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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문학/ 황조가, 정읍사, 조신몽설화

수로보니게 여인 2009. 3. 6. 23:39

  • 삼국시대의 문학
  •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삼국이 한문을 공식 문자로 사용하고 유학과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문학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이루어졌다(→ 한자)

    . 한문의 사용은 〈유기 留記〉·〈신집 新集〉·〈서기 書記〉·〈국사 國史〉와 같은 역사책을 편찬하고,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진흥왕순수비 眞興王巡狩碑〉 같은 금석문을 짓는 등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서는 물론, 구비전승에만 의존했던 한국문학이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을 공유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하는 중대한 구실을 했다. 유학과 불교도 보편적인 이념을 구현하면서 한국문학의 주제를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 與隋將于仲文詩〉는 고구려인의 넘치는 기상을 드러냈고, 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 致唐太平頌〉은 그 내용이 비록 사대적이기는 하지만 신라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으로 가자

     

    황조가(黃鳥歌)

     

    翩翩黃鳥 편편황조
    펄펄 나는 저 꾀꼬리는

    雌雄相依 자웅상의
    쌍쌍이 기는데,(암수 다정히 노니는데)

    念我之獨 념아지독
    외로운 이 내 몸은(외로워라, 이 내 몸은)

    誰其與歸 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뉘와 함께 돌아가리)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정다운데
    외로운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지은이 : 고구려 2대 유리왕
    연대 : 유리왕 3년
    갈래 : 4언 4구의 한역 시가, 개인적 서정시
    성격 : 우의적, 애상적

    표현 : 자연물을 빌려 우의[(寓意) :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함. 또는 그런 의미.]적으로 표현, 대조,

              의태, 설의[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을 의문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상대편이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수사법.]적 표현을 통해

              화자의 외로운 심정을 노래, 한시의 전형적인 선경후정의 방식을 사용함[선경후정(先景後情) : 한시 창작의 한 방법으로 시

              의 앞부분에서 경치를, 뒷부분에서는 이에 대한 시적 화자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는 구성방법으로 여기서 꾀꼬리가 정답게

              놀고 있는 모습(선경)과 나의 외로움(후정)을 표현하고 있는 방법을 선경후정의 방법으로 볼 수가 있다.]

    제재 : 꾀꼬리
    주제 : 짝을 잃은 슬픔(외로움), 임을 잃은 슬픔
    출전 : <국사기>권 13, 고구려 본기
    의의 : ① 현전하는 최고의 개인적 서정시

              ②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단계의 가요로 작가는 유리왕이며, 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왕조'에 4언 4구로 전하는 한역시이다. '공무도하가'와 함께 우리 나라 최고의 서정시로 추정된다.

    구조:

    翩翩黃鳥  편편황조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 꾀꼬리의 정다운 모습

    雌雄相依 자웅상의
    쌍쌍이 즐기는데,(암수 다정히 노니는데)

    念我之獨 념아지독
    외로운 이 내 몸은

    짝을 잃은 '나'의 외로움

    誰其與歸 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뉘와 함께 돌아가리)

     

    내용 연구
    翩翩(편편) : 나부끼다
    黃鳥(황조) : 꾀꼬리
    雌(자) : 암컷
    雄(웅) : 수컷
    依(의) : 의지하다
    念(념) : 생각
    我(아) : 나
    獨(독) : 홀로
    誰(수) : 누구
    與(여) : 더불어, 함께
    歸(귀) : 돌아가다
    翩翩(편편) : 펄펄, 훨훨 가볍게 나는 모양, 의태어.
    雌雄(자웅) : 암수, 암컷과 수컷
    相依(상의) : 정답구나, 서로 의지함, 여기서는 암컷과 수컷이 함께 놂을 뜻한다.
    念我之獨(염아지독) : 나의 고독, 나의 외로운 심정, 실연의 고독과 절망감 등을 표현한다. '獨(독)'은 이 작품의 시적 모티브이다.
    誰其與歸(수기여귀) : '암수 서로 정다운데'와 대조를 이루는 시구로, 그 뉘와 더불어 돌아갈 것인가, 또는 함께 살아 갈 사람이 없다

                                    는 뜻
    翩翩黃鳥(편편황조) : 숲 속에서 겁게 펄펄 날아다니고 있는 저 꾀꼬리는. : 시적 화자의 서정을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는 제재

                                   인 꾀꼬리의 모습을 묘사하여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대비시키고 있다. 여기서 꾀꼬리는 시적 화자와 대조되어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존재이다.

    雌雄相依(자웅상의) : 암컷과 수컷이 잘 어울려 정답게 노닐고 있구나. : 꾀꼬리의 정다운 무습을 통해 자신의 고독하고 슬픈 정서를

                                    환기시키고 있다. 제 1 구와 함께 이 노래의 배경 역할을 한다.

