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시대 의 문학
한국문학의 기원은 구석기시대의 원시종합예술까지 거슬러 올라가 소급된다. 원시종합예술은 무용·음악·문학이 함께 어우러진 예술형태로서, 사회적인 통합을 기하려는 정치적 기능,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재앙을 면하려는 종교적 기능, 생산활동을 고무하여 식생활의 안정을 누리려는 경제적 기능을 아울러 수행하는 제전형식으로 발생한 것이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풍요를 기원하는 농업노동요와 소박한 단계의 신화 및 서사시가 생겨나 구비전승되었을 것이나 온전한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신석기시대 이래 수차례에 걸친 민족의 이동과 원주민과의 동화가 이루어지면서 고아시아 계통의 선행문화가 알타이계 이주민의 신화·서사시와 결합하여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단계인 청동기시대의 건국신화·건국서사시로 발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천상에서 내려온 환웅과 곰에서 변신한 웅녀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는 고조선상고시대의 문학 〈건국신화〉, 해모수와 유화 사이에서 주몽이 태어났다는 부여·고구려계의 〈동명왕 신화〉,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김알지 신화〉, 가야의 〈김수로왕 신화〉 등은 공통적으로 시련을 극복하는 건국영웅의 위대한 행적과 지상의 지배자로서 천상적 권위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건국신화들은 주로 국중대회라는 축제의 형식을 통하여 전승되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등과 같은 국중대회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하늘의 권위를 지닌 동시에 집단의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군주의 신화적인 내력을 노래와 몸짓으로 구현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신화·서사시의 시대를 지나면서 변모된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노래들이 생겨났다. 한역가로 현전하는 〈공무도하가 公無渡河歌〉·〈황조가 黃鳥歌〉·〈구지가 龜旨歌〉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공무도하가〉는 연속적인 세계관에 기반하는 신화적 질서가 불연속적인 세계관에 기초하는 새로운 질서로 바뀌는 양상을 보여주며, 〈황조가〉는 파탄에 이른 고구려 유리왕의 개인적인 고독을 하소연한 최초의 서정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화적인 질서의 동요 흔적은 이러한 고대가요에서뿐만 아니라 고구려 초기의 해명태자, 호동왕자 전설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무도하가 한문(漢文) 가사(歌辭)의 첫 구절을 따서 일컫는, '공후인'의 다른 이름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백수광부의 처
公無渡河 (공무도하) 저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공경도하) 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墮河而死 (타하이사)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당내공하) 가신님을 어이할꼬.
정병욱 번역
그대 건너지 마오
그대 그예 건너네.
물에 빠져 죽으니
이제 그대 어이하리.
전광용 번역
그대여 물을 건너지 마오.
그대여 그예 물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어지면,
장차 그대는 어찌하리오.
박성의 번역
'공무도하가'의 한역의 예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 해동역사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將奈公何 - 대동시선
公無渡河 公而渡河 公墮而死 將奈公何 - 청구시초
公無渡河 公終渡河 公淹而死 當奈公何 - 연암집
河(하) : 물
竟(경) : 마침내, 끝내
墮(타) : 휩쓸리다, 떨어지다
而(이) : 어조사 이. 여기서는 접속사로서 '그리하여'의 뜻
公(공) : 여기서는 남편, 곧 백수광부를 이르는 말. 그대, 당신, 임
無(무) : 여기서는 금지사(禁止辭)로서의 뜻. ∼하지 말라.
竟(경) : 마침내. 기어코. 드디어. 그예, 끝내
墮河(타하) : 물에 휩쓸리다. 여기서는 '물에 떨어지다'로 풀이하지 말 .것
而(이) : 順接(순접)의 접속사, 그리하여
當(당) : 마땅히, 이제
奈∼何(내∼하) : ∼을/를 어찌하는가. ∼을/를 어찌할 것인가.
奈(내) : 어찌
何(하) : 어찌
奈公何(내공하) : (돌아가신) 임을 어찌할 것인가. (돌아가신) 임을 어찌할꼬.
요점 정리
작자 : 백수광부의 아내(원작자는 백수 광부의 처이며, 곽리자고의 부인 여옥이 이를 노래로 정착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가사명일 경우 '공무도하가'로, 곡조명일 경우 '공후인'으로 구분한다.)
