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 서거] 27년 옥살이 후에도 용서 외친 만델라 "가장 위대한 무기는 平和"
입력 : 2013.12.07 03:05
[만델라의 '자유 향한 여정']
-족장 아들서 人權의 상징으로
인종차별 반대하다 대학 退學… 합법 투쟁위해 변호사 자격 따
1964년 반란죄로 종신형 선고… 교도소에서도 흑인 인권운동
1993년 노벨 평화상 수상… 이듬해 첫 흑인 대통령 당선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대통령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만델라와 가진 인터뷰에서 "어떻게 그런 비인간적인 감옥 생활을 하고 난 후 (백인에 대해) 복수심이 아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만델라는 "내가 만약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할 기회는 바깥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만델라는 1918년 남아공 남쪽 지역의 토착 템부족 족장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롤리라라'. '넬슨'이란 이름은 감리교 계열 학교에서 받은 영국식 이름이다. 그의 조국 남아공은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인이 이주하면서 백인 통치가 시작됐다. 네덜란드계 후손(보어인)들은 유럽과 기후가 비슷한 남쪽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터전을 마련했다. 19세기 들어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와의 식민전쟁에서 승리하자 네덜란드계 후손들이 대거 내륙으로 이주했다. 이 과정에서 토착 흑인과 수많은 유혈 학살극을 벌였다. 일부 지배층이 와서 식민 통치를 하고 물러났던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남아공은 백인 이주민과 토착 부족 간에 갈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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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사진이 영국 런던 의회 광장의 만델라 동상 앞에 6일(현지 시각) 놓여 있다. 시민들은‘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적힌 사진 주변에 조화를 놓았다. 전 세계에서 만델라 추모 열기가 일었다. /로이터 뉴시스
만델라는 1940년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주동하다 대학에서 쫓겨났다. 이때부터 일생을 건 흑인 인권운동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합법적인 투쟁을 위해 변호사 자격을 따고, 남아공 최초로 흑인 전용 법률상담소를 열어 조직적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시민 불복종 운동 전개
합법적 평화 시위를 주도하던 만델라의 삶은 '샤프빌 학살 사건'을 계기로 바뀌게 된다. 백인 정권의 경찰은 1960년 3월 통행 차별법에 항의해 시위 중이던 흑인 69명을 사살했다. 만델라는 평화적 방법만으로는 인종 차별을 철폐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생산 현장 파업을 주도하고 대규모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여나갔다. 백인 정권은 1964년 만델라를 반란죄로 체포하고 종신형을 선고했다.
만델라가 갇힌 곳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로벤섬' 교도소의 5㎡(1.5평) 좁은 독방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며 강제 노역을 했다. 만델라는 수감 중에도 흑인 죄수들의 인권과 비인간적인 교도소 환경 개선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런 활동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만델라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남아공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인도는 만델라에게 1979년 네루 인권상을 수여했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도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만델라는 세계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감옥에서 내가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내가 나도 모르게 바깥세상에서 투사한 허상, 내가 성인(聖人)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
1980년대 남아공 백인 정부는 인종차별이 국제 문제로 떠오르면서 궁지에 몰렸다. 결국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1990년 만델라를 석방했다. 이듬해에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인 주민 차별법이 폐지됐다. 350년에 걸친 인종차별 정책이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만델라는 1993년 데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실시된 남아공 최초의 평등선거에서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94년 대통령 취임 연설 메시지는 '억압의 종식'이었다. "이 아름다운 땅에서 다시는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합시다."
만델라는 남아있던 차별 정책을 모두 철폐하고 1999년 6월 퇴임 때까지 남아공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인종차별 범죄의 진실을 밝히면서도, 백인들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구했다. 백인들은 기득권을 잃었지만 '피의 보복'을 막아 주는 지도자로 만델라를 받아들였다.
뉴욕타임스가 '20세기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만델라의 저서 제목은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1995)이다. 만델라는 이 책에서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다"라며 평화와 치유가 대립과 분열을 해결할 최종 열쇠임을 말했다.
만델라는 첫 번째, 두 번째 부인과는 정책 노선 차이 등을 이유로 이혼했다. 1998년 모잠비크 전 대통령 부인이었던 그라샤 마셸(67) 여사와 재혼해 여생을 보냈다. 2남 4녀를 뒀으며 현재 딸 셋이 생존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분리·격리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네덜란드어 계통의 아프리카어)로, 남아공의 소수 백인 지배층에 의한 인종차별 정책을 가리키는 말. 2차대전 이후 백인 기반의 국민당 정권에 의해 극단적인 정책으로 확립됐다. 비(非)백인의 직업·거주지 제한, 노조 결성·토지 소유 금지, 다른 인종 간 혼인 금지, 공공시설 사용 제한 등이 시행됐다.