    念我之獨(염아지독) : 나는 사랑하는 임을 잃었으니 외롭기 그지없구나. 여기에서의 '獨'은 임을 여읜 서정적 자아의 심정이 단적으

                                  로 집약된 단어이다. 시상이 객관적 상관물인 꾀꼬리에서 서정적 자아의 세계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誰其與歸(수기여귀) : 이제 나는 누구와 짝을 하여 되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 함께 돌아갈 사람을 잃은 데서 오는 슬프고 고독한 감

                                   정이 절정에 이른 구절이다. 제3구와 함께 '펄펄 나는 꾀꼬리'와는 대조적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꾀꼬리

                                   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 보고 있을 시적 화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겠다. 4구는 짝을 잃은 자신의 외로운 심

                                   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쓸쓸한 탄식으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해와 감상

    이 노래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의 설화에 나오는 삽입 가요로, ' 구지가'가 주술적인 집단 무요(舞謠) 또는 노동요의 성격을 띤 시가임에 비하여 이 노래는 고대인의 이별을 소박하게 노래한 개인적 서정시이다. 또한 이 작품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정시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인 서정을 노래한 작품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제 또한 평이하여 독자에게 강한 호소력을 느끼게 한다. 이 노래의 소재는 '꾀꼬리'라는 자연물이고, 주제는 '사랑하던 임을 잃은 외로움과 슬픔'이다. 즉, 주체할 수 없는 실연의 아픔을 꾀꼬리라는 자연물에 의탁하여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찍이 유리왕은 아버지를 이별하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어머니 곁을 떠나 남방으로 방랑하게 되었고, 끝내는 왕비까지 잃게 되어 화희와 치희의 두 계비를 맞이하는 등 애초부터 정에 굶주리고 있었다. 이러한 그가 두 계비 간의 사랑 싸움으로 치희를 잃게 되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때마침 정다운 모습으로 펄펄 나는 한 쌍의 꾀꼬리는 두 계비의 시샘과 자신의 갈등이 상징적으로 어우러지면서 그 비애감을 한 층 더하게 하였으니, 이 시의 모티브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허탈에 빠진 왕은 나무 그늘에 무심히 앉아 있었다. 때마침 나뭇가지에는 황금빛 꾀꼬리 한 쌍이 서로 부리를 맞대고 정답게 놀고 있었다. 무슨 사랑의 이야기나 나누는 듯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왕은 그 순간 과거의 그 거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더욱 뼈저리는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노래의 짜임은 극히 단순하나 완벽한 대칭 구조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짝을 이루어 거이 노니는 꾀꼬리와 홀로 있는 사람, 하늘을 나는 가벼움과 외로운 심사의 무거움, 그리고 마지막 구절 뒤의 쓸쓸한 여운이 서로 대립하고 중첩되면서 그리움의 간절함과 깊이를 보여 준다. 개인의 감정을 꾀꼬리라는 자연물에 이입시킨 대조적 표현이 돋보인다. 짤막한 이 한 편의 노래에서 우리는 왕으로서 유리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유리왕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 그에게서 따뜻한 정감이 흐르는 훈훈함을 맛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은 현대적인 관점 다시 말해서 일부일처제의 관점에서 볼 때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왕이 한 여자만이 아니라 다수를 거느렸던 때인지라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보아야 한다. 또한 보통 계급과는 다른 지도자였던 왕조차도 사랑 문제에서는 이렇게 심각한 가슴앓이를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인간의 감정에는 신분 차이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또한 인간은 평등하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화 자료

    '꾀꼬리'와 왕은 각각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왕이 '꾀꼬리'를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다정히 노닐고 있는데 비해 유리왕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외로이 돌아오는 길이다. 왕은 다정한 한 쌍의

          꾀꼬리를 보며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더욱 절실히 느낀다.

    이 노래의 시상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말해 보자.

     => 이 노래의 첫 두 행에서는 꾀꼬리가 다정히 노니는 모습이 제시되었고, 나머지 행에서는 그것을 보는 시적 화자의 심경이 제시 된다. 이는 '선경후정'의 시상 전개 방식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정한 꾀꼬리 한 쌍과 외로운 처지의 왕은 대조를 이룬다.

    이 노래는 서정시로 볼 수 있다.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앞에서 배운 서정 갈래 개념을 바탕으로 말해 보자.

     => '황조가'는 집단의 정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정서를 다정한 꾀꼬리와 외로운 왕이라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저 '외롭다'는 정서만을 토로한 것이 아니라 그 외로움을 이미지, 즉 감각적인 형상으로 다듬어 노래하였다는 점이 이 노래를

         서정시로 볼 수 있게 한다.

    배경설화
    배경설화 원문<三國史記 卷 第 十三, 김종근 역>


    현대어역
    三年 7월에 離宮(이궁)을 골천에 지었다. 十月(시월)에 왕비 송씨가 돌아갔으므로 왕은 다시 두 女子(여자)를 繼室(계실)로 얻었는데 하나는 禾姬(화희)로 골천 사람의 딸이고, 하나는 雉姬(치희)로 漢人(한인)의 딸이었는데 두 여자는 사랑을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였으므로 왕은 양곡의 동서에 二宮(이궁)을 짓고 각각 두었다. 뒷날 왕은 기산에 田獵(전렵)을 나가서 칠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두 여자는 서로 쟁투하여 화희는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漢家(한가)의 婢妾(비첩)으로 어찌 무례함이 심한가'하니 치희는 부끄러워하면서 원한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며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 때 왕은 잠깐 나무 밑에서 쉬는데 꾀꼬리들이 모여들므로 이에 느끼어 노래하기를 '꾀꼬리는 오락가락 암놈 숫놈 기는데 외로울 사 이내 몸은 뉘와 같이 돌아갈꼬'(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하며 탄식하였다. [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왕]

    유리왕
    고구려 제2대 왕(재위 BC 19∼AD 18)으로 휘(諱) 유리(類利)·유류(儒留)·주류(朱留).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동명왕의 맏아들. 어머니 예씨(禮氏). 비(妃)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 BC 19년(동명왕 19)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BC 17년 계비인 치희(雉姬)를 그리는 《황조가(黃鳥歌)》를 지었으며, BC 9년 선비(鮮卑)를 공략하여 항복받았다. 3년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3년 부여(扶餘)가 침공해 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14년 군사 2만으로 양맥(梁貊:小水貊)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高句麗縣:玄娠郡의 屬縣)을 빼았다. 두곡동원(豆谷東原)에 묻혔다.



