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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만남을 위한 글 읽기/ 진정한 벗의 사귐

수로보니게 여인 2008. 8. 5. 01:58

   

 

글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귐을 매개하는 수단이다.

  독서를 통해 진정한 인간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일기 읽기: 수양이 되면서 자신의 삶의 자세도 변화될 수 있다.

              관찰력과 사고력이 예리해지면서 글쓴이의 가치관과 태도에 동화된다. 

 

 

 

 

 

 

 

 

 

 

 

 

      

 사람 사이의 만남을 위한 글 읽기

   

    1) 친교 및 정서 표현을 목적으로 한다.

    2)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 정서를 이해하며 읽는다.

    3) 글쓴이의 처지와 의도, 감정을 헤아리고 공감하며 읽는다.

    4) 개성과 정서를 드러내는 표현 방식을 이해한다.

    5) 자신의 체험과 정서와 관련지어 이해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이해한다. 

 

구두     

                - 계용묵


구두 수선(修繕)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도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고,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귓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이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 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咫尺)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옹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 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 땅바닥을 박아 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인위(人爲)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줄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 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 공포(恐怖)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 또그닥, 좀 더 재어지자 이에 호응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 내는 그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보는 동작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한참 석양 놀이 내려퍼지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鋪道) 위에서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하는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 3보(步)만 더 내어 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2,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 뿌리에도 풍진(風塵)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 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고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휭 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을 알 바 없었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 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진정한 벗의 사귐

                            박지원

 

삼한 땅을 두루 돌아서 동해에 이르면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끝이 없다. 명산이 그 가운데 뿌리박고 서있는 이 땅은 백리가 되는 평야가 드물고 천 호가 되는 고을이 없으니 그 지세 모양부터가 역시 애초에 비좁다.

서로 의견이 대립되어 네 파로 나뉘고, 이른바 사농공상도 아니면서 명분상 차등이 네 가지나 된다. 좋다고 생각되는 견해가 같지 않을 뿐인데 의논 대립의 격렬함은 진秦월越보다 더 이질적이고, 처해 있는 입장에 차이가 있을 뿐인데, 명분 구별의 명확함은 화華‧이夷보다 더 엄격하다. 서로가 이름을 들으면서도 남의 이목에 드러날까 꺼리어 서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서로 교제는 하면서도 신분상의 차등에 구애되어 감히 벗으로 삼지는 아니한다.

사는 동네가 같고, 종족이 같고, 언어나 의복이 자기와 다른 점이 거의 없다. 그러나 서로 알려고 하지 않으니 서로 혼인을 하겠는가? 감히 벗으로 삼지 않으니 서로 도의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집안끼리 수백 년 동안을 지붕을 맞대고 담장을 붙여 살면서도, 마치 진‧월 과 화이 관계처럼 지내오고 있으니 그 풍속이 어찌 이다지도 좁쌀스러운가!

