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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문학의 수용과 창작(3) / 무궁화

수로보니게 여인 2008. 9. 16. 01:39

 

수필 문학의 수용과 창작(3)


무궁화(無窮花) 

                                     이양하(李敭河)

 

 

 우리 고향은 각박한 곳이 되어 전체 화초가 적지만 무궁화가 없다. 어려서부터 말은 들었지만 실지로 무궁화를 본 것은 십여 년 전, 처음 서울에 살기 시작한 때다. 서울 어디서 첫 무궁화를 보았는가는― 역시 연전 교정(延專校庭)이 아니었던가 한다.―기억에 어렴풋하나, 그 때 느낀 환멸감은 아직도 소상하다. 보라에 가까운 빨강, 게다가 대낮의 햇살을 이기지 못하여 시들어 오므라지고 보니 빛은 한결 생채를 잃어 문득 창기(娼妓)의 입술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러면 잎새에 아름다움이 있나 하고 들여다보고 들여다봐야, 거세고 검푸른 것이 꽃 잎새라느니보다 나무 잎새였다. 요염한 영국의 장미, 고아하고 청초한 프랑스의 백합, 소담한 독일의 보리(菩提), 선연(鮮姸)한 소격란의 엉겅퀴, 또는 가련한 그리스의 앉은뱅이, 또는 찬란하고도 담백한 일본의 벚꽃을 생각하고 우리의 무궁화를 생각할 때, 우리는 아무리 하여도 우리 선인의 선택이 셈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 상허(尙虛)는 무궁화가 우리의 국화로서 가당하지 못하다는 여러 가지 적당한 이유를 들고, 우리에게 좀 더 친근하고 보편적인 진달래를 국화로 하였으면 하는 의견을 말하였다. 그러나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대한 혐오의 감을 더 절실하게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떤 친구의 다음 이야기겠다. 이 친구는 전라도 태생이 되어 어렸을 때부터 무궁화를 많이 보아 왔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란 것은 알지 못하였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서울 와서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순간의 그의 감명은 이러한 것이었다.

 “게 무강 나무 아닌가. 우리 시골 가면 집 울타리 하는 바루 그게 아닌가.”


 그러나 연희(延禧)에 있는 십 년 동안 여름마다 많은 무궁화를 보아 오고, 또한 사오 년 동안은 두서너 그루의 흰 무궁화가 자라는 집에 살게 되어 아침저녁으로 이 꽃의 이모저모를 보아 온 이래, 무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오늘에 있어서도 우리 국화론 꼭 무궁화라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국화 대접을 하여 부끄러운 꽃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아니한다. 그러고 생각하면 우리의 선인들이 무궁화를 소중하게 여긴 뜻과 연유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고, 또 꽃 자체로도 여러 가지 미덕을 가져 결코 버릴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앵두꽃이 피고, 살구, 복숭아가 피고 져도 무궁화는 아직 메마른 가지에 잎새를 장식할 줄도 모른다. 잎새가 움트기 시작하여도 물 올라가는 나무뿌리 가까운 그루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어서 온 뜰이 푸른 가운데 지난해의 마른 꽃씨를 달고 있는 나뭇가지가 오랫동안 눈에 거슬린다. 라일락이 피고, 황매가 피고, 장미가 피고 나야 비로소 잎새를 갖춘다. 잎새는 자질구레한 것이 나무 그루터기부터 가지가지의 끝까지 달리는 것이어서, 말하자면 온 나무가 잎새가 된다. 꽃 피는 것도 무척 더디다. 봉우리가 맺히기 시작하여도 한두 주일을 기다려야 꽃이 피는데, 첫 꽃이 피는 것은 서울서는 대개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칠월 초순이다. 오래 기다리던 나머지요, 또 대개의 꽃이 한봄의 영화를 누리고 간 뒤의 뜰이 적이 쓸쓸한 탓도 있을 터이지마는, 하루아침 문득 푸른 잎새 사이로 보이는 한 송이의 흰 꽃 무궁화―무궁화는 흰 무궁화라야 한다. 우리의 선인이 취한 것도 흰 무궁화임에 틀림이 없다. 백단심(白丹心)이라는 말이 있을 뿐 아니라, 흰빛은 우리가 항시 몸에 감는 빛이요, 화심(花心)의 빨강은 또 우리의 선인들이 즐겨 쓰던 단청(丹靑)의 빨강이다.―는 감탄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꽃은 수줍고 은근하고 겸손하다. 그러나 자신은 없지 아니하다. 왜 그러냐 하면, 한 번 피기 시작하면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대개 그 날 밤사이에 시들어 뒤말라 버리고 말지만, 다음날 새 송이가 잇대어 피고 하는 것이, 팔월이 가고 구월이 가고 시월에 들어서도 어떤 때는 아침저녁 산들 바람에 흰 무명 바지저고리가 차가울 때까지 끊임없이 핀다. 그 동안 피고 지는 꽃송이를 센다면 대체 몇 천 송이 몇 만 송이 될 것일까? 그 중 많은 꽃을 피우는 때는 팔월 중순경인데, 이 때면 나의 키 만 한 나무에 수백 송이를 셀 수가 있다. 형제가 번열하고 자손이 자자손손(子子孫孫) 백 대 천 대 이어 가는 것을 무엇인가 큰 복으로 생각하던 우리의 선인들은 첫째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아마 무궁화를 사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꽃으로서도 이만큼 무성하고 이만큼 오래고 보면 그것만으로도 한 덕이라고 할 수 있지 아니할까?