    '황조가'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

    1. 이병기 : 원시적 서사 문학 가운데서 축수 또는 기원의 요소적인 부분이 분화 독립하여 서정시로 형성되었는데, '황조가'도 그 한

                     예이다.
    2.임동권 : 고구려의 민요로서 유리왕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가창했을 따름이다.
    3. 정병욱 : 이 노래는 <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제례 의식 중에서 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불려진 사랑가의 한 토막.
    4. 이명선 : 유리왕의 치희에 대한 개인적인 미련에서 불려진 것이 아니라. 종족간의 상쟁을 화해시키려다 실패한 추장의 탄식으로

                     이해된다.

    다른 해석

    그 동안 학계에서는‘황조가’가, 삽입된 설화와 그 시대상을 고려할 때 서정시냐 서사시냐 하는 문제와 작자가 유리왕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앞에서는 양주동 이래 학계의 통설이 되어 온 서정시설을 따랐으나 서사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황조가를 서사시로 해석하면서 화희와 치희의 쟁투를 종족간의 싸움으로 보고,‘황조가’의 배경에 설화적인 모습이 있는 것과 화희·치희의 이름이 토템적임을 들어 이에 동조하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정병욱은‘황조가’는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민요로서 유리왕 설화에 삽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즉 황조가는 형식이나 내용으로 보아 중국의 시경과 같은 것으로서 연희석상에서 간의 연정을 읊던 노래의 형태이고 그 기원은 이미 오래 된 것이며, 따라서 황조가의 작자는 유리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화(禾)’가 벼,‘치(雉)’가 꿩인데 착안하여 화희와 치희의 쟁투에서 치희가 부끄럽게 여기고 유리왕 곁을 떠났음을 당시의 시대상과 결부시켜, 유리왕 대가 수렵 경제 생활 체제에서 농경 경제 생활 체제로 발전되던 역사적 사살을 신화적으로 투영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견해가 있지만, 확실한 논증이 없는 지금이 황조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 시가의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황조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

    유리왕은 신화적 인물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경위부터가 신화적인 요소가 매우 짙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과연 신화적인 요소를 띤 인물의 창작적인 시 제작을 인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문학사의 발전 과정으로 보아, 신화적인 존재의 인물은 서사시의 주인공이고, 서정적인 창작시는 그보다 늦다는 견해가 통설인 이상, '국사기'의 기록을 전적으로 믿는 데에는 얼마큼 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사기의 기록을 떠나, 이 '황조가'를 한 편의 순수한 고대의 서정시로 보고서, 그 내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이 노래의 소재는 '꾀꼬리'라는 자연물이고, 주제는 간의 애정을 읊은 노래임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한다면, 간의 애정 즉 연애 감정을 읊는 데에, 꾀꼬리라는 자연물을 빌려서 그 감정을 표현하였다는 뜻이 되겠다. (중략) 그러나 신화적인 인물의 창작적인 시 제작을 믿을 수 없다는 문학사의 일반적인 발전 법칙을 고려하여, 이 노래를 작자 불명의 서정적인 고대 가요로 친다면, 그 창작 동기도 '국사기'의 기록을 떠나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노래는 치희를 잃은 유리왕의 외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우리의 추론을 발전시킨다면, 어떠한 창작 동기를 상정할 수 있겠느냐는 설문이 제기되어야 한다.(중략)

    이 '황조가'라는 노래도 거절당한 남자의 애절한 구애곡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 드는 처녀에게 사랑을 호소했다가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외로운 총각의 심정, 그것이 바로 '황조가'의 내용에 넘쳐 흐른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의 보는 바로는, 이 노래를 '국사기'의 기록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위서동이전'이 전하는 바 많은 제례 의식 중에서, 가 배우자를 선정하는 기회에 불려진 사랑의 노래의 한 토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가도 사실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제작 연대도 확정할 수 없는 고대의 서정적인 가요의 한 토막이 후에 한문으로 번역되어, 고구려 유리왕의 설화 속에 끼여들었다는 정도로 생각해 두는 편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처 : 정병욱 저 '한국고전시가론')

    꾀꼬리

    참새목 꾀꼬리과의 새로《국사기》에 암수가 의좋게 노니는 것을 읊은 <황조가>가 전하며, 고려가요 <동동>에서 4월의 전경을 노래한 대목에 ‘곳고리 새’라 하여 꾀꼬리가 등장하고 있다. 모습이 아름답고 울음소리가 맑고 다양하여 예로부터 시재(詩材) 및 화재(畵材)로 쓰였다. 관상용으로 기르기도 한다.

