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조선 스토리

『당의통략』으로 읽는 선조 후반의 당쟁

수로보니게 여인 2012. 1. 30. 11:04

 

- 이백 세 번째 이야기
2012년 1월 30일 (월)
『당의통략』으로 읽는 선조 후반의 당쟁.

  2012년 대선과 총선의 해를 맞이하여 정당 내에서는 파벌에 따른 이합집산이 계속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1575년(선조 8)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붕당정치가 처음 시작된 이래로 당파 간의 경쟁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선조 후반 서인과 북인 간에는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으며, 북인이 집권 세력이 된 후에는 북인 간에 다양한 분열이 일어났다. 특히 적장자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인해 선조의 후계자 계승 구도가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북인의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가장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이건창(1852~1898)의『당의통략(黨議通略)』에는 당시의 당파 분열과 인물 간의 갈등 요인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이산해와 홍여순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는 대북이라 하고 남이공과 김신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들은 소북이라 하였다. 소북이 왕의 견책을 받음에 미쳐 이산해와 홍여순이 또 서로 더불어 권력을 다투어 이산해의 당은 육북(肉北)이 되었고, 홍여순의 당은 골북(骨北)이 되었다. 이이첨이 상소하여 홍여순을 탄핵하자 임금은 둘을 내쫓고 다시 서인을 참여시켜 나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체찰사인 이귀가 스스로 영남에서 돌아와 정인홍이 고향에 거주할 적의 불법적인 일을 논하자 정인홍이 뒤에 상소하여 “신은 성혼, 정철과 더불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또 유성룡과도 유쾌하지 못했는데 지금 그 무리가 신을 미워함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성혼이 최영경을 얽어 죽이고 나라가 어려울 때 (왕의 피난처에) 이르지 않고 화의를 주장한 모든 일을 심하게 꾸짖었다. 아울러 정경세가 상중에 술을 마신 것을 탄핵하였다. 대사헌 황신이 뒤에 성혼의 무고함을 상소하였는데 왕이 황신을 교체하고 조정에 있는 모든 서인을 내쫓고 간사한 성혼, 독한 정철이라는 교서를 내렸다. 유영경을 이조판서로 하고 정인홍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항복은 평생에 당이 없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유영경이 이조판서가 되는 것을 막고자하였다. 그러므로 당에서 탄핵당하는 바가 되었고 정철의 심복으로 지적되어 이로써 정승직을 면하게 했다. 정인홍은 왕의 부름을 받자 먼저 최영경을 국문했을 때 대간으로 있었던 구성의 죄를 논하여 유배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유영경이 정승이 되어 정치를 전임하자 정인홍의 무리를 많이 파면하고 교체하였으며 오로지 소북만을 등용하였다.」
[於是 主山海汝諄者 爲大北 主以恭藎國者 爲小北 及小北被讉 而山海汝諄 又相與爭權 山海黨爲之肉北 汝諄黨謂之骨北 李爾瞻疏 劾洪汝諄 上兩黜之 復叅進西人 未幾 體察李貴 自嶺南還 論鄭仁弘 居鄕不法事 仁弘疏卞曰 臣與成渾鄭澈 不相能 又不快於柳成龍 今其徒嫉臣如此 因極詆渾搆殺崔永慶 不赴國難 主和議諸事 幷劾鄭經世 居喪飮酒 大憲黃愼 疏卞渾誣 上遞愼 悉逐西人在朝者 有奸渾毒澈之敎 以柳永慶爲吏判 鄭仁弘爲大憲 李恒福 平生無黨 至是欲沮永慶吏判 故爲其黨所劾 指爲鄭澈腹心 以此免相 仁弘赴召 首論崔永慶再鞫時臺諌具宬之罪 竄之 未幾 柳永慶 爲相專政 仁弘等多罷遞 專用小北]

 

