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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심미의 경험을 돕는 독서(1) 53~ 57

수로보니게 여인 2008. 12. 17. 00:03

예술과 심미의 경험을 돕는 독서(1)예술과 심미의 경험을 돕는 독서(1)

 

독서와 문화

책은 문회의 축적물로 문자 언어를 수단으로 한 인간과 사회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그 책이 쓰여진 시대의 사회 및 문화와 교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독서를 통해 사람은 문화를 이해하고 전수받게 되는 것이다.


1) 예술 영역: 인간의 다양한 미적 활동의 결과로 창출된 미적 산물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하는 영역-> 문학, 음악, 미술, 만화, 영화, 연극, 조형, 무용, 조경, 건축 등

예술 영역의 글들은 대개 원론적 성격과 실제적 성격의 제재로 나누어지는데, 원론적 성격의 글은 예술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실제적 성격의 글은 구체적인 예술 작품을 대상으로 삼는다.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서


주상관매도에는 느긋하고 한가로운 기운이 감돈다. 마치 여유롭고 유장한 평시조 가락이 허공중에 여운을 날리며 떠도는 듯하다. 

 화폭은 커다란데 그려진 경물은 화면의 오분의 일도 채 안 된다. 옇게 떠오르는 끝없는 빈 공간, 그 한중간에 가파른 절벽위로 몇 그루 꽃나무가 안개 속에 슬쩍 얼비친다.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는 이편 산자락의 끄트머리가 드리웠는데 그 뒤로 잠시 멈춘 조각배 안에는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하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꽃을 치켜다보는 노인과 다소곳이 옹송그린 뱃사공이 보인다.

 여백이 넓다 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을 할 수 없다. 허공중에 아스라이 떠오른 언덕, 그것은 어쩌면 신기루와도 같다. 그림 한복판의 언덕은 짙은 먹선으로 초점이 잡혀있으나 오른편과 왼편으로 뻗어나가는 필선은 점점 붓질이 약해지고 말라가면서 뿌연 여백 속으로 사라진다. 꽃나무도 마찬가지다. (중략)

 경물과 여백이 서로에게 안기고 스며드는 이 작품의 시적인 공감 감각은 김홍도의 노년기 산수화에 엿보이는 특징이다. 언덕의 풍경은 실제의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 언덕과 꽃나무는 우리가 바라본 것도, 맞은편에 앉은 뱃사공이 바라본 것도 아니다. 바로 그림 속의 주인공, 주황빛 도포를 걸친 노인의 늙은 눈에 얼비친 풍경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그림 속의 노인이 바라보는 풍경이 그대로 화폭위에 떠오른 것이다. 참으로 오묘한 우리 옛 그림의 맛이다.  

작품의 가운데  써 넣은 노년화사무중간(老年花似霧中看)은  두보의 시중에 나오는 한 귀절을 인용한 것인데  김홍도는                    

봄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이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을 안개 속인가 하노라 는 아름다운 시를 지어 화답

하였다.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세계


18세기 조선 화단은 화화사적으로 가장 화려하게 기억되는 민족 예술의 중흥기요, 가장 한국적 정서의 화화가 생산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풍속화 장르의 발달이다.

풍속화의 역사를 짚어보면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벽화의 생활 그림에서 시작하여 그 전통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18세기 김홍도와 신윤복에 의해 그 절정을 맞이한 풍속 그림의 전통은 가깝게는 바로 한 세대 선배인 윤두서, 조영석 등의 실학사상에 조예 깊은 선비화가들로부터 찾을 수가 있다. 18세기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기류가 조금씩 시작된 후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은 풍속화의 꽃으로 만개하였다. 김홍도 인물화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산수, 인물, 화조 등 다방면에 걸쳐 천재적인 재질을 자랑하였지만, 특히 30~ 40대에 도석 인물화를 많이 그렸고, 여기에서 그의 특유의 화풍이 드러난다. 즉,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이모저모를 간략하면서도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넘쳐흐르도록 그림에 담는 화단의 풍조는 김홍도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으로, 김홍도의 풍속화는 주로 인물위주로 그렸다. 그는 이렇듯 농민이나 수공업자등의 서민들의 생활의 단면을 소재로 삼아 조선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도록 그려냈다.