    윤사월(閏四月)에 등장하는 꾀꼬리와 비교하기

    송화(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목월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민요풍의 서정시이다. 초여름의 산경(山景)을 배경으로 눈먼 처녀의 애달픔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는 꾀꼬리가 한 마리 나오고 사람이 한 명 나오는데, 꾀꼬리는 울고 눈먼 처녀는 엿듣고 있다. 그 처녀는 눈이 멀었고, 산지기의 딸이니까 가난하고, 그래서 나이가 차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은 안으로 안으로만 뭉쳐지고 피맺히게 우는 꾀꼬리 울음에서 언뜻 제 설움을 발견하게 된다. 처녀는 바깥의 아름다운 세상이 무척이나 그립다. 그러나 처녀의 이 그리움과 욕구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처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문설주에 기대어 그 아름다운 세계의 소리나마 엿듣고자 한다. 여기에서 꾀꼬리의 "울음-한"과 눈먼 처녀의 그것은 하나를 이루고, 거꾸로 "외딴 봉우리-외딴 집"의 외로움으로 되돌아간다. 한국 여성의 한과 설움의 결정을 맛보게 하는 작품이다.
    또한 이 시는 극도의 회화적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전반부는 커다란 화면 구조 속에서 제시되고 후반부는 눈먼 처녀의 모습을 또렷하게 확대하여 보여준다. 외딴 봉우리, 외딴 집, 눈 먼 처녀로 이어지는 공간적 이미지는 고독감과 애절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결국 <윤사월>은 간절한 삶의 충동이 펼쳐질 수 없는 불행한 상황에 처한 눈 먼 처녀의 그리움이 한가로운 산 속의 풍경과 미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함축성 있게 그려진, 토속적 서정을 탁월하게 표현한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꾀꼬리라도 이렇게 다른 것은 시인들의 개성에 연유하는 것이고, 시적 화자의 다양성에 기인하리라.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정읍사(井邑詞)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정읍사 고문출처 : http://travel.waw.co.kr/photo/moon.htm-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멀리 멀리 비춰 주소서.
    시장에 가 계신가요?
    위험한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놓으십시오.
    당신 가시는 곳에 저물까 두렵습니다

     

    달님이시여, 좀더 높이높이 돋으시어
    멀리 비추어 주소서
    지금쯤 전주 시장에 가 계시옵니까
    어두운 밤길을 가시다가
    혹시 진데를 디뎌 흙탕물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옵니다.
    몸이 고달프실 텐데 아무 데나 짐을 부려놓고 편안히 쉬소서
    당신이 가시는 길에 날이 저물까 두렵사옵니다. - 金 東 必

    달님이시여, 좀더 높이 돋으시어
    멀리 비추어 주십시오
    시장에 가 계십니까
    진 데를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 것이나 다 부려놓고 오십시오
    나의 가는 데가 저물까 두렵습니다. - 朴 晟 義

    저기 저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아 올라서 멀리멀리 비춰 주십시오.
    지금쯤 어느 시장에 가 계시옵니까
    어두운 밤길을 가다가
    혹시 진 데를 디뎌 수렁물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밤길을 가다가 몸이 고달프시면 아무데서나 짐짝을 부려 놓고 편안히 쉬십시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혹시나 내 남편이 가는 길이 어두울까 봐서요. - 鄭 炳 昱

    달이여, 높이 높이 돋우시어,
    멀리 멀리 비치십시오.
    시장에 가 계십니까
    혹시 진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디에든지 놓고 계십시오(어느 사람에다 마음을 두고 계십니까)
    나의 임(나의)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 全 光 鏞

    요점 정리

    작자 : 어느 행상인의 처, 미상
    갈래 : 고대 가요, 서정시
    연대 : 미상(백제로 추정)
    형식 : 내용상 3장 6구, 여음을 뺀 본사설은 6행으로 2줄씩 합해보면 3장 6구(각 장에 후렴구가  있음)의 시가 형식이어서 시조의 근

              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성격 : 서정적, 기원적, 망부가
    표현 : 직서법, 비유법을 사용
    주제 : 행상 나간 남편의 안전을 기원,
    의의 : 현재 가사가 전해지는 유일한 백제 가요. 국문으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노래. 시조 형식의 원형을 가진 노래
    관련 : <고려사> '악지'에는 백제 시대의 가요와 그 배경 설화가 기록되어 있고, '정읍사' '선운산가' '지리산가' '방등산가' '무등산

             가'의 다섯 편이 그것이다.

    구조 : 기, 1장 => ‘달’에 남편의 을 청원, 천지신명에의 기원 
              서, 2장 => 남편에 대한 야행침해(夜行侵害) 염려, 남편의 기원 
              결, 3장 => 남편의 무사 귀가를 기원, 남편의 편안함을 간구  

    출전 : 악학궤범(樂學軌範)

     

    구성 :

     이 노래는 멀리 행상 나간 남편의 안전을 기원하는 아내의 간절한 마음을 노래한 작품으로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행상 나간 남편이 밤에 돌아오는데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하는(야행침해) 아내가 자신의 염려하는 마음을 '달'에게 빌어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있는 작품으로 여기서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라는 후렴구를 빼고 작품을 읽으면 오늘날 시조와 어느 정도 유사한 맥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시조의 원형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특히 '달'은 남편의 무사 안전을 도와주는 '절대자'의 의미가 담겨 있어 우리의 민속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즌데'라는 말은 밤길 귀가길에 닥칠 지 모르는 위험이나 또는 남편이 가서는 안될 곳을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본다. 그래서 여기서 '즌데'는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상황을 상징한다. 