宣傳官宴會圖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위의 기록에는 북인 내의 소북과 대북, 육북과 골북의 분열상과 기축옥사, 성혼과 정철에 대한 탄핵 등을 빌미로 북인이 서인을 탄핵하고 권력을 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항복처럼 평생 당을 하지 않아도 정치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당인(黨人)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유영경은 선조 후반 후계자로 영창대군을 지지하면서 선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며, 광해군을 후계자로 지지한 정인홍과 치열한 대립을 하였다. 다음의 기록은 후계자 지명 문제가 당파의 분열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처음에 광해군을 세자로 봉한 지 20년이 되었다. 누차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청했지만, 중국 조정에서는 임해군이 장자라는 이유로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임해군과 광해군은 모두 공빈 김씨1)에게서 태어났는데, 임해군은 광폭하여 많은 덕을 잃었고, 광해군은 살피고 어루만진 공로가 있어서, 의인왕후가 일찍이 취하여 아들로 삼아서 궁중 안이나 밖에서나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여 다른 말이 없었다. 의인왕후가 죽자, 예관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청하고자 하니 왕이 말하기를, “왕비 책봉은 청하지 않으면서, (세자의) 책봉만 청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 하였다. 마침내 인목왕후를 책봉하였는데, 그 뒤에 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상 유영경이 세종 때의 광평대군과 임영대군, 두 대군의 예를 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를 베푸니, 좌상 허욱과 우상 한응인이 말하길, “대군 한명이 태어났다고 어찌 반드시 하례를 베풀겠소.” 하니, 유영경이 이에 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유영경이 왕의 뜻을 받들어 대군의 입지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왕에게 병이 있어 은밀하게 세자에게 전위하는 전교를 내려 모든 정승을 불렀는데, 유영경이 말하길, “지금은 시상(時相:현재의 재상)을 부르는 것이니, 다른 정승들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다른 정승들이 모두 물러갔다. 유영경이 홀로 계를 올려 (전위 교서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며 말하길, “오늘의 전교는 여러 사람들의 뜻 밖에서 나온 것이니 신은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다. 병조판서 박승종이 유영경과 더불어 꾀하여 군사를 동원하고 궁궐을 호위하며 비상사태에 대비하니, 인심이 흉흉해져 모두가 말하기를, “유영경이 세자를 세우지 못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初光海君册儲二十年. 累遣使請封 中朝以臨海君居長 持之不許. 臨海光海皆恭嬪朴氏出 臨海狂暴多失德 光海有監撫功 懿仁后甞取而子之 中外皆屬心無異辭 及懿仁后薨 禮官復欲遣使請封 上曰 不請册妃而請封何也. 遂册仁穆后 後后生永昌大君. 領相柳永慶 援世宗時廣平臨瀛二大君例 率百官陳賀 左相許頊右相韓應寅 曰一大君生 何必陳賀 永慶乃止. 然人皆永慶疑迎上意 爲大君地也 上有疾 密敎傳位于世子 招諸相 永慶曰 今召時相 他相不得與 他相皆退. 永慶獨啓請收曰 今日之敎出於羣情之外 臣不敢承命. 兵判朴承宗 與永慶謀 勒兵扈宮 以備非常 人心洶洶 皆言永慶 不欲立世子]

1) 원문에는 박씨로 기록되어 있으나, 광해군의 생모는 공빈 김씨이다. 아마도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박씨이므로 이를 착각한 오기로 보인다.

  1592년 임진왜란은 왕실과 정치 세력의 세력 판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방어선이 뚫리면서 위기를 맞은 국왕 선조는 서둘러 피난길을 재촉하는 한편,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고 분조(分朝:조정을 나눔) 활동을 통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도록 했다. 18세의 나이에 왕세자로서 분조를 이끌며 대왜 항쟁에 나섰던 광해군은 강력한 주전론을 전개한 정인홍 등의 북인과 호흡이 잘 맞았다. 의주로 피난해 백성의 원성을 들었던 선조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야의 명망은 광해군에게 쏠렸고 광해군의 왕의 계승은 무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602년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인목왕후가 계비로 들어오면서 왕실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였고, 후궁인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왕자 곧 임해군과 광해군이 있었다. 임해군은 이미 자질에서 문제가 드러났으므로 선조는 왜란이라는 국난의 시기를 맞아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후궁 출신의 아들이라는 점은 선조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의 마음을 파고 든 것은 어린 계비가 낳은 영창대군이었다. 1606년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본 선조의 기쁨은 누구보다 컸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정에도 감지되어 선조의 환심을 사고자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을 은근히 청하는 세력들도 생겨났다. 정치판의 줄서기는 과거나 현대나 마찬가지이다. 영창대군의 탄생을 계기로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분립되었다.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이,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이 자리를 잡았다. 정인홍은 광해군의 후계자 지명을 저지하려는 유영경을 강력히 탄핵하였다.

