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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수로보니게 여인 2008. 12. 25. 15:33

Also sprach Zarathustra, Op.30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Richard Georg Strauss, 1864 ~1949


전곡 연속듣기

 

고금의 걸작으로 꼽는 이 작품은 니체의 대표적 저서를 음악화한 것이다. 즉 슈트라우스는 철학의 음악화를 실험하여 클래식 음악의 레퍼토리를 확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초 이 작품에는 찬사와 더불어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작곡가 자신은 스코어 제목 밑에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자유로이 따른'이라고 써넣으면서 '나는 결코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작품을 음악으로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라 인간 발전의 관념을, 갖가지 단계를 거쳐 초인에 이르는 과정을, 니체의 초인 사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작곡은 1896년 2월부터 8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초연은 동년 11월 27일 프랑크루트 박물관 협회 연주회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제1곡: Einleitung


제2곡: Von der Hinterweltlern


제3곡: Von der grossen SehnsuchtHinterweltlern


제4곡: Von den Freuden und Leidenschaften


제5곡: Das Grablied


제6곡: Von der Wissenschaft


제7곡: Der Genesende


제8곡: Das Tanzlied


제9곡: Das Nachtwandler lied

한 천재의 산물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 대하여 이 책은 19세기 말 독일 철학자 니체(1844~1900)의 저서로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서 이다. 니체는 이 책의 5, 6부를 완성하지 못했다. 자라투스트라는 나이 30이 되었을 때,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스스로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면서 10년 동안이나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마음은 변하고 말았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먼동이 트자마자 일어나서 태양을 행해 걸어 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오 위대한 천체여! 만일 그대가 비춰야 할 대상을 갖지 못했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10년 동안이나 여기 떠올라서 그대는 나의 동굴을 비추어 왔다. 만일 나와 또 나의 독수리와 뱀이 없었다면 그대는 그대의 가는 길에 염증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아침마다 그대를 기다렸노라. 그리하여 그대의 과잉을 흡수하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그대를 축복하였노라. 보라! 마치 저 꿀벌들이 너무나도 많은 꿀을 모은 것처럼 이제 우리는 자기 지혜에 지쳐 버렸다. 지금은 그것을 구하려고 내미는 손이 있어야 하리라. 나는 그것을 나누어 주련다. 나는 영원하고 또 바라노니, 인간들 중에서 현명한 자가 또다시 그 어리석음을 기뻐하고, 가난한 자가 다시 한 번 그 유복을 기뻐하게 되기를. 이를 위해서는 나도 역시 깊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노라. 마치 그대가 다시금 하계에 빛을 가져다주기 위해, 저녁마다 바다 저쪽으로 가라앉는 것과도 같이. 오오, 그대 너무나도 풍요한 성진이여! 나도 또한 그대처럼 밑으로 내려가야 하노니, 이제 내가 내려가려는 그 고장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몰락>이라 부른다.

그대 조용한 눈동자여! 한없이 큰 행복조차도 시기함이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눈동자여! 나를 축복해다오. 바야흐로 넘쳐흐르려는 이 술잔을 축복해 다오. 물이 그 속에서 황금 빚으로 흘러나오고 가는 곳마다 그대 태양이여, 그대의 환희와 반영을 실어가기 위해여. 자! 이 술잔은 또다시 비워지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자라투스트라는 다시금 인간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리하여 자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 '숲속에서 성자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하고 자라투스트라는 물었다. '노래를 지어 부르고, 노래 지으면서 웃고, 울고, 하소연 하노라. 그리하여 신을 찬양하노라. 노래하고, 웃고, 중얼거리고, 그럼으로써 나의 신을 찬양하노라. 그러나 그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여기에 이르렀는가?'하고 성자는 말했다. '어찌 내가 당신들에게 줄 것을 가졌단 말이오. 아니 내가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빼앗는 일이 없도록 빨리 이곳을 떠나게 하여 주오!'- 이리하여 두 사람, 노옹과 젊은이는 서로 헤어졌더라. 웃으면서, 마치 소년들처럼 웃으면서. 그러나 자라투스트라는 홀로 있게 되자 자신의 마음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이 있을까? 저 늙은 성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가. ‘신은 죽었다’는 것을.'   ~  나는 사랑하노라. 위대한 멸시하는 자를. 이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숭배자이기 때문이며. 또한 피안의 적벽으로 행하려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ZARATHUSTRA

       유명한 철학자들에 대하여

그대들은 민중과 민중의 미신에 봉사해 왔다! 그대들 모든 유명한 철학자들이여. 그대들은 진리에 봉사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민중은 그대들에게 존경을 표시한 것이다. 그대들의 마음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말해왔다.
"나는 민중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신의 소리 또한 민중을 통해 내게로 왔다."

그대들은 언제나 민중의 대변자로서 당나귀처럼 고집스럽고 영리했다.
아,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진실성'을 믿게 하려면 먼저 그대들의 숭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수어 버려야만 하리라.

진실한 자,- 신도 없는 사막에 가서 자신의 숭배하고자 하는 가슴을 부숴 버린 자를 나는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잘 먹어 살찐 유명한 철학자들은 도시에서 산다. -그 짐수레를 끄는 가축들은! 그들은 언제나 당나귀가 되어 민중의 짐수레를 끌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 유명한 철학자들이여, 그대들은 그대들의 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중일 뿐이다. 반쯤은 눈이 멀고, 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민중일 뿐이다. 정신은 스스로 삶을 찌르는 삶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고통에 의해 자신의 지식을 증대시킨다. -그대들은 일찍이 이것을 알았던가?