한편, 신윤복은 소재 선택이나 구성과 필지 등이 김홍도와는 대조적이다.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 생활의 단면을 다루었다면. 신윤복의 그림은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춘의와 남녀 간의 애정 등 애로틱한 소재가 많고, 무속, 주막 풍경 등도 많았다. 신윤복은 당시의 유교적 사회에서 남녀상열지사의 파격적인 그림을 그림으로써 도화서에서 쫓겨나는 등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이미 그가 활동하였던 정조, 순조 시대의 사회는 사치와 쾌락주의가 팽배하여 이와 같은 그림의 수요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신윤복의 그림은 그 같은 시대적 조류를 잘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윤복은 인물화로서, <미인도>로도 유명하다. 그의 <미인도>는 당시의 유행복을 짐작케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데, 이 그림은 김홍도의 인물과는 달리 얼굴이 갸름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의습선이 유연하고 세련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많았는데, 석법, 준법, 수파묘에서 김홍도의 영향이 감지되기도 한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산수에서도 특이하고 개성적인 화폭을 이룩함으로써 주목할 만하다. 김홍도의 <무위귀도도>등은 뚜렷한 자가 화풍으로서 겸재파의 진경산수와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며, 신윤복의 산수는 수채화와 같이 맑은 담채, 담묵으로 개성적이며, 윤제홍, 김수철 등과의 연관성을 짐작케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김홍도와 신윤복에 의해 꽃피운 풍속화는 18세기의 시대적 정신이나 경제, 사회적 여건에 연유한다 하겠다. 풍속화는 단원, 혜원 이외에 김득신 등 뛰어난 화원들을 통해 많이 그려지기도 하였으나, 19세기 해산 유숙의 <대괘도>를 끝으로 거의 조선 화단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은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남종 문인화의 유행이 거세어 18세기의 서민 예술의 쇠퇴를 부채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 화풍으로의 퇴조는 조선 회화의 근대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현대한국 화단이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전통의 회복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벽에 부딪히게 하는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다시금 18세기 민족 예술에 관한 중심이 증대되고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 조선 화단은 화화사적으로 가장 화려하게 기억되는 민족 예술의 중흥기요, 가장 한국적 정서의 화화가 생산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풍속화 장르의 발달이다.                                             김홍도의 「일하고 공부하는 가족」

풍속화의 역사를 짚어보면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벽화의 생활 그림에서 시작하여 그 전통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18세기 김홍도와 신윤복에 의해 그 절정을 맞이한 풍속 그림의 전통은 가깝게는 바로 한 세대 선배인 윤두서, 조영석 등의 실학사상에 조예 깊은 선비화가들로부터 찾을 수가 있다. 18세기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기류가 조금씩 시작된 후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은 풍속화의 꽃으로 만개하였다. 김홍도 인물화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산수, 인물, 화조 등 다방면에 걸쳐 천재적인 재질을 자랑하였지만, 특히 30~ 40대에 도석 인물화를 많이 그렸고, 여기에서 그의 특유의 화풍이 드러난다. 즉,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이모저모를 간략하면서도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넘쳐흐르도록 그림에 담는 화단의 풍조는 김홍도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으로, 김홍도의 풍속화는 주로 인물위주로 그렸다. 그는 이렇듯 농민이나 수공업자등의 서민들의 생활의 단면을 소재로 삼아 조선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도록 그려냈다.

한편, 신윤복은 소재 선택이나 구성과 필지 등이 김홍도와는 대조적이다.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 생활의 단면을 다루었다면. 신윤복의 그림은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춘의와 남녀 간의 애정 등 애로틱한 소재가 많고, 무속, 주막 풍경 등도 많았다. 신윤복은 당시의 유교적 사회에서 남녀상열지사의 파격적인 그림을 그림으로써 도화서에서 쫓겨나는 등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이미 그가 활동하였던 정조, 순조 시대의 사회는 사치와 쾌락주의가 팽배하여 이와 같은 그림의 수요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신윤복의 그림은 그 같은 시대적 조류를 잘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윤복은 인물화로서, <미인도>로도 유명하다. 그의 <미인도>는 당시의 유행복을 짐작케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데, 이 그림은 김홍도의 인물과는 달리 얼굴이 갸름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의습선이 유연하고 세련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많았는데, 석법, 준법, 수파묘에서 김홍도의 영향이 감지되기도 한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산수에서도 특이하고 개성적인 화폭을 이룩함으로써 주목할 만하다. 김홍도의 <무위귀도도>등은 뚜렷한 자가 화풍으로서 겸재파의 진경산수와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며, 신윤복의 산수는 수채화와 같이 맑은 담채, 담묵으로 개성적이며, 윤제홍, 김수철 등과의 연관성을 짐작케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김홍도와 신윤복에 의해 꽃피운 풍속화는 18세기의 시대적 정신이나 경제, 사회적 여건에 연유한다 하겠다. 풍속화는 단원, 혜원 이외에 김득신 등 뛰어난 화원들을 통해 많이 그려지기도 하였으나, 19세기 해산 유숙의 <대괘도>를 끝으로 거의 조선 화단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은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남종 문인화의 유행이 거세어 18세기의 서민 예술의 쇠퇴를 부채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 화풍으로의 퇴조는 조선 회화의 근대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현대한국 화단이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전통의 회복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벽에 부딪히게 하는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다시금 18세기 민족 예술에 관한 중심이 증대되고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오풍정(端午風情) 혜원 신윤복 (1805)  

