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앞바다
지난해에도 태안 앞바다의 해저에서 2만여 점의 고려청자가 발견되었는데, 이번에도 지난해 발굴지점에서 불과 10km 떨어진 바다 밑의 뻘 속에 500점이 넘는 고려청자가 묻혀 있는 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산이 많은 입지조건 때문에 육로운송보다는 해로운송이 활발하였다. 무거운 물건은 배에다가 싣고 서해안을 통하여 개경이나 서울로 운반되었다. 깨지기 쉬운 청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청자 생산지인 강진을 출발하면 진도 벽파리, 신안 안좌도, 암태도 앞, 목포 달리도, 무안 도리포, 군산 비안도, 군산 야미도, 군산 십이동파도, 보령 원산도, 태안 안흥량을 통과한다.
여기서 다시 경기도 앞바다를 거쳐 대부도, 영종도, 교동도 또는 석모도를 통과하여 예성강의 벽란도로 들어가 수도인 개성에 도착하는 코스였다. 이 해도(海道)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해상 고속도로였다. 신안군 임자도에서 바람을 잘 만나면 2박3일에 개성이나 서울 마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육로에 비해 엄청나게 시간을 절약할 뿐만 아니라, 화물 적재량도 육로 운송량의 수백 배나 되었다.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 곡식을 싣고 개성으로 올라가는 세곡선(稅穀船)들도 이 해도를 따라 올라갔다.
그러나 해상운송에도 문제가 있었다. 풍랑과 암초를 만나 청자를 실은 배가 침몰하는 사건이었다. 서해안에서 배가 자주 침몰하던 곳은 장연의 장산곶(長山串), 태안의 안흥량(安興梁), 강화의 손돌항(孫乭項), 임천의 남당진(南堂津), 영광의 칠산량(七山梁)이다. 특히 태안 앞바다 지역인 '안흥량'은 험난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초기 60년 동안 조운선(漕運船) 200여 척이 침몰하였다고 나온다. 사람도 1200명이 사망하고, 배에다 싣고 가던 쌀 1만5800섬도 수장되었던 지점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수많은 배가 태안 앞바다인 안흥량에서 난파되었던 것이다. 이 지역은 암초가 많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 바다 속에 암초가 많으면 물살이 빙글빙글 돌면서 소용돌이치는 곳이 많다. 여기에다 폭풍이 추가되면 배는 암초를 들이받고 그대로 침몰이다. 태안 앞바다인 '안흥량'은 수천 년 동안 난파선(難破船)의 무덤이었다.
2008.07.28 23:05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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