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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매체속의 언어자료 활용하기(1) 62~65

수로보니게 여인 2009. 1. 25. 19:32

 

다양한 매체속의 언어자료 활용하기(1)


오늘날은 다양한 매체의 시대이다. 컴퓨터, 수많은 음향 매체와 영상매체, 텔레비전 등 우리를 자극하는 많은 매체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매체 환경이 우리에게 약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은 멀티미디어 시대에 여러 매체를 잘 활용해서 다양한 정보를 찾고 독서 과정에 주체적으로 활용한다면 약이 될 것이고, 그 매체를 남용하거나 잘 활용하지 못한다면 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핵심적인 것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자기 주도적인 독서 활동을 펼쳐갈 수 있는 의지이다.


책을 통한 깊이 있는 지식의 습득

훌륭한 독서가가 되지 않고는 참다운 지식을 갖출 수 없다.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비디오 영상과 음향을 많이 사용하지만, 그래도 책은 여전히 세부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최선의 방식이다.     - 빌게이츠


 독서는 주어진 정보나 지식에 독자 스스로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 자신의 이전 경험과 지식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확장할 수 있게 해준다.

 

 독서는 독자 스스로의 반성적 사고와 지적 상상력을 등을 통해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고, 이러한 과정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준다.


인쇄 매체와 영상 매체

                인쇄 매체

               영상 매체

             논리적 능력 배양

           감각적 능력 배양

                  능동적

                 수동적

          논리적, 이성적, 추상적

         감각적, 감성적, 구상적

            생각하는 인간형

             행동하는 이상형

전자 매체의 장단점

     1) 장점: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 등의 전자 매체들은 영상, 소리, 감각을 결합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지식들을 제공한다.

     2) 단점: 전자 매체들은 편파적이고 피상적이다.


바람직한 독서 활동

     1) 정보를 체계적이고도 창의적으로 활용해서 독서에 적용한다.

     2) 자신의 관점과 흥미에 따라 해결할 문제를 스스로 정하고 탐구하는 자기 주도적인 독서를 한다.


둑서의 의미

     1) 독서는 정보사회에서도 정치, 경제, 문화적인 생활에 폭넓은 참여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2) 독서는 능동적인 정보의 추구와 수용을 위해, 또 창의적인 정보의 활용을 위해 필수적이다. 즉, 인터넷은 필요한 정보를 얻

         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책의 독서를 대신할 수는 없다.  

 


 

다양한 매체속의 언어자료 활용하기(2)


매체를 독서에 활용하기 - 「춤추는 최승희」

최승희에 대해 다양한 매체에서 얻은 정보를 자료들 사이의 연관성을 고려해 체계화 해보자.


최승희(1911~ 1969): 월북 무용가, 세계적인 무용가, 전설의 무용가, 1999년 한국예술 평론가 협의회에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 -> 조선인 최초의 무용가


최승희의 무용작품 세계

      1) 최승희의 무용작품은 시대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변했다.

      2) 최승희의 동양 무용은 주제가 동양의 전설 , 불상, 벽화, 비극, 고전 양식을 중심으로 한, 고도의 예술성을 가지고 있었다.

      3) 최승희의 작품은 세속적인 주제보다는 역사와 민족을 다루는 내용을 주제로 한 곳이 많다.

      4) 최승희는 작품 이름을 조금씩 바꾸면서 무용 구성도 조금씩 달리하여 새로운 작품이 되게 하는 방법으로 개성 있는 프로그램을 형성했다.

      5) 최승희의 작품은 시대적 환경과 공연 지역에 따라 적절한 무용 종목을 형성했다.

 


     승 무

                              조 지 훈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를 추는 과정


        파르라니 깎은 머리 : 슬픔의 감정과 종교적인 관점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1 - 3연) :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 천상적 이미지(황촉불, 하늘, 별빛),

                                                                                                 지상적 이미지(밤, 소매, 두 방울)

        빈대에 황촉 불이 말없이 녹는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 무대와 배경, 구성할 때 제일 앞에 놓일 수 있는 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 보선이여. : 역동적 심상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 동경,정지된 모습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 눈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 눈물로 승화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 유장한 가락에 따른 춤의 동작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정화와 재생)

 

1. 주제 :  인간 번뇌의 종교적 승화, 

2. 관찰자 시점을 취하여 화자의 주관적 감정을 절제함

 

