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와플 에세이

고통이라는 선물

수로보니게 여인 2013. 11. 28. 17:57

고통이라는 선물

입력 : 2013.11.27 05:37

 

아무리 아파도 産苦 견디는 산모처럼 인간은 겪어야 할 아픔 마다하지 않아
살아있는 한 고통은 生命의 한 부분… 고난 또한 '人生의 선물' 아닐까
누군가의 고난에 생명들 꽃피기에 고통받는 이웃들에 항상 빚진 심정

조정민 목사·前 언론인 사진
조정민 목사·前 언론인
꽤 오래전이지만 구안괘사의 병고를 두 차례나 겪었다. 다행히 가까운 한의사의 도움으로 두 번 다 정상을 회복했다. 그러나 치료 과정에서 겪었던 통증의 기억이 얼굴 곳곳에 남아 있다. 두 번째 치료 과정은 예상보다 오래 계속됐고 회복도 훨씬 늦었다. 한의원을 찾아가는 걸음이 때로 소가 도살장 가는 기분이었지만 한 번도 치료를 거른 적은 없다. 누가 그 치료를 마다하겠는가. 발병 후에 겪는 심신의 고통이 커서 완치를 향한 걸음을 늦출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침상에 누워서 눈을 감고 침이 얼굴 곳곳의 피부를 뚫고 지나가는 고통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 자체가 더 큰 긴장과 고통이었다. 침을 놓는 두세 군데는 얼마나 아픈지 비명을 참느라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어떻게 회복의 기쁨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산고도 마찬가지다. 산모가 입덧을 시작으로 열 달간 몸과 마음이 지게 되는 고통을 남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출산의 산고조차 새 생명의 탄생이 가져다줄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첫 아이를 낳고 대부분의 어머니가 둘째, 셋째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이토록 큰 고통이지만 그 고통보다 더 큰 기대와 기쁨 때문이다. 낳는 것도 힘들지만 아이를 기르는 것은 더 힘들다. 그래도 그 많은 부모가 아이들 양육을 포기하기는커녕 숱한 고통을 안겨준 자녀들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결혼식장에서는 이제 헤어져 속이 시원하다는 부모보다는 여전히 더 많은 부모가 눈시울을 적신다. 숱한 고통의 순간들은 사라지고 다만 한 가지, 아이가 장성해 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없이 감동한다.

누구나 다 고통을 힘들어하지 않는가. 다들 가능한 한 고통은 피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자청하고 고통 속으로 뛰어든다. 고통보다 더 큰 대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상급의 일부가 된 것이다. 육신의 고통만이 아니다. 정신적인 고통도 마찬가지다. 이 고통의 끝에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는 확신이 들기만 하면 누군들 고통을 멀리만 하겠는가. 이제 고통의 이유를 알았고 고통의 끝을 보았고 고통의 열매는 결코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고통 속으로 뛰어든다. 마치 더 큰 파도를 기다리다 그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서퍼와 같다.

ESSAY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사실 고통은 생명의 한 부분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반드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다. 생명이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 고통을 불가분이다. 그래서 주검은 생명의 끝이자 고통의 끝이다. 생명이 생명일 수 있는 까닭은 고통 때문이고, 끊임없이 고통이라는 신호가 전달될 때만이 생명은 지켜진다. 한 의료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들 돌보는 사역을 하다가 겪은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발의 감각을 잃었다. 직감적으로 감염을 의심했다. 발에 주삿바늘을 찔렀으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밤새 홀로 부르짖어 기도한 것은 단 한 가지다. "제게 다시 고통을 돌려주십시오!" 고통이라는 감각은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선물이다. 그래서 진통제라는 약은 지금 당장 고통을 덜어주는 약이지만 후일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고통이 생명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는다면 고난은 어떤가. 고난 또한 인생의 선물이 아닌가. 옛 어른들은 젊어서 고생은 돈을 주고 사서라도 시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요즘은 웃고 말 얘기다. 그러나 자녀들을 감싸느라 학교를 넘어 심지어 군대나 직장까지 찾아간다는 부모들의 세태를 보면서 고난의 유익과 가치를 잊은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한 송이 꽃이 피는 데도 반드시 고난이 있어야 하는데….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는 국화의 수난사를 담고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 겪어야 할 고난의 분량을 어떻게 우리 인생에 비길까. 참으로 얼마나 많은 고난 끝에 한 인생이 꽃 피우는가. 한 인생이 열매 맺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또 다른 인생이 함께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모든 생명의 탄생에는 고통이 있고, 모든 인생의 성숙에는 고난이 있다. 무르익은 인생이 부럽다면 그의 고난을 이해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그 깊고 깊은 고난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더불어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예수의 깊은 고난에 감동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 절규하는 십자가의 모습에 눈시울을 적신다. 그래서 또한 고통받는 이웃, 고난 겪는 이웃들에게 늘 빚진 자의 심정이 된다. 더구나 연말이 되면 겨울 추위보다 숱한 이웃들의 힘겨운 고난에 더욱 움츠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