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 ı Łονё 文學

[장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57] 빛의 발자국

수로보니게 여인 2019. 4. 9. 23:07
  • [장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57] 빛의 발자국
  • 력 2019.04.08 03:08

          


              

빛의 발자국


오후가 되면 슬그머니 내 방 벽으로 드시는 이
남향 창으로 격자무늬 햇살 그림자
방으로 드시는데
저 무늬 어디서 봤더라
참 다정한 모습인데 누구더라
내 생을 스쳐간 얼굴인가 풍경인가
피 당기는 저 모습 저 온기
내 몸보다 더 편안한 곳 모셔 두고 싶다


―신달자 (1943~ )


깨끗한 빈 벽 하나를 갖는 일도 쉽지 않다는 요지의 아름다운 수필이 있었습니다. 빈 벽이 왜 필요한가 싶지만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공자님 말씀처럼 '흰 것'이 된 이후 그곳은 더 이상 벽만은 아닙니다. 그동안은 알 수 없던 새롭고 신선한 손님들이 비로소 찾아들기 시작하지요. 여기 공일당(空日堂·시집 속 다른 시에 따르면 이 집 택호)의 벽을 비워놓으니 맨 먼저 눈에 띈 '이'가 '빛의 발자국'입니다.

오후의 비스듬한 햇빛은 방안 깊숙이 들어오지요. 한옥 문의 격자무늬가 어려 있으니 '빛'이 아니라 그것의 '발자국'입니다. 그 그림자는 먼 기억을 불러옵니다. 소녀가 물끄러미 방안 깊은 곳에서 벽에 어린 창호지 문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소녀 앞에 펼쳐졌던 세계와 지금 이 노경 화자의 지나간 시간이 만납니다. '참 다정한 모습인데 누구더라.' 반가운 모습과 함께 잔잔한 파문이 있음을 눈치챕니다. 벽은 순간 한 생이 지나가는 은막이 되었습니다.

일생이 '빛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일이었습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7/20190407021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