「승무」는 여승을 소재로 하여 삶의 번뇌를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회화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는 작품으로,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자체의 리듬감과 율동감도 매우 뛰어나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조지훈의 「승무」가 한국적인 장단과 호흡의 개념을 그대로 시에 옮겨 놓았다고 생각한다.      - 문학평론가 최동호  

 


 

다양한 매체속의 언어자료 활용하기(3)

멀티미디어를 독서에 활용하기


「괴테」의 삶과 사랑

이 글은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쓴 일기체 형식의 기행문이다. 괴테에게 있어서 여행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괴테는 몇 년간에 걸쳐 여행을 하게 된다. 본문의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괴테의 생애를 정리한 약력을 찾아보고, 이 글과 대비하여 읽도록 하자. 괴테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연표나 백과사전, 문학사전, 컴퓨터 등을 이용해 찾을 수 있고, 그림, 사진, 시디롬 등의 다매체 자료도 참조해 볼 수 있다. 


괴테의 생애

단테, 밀턴,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세계문학사에 빛나는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인이며, 소설가, 극작가, 변호사,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바이마르 공국(公國)의 재상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법률가이며 엄격한 성격이었고, 시장(市長)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하고 상냥해서 아들의 좋은 이해자였다. 이렇게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라틴어 등 어학공부에 뛰어났으며 독서량이 상당히 많았다. 괴테는 열다섯 살 때 그레트헨과의 첫 사랑을 경험했다. 열여섯 살 때 라이프치하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다가, 각혈로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무렵, 근처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牧歌的)인 사랑을 하였고 약혼까지 하였으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 후 회한(悔恨)과 마음의 부담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 때 겪은 내적 체험이 훗날 그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 1771년 변호사가 되어 고향에서 개업했는데, 이때 약혼자가 있던 샬로테 부프와의 사랑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년) 을 쓰게 된다.

그는 시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했고, 또한 자연 과학자로서 남다르게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26세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초빙되어 황태자의 스승이 되고 훗날 재상까지 되어 10년 남짓 국정(國政)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치적(治積)을 쌓는 한편,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하여 자연 과학에도 몰두하였다. 1784년, 동물에게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간악골(間顎骨)을 발견하여 비교 해부학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이 무렵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게 되고, 부인으로부터 인간적, 예술적 완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1786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부인과의 애정 관계는 끝을 맺었다.

 괴테는 이탈리아에서는 화가로서의 시간을 보내면서 1,000장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렸으며, 희곡을 써서 슈타인 부인에게 바치기도 한다. 이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괴테의 생애에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고전주의로의 지향(志向)을 결정한 시기로서 매우 중요하다. 1788년에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가난한 집안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한편, 실러와 괴테와의 이 우정은 1805년에 실러가 죽을 때 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10년 남짓한 시기에 괴테는 실러의 깊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하게 되고 오랫동안 중단되었던「파우스트」도 다시 쓰게 된다.

만년의 괴테의 문학작품으로는「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 「파우스트」의 완성이 최고봉을 이룬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는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묘사한 걸작이라 할 수 이으며, 「파우스트」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 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이다. 「파우스트」는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괴테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사의 최대 걸작중의 하나이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였던 괴테는 만년에도 세 차례의 연애를 체험하였다. 

괴테는 피서 여행을 갔다가 74세의 노령으로 19세의 처녀 우를리케 폰 레베초를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이 사랑은 좌절되었지만, 그 연모의 정이 시집「마리엔바더의 비가」(1823)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대공과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임종 시 그는 ‘좀 더 많은 빛을!’이라는 말을 남겨, 과연 괴테답다는 소리를 들었다.   

 

여정과 심리 과정의 변화


11워 1일 : 로마에 도착하여 기쁨을 느낀다. 로마를 세계의 수도라고 비유하며 안내자 없이 혼자서 방문한 기쁨을 이

              렇게 표현한다.

마침내 나는 이 세계의 수도에 도달했다.(중략) 티롤 산맥을 마치 날아서 날아온 것 같다.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 베네치아 같은 곳은 충분히 둘러보았지만, 페라라, 첸토, 볼로냐 등지는 대충 훑어보았고 피렌체는 거의 아무것도 둘러보지 못했다. 로마로 가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나 강렬했고 순간순간마다 더욱 높아졌기 때문에 잠시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피렌체에서는 겨우 세 시간밖에 머무르지 못했다.