     

    작품 선정의 취지

     이 작품은 현전하는 유일한 백제의 가요이자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최고(最古)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시어의 함축적 의미를 어떠한 관점에서 파악하느냐에 따라 시적 화자의 성격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어, 작품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구성해 내는 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통해 학생들은 작품 속에 나타난 표현이나 구성의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에 비추어 현대적 시각에서 시적 화자에 대한 평가를 다양하게 해 봄으로써 작품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기르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어느 행상인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걱정하는 마음을 달에 의탁하여 노래한 백제 가요이다. 정읍은 전주의 속현으로 그 고을 사람 가운데 행상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산 위의 바위에 올라가 남편 간 곳을 바라보다 이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고려사악지 에 전한다. 노래의 전문이 실린 곳은 1493년에 편찬된 '악학궤범'으로 이 노래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불리어져서 국문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 노래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달님이시어, 높이 높이 돋으시어

     아아, 멀리 좀 비추어 주십시오.

     저자에 가 계십니까?

     아아, 진흙탕을 디딜까 두렵구나.

     어느 곳에나(무거운 짐을 풀어)놓으십시오

     아아, 내 임이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구나.

     이 작품은 고려 조선조를 통하여 속악(俗樂)의 하나로 오랫동안 궁중에서 연주되었으며, 특히 조선조에 들어서서는 섣달 그믐달, 궁중 나례(儺禮) 뒤에 처용무(處容舞), 봉황음(鳳凰吟), 삼진작(三眞勺), 북전(北殿) 등과 함께 연주되었다.

     이 작품과 유사한 주제를 가진 작품으로 기한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부역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노래인 백제의 부전 가요 선운산가 와 박제상의 아내가 치술령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부른 노래인 신라의 부전가요 치술령곡을 들 수 있다. 특히, 치술령곡 은 정읍사와 마찬가지로 배경 설화에 망부석의 모티프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모티프는 김소월의 초혼(招魂)에 이어지고 있다.

     

    꼼꼼히 읽기

    1. 이 작품에서 남편이 행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근거를 찾아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학생들이 이 작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작품 속에서 근거를 찾아 시적 정황을 파악하게 하기 위한 활동이다. 한글로 표기는 되었지만 고어(古語)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흥미를 잃기 쉬우니, 적절한 고어 풀이를 통해서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에 임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풀이 : '져재 녀러신고요(저자[市場]에 가 계십니까?)', '어느이다 노코시라(어느곳에나(무거운

            짐을 풀어)놓으십시오.)' 등으로 보아 시적 화자의 남편은 행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 감상하기

      이 노래는 백제의 민요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국문으로 표기된 것으로, 시적 화자를 어떠   한 사람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감상이 가능하다.

     견해 1 :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에 전하는 배경 설화를 바탕으로, 행상 나간 남편의 야행 침

                 해(夜行侵害)를 염려하는 아내의 정성을 나타낸 사랑의 노래로 볼 수 있다.

     견해 2 : 고려 가요 '동동(動動)'과 함께 남녀간음지사(男女姦淫之詞)라 하여 폐기되었다는 '중

                 종 실록(中宗實錄)'의 기록을 바탕으로, 행상 나간 남편이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

                 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과 질투를 드러낸 속된 노래로 볼 수 있다.

    (1) ① '즌데'는 '진 데' , '진 곳' , 즉 '수렁물(진창물)이 고인 곳' 이고, '드디욜셰라'는 '디딜까 두렵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밤에 다니다가 도둑이 침해나 입지 않을까 두렵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②는 '즌 데'는 '수렁물이 고인 곳' 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주색(酒色) 또는 화류항(花柳巷)을 비유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남편이 수렁과 같은 주색에 빠지면 어쩌나 두렵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2) ① '내 가논데'는 ' 내가 가는 곳(가는 길)'. '내가 가는 길'. '남편이 오는 길'이고, '졈그 셰라'는 '저물까 두렵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남편을 마중하러 나가는 길(남편이 돌아오는 길)이 어두워질까 두렵다.'고 남편의 무사 안전을 걱정하는 뜻으로 해

            석할 수 도 있다.

         ② '날이 저물다'라는 말은 있어도 '달이 저물다'라는 말은 쓰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저물게(곧 어둡게)되는 것은 '나의

            님' 곧 '남편의 마음'이라고 보고, '내 가논 데'를 내가 살아가는 곳, 즉 인생의 전도(前途)로 해석하여 '남편과 나의 인생의 전

            도가 어두워질까 두렵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정읍사' 관련 설화

    井邑 全州屬縣 縣人爲行商久不至 其妻登山石以望之
    恐其未夜行犯害 托泥水之汚以歌之 世傳有登岾望夫石云
    정읍 전주 속현 현인위행상구부지 기처등산석이망지
    공기미야행범해 탁니수지오이가지 세전유등첨망부석운

    정읍은 전주 속현으로 이 고을 사람이 행상을 떠나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가 산 위 바위에 올라가 남편이 있을 먼 곳을 바라보면서 남편이 밤길에 오다가 해나 입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남편을 기다리던 언덕에 돌(망부석)이 남아 있다고 한다. 
    - '고려사악지', '국 속악 백제조'

    '정읍사'의 율격과 형태

    '정읍사'는 염을 빼고 사설 대목만 들면 노래말은

    달 하 노피곰 도드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머리곰 비취오시라.
    져재 녀러신고요.
    즌 데를 드디욜셰라.
    어느이다 노코시라.
    내 가논데 졈그를셰라. 가 된다.