 

 

예술과 심미의 경험을 돕는 독서(2) / 옛 그림의 원근법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림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확인한다면 그림 감상이 더 흥미 있고 감동적일 것이다.


옛 그림의 원근법

<몽유도원도>에는 우리 옛 그림의 원근법이 갖는 장점이 잘 드러나 있다.

작품을 보면

       1. 깎아지른 높은 산을 아래서 위로 치켜다본 시각(고원법高遠法)이 있고

       2. 엇비슷한 높이에서 뒷산을 깊게 비껴 본 시각(심원법深遠法)이 있고

       3. 높은 곳에서 아래쪽을 폭넓게 조망한 시각(평원법平遠法)도 있다. 이를 통틀어 옛 그림의 삼원법三遠法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하다가 너무나 아름다운 주위 경치에 감탄한 나머지 사진기 셔터를 열심히 눌러대곤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인화된 사진을 보면 꿈결처럼 아름다웠던 경치는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인물 뒤로 너무나 낯설고 지극히 평범한 풍경만 남아 있다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산에서 맛보았던 산수의 황홀한 인상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사람의 눈은 최고의 성능을 가진 카메라이며, 인간의 두뇌 역시 엄청난 고성능 컴퓨터이다. 눈은 대상의 성격에 따라 순식간에 올려다보는가 하면 내려다보기도 하며, 광각렌즈처럼 한꺼번에 주욱 휘둘러보는가 하면 망원렌즈처럼 겹쳐진 봉우리 사이로 저 멀리 아른거리는 먼산 풍경까지 비껴보기도 한다. 가까운 것은 가까운 대로, 먼 것은 먼대로, 밝은 것은 밝은 대로, 어두운 것은 어두운 대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적응하면서 다양한 대상의 갖가지 모습을 정확히 포착한다.

이렇게 살펴본 주위 경관의 여러 모습은 또다시 대뇌 안에서 하나의 전체적 영상으로 합성되며 내용 또한 지적知的으로 정돈된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은 같은 물체라도 다른 각도로 보게 되는데 이로부터 대상의 거리를 측정한다. 그리고 대상의 거리가 판단됨에 따라서 실제 물체의 크기를 가늠하고, 또 보이는 일부 면의 형태를 미루어서 입체적인 전체 모양을 상상하며, 가까운 곳에 보이는 물체의 재질을 기억해서 먼 곳에 있는 다른 물체도 실상은 같은 것임을 알아낸다. 그 밖에 명암은 명암대로 색깔은 색깔대로 다양한 시각 정보가 모두 순간적으로 종합되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고성능 카메라가 장착된 초고속 컴퓨터 이상의 존재다. 즉 어떤 특정 장소가 갖는 독특한 분위기는 인간의 오감五感 전체를 통해서도 느껴지고 기억 속에 저장된다. 등산 중에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탄성을 발했을 때에 받는 인상 속에는 비단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후각 등 조형 외적인 것까지 포함된다. 들려오는 바람소리, 차가운 물소리, 맑고 싱그러운 솔바람을 마셨을 때 코와 폐부에 느껴지는 상쾌함, 그리고 자욱한 물안개가 살갗에 닿는 촉촉한 느낌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산이 주는 갖가지 느낌은 조형만으로는 충분히 환기되기가 어렵다. 게다가 인간은 문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감수성의 내용은 다만 오감으로 포착되는 현재의 감각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체험했을 때 그것은 즉각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다양한 문화적 체험과 결합하여 좀 더 고차원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를테면 하나의 경물이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는 어떤 문학 작품이라든가 음악의 분위기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 결과 사람마다 서로 다른 나름의 독특한 심상心象을 이루게 되니, 똑같은 대상을 보고서도 사람마다 반응이 각양각색인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종합적이며 고차원적인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산수의 심상을 단일 초점을 가진 사진기라는 기계가 그대로 옮겨오기 어렵다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산수의 참 모습은 사실 사진기뿐만 아니라, 많은 서양화가들이 종종 고백하는 것처럼 서양의 풍경화로도 담아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거기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서양화의 일점투시도법一點透視圖法에 있다. 서양화의 이른바 과학적 원근법은 부동의 관찰자라는 단 하나의 시선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서양의 풍경화를 눈여겨보면 설령 화폭에 인물이 그려지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화면의 밖에 반드시 한 사람의 관찰자가 있어서 이젤 앞에 못 박힌 듯이 서서 주위 풍경을 측량하듯이 바라보는 차갑고 단조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자연 풍경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앞에 인간이 있으며, 그 인간이 바로 모든 풍경의 기준점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풍경화 속의 부분 부분은 한결 같이 작품 밖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한 개인, 객관적인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 투시법적으로 형태지워져 그려진다.