연대 : 고조선(古朝鮮)
갈래 : 개인적 서정시(4언 사구체의 한역 시가)
어조 : 여성적 화자의 탄식과 원망과 애절한 울부짖음과 체념적인 어조
성격 : 직서법으로 직정적(直情的)이고, 절박한 호소의 절규적 표현, 비극적
별칭 : 곡명은 ‘공후인’
소재 : ‘강’ 또는 ‘물’
구성 : 4언 4구체
주제 : 임을 여읜 슬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함, 물에 빠져 죽은 남편을 애도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함. 임과의 사별로 인한 슬픔
의의 : ‘황조가’와 함께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서정 가요.
②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시기의 과도기 작품.
출전 : <해동역사권 22 악가 악무조>
내용 연구
고대는 우리 문학이 태동한 시기로 고대 가요는 대부분 제천 의식과 관련이 많이 있어. 우리 조상들도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원시종합예술을 즐겼다고 볼 수가 있지. 그래서 고대시가의 대부분은 집단 가요이거나 노동요인데 인간이 점점 개인화되면서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시가류의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들은 당시의 작품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부 작품이 대부분 설화 속에 구전되어 내려 오다가 문자로 정착된 것이 많단다. 그리고 그 설화를 통해서 그 노래의 배경을 짐작하고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논리로 해석을 하고 있단다. 지금 읽은 공무도하가도 집단 가요에서 개인 서정시가로 넘어가는 시기의 가요로 임을 여읜 슬픔을 노래한 작품인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물'이 주는 상징성들을 고려하면서 읽으면 재미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인간에게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도 변하지 않는 본능적인 것의 하나로 보면 되지^^ 오늘날의 관점에서 시적 화자가 남편을 뒤따르는 죽음을 이해할 수가 없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회적 이유가 있단다.
혹시 순장(殉葬)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지. 순장은 '지배층에 속한 인물을 장사지낼 때 주변 사람들을 함께 묻는 것'으로 원시 시대에서는 순사(殉死)·순송(殉送)이라고도 하는데 자진해서 죽는 경우도 있었으나 강제로 묻히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산 채로 묻는 일도 있었으나 죽여서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단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미덕으로 간주되었단다. 그래서 여성들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도 하나의 미덕으로 알려진 세상이었단다. 물론 꼭 순장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아니단다. 정말로 사랑하는 임의 부재로 삶의 의미를 못 느끼고 그것을 상실감으로 표현할 수도 있단다. 그래서 죽음을 택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어떤 작품이라도 그 작품을 읽을 때 관련된 배경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읽으면 작품의 감상의 깊이가 더 깊어질 수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자! 그 당시 세상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참고로 발라드댄스설이라는 원시종합예술에 대해서 알아야 해.
公無渡河(공무도하) : 그대여 물을 건너지 마세요. - 죽음의 만류
이 노래의 첫 구절인‘公無渡河’는 곧 사랑하는 남편이 미쳐서 황급히 물 속으로 뛰어들려는 순간을 노래하였다. 이 경우에 '물', 즉 저 임이 건너지 말아야 할 물은 님과 나를 영원히 이별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시적 화자가 부르는 '公'은 시적 화자의 '간절한 사랑'이 담겨 있는 절박한 호소를 의미한다.
公竟渡河(공경도하) : 그대는 기어이 물을 건너시네. - '임과의 이별'
'公竟渡何'에서 '竟'과 결합되는 '河'는 사랑의 종말을 뜻함과 동시에 임의 부재를 불러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 물은 사랑을 뜻한다기보다는 시적 화자와 영원한 이별을 하게 만드는 물로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다.
墮河而死(타하이사) : 물에 빠져 죽으니 - '임의 죽음'
'墮河而死'에서 '河'는 임의 부재라는 소극적인 뜻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로 확대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여기서 사랑하는 임의 죽음을 통해 깊은 단절감을 느끼게 되리라.