향유를 바르고 눈물로 정화되어 하나의 희생 제물이 되는 것, 이것이 정신의 행복이다. -그대들은 일찍이 그것을 알았던가?

장님의 눈멀음, 그리고 그의 탐구와 모색은 역시 그가 보았던 태양의 힘을 증언해야 한다. -그대들은 일찍이 이것을 알았던가?

그리고 인식하는 자는 산을 가지고 건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이 산을 옮기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대들은 일찍이 이 일을 알았던가?

그대들은 단지 정신의 불티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정신 그 자체인 모루와, 그 쇠망치의 무자비함을 보지 못한다.

진실로 그대들은 정신의 긍지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정신의 겸손함이 행여 말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대들은 그 겸손함을 한층 더 견디지 못하리라.

그대들은 독수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지금껏 정신이 공포 속에서 갖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다. 새가 아닌 자는 심연 위에 보금자리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너무 미지근하다. 그러나 모든 깊은 인식은 차갑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정신의 가장 깊은 샘은 얼음처럼 차갑다. 그것은 뜨거운 손과 뜨겁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상쾌하게 한다.

그대들은 근엄하게, 그리고 뻣뻣한 자세로 거기에 서있다. 그대들 유명한 철학자들이여! 제아무리 강한 바람 혹은 강한 의지라도 그대들을 넘어뜨리지 못한다.

그대들은 일찍이 돛이 둥글게 부풀어 사나운 바람 앞에 떨며 바다를 지나는 배를 본 적이 없는가? 그 범선처럼 정신의 사나운 바람에 떨며 나의 지혜는 바다를 건너간다. -나의 거친 지혜는! 그러나 그대들 민중의 종인 유명한 철학자들이여! -그대들이 어찌 나와 함께 갈 수 있겠는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라투스트라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 철학은 단지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시간까지도 빼앗는 것이다. 철학은 마인드 게임(mind game)이다. 철학은 진리를 발견하는 길이 아니다. 철학을 통해서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다. 철학은 다만 공허한 언어의 체계를 구축할 뿐이다.

철학은 수많은 사람들을 속여 왔다. 철학은 삶의 신비를 여는 열쇠를 발견하려는 탐구를 방해해 왔다. 철학은 단 한 사람도 변형시키지 못했다. 철학은 사람들의 머리를 비대하게 만들 뿐, 삶에 어떤 혁명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철학을 통해서는 아무 변형도 일어나지 않는다. 철학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미치는 가장 커다란 사기극이다. 철학은 사람들이 갖고 놀 아름다운 말들을 선사한다. 철학은 사람들을 어린아이처럼 다룬다. 그리고 그 말들을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사람들은 아이처럼 유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를 들어,철학은 그들의 가장 유명한 단어, 신이라는 단어를 제시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 중에서 신이라는 말처럼 의미 없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은 그대가 발견해 낸 것도 아니며 그대가 창조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그대가 신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에 신은 만물의 창조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런 관념은 인간을 하나의 사물로 전락시킨다. 만일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 되었다면, 인간은 긍지나 존엄성을 가질 여지가 없다.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하게 된다. 어느 순간이라도 신은 마음을 바꿔 인간을 파괴할 수 있으며, 그때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창조시에나 파괴시에나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삶은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삶은 하나의 비극이고 감옥이며 기나 긴 노예의 역사가 된다. 신이 인간의 진화를 가로막는다고 지적한 사람은 자라투스트라뿐만이 아니다. 마하비라와 고타마 붓다 또한 자라투스트라와 의견을 같이 한다. 이 세 명의 천재들은 한 가지 점에서 완전히 동의한다. 그것은 신을 인간과, 인간이 갖고 있는 의식의 창조자로써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을 인정하는 것은 곧 삶의 의미와 중요성, 자유,사랑, 창조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이 없을 때 뿐이다. 인간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되어 간다. 그대는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창조라는 개념과 진화라는 개념은 서로 모순된다. 그대는 창조와 진화 둘 다가 될 수 없다. 창조는 진화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대는 동상, 그림, 시 등 어떤 것을 창조한다. 그대의 그림이 진화하는가? 동상이 시간에 따라 변화 하는가? 그대의 시(詩)가 매 순간 스스로 새로워지며 진화하는가? 창조된 모든 것은 그 지점에서 완전히 정지한다. 거기에는 진화의 가능성이 전혀 열려있지 않다. 그것이 천지창조의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은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이 정지했다.

진화는 우주가 원래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새로운 형태, 더 나은 형태를 창조한다. 인간과 인간의 의식은 진화를 통해 생성한 것이다. 자라투스트라의 종교는 진화이다. 창조가 아니다. 그리고 진화 안에서는 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 적어도 창조자로써의 신은 그렇다. 신을 위한 유일한 자리는 -만일 그대가 신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그 단어를 어딘가에 적당하게 배치하고 싶다면 -인간의 잠재성이 완전히 발휘되는 시점일 것이다. 그것은 신을 창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자라투스트라는 창조자로서의 신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의식이 최후로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신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인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이 의식의 궁극적인 진화를 그는 '초인'이라고 부른다. 초인이 그의 신이다. 그러나 초인은 출발점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절정으로서 마지막에 오는 것이다. 초인은 그대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그대의 진화된 형태, 정련된 형태이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자라투스트라가 하나의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 없이 많은 존재가 있으며 그들은 모두 진화하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신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는 신이 되기 위한 씨앗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라투스트라는 신과 종교라는 개념에 전적인 혁명을 불러 일으킨다. 이제 종교는 더 이상 믿음이나 숭배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종교는 인간의 가장 창조적인 행위가 된다. 종교는 더 이상 인간을 노예화시키지 않으며 인간의 정신을 감옥에 가두지도 않는다. 자라투스트라의 손에 의해, 종교는 모든 장애물과 사슬을 부수는 기술이 된다. 그 기술에 의해 인간이 가진 의식은 신성함을 부여받는다. 인간은 사라지고 초인이 탄생한다.