     

    한 줄이 두 토막씩이고, 모두 여섯 줄이다. 첫 줄에서는 '달하' 하고 부르고서 한참만에 '노피곰 도드샤'를 붙여서 읽어야 할 터이니, 두 토막씩으로 보는 데 예외는 없다. 다시 두 줄씩 합쳐 보면, 네 토막씩 세 줄 형식이어서 바로 시조와 상통한다. 이러한 형식이라면 우리 노래의 기본형 중의 하나이고, 오래 두고 전승되어 왔다고 보아 마땅하다. -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 지신삭업사, 1988
    -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2000.
    -지헌영, <고려가요연구>, 정음사, 1979.
    -양태순, <고려가요의 음악적 연구>, 이회문화사, 1977

    이해와 감상
    유일하게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는 백제의 노래로서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속악(俗樂)의 가사로 불려졌다. 〈고려사〉 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와 〈동국여지승람〉 권34 정읍현고약조(井邑縣古躍條)에 노래의 제작경위가 기록되어 있고, 〈악학궤범〉 권5 시용향악정재도의조(時用鄕樂呈才圖儀條)에 가사와 연행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정읍의 한 행상인이 행상하러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가 망부석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밤길을 가다가 해를 [야행침해]입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지어 부른 노래라고 한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순박하고 지순한 사랑의 마음이 달에 의탁되어 나타난 이 노래는 '달'을 절대자 혹은 천지신명에 가까운 존재로 보고 있다. 그점은 바로 민속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민속 신앙에서 ‘달’은 우리의 소원 성취를 기원하던 전통적인 수호신적 성격을 갖고 있는 달로, 이 노래에서는 아내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도와주는 절대자의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달이다. 이러한 달이기에 남편의 귀가길과 아내의 마중길, 나아가 그들의 인생 행로의 어둠을 물리치는 광명의 상징일 수도 있다.

    행상(行商) 나간 남편의 야행침해(夜行侵害 : 밤길에 해를 입음)에 대한 염려를 ‘즌 데를 드디욜세라.’하여 ‘이수지오(泥水之汚 : 진흙물에 더러워짐)’에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은 돋보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이 노래는 달의 광명을 통하여 남편이 무사하기만을 비는 간곡한 여인의 심정을 순박하게 형상화하여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제 1 연에서의 걱정은 제 2 연에 와서‘즌 데를 드디욜세라.’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었고, 3연에서의 ‘지고 가는 행랑을 어디에든지 놓고 그 위험을 피하십시오. 내 임이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라는 표현은 서정적 자아의 간절한 기원의 목소리를 드러나 있다. 이러한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는 그 당시 삶의 절대적 동반자였던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아내의 소박한 감정(感情)과 애환(哀歡)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달을 부르는 행위는 남편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여인의 간곡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달은 그들의 인생 행로의 어둠을 물리치는 천지신명과도 같은 광명의 상징일 수도 있다. 또 '비취오시라', '녀러신고요', 드디욜세라','노코시라', '졈그랄셰라' 등과 같은 존칭형어미에서 남편의 무사 을 기원하는 아내의 간절한 목소리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정읍사에 나타난 서정적 자아는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틋한 마음이 간절하여 우리의 전통적 여인상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 속요 '가시리', 황진이 시조,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맥을 같이한다.

    하여간 이 작품은 행상인의 아내가 남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노래로 아내의 지순한 사랑과 함께 백제인의 평민적 삶에서 빚어진 서정 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달'은 우리의 소원 성취를 기원하던 전통적 풍속과 관련되기도 하지만, 이 노래에서는 아내의 애정이 서려 있는 함축성이 내포된 달이다. 이러한 달이기에 그것은 남편의 귀가길과 아내의 마중길, 더 나아가서 그들의 인생 항로의 어둠을 밝히는 광명의 상징으로 길 가운데의 '즌 데'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정읍사에 나타난 남편이 무사하기만을 비는 여인의 지순(至純)한 사랑에서 우리는 한국 여인의 원형(原形)을 발견하고 오늘의 메마른 세태를 되돌아보게 된다.

    이 노래는 백제의 민요로 구전되어오다가 속악의 가사로 편입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는 궁중악인 무고정재(舞鼓呈才)의 가사로 창(唱)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처용무 處容舞〉·〈봉황음 鳳凰吟〉·〈진작 三眞勺〉과 함께 가창되었다. 〈악학궤범〉의 연행절차에 따르면 여러 기생이 〈정읍사〉를 부르는 가운데 8명의 여기(女妓)가 나와 절차에 맞춰 춤을 추고 북을 치는데 마지막에 악사(樂師)가 박을 치면 북을 멈추고 물러 나가고 음악이 그친다고 했다. 이 노래는 중종대(中宗代)에 이르러 음란한 노래라고 하여 궁중가악에서 제외되고 〈오관산 五冠山〉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성소복부고 惺所覆藁〉·〈대악후보 大樂後譜〉·〈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 등의 문헌에 간단히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이후에도 계속 연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읍사 공원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출처 http://culture.chongup.chonbuk.kr/h84/upsa_0002_6.html)

     

    노래에 대한 평가

    여성의 육체를 노래한 남녀상열의 음사다  - 지헌영
    행상인 남편이 화류항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아내의 심경을 표현하였다 
    - 박성의, 박병채 등
    남편의 야행침해를 걱정하는 불안 의식을 상징적으로 토로한 것으로, 정절의 미덕을 노래하였다
    - 최정여

     그러나 중종대에 조신들에 의해 이 '정읍사'가 '동동'과 함께 남녀간 음사라 하여 폐기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보면 단순히 남편을 걱정하거나 정절을 노래한 것만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관련 가요

    '선운가'와 '치술령곡'이 있다. 