當奈公何(당내공하) : 장차 임을 어찌할 것인가. - 임의 죽음을 슬퍼함
서정적 자아의 심정이 집약된 구절로 서정적 자아의 탄식과 원망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폭발하고 있다. 이 극한적인 비극적 심리의 폭발이 곧 배경 설화에서와 같이 여인의 자살을 몰고 온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처용가의 '아아! 엇디하릿고, 청산별곡의 '잡사와니 내 엇디하리잇고', 또한 시조의 종장에서 흔히 보는 '∼어떠리'에 관류(①하천 따위가 어떤 지역을 꿰뚫어 흐름. ②사상 따위가 어떤 현상이나 사실의 바탕에 깔려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하는 일련의 전통적인 표현 형식이다.
이 노래의 미적 특질은 비애미이고, 서정시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슬픔의 정한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며, 이 노래가 '황조가'와 같은 점은 형식에 있어서 동일하며, 이 작품의 중심 소재는 물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노래로 부른다면 애절하고 처절한 발라드곡(포퓰러송 가운데서 센티멘틀한 러브송 종류)에 해당한다. 전통적 한과 체념의 정서와 관련이 있다.
이 작품에 중심 소재는 물로 시적 화자의 심리 변화 과정은 애원 - 초조 - 비애 - 체념이다. 왜냐하면 시상의 전개 과정이 '임에 대한 만류, 임과의 이별, 임의 죽음, 이별의 정한을 담은 넋두리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한의 '불놀이', 고려 가요의 '서경별곡', '공무도하가',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의 물의 차이점은?
불놀이 |
좌절 -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고, 좌절에 잠겨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서경별곡 |
이별 - 사랑하는 임을 배에 싣고 떠나간다. |
공무도하가 |
죽음 -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빠져 죽는 죽음의 이미지 |
우리가 물이 되어 |
물 - 재생과 합일, 화해의 이미지 |
이해와 감상
공무도하가는 임을 잃은 슬픔을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우리 문학의 저변에 흐르는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남편의 죽음을 보고 뒤따라 죽는 아내의 모습에서 다소나마 기다림과 한(恨), 체념에 묻혀 살아 온 인종(忍從)의 한국 여인, 정렬(貞烈)의 여심(女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恨)이라고들 하는데, 이 한은 이별과 죽음에서 온다. 우리 나라의 서정시에서 이별을 다룬 것이 많은 것은 우리 나라의 경우 오랜 옛날부터 한의 정서가 싹터왔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우리 나라 서정시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으며 또한 이 노래는 한국적 정서인 한(恨)의 원류(原流)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의 중요한 제재인 강물이 훗날 고려 가요 속요의 ‘서경별곡(西京別曲)’이나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등 많은 이별가에 등장하고 있음은 이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이 노래에 대해서는 신화적 차원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정병욱교수는 설화 속의 백수광부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와 로마신화에 나오는 바카스에, 그의 처는 주신을 따라다니는 악신 님프에 비교해 볼 만하다고 하면서 물을 매개로 하여 사랑과 죽음이 결합된 이 노래는 사랑과 죽음을 서로 바꿀 수 있다는 강렬한 애정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장덕순 교수는 '當奈公何(당내공하)'에서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여인의 의지를 찾을 수 있어 이 노래는 결국 '정렬의 여심'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백수광부의 행동은 황홀경에 든 신, 또는 무당의 행동이며, 이 행동은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권능을 확인하는 의식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심화 자료
'공무도하가'의 배경 설화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의하면 최표의 ≪고금주≫에 기록된 이 노래의 배경설화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공후인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涇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호리병을 들고 어지러이 물을 건너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뒤쫓아 외치며 막았으나, 다다르기도 전에 그 사람은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그의 아내는 공후(謙隸)를 타며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는 심히 구슬펐다. 그의 아내는 노래가 끝나자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었다.
자고가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들려주니, 여옥이 슬퍼하며, 곧 공후로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옥은 그 소리를 이웃 여자 여용(麗容)에게 전하니 일컬어 공후인이라 한다.
이 노래는 채록자·채록양식·창작지역 등이 중국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작품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창작지역인 중국의 직례성 조선현(直酪省 朝鮮縣)이 고조선 이래로 한인(韓人)들이 잔류하면서 독자적인 문화양식을 유지하던 곳이어서, 〈공무도하가〉의 원작자가 반드시 중국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즉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할 때 원작자는 충분히 우리나라 사람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러한 점에서 〈공무도하가〉를 우리의 고대가요로 보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다.