 이와 관련된 의미에 있어 우리 선인들은 또 무궁화의 수수하고 부쩝 좋은 것을 좋아하였을 것이다. 무궁화는 별로 토지의 후박(厚薄)을 가리지 아니하고, 청송오죽(靑松烏竹)처럼 까다롭게 계절을 가리지 아니한다. 동절(冬節)을 제하고는 어느 때 옮겨 심어도 자라고, 또 아무데 갖다 놓아도 청탁 없이 잘 자란다. 밭 기슭에서 자라고, 집 울타리에다 심으면 집 울타리에서 자라고, 사랑 마당에 심으면 사랑 마당에서 자란다. 아니, 심어서 자란다느니 보다 씨 떨어진 곳에 나서 자라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이 꽃은 벌레 타는 법이 없다. 혹시 진딧물이 끼고 거미가 줄을 스는 법은 있어도 벌레 때문에 마르는 법이라 곤 없다. 이렇게 너무도 까닭 부릴 줄을 알지 못하고 타박할 줄 모르는 것이 이 꽃이 사람의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소이의 하나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도 부쩝이 좋고 까닭이 없고 보니 사람이 비록 소중히 하지 아니한다 하여도 절종(絶種)되거나 희소(稀少)해지거나 할 염려는 조금도 없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어디까지든지 퍼지고 자라고 번성할 운명을 가졌다. 여기 우리는 무궁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선인의 마음 가운데서 다시 자손의 창성(昌盛)과 국운(國運)의 장구(長久)를 염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겠다.

 무궁화는 어떤 의미에 있어, 아니 어떤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은자(隱者)의 꽃이라 할 수 있겠다. 외인은 혹 우리 한국을 불러 은자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 연유를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자연 은자의 나라다운 곳이 있다면, 무궁화는 따라서 우리나라를 잘 상징하는 꽃이 되겠다. 무궁화는 첫째, 성(性)을 따진다면 결코 여성이 아니다. 중성이다. 요염한 색채도 없고 복욱(馥郁)한 방향(芳香)도 없다. 양귀비를 너무 요염하다 해서 뜰에 넣지 않는 우리 선인의 취미에 맞을 뿐 아니라, 향기를 기피하여 목서까지 뜰에서 추방한 아나톨 프랑스의 사제(司祭)도 타협할 수 있을 은일(隱逸)의 꽃이다. 그리고 은자로서의 우리의 선인의 풍모를 잠깐 상상한다면, 수수한 베옷이나 무명옷을 입고 살부채를 들고 조그만 초당 뜰을 거니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 모습에 잘 어울리는 꽃으로 무궁화 이외의 꽃을 쉬이 상상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뿐 아니라, 무궁화는 은자가 구하고 높이는 모든 덕을 구비하였다. 무궁화에는 은자가 대기(大忌)하는 속취(俗臭)라든가, 세속적 탐욕 내지 악착을 암시하는 데가 미진(微塵)도 없고, 덕(德) 있는 사람이 타기하는 요사라든가 방자라든가 오만이라든가를 찾아볼 구석이 없다. 어디까지든지 점잖고 은근하고 겸허하여, 너그러운 대인군자의 풍도(風度)를 가졌다. 서양 사람들은 무슨 꽃을 겸허의 상징으로 삼는지 즉금(卽今) 잠깐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나는 어떤 꽃보다도 우리의 무궁화가 겸허를 잘 표현하고 있지 아니한가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무궁화는 최고의 덕을 가진 탁월한 꽃이라고 찬양할 수 있겠다. 왜 그러냐 하면, 겸허는 사람의 아들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심경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온 땅을 누릴 수 있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궁화는 어느 정도 우리 한국 사람의 성질을 말하고 우리의 지취(志趣)가 흔구(欣求)하는 바에도 상부(相符)하는 것이어서 국화로 삼아 의당할 뿐 아니라, 무궁화가 가진 덕을 몸소 배워 구현하는 데 힘쓴다면,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