     

    circle01_blue.gif 박목월의 '달'

     첫번째 개인 시집 《산도화》에 실린 3연 10행의 자유시로 그리움의 서정을 표현하였다. 제1연의 하얀 달밤에 핀 배꽃 사이로 비치는 달은 우리 민족의 정한(情恨)을 담은 색깔이다.

     제2연의 ‘불국사 언저리’ 역시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긴 공간적인 배경이다. 다시 제3연의 ‘반쯤 가리고 가는 달’은 체념과 그리움의 서정을 재확인하는 신화적인 공간이다.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혹(或)은 외동면(外東面)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요점 정리 

    지은이 : 박목월

    제재 : 달
    주제 : 달밤의 정경
    특징 : 절제된 감정으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간결한 형식미를 지님
    구성 : 수미상관의 구성
    표현 : 박목월의 '달'은 배꽃과 달의 만남을 그린 작품이다. 천상의 꽃인 달과 만난 지상의 배꽃

             은 얼굴을 반쯤 가리고 함께 길을 간다. 잔잔한 슬픔과 밝은 생명력이 교감하는 공간의

             승화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소재로 전통적인 정서를 민요조의 운율에 담아, 서정으로

             일관하는 그의 시가 여기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화자가 전면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슬픔을 대신 슬픔이 깃든 풍경만을 제시한다. 그 서정성이 말 밖의 말

             로 드러나는 셈이다.

    정읍사 유래

    작자·연대 미상의 가요로 백제시대부터 구전해온 민간전승의 가요로서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사 본문 중 全져재의 全자를 전주(全州)의 지명으로 보고, 백제시대의 완산주(完山州)를 신하 경덕왕 15년에 전주로 개명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동국여지승람 권32 전주부), 경덕왕 때 이후 내지는 고려시대 구백제지방의 민요로 보기도 한다.

    또 한편에서는 <고려사> 권71 악지(樂志) 2 국속악조(三國俗樂條)의 <정읍사>는 <고려사> 편찬자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같은 책의 고려속악조에 무고정재(舞鼓呈才) 때 <정읍사>를 동일시하고, <무고>를 만든 사람인 이곤의 생존연대와 관련하여 <정읍사>를 고려 충렬왕 때 전후에 개성주변에서 작사, 작곡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국사기>의 악지와 <고려사>의 악지가 다같이 재래속악에 대한 편차방식이 같은 점으로 보더라도, 국속악조에 백제속악으로 기록된 <정읍사>는 고려속악과 구별하여 기록한 것으로 편찬자의 잘못이 아니라 백제속악으로 인정함이 옳을 것이다.

    또 고려속악정재조에 신라 때 원효(元曉)가 지은 <무애>가 들어있는 것처럼 고려속악조에 들어 있다 하여 모두가 고려시대의 가요로 볼 수는 없듯이, 무고정재 때 <정읍사>를 불렀다 하여 <정읍사>의 제작연대가 무고를 지은 이곤의 생존연대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는 재래속악, 곧 유전악(遺傳樂)인 <정읍사>를 고려속악정재 때 이곤이 지은 무고라는 악곡에 얹어 불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악학궤범> 권5 시용향악정재조(時用鄕樂呈才條)에 <동동처용가 정과정> 등 고려가요와 함께 실려 전하고, <고려사> 악지 2 국속악조에도 <정읍사>에 관 한 기록이 있다. <정읍사>는 국속악의 하나로 전승되어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무고의 무의(無儀) 때 가창되었고,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 (邪神)을 쫓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인 나례(儺禮) 후에 거행된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처용가> 등과 함께 연주되었다(악학궤범 권5).

    이와 같이, <악학궤범>에 채록되어 악장(樂章)의 하나로 정착하게 되었으나, 중종 때에 이 르러 음란한 노래라 하여 궁중에서는 폐지되고 새로 만든 악장인 <오관산 五冠山>으로 대 용하였다.(중종실록 13년4월조).

    형식은 전강(前腔).후강(後腔).과편(過篇)의 3연체(聯體)로 되 어 있으며, 후렴을 뺀 기본 시행(詩行)만으로 본다면 3연6구의 형식이 되고, 또 각 연의 음 절수가 3음 또는 4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여 시조의 3장6구 형식의 근원을 <정읍사>에 서 찾고자 하는 경향이 많다.

    각 연의 후렴을 보면 제1.3연에 해당하는 전강과 과편에는 각 각 2구씩 되어 있으나, 제2연에 해당하는 후강에는 어긔야 어강됴리 1구뿐이고, 음악적인 악 조(樂調)인 소엽(小葉)에 해당하는 아으 다롱디리가 없다 그리하여 후강이라는 악조명 다음 에 전(全)자를 붙여 후강에는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없는 것이 온전하다는 뜻으로 후강전(後腔全)이라 표시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아직은 어느 문헌에도 후강전이라는 악조명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보면 후강에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있어야만 한 것이 된 다.

    특히 시가형태면에서 보더라도 <정읍사>가 백제가요로 인정되기는 하나, 오랜 세월 고 려속요와 함께 불려오는 동안 다분히 고려적인 성격으로 변모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일 것이다.