자라투스트라의 주장은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태초부터 존재하는 신은 그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대는 신봉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신앙은 그대의 성장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죽은 동상과 케케묵은 경전, 미개한 사상 앞에 노예처럼 무릎을 꿇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자라투스트라는 부패하고 낡은 것을 철저하게 청소하고자 한다. 그는 그대의 눈이 멀리 떨어진 별에 초점이 맞춰지기를 원한다. 그 별은 그대의 미래이다. 그대는 그 별이 될 수 있고, 또 그별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별이 되지 않는 한, 그대의 삶은 춤과 노래, 축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라투스트라는 모든 초점을 과거에서 미래로 변화시킨다. 그대는 과거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그대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인류는 과거를 믿는다. 그 때문에 인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고정되어있다.

자라투스트라는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미래는 열려있다. 모든 가능성이 그대의 손 안에 있다. 그대는 초인을 창조할 수도 있고 새로운 인류를 창조할 수도 있다. 그대는 이 지구상에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 자라투스트라는 이 지구를 너무나 사랑한다. 그는 세상을 포기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나무와 산, 강, 꽃, 새,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의 사랑은 엄청나다. 그와 대조적으로, 모든 다른 종교는 이 아름다운 혹성을 비난한다. 그들은 그대가 허구에 불과한 천국과 낙원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한다. 종교에 관한 한, 자라투스트라는 최초의 과학자이다. 그는 그대가 현실주의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 지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혹성이다. 이 시대는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리고 이 삶은 우리가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삶이다. 이제 그것으로 무엇을 만드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대는 그것을 아름다운 노래와 찬란한 경험, 황금빛 엑스타시로 만들 수 있다. 그대는 창조자가 될 수 있다.그리고 그대의 가장 위대한 창조는 신, 즉 초인이 될 것이다.

자라투스트라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연금술사와 같다.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을 믿는다. 그는 천국이 아니라 대지를 믿는다. 그는 대지가 품고 있는 엄청난 잠재력, 그리고 인간 안에 잠재된 씨앗을 믿는다. 그러나 그 씨앗은 성장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이 과거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성직자, 신학자들, -그들 모두는 그대를 과거에 묶어두려 한다. 그것이 그대가 길들여지는 방식이다. 그대는 반역할 수 없다. 그대는 항상 실수와 죄를 저지르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대는 항상 복종한다. 왜냐하면 복종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종하는 자만이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 받는 것을 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대의 공포와 탐욕은 그대를 파괴하고 착취하는데 이용된다. 자라투스트라는 이 기득권층과 더불어 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인간이 가치의 창조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되돌아 갈 수 없는 뒤쪽을 돌아보기 보다는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진 앞쪽을 바라본다. 앞에는 많은 문이 열려져 있고 그는 선택할 수 있다. 노예는 선택할 수 없다. 오로지 주인만이 선택할 수 있다. 노예는 단지 거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인류를 거지로 전락시켜 왔다. 그들은 그것을 기도라 부르고 헌신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추악한 실체를 가리는 아름다운 이름에 불과하다.

자라투스트라는 그대가 거지가 아니라 창조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대가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과거를 버리고 앞을 향할 때뿐이다. 과거의 죽은 시체를 짊어지고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죽은 시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위험스럽다. 그 시체들은 그대의 삶을 오염시킬 수 있다. -이미 그들은 그대의 삶을 오염시켜 왔다.

앞으로 일어날 일,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에 그대의 시선을 맞추라. 그것이 그대를 젊고 신선하세 지켜줄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열정을 지켜줄 것이다. 그것이 항상 그대를 새로운 여행, 새로운 순례의 길을 가도록 해줄 것이다. 삶에는 끝이 없다. 시간은 끝이 없다. 그대는 무한한 삶과 무한한 시간을 이용할 수 있다.그대는 그대의 영혼 안에서 신을 창조할 수 있다.

자라투스트라는 그 신을 '초인'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말과 더불어 추악한 단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자라투스트라가 신이라는 단어를 포기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 단어는 허구이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허구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초인은 허구가 아니다. 초인은 그대 안에 잠재해 있다. 모든 사람이 초인이 될 가능성을 갖는다. 초인이라는 개념은 그대를 풍요롭게 하고 충만하게 한다. 초인이라는 개념은 그대를 거지나 숭배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대는 교회나 사원에 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초인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이젠 기도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할 일은 그대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대는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그때, 종교는 변형의 연금술이 된다. 그대는 노예에서 주인이 된다.

자라투스트라는 다른 철학자들과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홀로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의 공헌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그의 공헌은 다른 철학자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크다.사실 다른 철학자들은 아무 것도 공헌한 바가 없다. 그들은 공허한 말과 가정을 주장하며 서로 싸우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결말이 아니다. 더 이상의 진보가 없는 완전한 정지 상태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정지 상태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덤을 의미한다. 더 이상 미래가 남아있지 않으며 진화나 창조가 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그대는 그대가 가진 모든 잠재력을 다 소비했다.