이와는 달리 우리 옛 산수화에서는 어디까지나 산수 자체가 주인공이다. 사람은 주인공인 산을 소중하게 한가운데 모셔 두고서 치켜다보고, 내려다보고, 비껴보고, 휘둘러봄으로써 산수의 다양한 실제 모습에 접근하려 한다. 산수화의 목적이 자연의 형상뿐만 아니라 거기서 우러나는 기운氣韻까지 담아내는 것이라고 할 때, 서양의 일점 투시는 일견 과학적인 듯 보이지만 카메라 앵글처럼 포용력이 부족한 관찰 방식이다. 일점 투시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의 산물인 까닭에 자연의 살아 있는 모습을 따라잡는 데는 실로 많은 어려움을 드러낸다. 애초 산이란 것이 하나의 숨쉬는 생명체라면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 양보를 전제로 하는 동양의 고차원적 인본주의, 즉 회화적으로는 삼원법에 의해서만 충분히 표현된다.

그런데 옛 그림의 삼원법三遠法, 즉 고원, 심원, 평원의 다양한 시각이 어떻게 <몽유도원도>라는 한 화면 속에 무리 없이 소화되고 있는가? 그 점을 눈여겨보는 것이 사실 옛 산수화를 보는 재미의 가장 커다란 부분의 하나다. 얼핏 생각하기에 다양한 시각이 뒤섞여 있으니 작품전체가 매우 이상하게 보임직한데 오히려 옛 산수화를 보면 마음이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서양의 투시원근법상의 논리로부터 슬그머니 도망쳐 나온, 수없이 많은 자잘한 여백들이 경물과 경물 사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이의 시선은 그려진 대상의 제각각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돌아 옮겨 다니게 된다. 이를테면 깎아 세운 절벽은 아래쪽에서 쳐다보는 느낌을 주고, 넓은 평원은 자신이 그림 속의 높은 곳에 올라서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작품 속의 산수가 실제의 자연이 그렇듯이 여기저기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피카소가 서양 입체파의 선구자로서 사물을 보는 자유롭고도 상상력 넘치는 시각을 이용해서 복합적인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서양 회화사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피카소의 작품은 종종 형상을 너무나 무리하게 왜곡시켜 보는 이에게서 대상의 객관성을 배제하고 주관 속의 일그러진 인상만을 보여준다. 여기서 오는 어리둥절함을 신선하고 자극적이라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지만 우리 한국인에게는 아무래도 어딘가 편하지 않고 좀 지나치다 싶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글쓴이는 진정한 입체파의 모범은 오히려 우리의 옛 산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규모도 훨씬 크거니와 결코 자연의 사실성을 희생시키거나 파괴하여 그것을 화가의 개인의식 속으로 환원 또는 침몰케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 자연이라는 대상이 살아 있고, 그 대상에 반응하는 인간도 자연과 함께 존재하는 중용적인 시각, 그것이 옛 그림 속의 삼원법이 재현하고자 하는 경계이다. 그리하여 옛 그림 속의 산수는 보는 이로 하여금 대자연의 정기를 속속들이 추체험하게 하면서 보는 이의 마음에 크나큰 위안을 주는 것이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조선초기 화단의 최대 거장으로 알려져 있는 안견(安堅)이 남긴 유일한 진작(眞作)으로, 제작연대가 알려진 현존하는 조선시대 산수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현재 일본의 天理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데, 어떤 경로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확실치 않다.

