 이미 보여진 바였다. 민요와 사대부 문학의 결합이라는 가사의 특성상 구어체와 문어체의 혼용은 이미 배태되어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이 16세기의 가사들에서는 단편적으로만 보이는 반면, 송강가사에서는 문학적 언어에 대한 본격적인 언어 실험의 시도로 나타났다. '서술자의 존재가 드러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하며 숨기도 해서, 서술자의 목소리와 시점, 인물의 목소리와 시점이 다양하게 조합됨으로써 상호침투 내지 공존' 하는 현상은 실로 송강가사의 문체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16세기는 주자학이라는 절대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기였으므로 당시에 보였던 과도기적 경향도 그러한 거시적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송강이 가졌던 상대주의적 의식도 주자주의의 틀 속에 국한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송강가사의 문체 또한 한 의미의 대화체로 보기는 어렵다. 송강가사의 후기의 기행가사인 '연행가' 나 '일동장유가' 등에서 볼 수 있는 상의한 의식이나 경험의 세계를 드러내지는 않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를 토대로 송강가사가 전기가사의 최고봉이면서 그 마지막에 놓인다는 사실을 해명하는 가사사적 전망을 세워볼 수는 있을 것이다. 발생기의 가사가 민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사대부의 문학으로 자리잡게 된 까닭은 상승하는 계급으로서의 사대부가 민중의 언어를 포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가사가 서정성을 띤 이유도 마찬가지로 이제 상승을 끝낸 사대부들이 그들의 이념을 내면화하는 단계였기 때문이다. 송강가사에서 보이는 언어 현상은, 지배계급의 언어만으로는 더 이상 모순이 쌓여 가는 세계를 다 설명할 수 없게 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민중의 언어가 스며든 것인 셈이다.
송강가사의 문체가 보여 주는 특성들은 궁극적으로 개화기의 대화체가사에서 드러나는 언술적 특성의 단초가 되었다. 대화체가사의 서사화가 이미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었고 후기가사의 서사화는 '누항사'가 그 선편을 쥐고 있었던 바, 서사화의 가능성은 원칙적으로는 가사의 언술적 특성 자체에서 찾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송강가사의 언어 실험이 그 매개항이 되기 때문이다. 송강가사는 이른바 사대부가사의 백미로 평가될 수도 있지만, 바로 이어지는 '누항사' 에서 비롯되는 후기가사의 서사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송강가사는 전기가사의 마지막이면서 최고봉인 동시에 사대부가사 자체의 원리는 해체되고 있었던 것이다.(출처 : 조세형, '송강 가사의 이해와 감상')
개화가사(開化歌辭)
용담유사 (최제우 가사집) [龍潭遺詞]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1824~64)가 1860~63년 한글로 지은 포교가사집(布敎歌詞集).
〈동경대전 東經大典〉과 함께 동학의 기본경전이다. 모두 9편의 가사를 싣고 있다. 서양세력이 밀려오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이에 맞서는 정신적 자세로서 동학을 내세우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일반 민중과 부녀자를 독자로 삼았기 때문에 한글 가사체의 형식을 택하고 있다. 1881년(고종 18) 6월 최시형(崔時亨)이 충청북도 단양군 남면 천동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처음 펴냈고 1893, 1922년 재간행되었다.
9편의 가사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용담가(龍潭歌):1860년 최제우가 득도하고 지은 가사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득도한 곳인 경주 구미산 용담의 경치와 득도
의 기쁨을 읊었다. 풍수지리사상과 충효사상이 강조된 작품이다.
② 안심가(安心歌):1860년에 지은 가사이다. 당시 사회에서 불안해하던 부녀자들을 안심시키려는 목적으로 지었다. 천대받던 부
녀자들의 덕을 칭송하고 좋은 시절이 오면 여성이 주체가 될 것이라고 했다.
③ 교훈가(敎訓歌):1860년에 지은 가사이다. 고향의 교도들에게 수도에 힘쓰라고 교훈을 내리는 내용이다.
④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1861~62년에 지은 가사라고 한다. 자식이 없던 노인이 금강산에 들어가 빌어 옥동자를 얻었
는데, 이 아이는 난세를 한탄하며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금강산에서 꿈속의 도사를 만나 득도
했다는 내용이다. 최제우의 삶과 득도과정, 내용을 나타낸 가사이다.