나는 인간의 잠재력이 무한하다는 면에서 자라투스트라와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은 새로운 의식의 차원, 새로운 축복과 엑스타시의 차원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인간은 초인이 되어 간다. 인간은 하나의 과정이지 결말이 아니다. 초인 또한 과정이지 결말은 아니다.

자라투스트라는 인간을 파괴적으로 지배해온 많은 낱말들을 바꾸어 사용한다. 그는 '결말'이라는 단어 대신 '과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는 고정된 의미의 '존재'라는 말 대신에 '생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항상 뭔가 더 획득하고 달성할 것을 남겨놓기 위해서이다. 그대의 영혼이 높이 비상할 무한한 공간은 항상 열려 있다. 그대는 우주의 한계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민중과 민중의 미신에 봉사해 왔다! 그대들 모든 유명한 철학자들이여, 그대들은 진리에 봉사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민중은 그대들에게 존경을 표시한 것이다.

그대가 사람들의 미신을 옹호한다면, -설령 그것이 사람들을 중독 시키는 것이라 해도-그대는 존경받을 것이다. 그들은 그대를 매우 존경스럽게 대할 것이다. 그들은 그대를 성자로 찬양할 것이고 예언자나 구세주로 추켜세울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미신과 더불어 살아 왔으며 그 미신을 진리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 미신과 더불어 안락한 삶을 살아 왔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애써 진리를 탐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그것을 갖고 있다. 그들의 미신을 비난하는 순간, 모든 군중은 그대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다. 그들 모두가 적으로 돌변할 것이다.

나는 평생 동안 그것을 경험해 왔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오고 간다.내 말에 의해 그들의 미신이 만족되면 그들은 내 곁에 남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그들의 미신을 옹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은 즉시 나의 적으로 돌변한다. 내가 시체처럼 굳은 그들의 미신을 편들면, 그들은 나를 존경하고 추앙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고자 하면 그들은 적이 된다.

자라투스트라는 유명한 철학자들에 관해 말한다. 그들의 명성은 그들이 인류의 성장에 기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혹성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삶을 더 많은 기쁨으로 넘치게 만들며 사랑을 더 달콤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이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명성을 얻은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의 미신을 절대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위안을 구하는 신앙과 허구를 편들고 그대를 안전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명성을 얻은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문제에서 그대를 면제시켜 준다. 그들은 그대자신을 더 높은 차원으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문제에서 그대를 면제시켜 준다.

그대들은 민중과 민중의 미신에 봉사해 왔다! 그대들 모든 유명한 철학자들이여, 그대들은 진리에 봉사한 것이 아니다!

진리에 봉사하는 사람은 항상 십자가에 매달린다. 그가 도움을 주고자 하는 군중들, 그들은 그를 살해하고 독살하고 돌로 쳐 죽인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민중은 그대들에게 존경을 표시한 것이다.

그들이 그대를 위대한 철학자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그대의 철학에는 위대함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대를 위대한 철학자, 민중의 하인으로 부른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들의 잠을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잠은 곧 그들의 미신이다. 그리고 미신에 빠져있는 한, 그들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 것이고 아무런 진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항상 동물과 초인 사이에 머물 것이다. 그들은 항상 다리 위에 남을 것이다. 그들은 다리 위에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를 매우 존경할 것이다.

그대들의 마음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말해왔다."나는 민중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신의 소리 또한 민중을 통해 내게로 왔다."

그대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소위 위대한 철학자고 불려지는 사람들의 이름 몇 개를 떠올려보라. 임마뉴엘 칸트, 헤겔, 데카르트…인도의 경우엔 샹카라(Shankara), 라마누자(Ramanuja),이들 중의 아무도 군중에 의해 비난받은 사람은 없다. 군중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군중은 소크라테스를 독살했다. 그러나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독살하지는 않았다.

그대가 철학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름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거나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그들은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존경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대에게 아무 것도 공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대에게 뭔가 공헌한 사람들을 그대는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대는 항상 친구를 십자가에 매달고, 적에게는 경의를 표할 태세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임마뉴엘 칸트나 샹카라의 철학이 아무리 위대하다해도 그것은 말의 잔치일 뿐이다. 그것은 말의 설사병과 같다. 그들은 병든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게 있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그 무게 있는 말에 강하게 영향 받는다.

사람들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철학자들이 그들의 미신에 반대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철학자들은 신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 또는 경전에 반대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들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철학이 자기 자신의 의식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만일 철학자 자신의 의식마저도 변화시키지 못한 철학이라면,  철학이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도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변화는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사람들은 게으름뱅이이다. 변화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겁쟁이이다. 비록 기존의 세계가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그는 거기에 그대로 남을 것이다. 최소한 그것은 이미 친숙하게 알려진 세계가 아닌가? 그는 알려진 세계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누가 아는가? 미지의 세계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자신의 집-똑같은 비극, 똑같은 부인과 남편, 똑같은 걱정과 문제들 -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대들은 언제나 민중의 대변자로서 당나귀처럼 고집스럽고 영리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변자가 아니다. 사람들의 삶은 점진적인 죽음에 불과할 정도로 비참하다. 그들의 삶을 옹호한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봉사가 아니다. 그들에겐 정신을 차리도록 망치로 머리를 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군중들의 미신을 타파하는 사람, 군중들의 게으름을 일깨워 앞으로 진보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 군중들에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마 극소수의 지성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그와 손을 잡고 진리와 의식을 향한 모험의 길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매우 화를 낼 것이다. 그는 군중의 잠을 방해한다. 그는 군중들이 위로받고 있는 것을 방해한다. 군중은 그들의 대변자를 사랑한다.