  「정인홍이 개연히 고향에서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유영경은 성지를 비밀로 하고 여러 재상들을 쫓았으니 이른바 여러 사람의 뜻이라는 것이 나라 사람들이 원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사로운 당들이 하고자 하지 않는 바입니까?” ... 왕이 심히 노하여 말하기를, “인홍이 세자로 하여금 속히 왕위를 전해 받게 하려고 하니 신하된 자가 차마 옛날 왕을 물러나게 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광해군이 매일 문안을 하면 왕은 번번히 꾸짖으며 말하기를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라 하겠는가? 문안을 다시는 오지 말라.” 광해군은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하였다. 대간 이효원 등은 정인홍을 탄핵시켜 군부를 동요시키고 골육간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고 탄핵하고, 아울러 이산해를 거론하고 이경전과 이이첨 등을 아울러 논하여 다 귀양을 보냈다. 진사 정온이 상소하여 정인홍을 구하려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이때 허욱, 성영, 최천건, 홍식, 성준구, 이효원, 이유홍, 김대래, 송응순, 이덕온, 송전, 송일, 남복규, 유성, 박승종, 유영근, 유영순, 이정, 이경기, 박이장, 황섬, 황하, 황근중, 조명욱, 성이문, 민경기, 박안현, 신광립, 신요는 모두 유영경을 지지했는데, 이들을 유당(柳黨)이라 이른다. 김신국 또한 유당에 들어갔고 남이공, 김시국, 남이신, 박이서, 임연, 임장은 유영경에게 붙지 아니하여 남당(南黨)이라 불렀다. 유희분은 비록 광해군과의 연고 때문에 대북과 더불어 일을 계획하였으나 본래 소북이었다. 더욱이 남이공과 더불어 친한 까닭으로 또한 남당(南黨)이라 칭하였다. 이것은 모두 소북 중에서 또 갈라져 둘이 된 것이다. 상이 승하하자 광해군이 당일 즉위했다. 이산해를 원상으로 삼고 정인홍과 이이첨을 석방시켜 탁용하였다. 유영경과 김대래를 죽였다.」
[仁弘慨然 自鄕呈疏曰 柳永慶秘聖旨 而逐諸相 所謂羣情者 國人之不願歟 抑私黨之所不欲歟 ... 上怒甚曰 仁弘欲令世子 速受傳位 爲人臣者 忍以退舊君 爲能事哉 自此光海 每問安 上輒責之曰 未受冊命 何以稱世子 問安其勿更來 光海伏地嘔血 臺諫李效元等 劾仁弘 動搖君父 離間骨肉 幷論山海 幷論慶全及爾瞻等 悉竄之 進士鄭蘊 疏救仁弘 不報 時許頊 成泳 崔天健 洪湜 成俊耈 李效元 李惟弘 金大來 宋應洵 李德溫 宋(馬+專) 宋馹 南復圭 柳惺 朴承宗 柳永謹 柳永詢 李瀞 李慶禥 朴而章 黃暹 黃昰 黃謹中 曹明勗 成以文 閔慶基 朴顔賢 申光立 申橈 皆右永慶 謂之柳黨 金藎國 亦入柳黨 南以恭 金蓍國 南以信 朴彝叙 任兗 任章 不附永慶 謂之南黨 柳希奮 雖以光海故 與大北計事 然本小北 尤與以恭善故 亦稱南黨 此皆於小北中 又歧爲二者也 上昇遐 光海卽日卽位 以李山海爲院相 釋仁弘爾瞻擢用之 戮柳永慶金大來]


  위의 기록에서 유당(柳黨), 남당(南黨)이라 하는 것은 현재 ‘친이계’, ‘친박계’라고 하는 상항과도 유사하다. 유영경의 영의정 임명과 소북 정권의 수립은 선조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고, 영창대군의 왕의 계승은 상당한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의 급서로 정국은 일변한다. 아직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불안해한 선조는 마지막 유언에서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을 국왕의 자리에 올릴 것을 명했다. 16년간의 세자 생활을 어렵게 청산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국은 일순간에 대북정권 중심으로 짜여졌다. 광해군이 불안한 위치에 있을 때 ‘정권의 실세’ 유영경을 탄핵하다가 귀양길에 올랐던 정인홍은 곧바로 석방된 후 정권을 뒷받침하는 산림(山林)의 영수로 떠오르면서 정권을 지원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선조 사후 후계자 계승을 둘러싼 뜨거운 정쟁 속에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처형으로 생을 마감했고, 광해군을 지지했던 정인홍은 광해군 정권 수립 후 ‘왕의 남자’가 되어 정치와 사상계의 일선에 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선조 후반 북인과 서인의 대립, 북인 내의 자체 분열이 과거의 옛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이 오늘의 정치 현실이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