홍군덕보(洪君德保)가 일찍이 말 한 필을 타고 사신의 행차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는 시장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지위가 없는 사람들 사는 곳을 다니다가 항주 출신 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그들의 숙소를 찾아가 서로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정답게 대했다. 서로 여러 문제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하면서, 결론을 내리기도 하고 서로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서로가 처음에는 지기로 받아들였다가 나중에는 형제의 의리를 맺기에 이르렀다. 서로 좋아하여 저버리지 말자고 언약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의 의리는 능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아, 우리나라에서 항주까지는 거의 만 리나 된다. 홍군은 두 번 다시 그 세 사람을 만나 볼 길은 없을 것이다. 그가 이전에 우리나라에 살았을 때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끼리 서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만 리 밖의 사람을 사귀었다. 이전에 자기 나라에 있을 때 종족이 같은데도 서로를 사귀지를 않다가 두 번 다시 만나볼 길이 없는 사람을 벗으로 삼고, 또한 이전에 자기 나라에 있을 때에는 언어나 의복이 같은 사이인데도 서로 벗으로 삼지 않다가, 이제 갑자기 언어도 다르고 의복도 같지 않은 사람을 벗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덕보가 한동안 씁쓸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감히 우리나라에서는 사귈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벗을 삼지 않은 것이 아니네. 정말로 환경이 제약되고 관습에 구애되는 데에 마음이 무척 답답하였네. 난들 왜 오늘날의 중국이 옛날의 중국이 아니며, 또 그 사람들의 복식도 옛 중국 정통의 복식이 아님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사귀는 사람들은 여러 나라 출신으로 견문이 넓고 멀리 노니는 인사들이며, 그 사람들이 읽고 있는 서적도 삼대三代 이래 사해四海 만국萬國의 극히 해박한 서적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도는 비록 변하였더라도 도덕과 의리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옛날의 그 중국이 아닌 상황 하에서도 백성으로 살지언정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렇다면 저 세 사람들이 나를 볼 때도 중국과 우리나라의 구별 의식과, 이에 따른 남의 이목 및 신분상 차등에 구애됨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번거로운 꾸밈이나 엄격한 법도를 떨쳐 버리고 진심을 드러내었으니, 사귐의 드넓음이 하찮은 명성과 세상의 명리名利에 집착하는 위의 사람들과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세권의 책으로 모아 엮은, 세 사람들과 이야기한 내용을 나에게 내보이면서 말했다.

“자네가 서문을 쓰게.”

나는 한 번 죽 읽고 나서 감탄했다.

“자네 벗 사귀는 것이 툭 틔었군, 벗으로 삼는 법과 벗이 되는 법. 그리고 벗으로 삼지 않는 법을 잘 아는 것이야말로 벗을 사귀는 도리임을 이제야 알겠네.”


이 글은 지세가 비좁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분, 명분, 남의 이목에 구애받아 진정으로 벗으로 사귀지 않는 태도를 비판하며 홍군덕보가 먼 중국 사람들과 형제의 의리를 맺은 사례를 들어 환경과 관습에 구애되지 않고 벗을 사귀는 태도를 강조한다. 진정한 사람의 사귐은 허례허식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음을 깨우쳐주면서 진정한 인간애를 모색하고 있다.


 통곡할 만한 자리

                                박지원(朴趾源)

 초팔일 갑신(甲申). 맑다.

정사 박명원(朴明源)과 같은 가마를 타고 삼류화(三流花)를 건너 냉정(冷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십여 리 남짓 가서 한 줄기 산기슭을 돌아 나서니 태복(泰卜)이 국궁(鞠躬)을 하고 말 앞으로 달려 나와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큰 소리로,

 “백탑(白塔)이 현신함을 아뢰오.” 

 한다. 

 태복이란 자는 정 진사(鄭進士)의 말을 맡은 하인이다. 산기슭이 아직도 가리어 백탑은 보이지 않았다.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채 못가서 겨우 산기슭을 벗어나자 눈앞이 아찔해지며 눈에 헛것이 오르락내리락하여 현란했다.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디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이마에 대고 말했다.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 볼 만하구나!”

 정 진사가,

 “이 천지간에 이런 넓은 안계(眼界)를 만나 홀연 울고 싶다니 그 무슨 말씀이오?”

 하기에 나는,

 “참 그렇겠네. 그러나 아니거든! 천고의 영웅은 잘 울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지만 불과 두어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그저 옷깃을 적셨을 뿐이요, 아직까지 그 울음  소리가 쇠나 돌에서 짜 나온듯하여 천지에 가득 찼다는 것이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칠정(七情) 중에서 ‘슬픈 감정[哀]’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 알았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를 겝니다. 기쁨[喜]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怒]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樂]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愛]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미움[惡]이 극에 달하여도 울게 되고, 욕심[欲]이 사무치면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 버리는 것으로 소리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소이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게요. 북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뭐 다르리요?