아,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진실성'을 믿게 하려면 먼저 그대들의 숭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수어 버려야만 하리라.

자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그대가 진실하다는 것을 믿게 하려면, 먼저 그대가 숭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술 것이라는 증거를 내 보이라."

그대가 숭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의 의식보다 높은 것은 없다. 오로지 인간의 의식만이 자신을 초월하여 나아갈 수 있다. 그대가 숭배하고 떠받들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사원과 율법을 세우고 다른 누군가가 그대를 돌보아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의 변형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진실한 자, - 신도 없는 사막에 가서 자신의 숭배하고자 하는 가슴을 부숴 버린 자를 나는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잘 먹어 살찐 유명한 철학자들은 도시에서 산다. -그 짐수레를 끄는 가축들은!
그들은 언제나 당나귀가 되어 민중의 짐수레를 끌고 있는 것이다!

자라투스트라는 매몰차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창조자는 매몰차야 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세상의 위대한 철학자들을 '민중의 수레를 끄는 당나귀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바보천치들에게 봉사한다. 그리고 바보천치들은 그 철학자들을 매우 존경한다. 만일 그대가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사람들의 선입견에 어긋나는 말을 한마디도 해서는 않된다. 설령 그대의 눈에 그것들이 엉터리처럼 보인다 해도 그대는 그것을 옹호해야 한다. 이것이 존경받는 비결이다. 그러나 품위를 갖춘 사람은 존경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품위와 존엄성을 갖는다. 는 자신을 존경한다. 그는 다른 사람의 존경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진실이라면 무엇이든지 숨김없이 말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해도 그는 그것을 축소시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수술에는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암을 치료해야 한다면, 환자가 아무리 자신이 아무 병도 없다고 우긴다 해도 의사가 그것을 편들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나에게는 어떤 친척이 있었는데…어느 날 그의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울면서 내게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남편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를 의사에게 데려가 검사를 해야 되는데 그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집안사람들이나 이웃이 보기에 그는 점점 더 허약해지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는 건강하다, 도대체 누가 내게 이상이 있다고 말하는가? 내가 왜 의사를 찾아가야한단 말인가?'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집을 찾아 갔다.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옳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최고로 건강해 보인다. 도대체 누가 당신이 병들었다고 말한단 말인가?" 그는 그것보라는 듯이 미소를 띠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그것 봐라. 내가 의사에게 가야 한다고 그렇게 귀찮게들 하더니만…" 내가 말했다. "의사는 필요 없다. 당신은 아주 건강하다. 그렇지만 여기 이 사람들에게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게 좋겠다. 나와 함께 의사에게 가자."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유일하게 그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사에게 갔다. 가는 도중에 그가 말했다. "꼭 가야만 할까? 여기서 되돌아 갈순 없을까?"
내가 말했다. "그들은 당신이 날마다 허약해지고 병들어 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신은 날마다 더 건강해지고 젊어진다. 나는 의사의 진단서를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확인시켜야 한다. 그래야 모든 문제가 끝날 것 아닌가?" 그가 말했다. "좋다."

그러나 그는 암에 걸려 있었다. 의사가 나에게 말했다. "아주 제 때에 오셨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시기를 놓칠 뻔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말했다. "이래서 내가 의사에게 오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나는 두려웠다. 누가 아는가? 의사가 무슨 이상을 발견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이제 의사는 내게 암을 주었다!" 내가 말했다. "의사가 당신에게 암을 준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암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치료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나를 속였다. 당신은 거짓말을 했다!" 내가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테니까."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 나는 그것이 죄악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미신 속에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그러나 성직자와 철학자, 신학자들은 사람들을 옹호한다. 그리고 그들은 존경을 얻는다. 그들은 위대한 성자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일이다. 차라리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존경을 잃는 것이 더 낫다.

아직까지 시간은 있다. 암은 제거될 수 있다. 아직도 때는 늦지 않았다. 초인에 도달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불행으로 가득 찬 인간을 떨쳐버릴 수 있다.그런 상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대는 현 상태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대가 더 큰 잠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더 차원 높은 경험과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대의 삶은 노래와 춤의 향연이 될 수 있다. 그대는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날 수 있다.그대의 삶은 지금 같은 고통과 불행의 악취대신에 감미로운 향기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관념에 집착한다. 그대는 자신과 관념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의 관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발을 만지며 경의를 표한다. 그대는 그들을 교황으로 만들고 샹카라차이야(shankaracharya)로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적이다. 만일 그대들이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을 즐긴다면 그들을 십자가에 매달라! 실제로 그들에겐 십자가형이 필요하다. 교황이 계속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이 그가 예수의 대리인이라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대신에 황금으로 된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닌다. 예수는 황금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 그리고 십자가가 예수의 목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대들 유명한 철학자들이여, 그대들은 그대들의 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중일 뿐이다. 반쯤은 눈이 멀고, 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민중일 뿐이다.

정신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대 삶의 에너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덕스러울 수 있겠는가? 그대는 단지 군중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군중의 덕에 대한 관념을 추종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대를 성인으로 칭한다. 그리고 만일 위대한 성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대는 군중들의 도덕에 대한 관념을 철저하게 추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도의 자이나 승려들은 목욕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가 단지 물질에 불과하다면, 그 물질 위에 다른 물질이 조금 더 쌓인다 해도 해로울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약간의 몸무게를 더 얻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닦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가 아직도 몸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매우 곤욕스러운 일이다. 그들의 입김에서는 구역질나는 악취가 풍기고 몸에서도 심한 냄새가 진동한다. 연례행사로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기계장치에 반대한다. 그러니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천 명의 자이나교 신자들이 그 모습을 보러 모여 든다. 나는 말끔하게 면도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오, 위대한 성자이시여!"하고 감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그처럼 할 수 없다. 그들은 죄인이다. 그러나 그 성자는 경전에 나온대로 따르고 있지 않은가?