이제 이곳에 도착한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평생 동안 지속될 듯한 안정을 찾은 것 같다. 부분적으로는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눈앞에서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바로 거기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 젊은 시절의 모든 꿈들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서 생생히 되살아나고 있다.


11워 22일 :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들어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는다.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밝고 쾌청하며 그림들도 충분한 빛을 받고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천장에 그려진 다양한 그림들은 우리의 경탄을 자아냈다. 나는 그것들을 보고 그저 놀랄 뿐이었다. 그 거장의 내면적인 확고함과 남성다움, 그 위대함은 어떠한 표현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없었다.

우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보고 난 뒤에 성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쾌청한 하늘에서 아주 아름다운 빛을 받으며 모든 부분이 밝고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는 감상자로서 지나치게 혐오스럽거나 너무 꼼꼼한 취향으로 혼란을 일으킴이 없이 그 웅장함과 화려함을 그대로 즐겼으며 트집 잡는 식의 비평은 삼갔다. 우리는 그저 즐길 수 있는 것을 즐겼을 따름이다. 이윽고 우리는 성당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11워 24일 : 이탈리아에서 조금 엉뚱한 일을 겪게 된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라고 표현

                한 이탈리아 민족에 대한 괴테의 생각이 담겨있는 그날의 일기를 보자.

이탈리아 민족에 대해서는 그들이 종교와 예술의 아름다움과 기품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동굴이나 깊은 숲 속에 살고 있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만큼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라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어떤 외국 사람에게든 금방 눈에 띄는 것, 오늘도 또 온 도시의 얘깃거리가 되면서도 그저 얘깃거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은 흔히 일어나는 살인 사건이다.

우리가 묶고 있는 구역에서만도 최근 3 주일동안 네 명이 살해당했다. 오늘도 슈벤디만이라고 하는 선량한 예술가가 빙켈만과 거의 똑같은 방법으로 습격당했다. 스위스 출신인 그는 메달 조각가로서 헤틀링어의 마지막 제자였다. 그에게 시비를 건 t가해자는 그에게 스무 군데나 자상을 남기고, 경비원이 달려오자 자기의 몸을 칼로 자살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곳에서도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죽이고도 교회로 도피하면 그것으로 그만이기 때문이다. 


12월 13일 : 로마에 와서 새롭게 태어나는 자신

모든 부분에서 진실 되고 한결같은 자연 대상들을 제외하고는 선량하고 지적인 사람의 업적만큼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없다. 수많은 횡포가 자행되고 터무니없는 많은 일들이 권력과 금권으로 오래 유지되어온 이곳 로마에서는 그런 점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빙켈만이 프랑켄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 한 구절을 읽고서 특히 기뻤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을 어느 정도 냉담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프랑스 사람으로 오인당할 겁니다. 나는 로마가 전 세계에 대한 최고 학교라고 믿고 있으며, 나 역시 이곳에서 정화되고 시험당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내가 이곳에서 연구하고 있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정말이지 로마에 와보지 않고서는 여기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를 전혀 알 수 없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매체 자료 활용의 독서 효과

     1) 영상물이나 사진을 통해 대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다양한 매체를 활용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생생한 느낌과 현장감을 얻을 수 있다.

     3) 인터넷을 활용함으로써 손쉽게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4) 그림, 사진, 시디롬 등을 참조하면서 폭넓은 배경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정보화 시대의 독서와 관련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문자 정보의 영상화이다. 영상 시대라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시뮬라크르의 시대’라는 이야기가 화두로 돌아다닌 지 오래다. 그러나 정작 문자 정보의 영상화가 어디까지 진행 되었는가 하는데 대한 검토는 별로 없다.