 이것은 여하튼 때는 마침 팔월, 무궁화가 가장 아름답고 무성할 무렵, 마침 새 나라의 기초가 서게 되니 상사로운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원하건대, 우리의 새 나라 새 백성, 무궁화처럼 천 대 만 대 길이 남아 훌륭한 나라 훌륭한 백성 되기를…….  


핵심 정리

 지은이: 이양하(李敭河 1904-1963) 수필가. 영문학자. 평남 강서(江西) 출생. 일본 도쿄[東京]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수료, 서울대학 문리과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의 수필은 대개 자연이나 생활 자체에서 그 소재를 구한다. 자연 예찬적 성격의 글이거나 혹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세심한 관찰을 통해 포착하여 낸다. 대표작으로 “나무”, “신록예찬”, “나무의 위의” 등의 수필이 있다.

 

  갈래 : 경수필. 교훈적 수필

  성격 : 사색적. 체험적. 관찰적. 설명적

  문체 : 평범하고 담담한 문체

  표현 : 애정 있는 관찰에 의거하였기에 설득적인 성격이 짙다.

  제재 : 무궁화

  주제 : 무궁화는 국화로서의 자격이 충분함

  출전 : <나무>(1964)

  특징대상을 의인화시켜 속성을 드러내고, 수식이 많으며 길이가 긴 화려체, 만연체 문장이다.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꽃 무궁화

   「풍류 한국」, 영국인 리처드 러트: 다른 나라와 달리 유일하게 황실의 꽃(梨花)이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짐.


작품 해설

 이양하 수필의 특색은 평범하고도 끈질기게 대상을 관찰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섬세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대상의 관찰은 곧 생활의 관찰이며 이것은 논리(論理)와 구성력(構成力)에 의존한다. 김진섭의 수필이 관념과 자기도취적인 수사학(修辭學)에 의존해 있는 것과는 달리 이양하의 수필은 논리적으로 자기 자신의 생활을 관찰한 것을 제시하여 독자를 설득하려고 한다.

 이 글은 국화(國花)로서의 무궁화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에 때를 맞추어 쓴 것이다. 이 글의 전체 흐름은 무궁화에 대한 환멸감(幻滅感)에서 점차 무궁화가 뛰어난 재치는 없지만, 무궁화가 지닌 미덕(美德), 곧 은근과 끈기를 설득력 있게 예찬하고 있다.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새 나라의 기초가 되는 때를 배경으로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다 같이 염원하게 하려는 의도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이 글은 전체 흐름은 무궁화에 대한 환멸감에서 점차로 무궁화의 미덕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관찰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긴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은근과 끈기의 미덕으로 참고 견디어 조국 광복의 감격스러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소감을 국화인 무궁화의 특성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대상을 평범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는 것과 자신을 솔직하게 숨김없이 드러내는 고백적 태도가 오히려 설득력을 획득한다.

 처음에는 벌로 눈에 띄지도 않고 벌레도 많이 끼어 좋아하지 않는 나무였으나, 점차 무궁화가 보여 주는 은근과 끈기의 미덕이 우리 민족성과 일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뛰어난 재치나 날카로움은 없으나 은근과 끈기로 설득력 있게 제재를 예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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