인도에는 일 년 내내 벌거벗고 사는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승려들이 많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고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대단한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육체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추운 겨울이건 더운 여름이건 간에 그들에겐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은 평정의 상태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은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나는 추위로 벌벌 떠는 승려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들이 벌거벗고 사는 것은 그 대가로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벌거벗는 것이 덕이 될 수는 없다. 모든 동물들이 벌거벗고 산다. 만일 벌거벗고 사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덕을 쌓는 것이라면 인간만이 곤란에 처할 것이다. 그리고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그들이 염려스럽다!

다양한 사회에는 다양한 덕이 존재한다. 중세에, 영국의 숙녀들은 개에게까지도 옷을 입혔다 벌거벗은 개는 음란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개가 걸 프렌드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더 난처해 질 것이다. 그것은 포르노의 생중계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 산책길에 나설 때, 손에 장갑을 끼고 개에게는 이상한 옷을 입혔다. 그 불쌍한 개는 이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람? 완전히 개망신이군." 상류층의 여성들은 의자의 다리에도 옷을 입혔다. 왜냐하면 그것의 이름은 다리이고, 다리는 내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리석음이란…

그대자신의 삶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군중들의 덕목을 따를 수밖에 없다. 나는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토마토를 먹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토마토를 먹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토마토는 고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토마토는 고기가 아니라고 할머니를 설득했다. 할머니가 말했다. "나도 그것을 안다. 그러나 토마토는 고기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는 집안에서 고기처럼 보이는 어떤 것도 먹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채식주의자 집안이다." 내가 말했다. "토마토도 채소란 말이에요." 그러나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에 토마토는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밤에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밤에 먹었다면, 나는 식구들에게 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나는 말했다. "어둠 속에서 먹어야 했던 수천 년 전이라면 뭔가 잘못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리 밤이라 해도 집안은 대낮처럼 밝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들은 말했다. "경전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말아라.  네 말을 듣는 것조차도 죄악이다. 경전을 쓴 사람들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집에서 존중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넌 나가 놀아라. 아무데나 가도 좋다." 내가 말했다. "뭐가 문제예요?" 그들이 말했다. "너는 우리를 난처하게 한다. 너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서는 안 될 말을 할지도 모른다." 다른 형제는 순종적이었다. 그들은 "이 아이는 참으로 순종적이지요."하고 손님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나는 중간에 끼어들어 손님에게 말하곤 했다. "나도 있어요. 나는 매우 순종적이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조금은 다양한 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순종적이에요. 나만이 유일하게 순종적이지 않은 사람이지요. 그리고 나는 당신과 만나는 것이 기쁘지 않다는 것도 말해두고 싶어요." 나의 아버지는 말했다. "나는 네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미리 일러두었다. 당장 딴 곳으로 가지 못해!" 그러나 나는 말했다. "나는 진실을 말하는 거예요. 나는 여기 이 분과의 만남에서 아무 기쁨도 느낄 수 없어요. 그리고 나는 이 신사분이 진실을 존중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아무도 진실을 존중하지 않는다.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군중을 따라야 한다. -그들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 그리고 그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

자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중일 뿐이다
.

그대의 덕은 위선이다. 그것은 그대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모방일 뿐이다. 그대는 하나의 복사판이다. 그대는 그대의 본래적인 '자기(self)'가 아니다.

정신은 스스로 삶을 찌르는 삶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고통에 의해 자신의 지식을 증대시킨다.-그대들은 일찍이 이것을 알았던가?

정신은 끊임없는 도전이며 투쟁이다. 삶은 더 높이, 더 깨어있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이런 각성과 정신적인 성장에서 덕은 저절로 태어난다. 덕은 그대의 경험과 이해에서 태어난다. 그 덕은 독창적인 것이다. 그리고 독창적인 것만이 아름답다. 독창적으로 되는 것, 항상 새로운 경지와 통찰을 향해 성장하는 것, 항상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인적미답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정신의 행복이다. 정신은 모험가이다. 그러나 군중은 고여 있는 연못과 같다. 연못은 아무데로도 흐르지 않는다. 그 물은 점점 더 더러워지고 태양 아래 증발된다. 곧 연못은 진흙투성이의 물이 될 것이다. 정신은 하나의 강이다. 강은 항상 새로운 땅으로 흐른다. 강은 바다 안에서 용해될 때까지 산에서 계곡으로, 그리고 평원으로 흘러간다.

향유를 바르고 눈물로 정화되어 하나의 희생 제물이 되는 것, 이것이 정신의 행복이다. -그대들은 일찍이 그것을 알았던가?

그대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다. 그대는 더 높은 차원으로 부활하기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한다. 그때, 그대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깨어날 것이다. 잠 속에서도 그대 안의 어떤 것은 주의 깊게 깨어있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깨어있고 눈을 뜨고 있지만 그대 안의 어떤 것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눈을 감고 들여다보라. 그러면 꿈들이 그대 안에 떠다니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장님의 눈멀음, 그리고 그의 탐구와 모색은 역시 그가 보았던 태양의 힘을 증언해야 한다. -그대들은 일찍이 이것을 알았던가?

