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6 03:09
탁! 탁!
마을버스에서 내린
맹인 소녀의 지팡이가 허공을 찌르자
멀리, 섬에서 점자를 읽고 있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따가워지기 시작한다
도다리가 잠든 횟집 앞
무거운 책가방을 든 소녀가 휘청거리며 지나간다
오른손에 움켜쥔 지팡이가 갈라진 보도블록을
탁! 탁! 칠 때마다 땅속 벌레들의 고막이 터진다
허공 어딘가 통점을 꾹. 꾹. 찌르며
헛발 딛는 소녀의 종아리가 되어
집을 찾아가는 지팡이
무수한 길들이
종아리 속에 뻗어 있다
―이설야(1968~ )
시각장애인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문득 숙연해집니다. 그리고 '길'이 옵니다. 저들의 길은 어떤 빛으로 밝혀지는 것일까? 그 순간 그와의 '마주침' 자체가 이미 '빛'이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몰랐을 겁니다. 자신이 평범한 어느 일상인에게 긴 여운의 화두와 빛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시각장애인 소녀 와 먼 섬에 있는, '눈이 따가운' 소년의 관계는 시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마을버스'를 이용하고 '도다리가 잠든' 횟집 앞을 지나는 고단한 공부길입니다. 세상을 헛디디며 '집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바뀝니다. '무수한 길들' 사이에서 진정한 자기 '집'을 '찾아가는' 일에 우리는 모두 시각장애인이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