안견은 자(字)를 가도(可度), 득수(得守)라 하고 호(號)를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라 하였으며, 정확한 생졸년(生卒年)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에 의하면 세종년간(1419∼1450)에 가장 활발히 활동하였고, 성종년간(1469∼1494) 초기까지도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그릴 당시 이미 정4품(正四品)의 호군(護軍)벼슬을 하였는데 6품이 한계였던 화원(畵員)의 신분으로 정4품까지 올라간 것은 매우 파격적인 경우로서 조선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안견이 이렇듯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몽유도원도'의 제작을 의뢰했던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1445년(세종 27)까지 수집된 안평대군의 소장품 222점 중 중국의 역대 서화를 제외한 나머지 30점이 모두 안견의 작품이었던 사실만으로도 안평대군과 안견과의 밀접한 관계는 충분히 짐작된다. 즉, 안견은 서화에 뛰어났던 안평대군의 이론적 지도를 받으며 그의 방대한 소장품을 접하면서 화가로서의 실력과 안목을 더욱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몽유도원도'에 나타난 곽희파(郭熙派) 화풍의 영향 또한 안평대군의 소장품 가운데 곽희파 화풍의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몽유도원도'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그림 뒤에 붙어있는 안평대군의 발문(跋文)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1447년(세종29) 음력 4월 20일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과 함께 노닐었던 도원(桃源)의 광경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였는데 안견은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였다. 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안평대군이 꾼 꿈은 중국 동진(東晉)때 시인인 도잠(陶潛,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곽희파 화풍을 토대로 하고 있다. 붓의 흔적을 감춘 운두준법(雲頭 法)이나 바위 밑을 비추는 조광(照光) 효과, 해조묘(蟹爪描)의 수지법(樹枝法) 등 기법적인 측면은 북송대(北宋代)의 곽희파 화풍을 수용한 것이며, 전체 화면구도와 다소 과장되어 형식화된 산의 형태, 산의 윤곽선에 나타나는 이상한 돌기의 모습 등은 북송대(北宋代) 이후 매너리즘에 빠진 원(元), 금대(金代)의 곽희파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안견은 이러한 중국 화풍의 영향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적인 자신만의 화풍을 형성하여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몽유도원도'에서 두드러지는 안견의 독창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먼저 일반적인 두루마리 그림과는 반대로
그림의 왼쪽으로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는 독특한 화면구성을 들 수 있는데, 화면의 좌측 아래쪽에서 우측 위로 대각선을 따라 현실세계와 꿈속의 세계를 효율적이고도 치밀하게 배치하였다.
또한
평원(平遠)과 고원(高遠)의 대조를 통해 산세(山勢)의 웅장함과 환상적인 느낌을 더욱 고조시키고, 넓게 펼쳐진 도원(桃源)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부분과는 달리 이곳만 조감도법(鳥瞰圖法)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세부 표현도 매우 뛰어나 선묘는 세밀하여 일획의 실수도 없이 정갈하며, 박락되어 흔적만 살펴볼 수 있는 복사꽃 꽃술의 금채(金彩)를 제외하고는 정교하게 채색된 부분 역시 아직도 화려함과 영롱함을 잃지 않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 구석에 "지곡가도(池谷可度)"라는 안견의 관지(款識)가 있고 이어서 주문방인(朱文方印) [가도(可度)]가 찍혀있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상, 하 2개의 두루마리로 표구되어 있는데, 상권의 첫머리에 "몽유도원도"라는 안평대군의 제첨(題簽)과 '몽유도원도'가완성된 지 3년 후에 지은 안평대군의 칠언절구(七言絶句)가 주서(朱書)로 쓰여 있으며 이 시문에 이어서 몽유도원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이 그림 뒤에 안평대군의 발문이 붙어있으며, 그 뒤를 이어
세종 조의 대표적 인물 21명의 찬시(贊詩)가 실려 있다. 상권에는 안평대군의 발문에 이어서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이개(李愷, 1417∼1456), 하연(河演, 1376∼1453), 송처관(宋處寬, 1410∼1477), 김담(金淡, 1416∼1464),고득종(高得宗), 강석덕(姜碩德, 1395∼1459), 정인지(鄭麟趾, 1396∼1478), 박연(朴堧, 1378∼1458)의 찬시가 있으며, 하권에는 김종서(金宗瑞, 1390∼1453), 이적(李迹), 최항(崔恒, 1409∼1474), 박팽년, 윤자운(尹子雲,1416∼1478), 이예(李芮, 1419∼1480), 이현로(李賢老, ?∼1453),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성삼문(成三問, 1418∼1456), 김수온(金守溫, 1409∼1481), 만우(卍雨, 1357∼?), 최수(崔脩)의 찬시가 실려 있다. 이처럼'몽유도원도'권(卷)은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의 수준 높은 경지를 구현함과 동시에 세종조의 빼어난 문화적 역량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예술과 심미의 경험을 돕는 독서(3)

             영원한 그리움의 노래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인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시들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은 역시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가 아닐까? 노래로도 익숙한 작품, 영원한 그리움의 노래 시 「향수」를 감상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와 작품 세계를 살펴보자.