눈 먼 사람은 단지 거기에 빛이 있다고 믿을 뿐이다. 사실, 눈먼 사람만이 믿는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신앙은 맹목적이다. 어떤 것을 직접 아는 순간, 그대에겐 믿음이 필요없다.

한때, 독일의 철학자가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라마나 마하리쉬가 대답했다. "아니오. 나는 신을 믿지 않소." 철학자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라마나 마하리쉬가 신을 체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해 하는 철학자를 보고 라마나 마하리쉬는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시오? 나는 신을 믿지 않소. 왜냐하면 나는 신을 알기 때문이오."

앎(Knowing)은 전혀 다른 과정이다. 믿음(Believing)은 앎의 정반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둘 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왜냐하면 신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신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앎에는 많은 노력과 탐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과 불신은 매우 쉽다. 그대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남에게서 빌려오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인식하는 자는 산을 가지고 건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이 산을 옮기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대들은 일찍이 이 일을 알았던가?

자라투스트라는 철학자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이 도대체 무엇을 안단 말인가? 군중 속에 살면서 살이 쪄 비대해지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따르면서 존경이나 받으려는 그대들이! 그대들은 아는가? 인식하는 자는 산을 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대는 깨어있는 의식의 산, 별까지 닿는 의식의 에베레스트를 세워야 한다.

정신이 산을 옮기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대들은 일찍이 이 일을 알았던가? 그대들은 단지 정신의 불티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정신 그 자체인 모루와, 그 쇠망치의 무자비함을 보지 못한다. 진실로 그대들은 정신의 긍지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정신의 겸손함이 행여 말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대들은 그 겸손함을 한층 더 견디지 못하리라… 그대들은 독수리가 아니다.

자라투스트라에게 있어서 독수리는 훌륭한 상징이다. 그는 두 가지의 상징을 좋아한다. 그것은 독수리와 뱀이다. 그에게 있어, 뱀을 지혜를 상징하며 독수리는 자유를 상징한다. 독수리는 가장 높이 난다. 독수리는 태양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자라투스트라는 철학자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은 독수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지금껏 정신이 공포 속에서 갖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다.

독수리만이 높이 나를 때의 외로움을 안다. 독수리만이 그 고요함과 위험을 안다. 위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성장하지 못한다.

자라투스트라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위험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먼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 내면의 '자기(self)'는 영원불멸이다. 위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멸하는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들의 두려움은 무지를 드러낼 뿐, 그 밖의 어떤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새가 아닌 자는 심연 위에 보금자리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심연위에 집을 짓는 즐거움… 그 즐거움은 극소수의 용기 있는 영혼만이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종교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종교는 독수리 같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종교는 위험스럽게 살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진리와 삶의 의미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만이 초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너무 미지근하다. 그러나 모든 깊은 인식은 차갑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정신의 가장 깊은 샘은 얼음처럼 차갑다. 그것은 뜨거운 손과 뜨겁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상쾌하게 한다.

군중은 미지근한 삶을 산다. 그들의 삶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다. 군중은 극단을 모른다. 그들은 항상 중간에서 안전을 도모한다. 그러나 안전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탐험가나 발견자가 될 수 없다. 참된 지식은 깊이 흐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차갑다. 그대는 미지근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도 죽음도 아닌 삶, 식물인간 같은 삶, 살아남기에 급급한 삶, 그대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대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살아남느냐, 어떻게 안전을 보장받느냐 하는 것에 집중된다. 그러나 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대는 무덤으로 가고 있다. 그대의 모든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무덤으로 가고 있다. 무덤으로 가기 전에 춤과 축제를 즐기라. 기쁨이 넘치는 가슴으로 노래를 부르라.

위험하게 살아라!

위험하게 살든 미지근하게 살든 상관없이 그대는 무덤으로 간다. 하지만 차이점은 있다. 위험한 삶을 산 사람, 전적이고 강렬한 삶을 산 사람은 자신 안의 '죽음 없음(deathless)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엔 무덤으로 간다 해도 죽음은 없을 것이다.

전체적인 삶을 살지 않은 사람 ,자기 자신 안에 깊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 -왜냐하면 그곳은 얼음장처럼 차갑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또한 무덤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삶의 원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삶을 충분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음이 다가왔다!

전적인 삶을 산 사람은 죽음을 축하하며 반길 것이다. 그 죽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마지막 도전으로 그에게 왔기 때문이다. 그의 전 생애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이제 그는 죽음을 환영할 것이며, 노래하고 춤추며 죽음의 세계로 들어 갈 것이다. 그는 자신 안에 파괴될 수 없고 죽음을 모르는 어떤 것이 있음을 안다.

그대들은 근엄하게, 그리고 뻣뻣한 자세로 거기에 서 있다. 그대들 유명한 철학자들이여! 제아무리 강한 바람 혹은 강한 의지라도 그대들을 넘어뜨리지 못한다. 그대들은 일찍이 돛이 둥글게 부풀어 사나운 바람 앞에 떨며 바다를 지나는 배를 본 적이 없는가? 그 범선처럼 정신의 사나운 바람에 떨며 나의 지혜는 바다를 건너간다. -나의 거친 지혜는!