⑤ 도수사(道修詞):1861년에 지은 가사이다.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떠나게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도 닦기를 간절히 당부
하는 내용이다.
⑥ 권학가(勸學歌):1862년에 지은 가사이다. 동학을 믿음으로써 다함께 동귀일체(同歸一體)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⑦ 도덕가(道德歌):1863년에 지은 가사이다. 지벌(地閥)과 문필보다는 도덕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내 몸에 이미 모시고 있는 하느
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했다.
⑧ 흥비가(興比歌):1863년에 지은 가사이다. 〈시경 詩經〉의 노래체인 흥과 비를 이용하여 도를 닦는 법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도는 멀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⑨ 검결(劍訣):1861년에 지은 가사이다. 이 노래가 문제가 되어 최제우는 처형당하게 되었다. 다시 〈용담유사〉가 간행될 때에는
이런 이유로 수록되지 못했다. 갑오농민전쟁 때 군가로 불리기도 했다. 최제우의 변혁의지가 잘 나타난 작품이다.
민요/ 아리랑 (한국민요)
어느 시대에 생겨났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지금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해외에도 널리 전승되고 있다.
〈아리랑〉의 기원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여음인 '아리랑'의 어원에서 그 바탕을 찾고 있다. 〈아리랑〉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를 전후한 시기이다. 이런 이유로 어원설은 대체로 〈아리랑〉의 최초의 형태가 1930년대에 정착된 〈아리랑〉과 유사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아리랑'이라는 말을 실사(實詞)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① 아리랑(我離娘):'나는 사랑하는 님을 떠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
② 아이농설(我耳聾說):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고생하던 민중들이 반가운 말은 못듣고 괴로운 말만 듣게 되니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는 설,
③ 아랑전설(阿娘傳說):밀양 영남루의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노래에서 나왔다는 설,
④ 알영설(閼英說):신라의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을 찬미한 말에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밖에도 여러 발생설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한 근거가 없으니 그저 구음(口音)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 유래했다고 봄이 바람직하다.
한국의 3대 전통민요 아리랑은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밀양아리랑〉을 말한다. 〈정선아리랑〉은 태백산맥 동서를 따라 설정된 메나리토리권의 민요로 민요적 전통성과 지역성이 강하다. 〈진도아리랑〉은 호남지역의 육자배기토리권에 속하지만 다른 육자배기토리 민요와 약간 차이가 있다. 전라남도 진도와 호남지역, 충청남도 일대, 경상남도 서부지역, 제주도 등에 분포되어 있다. 〈밀양아리랑〉은 영남지역에서 전하지만 영남지역의 정자토리 민요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편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신아리랑〉을 계기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통속 민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무가 (무속 음악) [巫歌, 신가]
굿이 진행되는 동안에 무당이 부르는 노래나 사설.
무가의 형식과 가창방법은 다양하며 내용에서도 공통된 통일성을 찾기가 힘들다. 그러나 구조와 흐름의 핵심적 부분은 대체로 비슷하여 무가에 대한 분석으로 무속적 세계관의 특징을 밝혀 볼 수 있다. 무가는 무속의 신관(神觀)·우주관·인간관 및 존재근원에 대한 일체의 사고가 다 들어 있어 무가를 무속의 구비경전(口碑經典)으로 볼 수 있다.
무가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가는 신성성(神聖性)이 있다. 무가는 민요와는 달리 '신'에게 노래하거나 구연(口演)하는 것이다. 둘째, 주술성(呪術性)이 있는데 점복(占卜)·치병(治病)·예언(豫言) 등의 내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셋째, 오락성(문학성)이 있다. 굿을 하면서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춤과 노래를 들려주고 굿판에서 재담으로 엮는다. 넷째, 전승의 한계성이 있다. 무가는 무당이라는 특정 계층에 의해서 전승되며 이는 사제관계나 무의를 공동으로 행하는 과정에서 전승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포용성(包容性)을 갖고 있다. 무가는 다른 신앙에 대한 배타의식이 적은 편이어서 다른 종교의 경문구를 빌어서 쓰기도 하는데 불교·유교·도교의 경전에서 많은 문구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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