[만델라 서거] "사랑해요, 마디바(존경받는 어른)" 슬픔에 잠긴 南阿共… 백인들도 추모행렬
입력 : 2013.12.07 03:05
[남아공 프리토리아 이성훈 특파원]
"그가 없는 이 나라 생각도 못해… 진정한 인류애 보여준 인물"
시민 수만명 거리 쏟아져 나와 남아공 국기 흔들며 애도
6일(현지 시각)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넬슨 만델라(95) 전 대통령 자택 주변은 춤을 추는 인파로 뒤덮였다. 이들이 두 손을 높이 들고 구슬프게 내는 소리는 울음인지, 노래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일부는 부부젤라(남아공의 전통 나팔)를 불기도 했다. 죽음을 마치 축제처럼 맞이하는 이 지역 특유의 의식(儀式)이다.
자택 앞에는 오전부터 추모객들이 가져다 놓은 꽃들이 쌓여 있었다. 아들 손을 잡고 온 오보안(42)씨는 "만델라가 가는 마지막 모습을 아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변에는 '잘 가요 만델라' '사랑해요'라고 적은 종이들을 벽에 붙이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 타타 마디바!'라는 글이 쓰여 있는 쪽지도 있었다. 현지어 타타(Tata)는 '아버지'를 뜻한다.
1990년 만델라가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역사적 연설을 했던 요하네스버그 시청사 주변에도 추모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의 고향 쿠누에서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오열했다. 이들은 "마디바(존경받는 어른·만델라의 존칭)"를 외치며 남아공 국기를 흔들었다. 현지 신문 '시티 프레스'는 만델라 서거 소식이 전해진 지난 5일 밤부터 수만명의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민 만타시(23)는 "만델라 할아버지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만델라가 없는 남아공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8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데스먼드 투투 주교는 현지 언론에 발표한 기도문을 통해 "청렴과 화해, 헌신의 리더십을 펼쳤던 만델라를 잃은 데 대해 마음속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밝혔다.
만델라를 떠나보낸 슬픔에는 흑백(黑白) 인종의 차이는 없었다. 추모 물결 속에는 백인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영국계 이주민 자손인 미셸(43)은 "만델라는 흑인과 백인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며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준 인물"이라고 말했다. 백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남부 케이프타운에서도 시민들이 거리에서 추모 행진을 했다.
인종차별로 멍들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를 변화시켰던 세 주역이 1994년 5월 케이프타운 의사당 앞에 나란히 섰다. 넬슨 만델라(가운데) 당시 대통령 당선자 양옆으로 퇴임하는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왼쪽) 대통령과 타보 음베키 부통령 지명자가 손을 맞잡고 있다(맨 위 사진). /로이터
만델라의 부재(不在)에도 남아공에 큰 동요는 없는 상황이다. 지난 6월부터 만델라가 사실상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면서, 그의 죽음에 어느 정도 대비해 왔기 때문이다. 현지 교민 임원빈(42)씨는 "만델라가 남아공 국민에게 갖는 의미는 매우 크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에 별다른 혼란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최근 경제 위기로 흑인 하층민의 생활고가 심화하고 있고, 만델라를 의식해 참고 있던 이들이 갑자기 불만을 터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흑인 밀집 지역인 소웨토 등에서는 약탈 등 범죄가 빈번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부정부패가 만연한 기성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다.
[만델라 서거] 오바마 "전 세계에 영감(靈感)을 불어넣은 인물 잃었다"
워싱턴=임민혁 특파원
이준우 기자
입력 : 2013.12.07 03:05
추모 줄잇는 만델라 친구들
"오늘 우리는 지구 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용기 있으며, 매우 선한 인물 한 명을 잃었다. 그의 도덕적 용기는 내게, 그리고 전 세계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성취를 이뤄낸 그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5일(현지 시각) 오후 만델라 서거 소식이 전해진 직후 백악관 브리핑룸에 나와 침통한 표정으로 추모 성명을 낭독했다. 오바마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유명 인사들이 타계했을 때 빠짐없이 성명을 발표해 왔으나, 서면(書面)이 아닌 직접 발표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오바마는 "만델라라는 사표(師表)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만델라는 오바마에게 '정신적 멘토(스승)'로서 의미가 각별했다는 것이다.
만델라의 오랜 친구들. 왼쪽 사진은 지난해 6월 힐러리 클린턴(오른쪽) 당시 미 국무장관이 남아공 쿠누에 있는 만델라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오른쪽 사진은 2002년 요하네스버그를 방문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오른쪽). /로이터 뉴시스
오바마는 평소 만델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의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는 지난 6월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 "19세 때 만델라의 리더십을 접한 것을 계기로 정치 참여를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시 만델라가 장기 복역한 로벤섬을 방문했고, 최근에는 백악관에서 만델라의 일생을 담은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만델라와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눴던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도 이날 "만델라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대변자이자 평화와 화해의 수호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한 첫 미국 대통령이다. 클린턴은 만델라와의 만남에 대해 "그는 오랜 수감 생활에도 사랑과 우정, 친절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화해의 정신 덕에 남아공은 과거를 딛고 공동의 미래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각계의 추모도 이어졌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만델라는 정의로운 거인이었다"며 "만델라가 남긴 뜻을 이어받아 더 정의롭고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밝혔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메르켈 독일 총리,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추모 성명을 발표했다.