지혜는 항상 거칠다.
지혜는 항상 사납다.
지혜는 언제나 자발적이다.
그러나 지식은 길들여진 노예와 같다. 지식은 매우 천하다. 컴퓨터는 지혜를 가질 수 없다. 지혜는 인간의 특권이다. 인간의 의식만이 지혜를 갖는다. 그러나 그때, 그대는 사납고 길들여지지 않으며 자발적으로 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말하지만 자유를 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노예는 편안하다. 다른 사람이 그의 삶을 책임져 준다. 그러나 지혜는 자유롭다. 그대는 다음 순간에 무엇을 알게 될지 미리 알 수 없다. 그대는 그것을 예행 연습할 수 없다. 그렇게 그것은 돌발적으로 온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지혜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들 민중의 종인 유명한 철학자들이여! -그대들이 어찌 나와 함께 갈 수 있겠는가?

자라투스트라는 철학자와 신학자, 성직자에게 말한다.
"그대들은 나와함께 갈 수 없다. 그대들은 나와 더불어 야생의 세계, 미지의 세계로 여행할 수 없다. 그대들은 너무 겁쟁이이다. 그대들에겐 영혼이 없다. 그리고 그대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 저 어둡고 깊은 세계에 대한 도전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Strauss, Richard Georg *1864, 뮌헨, †1949, 가르미슈)

아버지는 궁정악단의 호른주자. 발터(Benno Walter)와 마이어(Fr. W. Meyer)로 부터 바이올린과 이론을 지도 받음. 자신의 관악모음곡으로서 지휘자로 데뷔. 뷜로(H. v. Bulow)에 의해 마이닝겐 궁정의 부악장으로 초빙된 후, 뷜로의 후임으로 음악감독이 됨(1885). 이태리여행, 바이로이트와 뮌헨방문을 거쳐 바이마르로 이주. 바이마르에서 글룩과 모차르트, 바그너 작품들을 연구. 병으로 휴양차 그리스와 이집트를 방문. 이곳에서 그의 첫 오페라 「군트람」을 작곡(출판 1894 바이마르). 「군트람」의 프리마 돈나였던 아나(Pauline de Ahna)와 결혼. 뮌헨궁정의 부악장(1894), 악장(1896). 베를린 궁정의 악장(1898), 음악총감독(1908). 1917-1920년 베를린 음악학교의 작곡교수. 1919-24년 비엔나 국립오페라단의 책임자. 1933-35년 나치정권의 음악협회 회장. 그 이후엔 대부분 가르미슈에서 생활. 1945년 스위스로 이주. 1949년 가르미슈로 귀환.

작품소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향시와 오페라이다. 하지만 다른 장르들도 음악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슈트라우스의 초기작품들은 균형적 형식을 가진 고전적 곡들이다. 그의 새로운 음악세계는 교향시와 함께 출발한다. 그는 여기에서 바그너의 작곡기법을 이용하면서도 베를리오즈와 리스트를 모델로 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작곡한다. 이에 속하는 곡들로는 판타지 「이태리에서」부터 「가정심포니」까지 많은 곡들이 있다. 후의 작품들 중 「알프스심포니」도 이에 속한다.「돈 주앙」과 「틸 오일렌슈피겔」은 슈트라우스가 쓴 최고의 걸작들로 여기에서는 프로그램에 맞게 절대음악의 형식(심포니, 론도, 변주곡 등)에 내용이 덧붙여진다.

「군트람」과 「화재」(火災), 그리고 「살로메」에서 볼 수 있듯이 슈트라우스의 가장 중요한 음악장르는 오페라이다. 이 중「살로메」는 바그너를 뛰어넘는 최초의 중요한 음악극으로 취급된다. 슈트라우스는 이곳에서 바그너의 기법을 발전시켜 풍부한 색체의 새로운 음향세계를 만들어낸다. 두 번째 단막극인 「엘렉트라」는 수많은 불협화음을 사용 조성의 한계에 접근한다. 이 오페라에서 슈트라우스는 호프만슈탈(H. v. Hoffmannsthal)과 처음으로 함께 작업한다. 옛 소재에 의한 어둡고 우울한 작품들에 이어 다음엔 비엔나 희극인 「장미의 기사」가 작곡된다.

이곳에서는 바그너적인 기법들에 모차르트 풍의 아름다운 선율과 요한 슈트라우스 풍의 춤곡적 경쾌함이 첨가된다. 이로써 슈트라우스의 작곡방향은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때까지 새로운 음악의 주도자로서 받아들여졌던 그가 이 작품을 기점으로 '신음악'을 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복구주의자로 비판을 받는다. 그의 이러한 복구주의적 방향은 그의 생애 후반에 더욱 두드러진다. 실내음악적인 「아리아드네」에서는 비극과 희극, 그리고 옛것과 새것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그의 동화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자」에서는 「엘렉트라」와 「아리아드네」이 작곡기법이 혼합된다.

슈트라우스는 판토마임(요셉의 전설), 발레(Scklagobers), 순수춤곡(쿠프랭 조곡) 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슈트라우스에 의해 교향시, 오페라와 함께 수적으로 많이 작곡된 것은 가곡이다. 그 중에는 오케스트라를 반주로 하는 것도 다수 있다. 그의 가곡은 분위기 묘사가 잘 되어 있고, 민속적이며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하고 화려한 것에 이르기까지 형태도 다양하다. 이 중에는 사회적 내용의 시들(헨켈, 맥케이, 데멜)에 기초하는 곡도 있다. 이 외에도 온갖 장르들과 편성의 곡들이 슈트라우스에 의해 쓰여졌는데, 무반주나 오케스트라 반주에 의한 기교적인 합창곡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출처 :관현악문헌이뭘까? 원문보기 글쓴이 : 김선철  영어사전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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