시문학 감상법

     1) 글쓴이의 생각을 시와 연관을 지어 떠올려본다.

     2) 시어의 함축적 의미를 이해한다.

     3) 시적 화자의 정서 및 태도를 파악한다.

     4) 자신의 경험 속에서 시상을 연상해 간다.

     5) 시의 제목과 글감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6) 시의 분위기를 파악해본다.


향  수(鄕  愁) / 정지용


1. 시의 성격: 감각적, 묘사적, 향토적, 서정적, 회화적

2. 배경 및 어조

      1) 배경: 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 있는 고향, 전형적인 고향의 모습

     2) 어조: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드는 차분한 회상의 어조


3. 내용 이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거침없으면서도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소리를 내는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소리가 느릿하고 유장하고, 약간 슬픈 느낌이 들면서 한가함의 정서적 느낌이 드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연:  ‘실개천’과 ‘얼룩백이’ 황소의 모습을 통해 평화롭고 한가로운 고향의 정경을 노래하고 있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라는 표현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화 하고 있고, ‘금빛 게으른 울음’에서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공감각적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마치 바로 눈앞에 그 장면이 나타나는 듯한 시각적인 효과와 소리가 들리는 듯한 청각적인 효과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2연:  ‘질화로’, ‘늙으신 아버지가 있는 겨울 밤 풍경을 묘사. 1연이 고향의 외부 풍경을 묘사했다면, 2연에서는 고향의 내부 풍경을 그리고 있다. 또한 아버지의 대한 회상이 잘 나타나 있다.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에서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화한 공감각적 표현을 사용했으며,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에서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하고 있다. 고향의 모습에 대한 시적 화자의 정겨움과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는 연이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마구 적시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3연:  ‘파아란 하늘빛’이라는 표현을 통해 아름다운 꿈과 신비로 가득 찬 유년기를 회상하고 있다.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이라는 표현에서 유년시절의 순박함을 흙을 통해 형상화 하고 있다.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라는 표현에서는 유년기의 소박한 꿈과 동경을 비유하면서 풀밭에 떨어진 화살을 줍기 위해 헤매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고향에서의 꿈 많던 소년 시절을 그리고 있다.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4연:  ‘검은 귀밑머리 어린 누이’와 ‘사철 발 벗은 아내’에 대한 회상을 그리고 있다. 전설이 깃든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처럼 검은 머릿결을 가진 어린 누이의 사랑스럽고 신비한 이미지를 묘사했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라는 표현에서 묵묵히 현실을 참아내며 인고의 삶을 꾸리는 평범하고 가난한 아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 아내에 대한 인간적인 끈끈한 정과 진한 그리움이 그 표현 속에 숨어 있다.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평화스럽고 정겹고 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5연:  고향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이라는 표현에서 바쁜 농사철을 지낸 후 가족이 둘러앉은 단란한 모습을 시적 화자는 상상하고 있고, 가난하지만 정겹고 따뜻한 고향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후렴구의 반복: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 시의 주제를 강조

     2) 주기적인 반복을 통해 시상을 정리

     3) 시에 형태적 안정감 부여

     4)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킴

     5) 리듬감 형성


5. 표현상의 특징

     1) 시각적 이미지: 마음속의 고향을 구체적 영상으로 전환시켜 줌

     2) 후렴구의 반복: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

     3) 공감각적 이미지 구사: ‘금빛 게으른 울음’(청각의 시각화)

     4) 참신하고 세련된 인상을 주는 고유어: ‘지줄되는’, ‘휘돌아’, ‘해설피’, ‘풀섶’, ‘함초롬’

     5) 토속적인 정감을 주는 시어: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 ‘짚 베게’.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시인의 생가

향수(정지용 시)-색소폰 연주♬

 


예술과 심미의 경험을 돕는 독서(4)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 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는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 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 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기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끝)

 

일본 역사책 파문이 말해 주듯 교과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가벼운 저술은 아니다.