오히려 중국 쪽에 이런 노래가 전해지고 기록된 것은 우리 노래가 그만큼 널리 전파되어 있었던 증거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요망)
작품 수용의 다양성 측면에 바라본 공무도하가
위의 작품은 고조선의 노래로, 백수 광부(白首狂夫)가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수 광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아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작품은 남아 있지만 관련된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그 의미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학 작품 그 자체만을 가지고 작품의 의미나 가치를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문학 작품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문학 작품 그 자체의 독립된 내용뿐만 아니라 작품의 외적 요인들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문학 작품은 작가의 체험, 사상, 감정 등을 표현한 것이고, 작가 자신이 살았던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며, 독자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의 생애·사상, 시대적 배경(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 등과 같은 작품 외적인 요인들은 문학 작품 이해와 수용에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문학 작품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방법은 작품을 작가(作家)·외부 세계(外部世界)·독자(讀者)와 연결시켜 볼 것인가, 아니면 작품 그 자체를 독립된 존재로 볼 것인가라는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진다. 전자에는 표현론적(表現論的) 관점, 반영론적(反映論的) 관점, 효용론적(效用論的) 관점이 있고, 후자에는 절대주의적(絶對主義的) 관점이 있다.
표현론적 관점은 작품을 작가의 체험, 사상, 감정 등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작가의 명백한 창작 의도, 작가의 생애·사상 등 가능한 작가의 모든 전기적 사실에 주목하여 작품을 수용하는 것이다. 반영론적 관점은 작품을 특정한 삶의 현실(세계)을 모방한 것으로 보고, 작품에 나타난 세계가 실제 대상 세계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주목하여 작품을 수용하는 것이다. 효용론적 관점은 작품을 독자에게 미적 쾌감·교훈·감동 등과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그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어느 만큼 주었느냐에 주목하여 작품을 수용하는 것이다. 절대주의적 관점은 작품을 그 자체적으로 독립된 자족적(自足的) 세계라고 보고, 작품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킨 다음, 시어의 함축적 의미나 운율과 의미의 관계와 같은 작품 내부의 언어와 구조에 주목하여 작품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 작품을 어느 하나의 관점만 고집하여 바라본다면, 그 작품의 한 면만을 보게 되거나, 부분적 의미를 전체적 의미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방법이 종합주의적(綜合主義的) 관점이다. 종합주의적 관점은 작품 자체의 절대주의적 분석과 함께 작가, 독자, 당대 현실 등 작품과 관련된 모든 사항 등을 고려하고 각 관점의 장단점을 서로 보완하면서 작품의 총체적 의미를 포착하려는 것이다.(출처 : 김윤식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지도서)
공후인
서양의 하프와 비슷하며, 틀 모양에 따라 와공후(13현)·수공후(21현)·대공후(23현)·소공후(13현) 등으로 구분된다. 공후는 본디 서역계의 악기로 중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는데, 언제 어떠한 경로로 전래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이 악기들은 연주법을 잊어버린 채 악기의 모습만이 국립국악원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문헌상의 기록도 거의 없어 그 흔적을 찾기는 힘드나, 중국 '수서(隋書)'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의 일부에서 공후가 쓰였다 한다.
단군신화
고조선의 창업왕이자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에 대한 신화.→ 단군
단군왕검(檀君王儉) 또는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손자이고, 환웅(桓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웅녀(熊女)이다. 우리나라 국조신화(國祖神話)인 〈단군신화〉의 주인공이다.
〈단군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중국의 〈위서 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 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고려 후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 조선 초기 권람(權擥)의 〈응제시주 應製詩註〉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풍부하여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고기〉의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랜 옛날에 환인의 서자(庶子: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을 가리킴)인
환웅이 항상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 인간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번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여 3·7일(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호랑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 왕검이 당고(唐高:중국 3황 5제 중의 堯를 말함. 당시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조의 이름이 요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뜻이 같은 高자를 대신 쓴 것임) 즉위 50년 뒤인 경인년(庚寅年:당고의 즉위년은 무진년으로 50년뒤면 정사년이므로 경인년이란 표현은 아마 틀린 듯함)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弓자 대신 方자를 쓰기도 함)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의 호왕(虎王:주의 무왕을 말함. 고려 2대 혜종의 이름이 武이기 때문에 이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그밖의 다른 기록들도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