    후렴을 지니는 모든 고려속요는 예외없이 각 연마다 꼭같은 후렴을 지니고 있으 며, 또한 후렴이란 언제나 꼭같은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므로 고려속악과 함께 가창된 <정읍사>도 각 연마다 동일한 후렴을 지녀야만 형태상으로도 온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후강에서 소엽 아으 다롱디리는 구전되는 동안 탈락된 것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전자의 처리는 자동적으로 져재 앞에 놓여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현재 국문학자들 사이에서는 후강전(後腔全)이라는 주장과 후강전(全)져재로 보아 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고, 어떤 정설(定說)로 규정하기가 곤란하다. 

     (출처 http://culture.chongup.chonbuk.kr/h84/upsa_0002_2.html)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으로 가자

     

     


     

    조신몽설화 調信夢說話

    조신이라는 승려를 주인공으로 한 환몽설화(幻夢說話).

    국유사〉 권3 낙산2대성관음정취조신조에 실려 있다. 신라 때 세규사(世逵寺 : 逵는 達이 옳다는 설이 있음)의 농장이 명주에 있어서 본사(本寺)에서 조신이라는 중을 농장 감독으로 보냈다. 조신은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깊이 사모하여 낙산사 대비관음 앞에 나아가서 그 여자와 인연을 맺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벌써 배필이 정해져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다. 조신은 법당에 가서 대비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성취시켜주지 않음을 원망하여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노곤하여 잠깐 졸았다. 꿈에 갑자기 김씨낭자가 조용히 문으로 들어와 "내가 일찍이 당신의 낯을 보고 사랑하여 잊지 못했지만 부모의 명을 어기지 못해 딴 곳으로 출가했습니다. 이제 죽어서 한데 묻힐 친구가 되고자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신이 미칠 듯이 기뻐서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재미있게 살면서 아이를 5명이나 두었다. 그러나 점점 가난해져서 식구들을 이끌고 빌어먹으며 돌아다니다가 명주 해현령(蟹縣嶺)에 이르렀을 때 15세 된 큰 아이가 굶어죽게 되어 길가에 묻었다. 남은 식구들이 우곡현(羽曲縣)으로 가서 길가에 볏짚을 짓고 살았는데 부부가 늙고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여 10세 된 계집애가 밥을 빌러 돌아다니다가 동네 개에게 물려 아파 울부짖으니 부모로서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비참해지자 부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니 헤어지자고 제안하고 조신도 이에 동의했다. 가 각각 아이들을 2명씩 나누어 맡고 막 떠나려 할 때 홀연히 꿈을 깨니 조그마한 등불만이 어스름하게 비치고 밤은 벌써 깊었는데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 있었다. 이에 마치 100년의 괴로움을 겪은 듯하며 세상사에 집착하는 마음이 눈녹듯이 사라졌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상 앞에서 한없이 참회하고 해현령에 가서 아이를 묻은 곳을 파보니 돌미륵이 있었다. 조신은 돌미륵을 깨끗이 씻어서 가까운 절에 봉안하고 그뒤 서울로 가서 농장의 책임을 사임하고 사재를 털어 정토사(淨土寺)를 짓고 백업(白業)을 부지런히 닦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현실-꿈-현실'이라는 몽유양식(夢遊樣式)을 통해 인생무상이라는 주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환몽설화로 후대의 많은 몽유록(夢遊錄)과 몽자류소설(夢字類小說)에 서사구조를 제공한 것으로 지적되어왔다. 한편 몽중 체험이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특징 때문에 이 이야기는 불교적인 인생무상을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한자 調信
    영어 음역 Jo Sin
    분야 역사/전통시대, 성씨·인물/전통시대인물
    유형 인물/전통인물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고대/신라
    집필자 최호


    성격 승려
    성별 남
    생년 미상
    몰년 미상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개설]
    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조신(調信)의 꿈」을 통하여 애욕(欲)의 무상함을 깨친 일화를 남기고 있다.

    [생애]
    경주의 세달사(世達寺)에 속하였던 명주(溟州: 강릉) 장원(莊園)의 지장(知莊:장원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던 조신(調信)은 군수인 김흔(金昕)의 딸을 본 뒤 매혹되어 낙산사(洛山寺) 대비관음상 앞에서 그 사랑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이미 출가하여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자 관음상 앞에 가서 원망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뜻밖에도 꿈에 여자가 나타나 사실은 마음으로 그를 사랑해 왔으나 부모의 명에 따라 억지로 남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제 함께 살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그는 기뻐하며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살면서 5남매의 자식을 두었으나, 가난하여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10년 동안 걸식하였다.

    명주의 해현령(蟹縣嶺)에서 15세 된 아들이 굶어죽자 길가에 묻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빈곤에 시달리자 부부가 서로 헤어지기로 하던 차에 꿈에서 깨어났다. 인생의 허무와 회한을 느낀 그는 해현령에 가서 큰 아들 시체를 묻은 곳을 파 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오므로 이를 이웃 절에 봉안하였다. 그 뒤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신(調信)의 꿈」을 바탕으로 하여 이광수(李光洙)는 「꿈」이라는 작품을 썼고, 그것이 다시 영화로 제작되었다.

    [참고문헌]
    • 『국유사(三國遺事)』
    • 『강릉시사(江陵市史)』(강릉문화원,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