학계의 누적된 연구 성과가 객관적 보편적 시각으로 빠뜨림 없이 망라돼 소화, 정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崔淳雨·1916∼1984)는 65세 때인 1980년 틈틈이 발표한 짧은 에세이를 모아 장르별로 나눠 ‘한국미 한국의 마음’을 펴냈다.

이를 교과서로 지칭함은 결코 폄훼가 아닌, 우리 모두의 필독서란 의미이다. 전문적인 논문이나 체계적인 논술은 아니나 때론 그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전문학자들에게도 여러 측면에서 두루 시사함이 크다. 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이 쉽도록 상태가 양호한 도판을 한쪽에 과감하게 한 점씩 실은 이 아름다운 책은 조기에 절판된 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 ‘최순우 전집’을 간행한 출판사 학고재에서 1994년 저자의 10주기를 맞아 순서에 변화를 주고 내용을 세분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비록 흑백이지만 삼국시대 토기부터 조선 말 회화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 전반에 대한 친절한 입문서이며 안내서이다. ‘한국미의 산책’에서 ‘흔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20개의 주제(보급판은 17개 주제)로 나누어 회화 조각 건축 공예 등 우리 전통미술 전반에 관한 이야기의 타래를 풀어 나갔다.

그러나 무미(無味)한 인문학의 개설서나 그야말로 딱딱한 교과서와는 다르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표현대로 ‘이슬보다 영롱하고 산바람보다 신선한’ 미문(美文)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과 추구, 아름다움을 보고 깊이 느끼고 사랑했던 저자. 미술사학자로서의 그의 생활은 한국미의 추구와 실천 그 자체였다.

이 책을 들고 첫 쪽을 펴면 그냥 빨려 들어가 좀처럼 놓기 힘들다. 그리고 우리는 뿌듯하고 행복하다. 이 책은 겨레와 전통문화에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미술사가나 미학자 내지 평론가의 존재는 그들이 느끼고 깨달은 아름다움의 내용과 핵심 그리고 본질을 일반인에게 이해시키고 인식시킴에 있다. 즉 조형 언어에 낯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문자로 통역해 주는 역할이 그들의 임무이다.

‘한국 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유섭(高裕燮·1905∼1944)이 1934년 서른의 나이로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해 타계하기 전해인 1943년 최순우는 박물관에 입사한다.

이는 박물관의 법통(法統)을 전수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박물관 한곳에서 41년 동안 한 우물을 판 박물관인은 전무하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천부적인 안목과 혜안을 지닌 저자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실제 보고 만지며 아름다움의 본질을 온몸으로 체득(體得)했다.

그러고 나서 터져 나온 사자후(獅子吼)이기에 독자의 가슴에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  


판소리의 이면 표현

 예술과 심미의 경험을 돕는다(5)


판소리의 용어

     1) 득음: 모든 성음과 조를 자유자재로 구사함으로써 모든 판소리적 상황을 성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2)발림(너름새): 판소리에서 창자(唱者)의 동작을 이르는 말

     3) 아니리: 판소리의 내용을 ‘창’이 아닌 말로 표현하는 것

     4) 이면: 판소리에서 어느 대목의 사설 내용이나 철학적 바탕을 이르는 말

     5) 추임새: 판소리를 부를 때 고수나 청중이 흥을 돋우기 위해 발하는 감탄사


독해 방향: 글쓴이가 말하는 판소리의 이면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판소리의 장르적 특성을 생각해보고, 글쓴이가 묻고 답하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도록 한다.


1단락 요지: 판소리의 창자가 이면을 잘 그린 경우의 예

“천운 우습 깊은 밤에 모진 광풍이 일어나 바람은 우루루루루루루 쇄…….”

「춘향가」 가운데 춘향이 갇혀 있는 옥방(獄房)의 광경을 묘사한 ‘옥중가’의 한 대목이다. 이 ⓐ소리를 듣고 바람이 천장을 휘몰아서 마룻바닥을 스쳐 가는 음산한 옥방의 분위기가 느껴져 청중이 공감하게 되었다면, 창자(唱者)는 이 대목의 ‘이면’을 잘 그렸다는 말을 듣게 된다.


