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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인문과학을 ‘구조’한 구조주의

수로보니게 여인 2014. 11. 8. 22:45
서구의 인문과학을 ‘구조’한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서구의 지나친 관념주의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주체 중심의 인문학을 사회와 문화 전체에서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인문‘과학’으로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구 근대 인문학의 지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조 가운데 구조주의를 간과할 수 없다. 20세기 서구 지성사에서 구조주의의 등장은 전통적인 인문주의에 비판을 가하면서 인문학의 지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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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1857-1913)

소쉬르의 언어학으로 시작된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소쉬르의 현대 언어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당시 최고의 지성 장 폴 사르트르를 겨냥하여 그의 실존주의가 인간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구조를 등한시하고 개인에만 초점을 맞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했다.

기실 서구 근대 철학과 인문정신의 역사는 사회보다 개인을 더 중시하면서 자율적인 인간 주체를 견고하게 세우려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 인문주의는 르네상스 시대 몽테뉴로부터 비롯되어, 생각하고 회의하는 인간의 범형을 정립한 파스칼과 데카르트,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의 자유를 이론화한 칸트, 그리고 주체의 의식과 윤리적 지향성, 인간 삶을 세계 내의 존재로서 정의한 후설로 이어진다.
그러나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눈에 비친 서구 인문주의는 관념의 유희에 불과한 형이상학으로서 인간 사회의 심층을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다.

구조주의는 1950년대 서유럽에 등장한 인문과학 사조다. 구조주의 인문학의 태도는 쉽게 말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 이면에 숨겨진 보다 깊은 구조를 보는 것이다. 구조주의의 학문적 배경은 소쉬르가 말하는 현대 언어학의 이론이다. 흔히 언급되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는 사후 제자들이 강연록을 편집하여 출간한 책이다.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구조주의자들이 소쉬르의 연구에서 주목한 것은 언어가 지니는 자의적인(arbitrary) 모습이다. 예컨대 나무라는 이미지와 형상은 한국어 ‘나무’, 프랑스어 ‘arbre’, 영어 ‘tree’ 등 그 의미가 다양하다. 말하자면 나무라는 사물과 그것의 의미와의 관계는 각 문화마다 다양하므로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소쉬르는 이러한 언어의 모습을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로 구별하여 정의한 바 있다. 기표는 이미지와 형상을, 기의는 의미와 컨셉을 말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이 소쉬르의 현대 언어학에서 두 번째로 주목한 바는 언어가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기본구조와 그것의 개인적인 활용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언어의 고정된 부분은 문법의 규칙과 같은 랑그(langue, language)이고 개인적인 활용은 파롤(parole, speech)과 같은 발화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한국어를 말하는 것은 나의 머리 속에 한국어 문법체계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랑그란 추상적이고 고정불변한 언어의 인프라 구조와 같은 것이고 파롤은 우리 각자가 지금 말하고 있는 행위를 지칭한다.

구조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세 번째 생각은 언어 현상을 하나의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축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말(horse)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말이란 단어를 두 가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1) 즉 말이란 단어의 기원과 역사를 검토하는 것을 계열체적(diachrony) 접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말을 타고 들판으로 간다’라는 문장을 수직적인 축으로 놓고 본다면 ‘나’를 ‘너’로, 말을 소로, 들판을 벌판 등으로 얼마든지 다른 주어 동사 부사 등으로 교체할 수 있다.
2) 다른 이에 비해 통합체적 접근(synchrony)은 문장을 시간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횡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위의 문장이 ‘나는 + 말을 + 타고 + 들판으로 + 간다’ 등 단어의 수평적인 연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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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스트로스

문화와 신화의 구조주의적 접근

레비 스트로스는 바로 단어와 문장의 통합체적인 성격에 주목하면서 문화나 신화 분석에 언어학적 이론을 적용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나 신화 연구는 언어학 연구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특히 그는 인류학에 있어서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친족관계와 신화현상을 언어학적인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복잡하게 보이는 친족관계 현상을 몇 개의 간단한 요소로 분석하였다.
예컨대 사회구조 형성의 기반은 근친상간의 금지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원시 부족의 어떤 남성이 배우자를 다른 부족으로부터 얻어와야만 그가 속한 집단이 존속될 수 있다. 그러나 A 부족의 남자가 B부족의 여자와 결합하고 B 부족의 남성이 A 부족의 여성과 결합한다면 결국 이것은 ? 두 집단이 결합으로 인해 하나의 집단이 되므로 - 두 집단 간 근친상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위의 두 개 집단 간의 남녀 결합을 A, B, C, D 집단으로 확장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된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대칭적이고 폐쇄적인 친족관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활력과 변화를 줄 수 있는 보다 넓은 의미의 결혼제도의 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말대로 비대칭적이고 역동적인 요소가 새롭게 도입되어야만 그 집단이 존속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결혼제도를 통한 아이의 탄생을,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역동적인 요소로 보았다.

친족관계와 함께 신화구조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큰 관심사였다. 원래 신화란 근원을 알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옛 이야기, 비합리적인 서사 구조를 지닌 이야기로 알려져 왔다. 서구 문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화는 이성적인 언어가 아닌 원시적인 ‘말이 안되는’ 이야기로서 비과학적인 사고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원시부족의 신화를 분석하면서 신화가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발견하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원시인들의 생각은 ‘야생적 사고’로서 그것은 마치 ‘Do it Your self’와 같은 것이었다. 잘 알다시피 DIY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 예컨대 조립식 가구를 만드는 것과 같이 ― 어떤 물건을 한정된 재료를 가지고 스스로 만드는 것을 말하며, 이와 유사하게 원시인들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것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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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눈에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신화가,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사물의 창조물이었다.

신화와 언어, 본질적으로 동일해

‘브리콜라주’라고 불리우는 신화 만들기는 서구의 관점에서 비과학적인 것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지극히 정교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 가운데 상당 부분은 옛사람들이 마주했던 일상적인 자연과 사물들을 ‘브리콜라주’ 하여 신화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선조는 주몽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서 햇빛이 비쳐 잉태하였다. 알을 낳았는데 가축에게 주어도 먹지 않고 들판에 버려도 소나 말이 피해 다녔으며 새가 깃털로 감싸 보호하였다. 결국 어미에게 돌려주자 어미는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얼마 후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주몽으로 이는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최광식 『한국 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21 쪽)
위에서 살펴본 고구려 건국신화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야생적 사고’로서 당시 사람들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자연 현상과 짐승의 알, 새의 깃털, 활 등을 상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신화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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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기원을 알 수 없고 무질서한 이야기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신화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불변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의 기본 요소를 밝혀내는 것이 ―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 구조주의적 접근이다. 달리 말하자면 신화 서사는 하나의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우연적인 요소를 만들어내는 ― 소쉬르가 말한 바대로 ― ‘파롤’의 부분을 걷어내고 ‘랑그’를 구성하는 불변의 요소들을 추출하는 것이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주의 인문학은 문화와 사회현상을 지나치게 정태적인 하나의 틀로 고정시키고 시간과 역사라는 우연적인 국면들을 제거함으로써 이후 데리다와 푸코와 같은 후기 구조주의나 해체주의 사상가들의 비판이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구조주의가 서구의 지나친 관념주의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주체 중심의 인문학을 사회와 문화 전체에서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인문‘과학’으로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글 김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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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서울 생. 건국대 문과대 학장. 프랑스 프로방스대학교 대학원 박사. 한국영상문화학회, 한국기호학회 등에서 학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메를리 뽕띠, 하버마스 등의 연구를 통해 인문학적 지평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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