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一鷺蓮果(일로연과)→一路連科(일로연과), 小科·大科를 '한방'에…
[정민 교수의 '그림 읽기 문화 읽기'] 심사정 '백로와 연밥'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백로 한 마리가 못가를 걸어간다. 시선을 앞으로 집중하고 있는 걸 보니, 시든 연잎 아래 노니는 물고기를 노리는 눈치다.
백로의 머리 위로 고깔처럼 연밥이 드리웠다. 백로는 여름 철새다. 연꽃이 진 자리에 연밥이 매달리는 것은 잎이 시든 가을철의 일이다. 백로와 연밥은 실제로는 함께 놓일 수 없는 조합이다. 그런데도 화가들이 즐겨 그렸다. 역시 의미로 읽어야 한다.
백로는 우리말로 해오라기다. 하야로비, 해오라비라고도 부른다. 한자로는 백로(白鷺), 설로(雪鷺), 설객(雪客), 설의아(雪衣兒) 등 눈처럼 흰 깃에 눈길을 준 이름들이 있다. 풍채가 빼어나다 해서 풍표공자(風標公子)로 부르기도 하고, 머리 뒤로 실처럼 흩날리는 멋진 깃을 두고 사금(絲禽), 로사, 백령사 등의 이칭도 있다.
연밥은 연꽃이 진 자리에 벌통처럼 생긴 원추형의 자루가 생겨나, 구멍마다 연실(蓮實)이 송송 박힌 것이다.
이 열매는 약재로 쓰고, 요리의 재료로도 애용된다.
백로와 연밥을 함께 그릴 때는 한 마리만 그려야 한다. 이 둘을 합치면 일로연과(一鷺蓮果)다. 일로(一鷺), 즉 한 마리 백로는 '일로(一路)'와 음이 같다. 연과(蓮果), 곧 연밥은 '연과(連科)'와 통한다. 그래서 그림의 의미는 '일로연과(一路連科)'가 된다. 단번에 소과와 대과에 연달아 급제하라는 뜻이다. 오늘날로 치면 사법고시 1차 2차 시험을 한꺼번에 붙는 것을 말한다.
썩썩 몇 차례 거친 붓질로 연잎을 그리고, 그 빈 여백에 덤불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백로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백로도 분방한 선 몇 개로 그렸지만 새의 특징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진한 먹을 붓끝에 살짝 묻혀 줄기와 점을 찍어 순식간에 그림을 마쳤다. 체세(體勢)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이징의 '연지백로(蓮池白鷺)'와 서울대박물관에 소장된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노련도(鷺蓮圖)'에는 연밥 아래 백로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두 그림 모두 개구리밥이 떠다니고, 백로 한 마리가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거나 노리고 있다. 두 마리 백로 때문에 '일로연과'의 의미가 사라지고, 부부가 백두해로(白頭偕老) 하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사실은 일로연과의 뜻이 흐려지면서 생긴 변형이다.
같은 백로 한 마리도 연밥 아닌 부용화(芙蓉花) 아래 서 있으면, 일로영화(一路榮華)의 뜻이 된다. 용화(蓉花)와 영화(榮華)의 중국음이 같기 때문이다. 계속해 부귀영화를 누리시라는 것이니, 벼슬길의 승승장구를 축복하는 의미로 바뀐다. 같은 소재도 한 마리냐 두 마리냐에 따라 의미가 바뀐다. 연밥이냐 부용화냐에 따라서도 그림의 주제가 달라진다.
한양대 국문과 교수 입력 : 2008.06.20 16:10 / 수정 : 2008.06.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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