2단락 요지: 이면을 그린다는 말의 의미

그렇다면 ‘이면을 그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그린다’는 말은 소리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창자의 음악 행위를 나타내므로, 이면은 당연히 음악 행위에 의해 구현된 그 무엇에 해당한다. 창자는 ⓑ소리를 통해 사설의 내용인 옥방의 광경을 묘사했으니, 이면이란 사설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면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옥방의 광경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그 음산하고 비감한 분위기,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 의미까지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이면을 잘 파악한 후 성음[음색], 조[음계], 장단 등을 복잡하게 선택하고 구성하여 사설 내용을 실감 나게 ⓒ소리해야 이면에 맞는다는 평을 들을 수 있으니, 이면에 맞게 잘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면 찾다가 소리 못한다.”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3단락 요지: 사설 내용의 고정된 해석을 이면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사설 내용 그대로를 음악으로 표현해야만 이면을 그렸다고 생각하는 경우, 음악적 표현에 제약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사설 내용에 대한 해석이 어떤 ‘권위’에 의해 고정되어 있다면, 이면을 그리는 일이란 이미 고정되어 있는 해석을 음악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된다. 창자가 음악적 구성을 새롭게 변화시키면 “이면에 맞지 않는다.”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판소리 유파나 계보의 음악적 특성을 의미하는 ‘제’나 ‘바디’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생각 때문에 가능했다.


4단락 요지: 사설 내용에 대한 창자의 주체적 해석을 이면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그렇다면 사설 내용에 대한 해석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이 경우 이면을 그린다는 말에는 창자의 주체적 해석을 허용하는 의미도 포함된다. 따라서 창자는 사설 내용을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기존의 음악적 구성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판소리 전승상에 없던 독창적인 창법을 의미하는 ‘더늠’이 계속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생각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자칫 자신의 미숙한 ⓔ소리를 합리화하는 논리로 이용될 수도 있다.


5단락 요지: 이면의 개념과 이면 표현의 어려움

사설 내용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든,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든 간에, 이면이란 [      ㉠      ]을/를 의미한다. 모든 판소리 창자들은 “이면을 잘 그렸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말을 듣기란 쉽지 않다. 이면을 잘 그렸다는 찬사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명창(名唱)의 영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해설]

예술, ‘판소리 문학에서의 이면을 그리기’

지문해설 : 이 글은 판소리 문학에서의 ‘이면을 그리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규명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전개하기 위해 개념에 대한 정의를 하고,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단계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판소리에서 사설 내용의 해석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소개하고 이러한 관점들의 장단점을 살펴본 후 결론을 내리고 있다.


1. 비판적 사고(서술상의 특징 파악)

정답해설 : 이 글의 중심 화제는 ‘이면을 그린다’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러한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개념에 대한 규정과 의미 파악을 위해 다각적인 방면에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 어떤 관점에서 보든지 이면이란 무엇이다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통시적’이란 시간의 순서대로 대상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글이 진행되면서 이면을 그린다는 의미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대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통시적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오답피하기 : ①2문단에서 ‘이면을 그린다’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가며, 4문단에서 사설 내용에 대한 관점에 대해 질문을 던진 후 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②처음 시작에 있어 춘향가라는 예를 통해 독자의 흥미와 관심을 유도하여 화제에 접근하고 있다. ③3-4문단에서 판소리의 사설 내용을 고정된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 유동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다. ④이러한 대비 과정에서 각 관점이 지닌 장, 단점을 소개하고 있다.


2. 추론적 사고(글의 핵심 내용의 파악)

정답해설 : 이 글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이면의 의미에 대해 2문단의 3행에서 먼저 ‘음악 행위에 의해 구현된 그 무엇’이라 했다. 즉, 이면이란 ‘사설의 내용’인 것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이러한 의미적 측면 말고도 분위기, 그 내용에 담겨 있는 본질적인 의미까지 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면을 적절하게 소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에 들어갈 이면의 내용으로는 ‘창자가 소리로 표현해 내고자 하는 바탕’이라는 규정이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3. 추론적 사고(세부 정보의 추론)

정답해설 : 판소리의 창자가 이면을 잘 그렸다는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왜냐 하면 일단 이면을 잘 파악해 내기 위해서는 창자가 사설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④), 이러한 내용과 분위기까지 소리로 전달을 해야 하고(③), 또한 전달 과정에서 음악적 표현을 내용에 딱 맞도록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⑤).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 어울려서 소리로 나왔을 때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①). 하지만 독창적 창법의 개발 자체가 이면을 잘 그렸다는 평가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4. 어휘, 어법(문맥적 의미의 파악)

정답해설 : 이 글에는 ‘소리’라는 어휘가 특히 많이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리는 대부분 ‘판소리나 잡가 등의 옛노래’. 또는 ‘노래’를 달리 일컫는 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에서의 ‘소리’는 사전에서의 중심적 의미인 ‘귀에 들리는 공기나 물체의 빠른 진동’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