매체를 달리하여 전달되는 모든 정보를 영상으로 환원하려는 졸속한 판단이 사실을 왜곡한다. 문자 정보를 영상화할 경우, 이는 이미지 읽기로 읽기의 방향이 달라지고, 감각에서 감각으로 이어지는 읽기가 된다. 따라서 이전의 읽기 개념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영상이 소통에 적용하는 역량은 막강한 것이라서 언어로 따르지 못할 점이 있다. 광고 언어가 영상을 이용하는 까닭은 그러한 힘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을 깊이 따져보기 위해서는 다시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언어는 그 추상화 능력으로 인해 대상을 설명하는 이른바 학문의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철학성을 배반하는 모든 독서론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에 해당한다. 영상을 영상으로 반성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한 음악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변주한 음악이 있고, 그림을 그리면서 화폭에 호가를 그려 넣음으로써 스스로 한 단계 높은 시각을 갖추는 경우가 없는바 아니다. 그러나 이는 언어를 통한 자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철학은 언어의 추상화 기능에 기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영상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독서론에서 요구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정보화 사회는 일종의 독서 사회라 할 수 있다. 정보를 가공하고 저장하고 유통하는 데는 정보화의 메커니즘을 따라야 하지만, 정보의 수용과 새로운 정보의 창출은 독서를 통해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고독한 독서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관점은 한계가 스스로 분명해진다. 물론 문학의 어느 부면에 해당하는 독서 자료를 읽을 때는 개인적 고독과 심리적 분리가 보장 되어야 한다. 그러나 독서사회에서 독서인들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집단화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독서 사회학과 함께 ‘독서 경영론’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지식기반사회, 정보화 사회를 버티어 나가는 독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매체속의 언어 자료 활용하기(4)

후기 인상파의 다양한 행보


1. 고전주의 미술(고전주의 미술)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형성되던 미술 양식이다.

고전주의 미술의 특색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명확한 표현, 형식과 내용의 균형 등을 중시한데 있으며, 특히 조형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형상의 입체적 형식 등이 중요시 된다.


2. 인상주의 미슬(인상주의 미술)

19세게 후반, 주로 1860~ 189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양식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추천한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 일파가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체 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체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데 있었다.


1) 인상파 미술의 특징

현대 미술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후반의 인상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인상파는 고전주의적 균형과 정확한 묘사를 중시하던 인습을 타파하고 색체 묘사의 혁명을 일으켰다. 인상파 화가들은 미술학교에서 배운 대로 신화와 같은 품위 있는 주제를 완벽한 구상으로 그려내는 대신에, 밝게 빛나는 자기 주변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옮겨놓으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평범한 중산층의 행복한 생활 단면이나 해돋이와 같은 순간적 장면도 색체의 아름다운 배열만 지니고 있다면 그림의 소재로 삼을 수 있었다.


2)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새로운 모색들

그러나 인상파는 하나의 유파로서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세잔과 고흐, 고갱 등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 한편으로 인상파가 이룩한 업적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인상파에 대한 반발과 저항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세 화가는 눈에 비친 자연을 인상파처럼 묘사하는 과정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상실했다고 느꼈고, 그것을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인상파를 극복하려 한 점에서는 공통적이었지만 그 저항하는 방향은 서로 달랐다.


3)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화법

먼저 세잔은 인상파가 순간의 감각에만 사로잡힌 나머지 자연의 변함없는 형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색체의 밝음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화면의 깊이와 거리감을 부려하려 했고, 이를 위해 ‘세계의 모방’이라는 전통적 목적을 버린 채 기하학적 형태와 색체간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고흐는 인상파가 시각적인 인상에 너무 빠져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했다고 판단하였다. 인상파의 미술이 정열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술가의 활기찬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라고 하면서, 이를 달성하기 위해 거친 붓 자국으로 격정적 내면을 표출하였고, 필요할 경우 형태의 왜곡까지도 감행하였다. 한편, 고갱은 서구 문명이 축적한 근대적 학문과 예술 전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는 고상하고 초월적인 것을 열망했고, 그것은 복잡한 물질문명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미련 없이 세련된 인상파적 요소를 버리고 원시적 가치를 찾아 나설 수 있었다.


4)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가 현대 미술의 발전에 미친 영향

현대 미술은 위에서 언급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를 계승한 것ㅇ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인상파의 주제 접근 방식은 현대 미술의 폭을 넓혀 주었고, 세잔, 고흐, 고갱이 제기한 문제의식은 입체파, 표현주의, 야수파 등 현대 미술 사조가 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 미술가들은 사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인상파는 고전주의에 의한 반발로 생겨났지만, 세잔과 고흐, 고갱은 이러한 인상파의 화풍을 계승, 극복하여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창조해 냈다. 세잔과 고흐, 고갱은 인상파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각기 지향하는 바는 달랐으며, 이들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서 현대 미술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세잔: 대상을 모방하려 하지 않고 기하학적 형태와 색체간의 관계를 탐구

고흐: 예술가의 활기찬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으로 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거친 붓 자국으로 격정적 내면을 표출

         함. 필요할 경우 형태의 왜곡까지도 감행함

고갱: 복잡한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세련된 인상파적 요소까지 버리며 원시적 가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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