복싱 스타 무하마드 알리는 "어떠한 차별에도 꺾이지 않은 그의 영혼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했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는 "그를 만날 때마다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만델라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2001년 만델라와 만나 그의 인생사를 듣고 감명해 남아공에 빈곤층을 위한 학교를 짓겠다고 약속했다. 윈프리는 2007년 그 약속을 지켰고, 이 학교 개교식에는 만델라가 직접 참석했다.
"그가 없는 이 나라 생각도 못해… 진정한 인류애 보여준 인물"
시민 수만명 거리 쏟아져 나와 남아공 국기 흔들며 애도
6일(현지 시각)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넬슨 만델라(95) 전 대통령 자택 주변은 춤을 추는 인파로 뒤덮였다. 이들이 두 손을 높이 들고 구슬프게 내는 소리는 울음인지, 노래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일부는 부부젤라(남아공의 전통 나팔)를 불기도 했다. 죽음을 마치 축제처럼 맞이하는 이 지역 특유의 의식(儀式)이다.
자택 앞에는 오전부터 추모객들이 가져다 놓은 꽃들이 쌓여 있었다. 아들 손을 잡고 온 오보안(42)씨는 "만델라가 가는 마지막 모습을 아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변에는 '잘 가요 만델라' '사랑해요'라고 적은 종이들을 벽에 붙이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 타타 마디바!'라는 글이 쓰여 있는 쪽지도 있었다. 현지어 타타(Tata)는 '아버지'를 뜻한다.
1990년 만델라가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역사적 연설을 했던 요하네스버그 시청사 주변에도 추모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의 고향 쿠누에서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오열했다. 이들은 "마디바(존경받는 어른·만델라의 존칭)"를 외치며 남아공 국기를 흔들었다. 현지 신문 '시티 프레스'는 만델라 서거 소식이 전해진 지난 5일 밤부터 수만명의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민 만타시(23)는 "만델라 할아버지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만델라가 없는 남아공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8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데스먼드 투투 주교는 현지 언론에 발표한 기도문을 통해 "청렴과 화해, 헌신의 리더십을 펼쳤던 만델라를 잃은 데 대해 마음속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밝혔다.
만델라를 떠나보낸 슬픔에는 흑백(黑白) 인종의 차이는 없었다. 추모 물결 속에는 백인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영국계 이주민 자손인 미셸(43)은 "만델라는 흑인과 백인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며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준 인물"이라고 말했다. 백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남부 케이프타운에서도 시민들이 거리에서 추모 행진을 했다.
인종차별로 멍들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를 변화시켰던 세 주역이 1994년 5월 케이프타운 의사당 앞에 나란히 섰다. 넬슨 만델라(가운데) 당시 대통령 당선자 양옆으로 퇴임하는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왼쪽) 대통령과 타보 음베키 부통령 지명자가 손을 맞잡고 있다(맨 위 사진). /로이터
만델라의 부재(不在)에도 남아공에 큰 동요는 없는 상황이다. 지난 6월부터 만델라가 사실상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면서, 그의 죽음에 어느 정도 대비해 왔기 때문이다. 현지 교민 임원빈(42)씨는 "만델라가 남아공 국민에게 갖는 의미는 매우 크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에 별다른 혼란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최근 경제 위기로 흑인 하층민의 생활고가 심화하고 있고, 만델라를 의식해 참고 있던 이들이 갑자기 불만을 터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흑인 밀집 지역인 소웨토 등에서는 약탈 등 범죄가 빈번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부정부패가 만연한 기성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5일(현지 시각) 오후 만델라 서거 소식이 전해진 직후 백악관 브리핑룸에 나와 침통한 표정으로 추모 성명을 낭독했다. 오바마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유명 인사들이 타계했을 때 빠짐없이 성명을 발표해 왔으나, 서면(書面)이 아닌 직접 발표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오바마는 "만델라라는 사표(師表)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만델라는 오바마에게 '정신적 멘토(스승)'로서 의미가 각별했다는 것이다.
만델라와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눴던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도 이날 "만델라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대변자이자 평화와 화해의 수호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한 첫 미국 대통령이다. 클린턴은 만델라와의 만남에 대해 "그는 오랜 수감 생활에도 사랑과 우정, 친절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화해의 정신 덕에 남아공은 과거를 딛고 공동의 미래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각계의 추모도 이어졌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만델라는 정의로운 거인이었다"며 "만델라가 남긴 뜻을 이어받아 더 정의롭고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밝혔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메르켈 독일 총리,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추모 성명을 발표했다.
복싱 스타 무하마드 알리는 "어떠한 차별에도 꺾이지 않은 그의 영혼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했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는 "그를 만날 때마다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만델라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2001년 만델라와 만나 그의 인생사를 듣고 감명해 남아공에 빈곤층을 위한 학교를 짓겠다고 약속했다. 윈프리는 2007년 그 약속을 지켰고, 이 학교 개교식에는 만델라가 직접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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