 사람들의 보통 감정은 이러한 지극한 감정을 겪어 보지도 못한 채 교묘하게 칠정이 늘어놓고 ‘슬픈 감정[哀]’에다 울음을 짜 맞춘 것이오. 이러므로 사람이 죽어 초상을 치를 때 이내 억지로라도 ‘아이고’, ‘어어’라고 부르짖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하고 참다운 소리는 참고 억눌리어 천지 사이에 쌓이고 맺혀서 감히 터져 나올 수 없소이다. 저 한(漢)나라의 가의(賈誼)는 자기의 울음 터를 얻지 못하고 참다못하여 필경은 선실(宣室)을 향하여 한 번 큰 소리로 울부짖었으니, 어찌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요.”

 “그래, 지금 울 만한 자리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당신을 따라 한바탕 통곡을 할 터인데 칠정 가운데 어느 ‘정’을 골라 울어야 하겠소?”

 “갓난아이에게 물어 보게나. 아이가 처음 배 밖으로 나오며 느끼는 ‘정’이란 무엇이오? 처음에는 광명을 볼 것이요, 다음에는 부모 친척들이 눈앞에 가득히 차 있음을 보리니 기쁘고 즐겁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이 같은 기쁨과 즐거움은 늙을 때까지 두 번 다시없을 일인데 슬프고 성이 날 까닭이 있으랴? 그 ‘정’인즉 응당 즐겁고 웃을 정이련만 도리어 분하고 서러운 생각에 복받쳐서 하염없이 울부짖는다. 혹 누가 말하기를 인생은 잘나나 못나나 죽기는 일반이요, 그 중간에 허물 환란 근심 걱정을 백방으로 겪을 터이니 갓난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울어서 제 조문(弔問)을 제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갓난아이의 본정이 아닐 겝니다. 아이가 어미 태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는 어둡고 갑갑하고 얽매이고 비좁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탁 트인 넓은 곳으로 빠져 나오자 팔을 펴고 다리를 뻗어 정신이 시원하게 될 터이니, 어찌 한 번 감정이 다하도록 참된 소리를 질러 보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본받아야 하리이다.

 비로봉(毘盧峰) 꼭대기에서 동해 바다를 굽어보는 곳에 한바탕 통곡할 ‘자리’를 잡을 것이요,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金沙) 바닷가에 가면 한바탕 통곡할 ‘자리’를 얻으리니, 오늘 요동 벌판에 이르러 이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일천이백 리까지의 어간은 사방에 도무지 한 점 산을 볼 수 없고 하늘가와 땅끝이 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고금에 오고 간 비바람만이 이 속에서 창망할 뿐이니, 역시 한 번 통곡할 만한 ‘자리’가 아니겠소.” 

 

핵심정리

 지은이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조선 시대의 실학자. 호는 연암(燕巖).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처숙 이군문(李君文)과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서 수학. 44세 때 청에 다녀왔는데 청나라 문물을 보고 기행문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음. 홍대용,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가 됨. 저서로는 <연암집(燕巖集)>, <연암속집(燕巖續集)>,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이 있다.

 연대 : 조선 후기

 갈래 : 중수필. 기행문

 성격 : 비유적. 교훈적. 사색적. 분석적

 표현 : 적절한 비유와 구체적인 예시로 실감나게 묘사함

 특징 : 발상과 표현이 참신함

 주재 :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기쁨

 출전 :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도강록(渡江錄)’


작품해설

 ‘통곡할 만한 자리’는 <열하일기> 중 ‘도강록’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작가는 중국의 요동을 여행할 때 요동의 백탑(白塔)과 광활한 요동 벌판을 보고 그 감회를 적은 글이다. 이 글에서 작가는 만주의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적절한 비유와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매우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작가는 요동 벌판을 보고 ‘한바탕 울고 싶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울음은 슬픔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극에 달해 북받쳐 나오는 울음으로, 갓난아이가 어둡고 비좁은 태속에서 넓은 세상으로 나와서 터트리는 울음과 같다고 한다. 이는 곧 작가가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Language is a means of communication. 언어는 인간 사상의 전달 수단이다.

          What you say is true. 당신 말이 완전 옳아요. 

        Right you are옳은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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